석법현(釋法顯)스님 이야기
석법현의 성(姓)은 공씨로 중국 평양(平陽) 무양 사람이다.
법현의 세 형이 모두 7·8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아버지는 죽음의 재앙이 법현에게도 미칠까 두려워,
세 살 되던 해에 바로 승적에 올려 사미가 되게 하였다.
사미 - 7세 이상 20세 미만의 남성 출가자
몇 년 동안 집에 머무르다가 병이 위독해져 곧 죽을 듯했다.
사찰로 돌려보내니, 이틀 만에 병이 나았지만 집으로는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를 만나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다.
후에 사찰의 문 밖에 작은 집을 짓고 서로 왕래하는 것에 위로를 삼았다.
열 살 때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작은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늙은 데다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내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억지로 환속(還俗)시키려고 했다.
법현이 말하였다.
"본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출가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티끌세상을 멀리 여의고자 불도에 들어왔을 뿐입니다."
작은 아버지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곧 그만두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지극한 성품이야 보통사람을 훨씬 넘어섰지만,
장례를 마치고는 곧바로 절로 돌아왔다.
언젠가 같이 공부하는 이들 수십 명과 논에서 벼를 베었다.
그 때 굶주린 도적들이 그 곡식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여러 사미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지만, 법현만은 홀로 남아 도적에게 말하였다.
"만일 곡식을 원한다면 뜻대로 가져가도 좋다.
그러나 그대들은 과거에도 보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과보로써 배고프고 가난하게 된 것이다.
지금 또 남의 것을 빼앗으면, 내세에는 배고픔과 가난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빈도(출가 승려)는 미리 그대들을 위하여 걱정할 따름이다."
말을 마치자 즉시 뒤돌아서니,
도적들은 곡식을 버리고 갔다. 수백 명의 대중 승려들이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구족계를 받기에 이르러서는 지조와 행실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구족계 -사미와 사미니를 거친 뒤에 비구 또는 비구니로서의 인정을 받게 되는 의식을 치를 때 구족계를 받는다.
기거의 동작과 범절도 바르고 엄숙하였다.
항상 불경과 율장이 어긋나고 빠진 것을 개탄하고는, 맹세코 찾아 구하겠다는 뜻을 품었다.
동진(東晋) 융안 3년(399) 같이 공부하는 혜경(慧景)·도정(道整)·혜응(慧應)·혜외(慧嵬) 스님등과 함께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고비사막을 건넜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에는 뛰어다니는 짐승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득히 넓고 끝없이 멀어서 가야 할 곳을 헤아릴 수 없었다.
오직 해를 보고 동쪽과 서쪽을 짐작하고,
죽은 사람의 해골로 길의 표지를 삼을 뿐이었다.
법현은 인연에 맡기고 목숨을 내던져, 곧바로 위험하고 어려운 곳을 지났다.
얼마 후 파미르 고원에 이르렀다. 고원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이 쌓여 있었다.
혹독한 바람이 불어 비바람에 모래와 자갈이 날렸다.
산길은 험하고 위태로우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천 길이나 되었다.
옛 사람들이 돌을 뚫어 길을 내었다.
그리고 그 곁에 사다리를 걸쳐 놓은 곳이 7백여 군데나 되었다. 그곳을 건넜다.
또 조교(弔橋)를 딛고 강물을 건너기 수십여 차례였다.
다음에는 소설산(小雪山)을 넘었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 닥쳐왔다.
혜경은 입을 다물고 벌벌 떨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법현에게 말하였다.
"저는 죽을 것입니다.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마치자 숨을 거두었다. 법현은 그를 어루만지며 울면서 말하였다.
"원래의 계획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천명이니, 어찌하겠습니까?"
다시 혼자 힘으로 외로이 나아갔다.
마침내 험준한 산을 넘어 모두 30여 국을 두루 돌아다녔다.
차츰 천축국(인도국)에 이르렀다.
왕사성(王舍城)과의 거리가 30여 리 되는 곳에 한 절이 있었다.
어두워질 무렵에 그 절을 방문하였다.
법현은 다음 날 새벽에 기사굴산에 가려고 하였다. 그 절의 승려가 말렸다.
"길이 매우 험준하고 외집니다.
게다가 검은 사자들이 많아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법현이 말하였다.
"멀리 수만 리를 건너온 것은 맹세코 영취산(靈鷲山)에 이르고자 함입니다.
목숨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숨쉬는 것조차 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해 동안의 정성을 들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거늘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제 아무리 험난하다 하더라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그를 만류할 수 없자, 두 승려를 딸려 보냈다.
법현이 산에 이르렀을 때는 땅거미 지는 저녁 무렵이었으므로,
거기서 하룻밤을 묵으려고 하였다.
따라온 두 승려는 위태로움으로 무서워하면서 법현을 버려두고 돌아갔다.
법현만 홀로 산중에 남아 향을 피우고 예배하였다.
부처님의 옛 자취에 가슴 설레며 상상의 나래를 펴, 마치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뵙듯이 했다.
밤이 되자 세 마리의 검은 사자가 왔다.
법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입술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법현은 경문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염하였다.
그러자 사자는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더니, 법현의 발 앞에 엎드렸다.
법현은 손으로 사자들을 쓰다듬으며 주문을 외웠다.
"만일 나를 해치고자 하거든, 내가 경문 외우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다오.
만일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면, 바로 물러가는 것이 좋으리라."
사자들은 한참 있다가 가 버렸다.
이튿날 새벽 다시 돌아올 적에는 길이 다하여 으슥하게 막혀 있었다.
다만 하나의 좁은 길로만 통행할 수 있었다.
미처 1리 남짓 가지 못했을 때, 홀연히 한 도인(道人)을 만났다.
나이는 90세 정도이다.
용모와 복장은 누추하고 소박하나, 신령스런 기운이 우뚝하고 높았다.
법현은 비록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고상하다는 것을 느꼈으나,
그 분이 신인(神人)인 줄은 깨닫지 못하였다.
뒤에 또 한 젊은 승려를 만나자, 법현이 물었다.
"아까 그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젊은 승려가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대제자(大弟子)인 두타(頭陀) 가섭(迦葉)이십니다."
법현은 비로소 크게 한탄하고는 다시 급히 뒤쫓아 그 장소에 갔다.
그렇지만 가로지른 돌이 굴 입구를 막아 끝내 들어갈 수 없었다.
법현은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나갔다.
앞으로 나아가 가시국(迦施國)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는 흰 귀를 가진 용이 있었다.
매양 대중 승려들과 약속하여 나라에 풍년이 들게 하였다. 그때마다 모두 효험이 있었다. 사문들은 용을 위하여 용이 사는 집을 지었다. 아울러 좋은 먹이를 베풀었다.
매번 하안거(여름 공부기간)를 마칠 무렵이면, 문득 용은 한 마리 작은 뱀으로 변하였다. 양쪽 귀가 모두 흰 빛이다. 대중들은 모두 이것이 그 용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구리 쟁반에 음식을 가득 담아서, 용을 중앙에 두고 상좌(上座)에서부터 하좌(下座)에 이르기까지 두루 예를 행하면, 곧 용으로 변화하여 사라진다. 해마다 한 번씩 출현한다. 법현도 이 용을 친견하였다.
뒤에 중천축국(中天竺國)에 이르렀다.『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과 『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 등을 얻었다.
법현은 그곳에서 3년 동안 체류하면서 범어(고대 인도어)와 범서(梵書)를 배워서, 비로소 직접 글씨를 베껴 쓸 수 있었다. 이에 불경과 불상을 지니고, 상인(商人)들에게 의탁하여 사자국(師子國)에 도착하였다.
법현과 함께 동행했던 10여 명의 동료들은 곳곳에 남기도 하고, 혹은 죽기도 하였다.
머리 돌려 바라보아도 자신의 그림자만 비치는,
오직 자기 혼자뿐이어서 늘상 슬픔과 탄식을 품었다.
때마침 옥으로 된 불상 앞에 한 상인이 중국 땅에서 생산된 둥근 모양의 흰 비단 부채를 공양하는 것을 보았다. 고향 생각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2년간 머무르고 다시 『미사색률』·『장아함경』·『잡아함경』·『잡장』등을 얻었다. 모두 중국 땅에는 없는 경들이었다.
그러고 나서 상인들의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돌아왔다.
배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탔다. 폭풍을 만나 배에 물이 들어찼다. 사람들은 모두 정신없이 두려워하였다. 즉시 하찮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져다 던져 버렸다.
법현은 그들이 불경과 불상을 던져 버릴까 두려워하였다.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중국의 대중 승려들 사이에서 목숨을 마치게 해달라고 빌었다.
바람에 실려 항해하였으나, 배는 파손된 곳이 없었다.
10여 일 정도 지나 야바제국(耶婆提國)에 도착하였다.
다섯 달 동안 머물렀다. 다시 다른 상인들을 따라 동쪽 광주(廣州)로 나아갔다.
돛을 올린 지 20여 일 만에 밤중에 갑자기 큰바람이 불었다.
온 배 안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대중들이 모두 의논하였다.
"이 사문(승려)을 태운 죄에 연루되어 우리들이 낭패를 당하는 것이다.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가 같이 죽을 수는 없다."
그리하여 모두 법현을 밀어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법현의 시주가 성난 목소리로 상인들을 꾸짖었다.
시주 - 자신의 재물을 바쳐서 법회를 열거나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사람을 가리킴.
"당신들이 만약 이 사문을 내려놓겠다면,
나도 함께 내려놓으시오. 아니면 나를 죽이시오.
중국의 제왕(帝王)은 부처님을 받들고 승려들을 공경하오.
내가 중국에 이르러 왕께 고하면, 반드시 당신네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오."
상인들끼리 서로 쳐다보며 낯빛이 변하여 고개를 숙이고는, 곧 그만두었다.
이미 먹을 물도 떨어지고 양식도 다 없어졌다.
오직 바람에 실려 바다를 떠내려갈 뿐이었다.
뜻밖에 어떤 해안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명아주 풀을 발견하고는 짐짓 이곳이 바로 중국 땅인 줄을 알았다. 다만 아직 어느 곳인지를 헤아리지 못했다.
곧 작은 배를 타고 포구로 들어가 마을을 찾다가, 사냥꾼 두 사람을 발견하였다.
법현이 물었다.
"이곳은 어느 지역입니까?"
사냥꾼이 대답하였다.
"이곳은 청주(靑州) 장광군 뇌산(牢山)의 남쪽 해안입니다."
사냥꾼이 돌아가 태수(太守) 이억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억은 평소 불법을 공경하여 믿었다.
뜻밖에 사문이 멀리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몸소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법현은 불경과 불상을 모시고, 그를 따라서 돌아갔다.
얼마 후 법현은 남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청주자사가 법현이 더 머물러 겨울나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법현은 말하였다.
"빈도(승려)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땅에 몸을 던진 것은,
부처의 가르침을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데에 뜻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기약하는 바를 아직 이루지 못했으므로,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법현은 남쪽 서울로 갔다.
외국 선사 불타발타라에게 나아가 도량사(道場寺)에서 『마하승기율』·『방등니원경』·『잡아비담심론 (雜阿毘曇心論)』을 번역해 내었다. 거의 백여 만 글자나 된다.
그러고 나서 법현은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을 세상에 내어 널리 유통시키고 교화시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듣게 하였다.
어떤 한 집이 있었는데,
그 성명(姓名)은 전하지 않아 알지 못한다.
주작문(朱雀門) 근처에 살았으며 대대로 불법의 바른 교화를 받들었다.
스스로 『대반니원경』 한 부를 베껴서 독송하고 공양하였다. 별도로 경실(經室)이 없어, 그 경을 잡서(雜書)들과 함께 방에 놓아두었다.
후에 갑자기 바람과 불길이 일어나서 그의 집까지 미쳤다. 재물이 죄다 타버렸다. 그렇지만 오직 『대반니원경』만은 엄연히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을음도 묻지 않았고, 책의 빛깔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울에 전해지자, 모두들 신통하고 영묘한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법현비구는 뒤에 형주(荊州)에 이르러 신사(辛寺)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86세이다. 대중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고 서러워하였다.
그가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답사한 것에 대해서는 별도로 대전(大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