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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머릴 깎아 민머리면 원효대사(元曉大師)고,
머릴 다듬어 관을 쓰면 소성거사(少性居士)다.
나타나는 모습이 1,100가지라지만,
마치 손바닥 같은 모습뿐이다.
이 두 모습은 그저
한바탕의 놀이일 뿐이지.
ㅡ 《동문선》 제50권 <소성거사찬>. 이규보 작.
삼국시대 중기 신라의 승려.
같은 시기에 활동한 고승 의상과 쌍벽을 이루는 고대 한국 불교계의 고승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명이다. 해골물을 통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3학에 능통했으며 신라에서는 원효를 두고 만인지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파계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계는 물론이고 한국 고대사ㆍ철학사ㆍ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천재로 평가받고 있다.
난세인 삼국통일전쟁 시기에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고 통일신라의 탄생을 목격했다. 또한 화쟁(和諍) 사상을 주창해 불교의 대중화는 물론 통합의 정신을 강조했다. 원래 중국 삼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백제 삼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근거는 6세기 말에 편찬된 백제의 《대승사론현의기》(大乘四論玄義記)로 백제 승려 혜균(慧均)의 생각과 많이 닿았다는 평가가 있다. 삼국통일에는 사상적인 통합이 선행되었고, 원효가 그 토대를 쌓았음을 보여준다.
속성은 경주 설씨(薛氏)이다. 이름은 사(思)라고 전하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다. 고선사(高仙寺)의 원효대사 비명을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라고 한 것을 보면 늦게까지 서당(誓幢)을 이름으로 쓴 듯하다. 서당의 서는 새롭다의 음을 취한 것이고 신당의 신은 새롭다는 뜻을 취한 것으로 모두 새벽을 의미한다. 경주설씨 가보(家譜) 중 신라사략(新羅史略)에 모친[趙氏]이 불등을촌(佛等乙村) 밤나무골에 지내는 중 산기가 있어 대사를 낳으니 그때가 해 뜨기 전 첫새벽이므로 이름을 원효(元曉)라고 했다고 했음을 보아도 대사의 이름은 새벽, 새날, 새빛, 새깃발, 새기치 등의 뜻을 가진 순수한 우리말인 듯하다. 족보에 전하는 이름인 사(思)는 후세의 유생들에 의한 개작일 수 있다.
법명인 원효(元曉)는 스스로 지은 것이라고도 한다. 당시 신라 사람들은 우리말로 원효를 始旦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를 '새벽‘이나 ’첫새벽', 혹은 '설'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실계, 환속 후에는 스스로 소성거사라고 칭했으며, 그 높은 위상과 유명도만큼, 원효를 칭하는 호칭도 상당히 많았다. 고려 숙종이 공식적으로 내린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부터 시작하여, 원효보살, 해동보살, 해동법사, 해동교주 등등 다양하다. 청구의 용이라는 의미에서 구룡(丘龍)이나 구룡대사라고도 불렸으며, 청구대사, 청구화상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화엄지(華嚴地)의 대권보살(大權菩薩)이나 성종성(聖種性)의 대종사(大宗師)로 여겨지기도 했다.
조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 하고 족보에 의하면 이름은 승무(承務)이다. 부친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담날(談捺) 나마(奈麻), 삼국유사에 의하면 담내(談㮈) 내말(乃末)이고, 족보에 의하면 이름이 이금(伊琴)이라고 한다.
2. 생애
신라의 압량주(押梁州)(현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나마(奈麻)였던 담날(談捺)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으로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뼈대 있는 집안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진골 출신임이 확실한 의상과는 달리 원효는 출신이 확실하지 않으며, 6두품 출신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중국에서 성이 설씨인 신라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에
'설씨는 신라의 김씨에서 나왔다.'
는 문구가 있는 점, 아무리 왕의 뜻이었다고는 하나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을 들어 사실은 신라 왕실의 방계 왕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소수 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신라 왕족인 요석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해 설씨 족단에 편입되었다는 설이 더 일리 있는 추정일 듯 하다.
출가 시기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송고승전》에 관채지년에 출가했다는 기록이 있어 일반적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29세에 황룡사로 출가했다거나 출가 이전에 화랑이었다는 말도 꽤 유명하지만, 문헌적으로는 이렇다 할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석가모니처럼 모친이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밤나무 사이에서 출산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밤은 1톨이 사발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에서 일하는 머슴이
"우리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한 끼에 밤 2톨밖에 안 준다."
라고 관가에 고발했는데 관리가 그 고발을 받고 와서 막상 보니 밤 1알이 큰 사발만 한지라
"앞으로는 한 끼에 밤 1톨만 주라."
라고 판결을 내렸다고 하며, 원효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는 사라사(娑羅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사라사 터로 알려진 자리에는 제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건물은 후대에 지었다고 한다.
원효는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출가하고 이렇다 할 스승이나 종파 아래에서 일정하게 배운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배움을 받으며 본인의 학문을 이어나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반고사라는 절에 머물며 낭지선사(朗智禪師)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5권에 등장하는 신라 반고사(磻高寺)는 굴화 영취사의 서북쪽에 있는데, 원효대사는 이곳에 머무르며 낭지선사의 가르침을 청하고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했다고 한다.
문제는 낭지선사가 《삼국사기》 3권의 법흥왕(法興王) 14년(527), 영취산(靈鷲山)에 법장을 열었다는 내용에서 처음 등장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약 20살쯤부터 영취사를 지어서 머물었다 해도 617년 태생인 원효대사가 10살쯤 되었을 때는 이미 120살 가까이가 되니 연대상으로 봐도 무리가 있다. 참고로 원효가 머물었다는 반고사로 추정되는 절 터 근처에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암각화가 존재한다. 애초에 이 두 문화재를 발견한 계기가 반고사 터를 찾고자 폐사지를 답사했기 때문이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의 유학을 두 번이나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당나라로 가는 것을 그만둔 후 돌아왔다고 한다. 귀국한 뒤에는 분황사에 주로 머물렀으며, 이후 상당히 특이한 방법으로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맺어져 이후 신라의 손꼽히는 유학자가 되는 설총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다만 요석 공주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설화이기에 실제 있었던 일인가에 대해선 의문이 있다. 이 설화를 기록한 일연도 웬만한 원효의 업적은 <당전>과 <행장>에 기록되었으니까 대신 향전의 한 두 가지 기이한 일을 쓴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서당화상비>나《송고승전》, 《삼국사기》 등 다른 기록에선 설총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삼국사기 설총 열전에선 원효의 아내나 파계에 관한 이야기 없이 그냥 불서에 통달하고 속인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소성거사라 칭했다고만 전하고 있다. 또한 원효가 설총을 낳은 시기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여야 자연스러운데, 설총의 출생은 2차 입당 시도 전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물론 원효의 2차 입당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둘 다 후대의 설화일 가능성도 있다. 여러모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어쨌든 원효대사는 어느 시점부터 속세로 돌아와 머리를 깎지 않고 속세의 옷을 입으며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며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말이나 행동을 험하게 하거나 거사들과 함께 술집과 기생집을 드나들기도 했고, 금속 칼이나 쇠석장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 또 소(疏)를 짓고 강론을 하거나 사당에서 거문고를 뜯기도 하고, 여염집에서 잠을 자거나 산과 강을 따라 좌선을 하는 등 일정한 법식이 없는 자유분방한 모습들을 보였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원효의 행보는 속세에 섞여 대중 교화를 실천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실제로 원효는 평생 활발하게 불교 연구와 저술 활동에 열중했다.
그리고 사실 혜공(惠空)이나 대안(大安) 등 원효와 동시대의 다른 고승들도 대중 교화를 위해 술집이나 저잣거리 등에 섞였으며, 이로 인해 이들 역시 해괴하다는 식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를 고려하면 당시 고승들 중에는 주변의 시선이나 눈초리를 무시하고 대중 교화를 위한 방편으로 속세를 드나드는 경우가 있었으며, 원효도 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원효는 《화엄경》의
일체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
一切無碍人一道出生死
의 문구를 따서 <무애>라는 노래를 지어 수많은 촌락에서 이를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대중에 대한 교화를 실천하기도 했다.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 )
어쨌든 여러모로 파격적인 행보를 일삼고 돌아다니다 보니, 당시 승려들 가운데는 원효를 못마땅해하는 시선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황룡사에서 인왕백고좌회라는 법회를 열었는데 고향인 상주에 머무르고 있었던 원효도 추천을 받아 참석하기로 했으나 당시 승려들이 원효의 파계 행적을 문제삼아 참석을 반대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왕비가 병이 났는데 어떤 의사들도 고칠 수 없었고, 산천의 신령한 사당에서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후 어떤 무당이 타국으로 사람을 보내 약을 구하게 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 하므로 약을 찾아 당나라로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은 서해 위에서 용궁으로 초대를 받아 용왕으로부터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라는 불경을 받았다. 그 불경은 뒤죽박죽 섞여 있었는데, 용왕은 불경을 주며 대안(大安) 성자에게 경전의 순서를 맞추게 하고, 원효 법사에게 경전을 주석하여 강론시키면 왕비의 병이 나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안(大安)이 왕명으로 불경의 순서를 제대로 짜맞추었다.
이후 원효는 고향에 머무르다가 불경의 내용을 풀어 강의해 달라는 왕명을 받고 소를 탄채 서라벌로 갔는데 가는 동안 소의 뿔 사이에 경전을 놓고 4일 만에 소(疏, 해설집) 5권을 썼다. 그런데 이번에는 법회를 하루 앞두고 원고를 누가 훔쳐가는 바람에, 원효는 법회를 4일만 더 연기해 달라고 요청하여 약소(略疏, 요약해설집) 3권을 써서 겨우 강의할 수 있었다. 강의를 마친 뒤 원효가
"지난 날 서까래 100개를 고를 때는 끼지 못했었는데, 이제 용마루 하나를 고르는 자리에는 나 하나만이 있구나."
라고 말하니 법회에 모인 승려들이 부끄러워하고 참회했다고 한다. 이때 원효가 지은 해설집이 바로 《금강삼매경론》이다.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경주 고선사(高仙寺) 터에서 원효의 행적을 기려 세운 <서당화상비>가 발견되었는데 비문에는 원효가 686년 3월 30일, 70세의 나이로 혈사(穴寺)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1. 입당 시도와 깨달음
젊었을 적 원효는 촉망받는 유능한 승려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고 했었다. 첫 번째 입당은 실패로 끝났고 두 번째 입당 시도에서 가는 도중 날이 어두워져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차에 동굴에 들어가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웬 물이 담긴 바가지가 있어서 거기에 든 물을 들이키곤 달고 시원하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다음날 날이 밝은 뒤 일어나 주변을 본 뒤 원효는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동굴의 정체는 파묘(破墓)된 무덤이었고, 그가 마셨던 건 해골 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기 때문이다. 경악한 원효는 구토를 했는데, 직후 썩은 물도 목이 마를 때 모르고 마시니 달았다는 것에서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라는 깨달음을 얻고는 스스로 유학을 포기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때 같이 가던 의상은 그대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서 화엄종을 연구한 뒤 신라로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것이 잘 알려져 있는 원효의 해골물 이야기다.
다만 원효가 입당 중 해골에 고인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 자체는 12세기 초 송나라 말기에 저술된 《임간록》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의외로 꽤 후대에 등장하는 요소이다. 원효의 깨달음과 관련된 가장 초기의 자료는 960년대에 저술된 《종경록》과 980년대에 저술된 《송고승전》의 기록인데, 그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일단 종경록에선 임간록과 비슷하게 썩은 물을 마셨다고 나오는데, 다만 해골에 고인 물이 아니라 죽은 시체의 즙을 마신 것으로 묘사된다. 송고승전에선 원효와 의상이 입당을 시도했는데 비가 와서 어느 토굴에서 머물며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본인들이 묵은 장소가 오래된 무덤인 것을 알게 됐되만 여전히 비바람이 불고 땅이 질척여 무덤에서 하루를 더 보냈다. 그런데 무덤인 것을 알고 나니 두려운 귀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원효는 전날에는 평범한 토굴인 줄 알아서 편하게 잤지만 오래된 무덤인 것을 알게 된 지금은 마음이 동요해 귀신을 보게 되었다면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도 비슷하게 원효가 비를 피해 토굴로 들어갔는데 그때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니, 다음날 그 토굴이 반쯤 무너진 무덤이라고 알게 되자 그날 밤엔 도깨비가 우글거려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두 이야기가 합쳐진 버전, 그러니까 동굴인 줄 알았던 곳이 무너진 무덤이고, 해골물도 마셨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다만 원효의 전기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인 9세기 초 서당화상비의 비문에선 그냥 날 때부터 도를 알았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연 역시 삼국유사에 이 이야기를 싣지 않았다. 이를 고려하면 이야기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 깨달음 이야기는 어느 정도 설화적으로 이해되고, 변형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원효가 사실은 의적(혹은 의상)과 더불어 중국에 단기간이나마 유학했고, 유학 기간 동안 삼장법사 현장의 밑에서 공부하는 한편, 일본인 승려인 가재를 제자로 두었다는 주장도 있다.
3. 평가
"《대승기신론》은 대승을 본질로 한다. 그것(대승)은 텅 비어 고요하며, 깊고 그윽하다. 그윽하고 또한 그윽하지만 어찌 만상(萬像)밖을 벗어난 것이겠으며, 고요하고 또한 고요하지만 오히려 백가(百家)의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허나 만상 밖을 벗어난 것은 아닐지라도 5안(眼)으로도 그 형체를 능히 볼 수 없으며, 백가의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4변(辯)으로도 능히 그 형상을 말할 수 없다.
'크다'고 말하자니 아무리 적은 것(無內)에도 충분히 들어가며, '작다'고 말하자니 아무리 큰 것(無外)도 충분히 감쌀 수 있는 것이라. 그것을 '존재'라고 하자니 진여도 그것으로 인해 공이 되고, '비존재'라고 하자니 만물이 그것을 통해 생겨난다.
그것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하니, 굳이 말로 하자면 '대승'이다."
《대승기신론소》, 원효
불교 사상을 깊게 접할 일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원효하면 그냥 '해골물을 마신 승려' 정도로만 기억되지만, 사실 한국의 철학이나 종교계에선 손에 꼽는 인물이다. 원효는 유학을 다녀오지도 않았고 제자 양성이나 종파를 남기는 것에도 큰 관심을 두진 않았지만, 수준 높은 지식과 활발한 저술 활동을 바탕으로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은 물론, 동북아시아 불교의 중심인 중국에도 여러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대승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그 내용이 어렵고 난해하단 평가를 받던 《대승기신론》을 원효가 해석한 주석서 대승기신론소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으며 중국이나 일본에도 전해졌다. 심지어 중앙아시아까지 전해져 10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대승기신론소》 돈황 판본이 발견된 적도 있다. 대승기신론의 주석서는 당나라 화엄종 제3조인 법장의 것과 9세기 당나라 승려 종밀의 것이 보편적으로 읽혔는데, 두 명의 주석서 모두 원효의 대승기신론 해석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원효는 화쟁을 주장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십문화쟁론》에선 당시 유행하던 불교 이론을 묶어 정리하며 화쟁 사상을 설파하기도 했다. 이러한 원효의 이론과 저서들은 당시 동북아의 불교계에서 중관 학파와 유식 학파의 대립 등 종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이를 논리적으로 풀어내어 완파했다. 또한 원효는 교종 승려로 유명하나, 원효의 저작인 《금강삼매경론》 등은 선종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처럼 원효는 일심과 화쟁 등에 기반한 풍부한 저술 활동을 통해 동아시아 대승 불교의 대중화와 발전에 여러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도 원효의 여러 저서들이 읽히고 인용되었다. 의상과 원효에 대해 그린 그림인 화엄조사 역시 일본에 있다. 일본 승려 장준이 쓴 <인명대소초(因明大疏抄)>에 따르면 원효가 현장 삼장법사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한 상위결정비량(相違決定比量) 논의가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의 학승들이 접하고는 원효가 있는 동방을 향해 3번 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교에서 3번 절하는 대상이 누군지 생각해보자.
일본 센고쿠시대에오다 노부나가에게 대항한 잇코잇키나 혼간지로 유명한 일본의 정토진종(또는 일향종, 一向宗)은 《유심안락도》(遊心安楽道)]의 영향하에서 세워진 종파였다.# 비단 정토진종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토교 계열 종파는 대체로 원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는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감동하여 779년 신라에서 온 사신단 가운데 원효의 손자인 판관 한나마(대나마) 설중업(薛仲業)이라는 사람을 발견하자 감격하면서 그에게 아래의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원효 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을 읽고 감동했는데(嘗覽元曉居士所著金剛三昧論)
그 사람을 보지 못해 깊이 아쉽거늘(深恨不見其人)
이제 그 후손과 만나니 기쁘도다(而喜遇其孫)
기꺼이 시를 써서 전해야지(乃作詩贈之)
고려를 통해 원효의 저서를 받아 본 요나라 후기의 황제 도종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찬양한 적도 있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미하다가 불교적인 이해도가 높아진 고려 시대가 되어서야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인도 유식학파의 고승으로 보살이라고까지 불린 진나(陳那)의 문도가 당나라에 와서 《십문화쟁론》을 읽고 춤을 추며 찬탄하고는 인도로 역수입해갔다. 순고의 《기신론본소집청기》에 실린 다른 기록에서는 진나의 문도가 《십문화쟁론》을 보더니
"이 원효라는 사람, 우리 스승님(진나)의 후계인가?"
라고 하며 인도로 가져갔다고 나온다. 불교에서 '아무개의 후계'라고 하면 특정 고승 · 대덕의 환생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본토 학파에서 자기네 스승과 동일시할 정도면 그 위엄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티베트로도 전해져서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승려로 출가한 사람들에게 수행할 것을 권하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불교에서 승려들이 출가해 입문서로 처음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에 포함되어 있다.
원효가 불교의 가르침을 풀이해 부른 노래인 <무애가>(無碍歌)는 처용무와 마찬가지로 무애무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의 궁중무용으로 편입되어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었는데 불교적인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궁중무용에서 빼버렸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에 효명세자가 창작한 악무 가운데 동명의 무악이 있기는 하지만, 무애무가 사라진지 200년이 지난데다가, 1명이 추던 것이 12명으로 늘어났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추는 춤으로 변했으며, 불교적인 색채는 전혀 없는 등,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춤이다. 《삼국유사》나 《파한집》 등의 기록에는 원효가 시중의 광대들에게서 호리병 하나를 얻어 저자에서 부르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후세에 그것을 본떠 무애무라는 춤을 제작할 때는 호리병 끝에 방울과 오색 비단을 매달아 장식했다고 한다.
"양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두 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요.
발을 3번 드는 것은 삼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라."
"배는 가을 매미 같고 목은 여름 자라 같은데,
그 굽은 것은 뭇 중생이 따를만 하고 그 빈 것은 만물을 받아들일만 하네"
등 고려시대에 무애무를 본 사람들의 시에서 무애무의 춤사위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원효는 불교 이론가이자 교종으로서의 면모가 매우 큰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대중화에 매우 큰 기여를 한 인물이었는데,
'경전의 이해가 어렵다면 그냥 생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라. 나무아미타불만 잘 외워도 된다.‘
는 내용으로 대표되는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생활 불교인으로서의 면모도 상당한 인물이었다. 나무아미타불을 사실상 '발굴'한 것도 원효의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라 중기의 불교 문화가 현세구복적(현실의 복을 비는 것)이었던 것에 비해 원효가 주로 설파한 정토종(아미타 신앙)은 말 그대로 '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왕생'이기 때문에 내세구복적이다. 신라 시대에 현세구복적 불교로 가장 대중화된 종파는 의상의 화엄종이다.
학술적 의미에서 설명하자면, 국내에서 원효를 주제로 쓴 박사 논문이 160여 편이 넘는다. 원효의 연구범위는 현세구복적 불교에서 논리학적 불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내용의 수준 역시 동아시아의 최첨단을 달렸다. 한국에서 원효의 명성이 지금처럼 크게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근대부터지만, 고려시대에도 숙종, 의천, 김부식, 이규보, 일연 등 인물들이 언급하거나 여러 설화에 등장할 정도로 인지도 자체는 상당히 높았다. 한국 불교가 통불교의 형태를 지양하게 된 것도 원효의 사상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다.
워낙 뛰어났던지라 전근대에는 원효가 보살,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의 원효불기를 보면 원효가 십지보살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는 설화적 기록이 있으며, 화엄지(華嚴地)의 대권보살(大權菩薩)이나 성종성(聖種性)의 대종사(大宗師) 등으로 칭해지기도 했다. 원효의 사상을 중요하게 여겼던 의천은 그를 아예 마명보살이나 용수보살에 비견하기도 했다.
4. 대중매체에서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소설가 이광수가 《매일신보》에 원효의 이야기를 다룬 《원효대사》라는 소설을 연재했는데, 이 소설은 원효 사상에 대한 의도적인 오독을 통해서 일본 제국의 전시 동원과 식민 교육을 설파하는 특별한 인물로 원효를 조립해내, 전쟁주의와 군국주의를 추구하는 일본 제국의 군부를 정당화하는 장치에 원효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친일 소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62년 장일호와 최금동이 위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영화화한 바 있다. 제작/배급은 국일영화사가 맡고 음악은 황문평이 맡았으며 최무룡이 원효 역을 맡았다. 다만 필름은 유실된 상태이다.
1967년 TBC가 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수요연속극 <원효대사>를 방영한 바 있는데 극본은 최금동, 연출은 서석주가 각각 맡았다. 박병호가 원효 역을 맡았는데 그가 TV에서 처음 맡아 본 승려 역할이었다.
1969년 미시마 유키오의 연작소설인 《풍요의 바다》 제 1권인 《봄눈》(春の雪)의 초반부에서 원효의 해골물 설화가 작중 등장하는 스님의 설법 내용으로 인용되기도 한다.
1979년 11월 KBS <일요사극 맥> -성사의 길- 편에서 임혁이 원효 역을 맡았는데,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과 요석공주와 맺어지는 줄거리를 담았다. 1995년 4월 1일자 KBS 1TV <역사의 라이벌>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1986년 KBS1에서 방영한 <원효대사>라는 8부작짜리 미니시리즈 사극이 있는데 극본은 김운경, 연출은 최상식으로 전무송이 원효 역을 맡았다. 마지막에 성인이 된 아들 설총이 원효의 절로 찾아가니 원효가 마당을 쓸라고 시켰는데 깨끗하게 쓸고 나니 원효가 그걸 보면서 "가을 마당에 낙엽 1~2잎은 있어야지."라고 하면서 몇 개 흩뿌리는 걸로 마무리한다. 이는 유학자의 길을 걷게 되는 설총과 승려로 남은 원효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재생 목록
1992년 KBS 대하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서학이 연기했다.
2006년 봉준호의 영화 <괴물>에서는 "해골물 처먹은 놈"이라고 언급된다. 그리고 의료진이 해골물을 마신 게 원효대사인지 사명대사인지 병림픽을 벌이는데, 영화판에서는 "원효대교의 원효가 그 원효대사인가?"라는 말에 다른 의료진이 "그럼 반포대교는 반포대사냐?"라고 빈정거리는 걸로 끝나지만, 소설판에서는 짬 높은 의료진이 "원효대사가 아니라 사명대사가 해골물을 마신 거야"라는 개드립을 치면서 신참 의료진을 찍어누르는 내용으로 나온다.
2013년 <푸른거탑> 시즌 1 에피소드 8 -발렌타인 데이의 기적-에서 아다리가 걸린 상황하에 대침투 작전에 투입된 최종훈, 김재우, 김호창이 흙 구덩이를 발견하고 우여곡절 끝에 들어가 앞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우연히 이불을 발견하게 되는데 실상은 죽은 멧돼지의 썩은 가죽이었고, 추위를 녹일려고 할 참에 갑자기 목이 말랐는데 우연히 어느 바가지에 고인 물을 발견하고 바가지의 물을 마셨는데 알고 보니 짐승뼈에 고인 물이라는 내용으로 패러디되었다.
2017년 10월 16일 채널A <천일야史> 43회에서 단편으로 <원효대사의 몰래한 사랑>이 방송되기도 했는데 이대진이 원효를 연기했다.
윤인완-양경일의 만화 《신암행어사》에서는 원효의 이름을 딴 캐릭터가 나오지만 이 만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처럼 이 인물 또한 원효라는 이름만 땄다. 원효(슈퍼스트링) 문서로.
<개그콘서트>의 前 코너 -대화가 필요해-에서 장동민이 역사 숙제로 본인 가족의 위인 조사를 위해 부친 김대희에게 물어보고 이야기를 들어 보니 원효로 가는 듯 했는데, 알고 보니 해골바가지가 본인들 위인이었다.
2020년 래원이 <원효대사>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냈다.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는 신라측 영웅들 중 하나로 등장하며, 절에서 생산되는 마법형 장수로, 마법은 금강역사 소환이다. 원효대사가 삼국통일전쟁에 참전했다는 역사적인 기록은 전혀 없지만, 아마도 타국들과 달리 이름 있는 마법형 장수가 없어서 급히 승려이고 역사 인물들 중에서는 인지도가 높은 원효를 땜빵한 것으로 보인다.
5. 기타
원효는 뛰어난 능력과 특이한 행동만큼 관련된 일화나 야사도 많다. 《삼국유사》에는 661년 김유신이 평양을 포위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해주러 고구려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정방은 신라군이 전달해준 군량을 받고 김유신에게 송아지와 난새(鸞鳥)의 그림을 그려서 보냈는데, 원효가 이 그림이 "속히 돌아가라."라고 하는 암호문임을 해석해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유신은 돌아오면서 고구려군의 포위 공격에 걸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뛰어난 신통력이나 승려로서의 뛰어남을 자랑하는 설화나 야사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심지어 송고승전이나 서당화상비 같은 오래된 기록에도 원효와 관련된 신이담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사찰 성선사(聖善寺)에서 화재가 일어난 것을 신라에 있는 원효가 알아채고 비를 내려 불을 끈다거나, 당나라의 운제사(雲際寺)가 무너져 내릴 것을 알고 원효가 소반이나 널빤지를 던졌는데, 이것이 그 사찰의 마당에서 날아다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승려들이 사찰이 무너지기 직전 나와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렇게 신통력으로 도움을 받은 당나라의 승려들이 원효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는 설화다.
흔히 '나무아미타불'이란 염불을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원효가 창시한 것은 아니다. 나무아미타불 등의 염불을 외우는 것은 원효 이전부터 정토교에서 강조했던 것인데, 원효가 정토 사상을 불교 대중화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원효로 인해 가난하거나 무지몽매한 이들도 나무(염불)를 외우게 되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원효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이 염불이 동북아시아에 퍼지는 데 원효의 영향 역시 적지 않게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
불립문자 주장으로도 유명하다. 본인은 역설과 비유를 활용한 많은 저작을 남겨 말로는 표현 못할 진리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원효의 유골에 흙을 붙여 만든 원효회고상이 분황사에 전해졌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고려 중기 여몽전쟁 때 몽골군이 경주시에 불을 지르면서 분황사도 타버렸는데, 그때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원효 생전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되었을 것이다.
대신 문서 최상단에 있는 초상화가 남아 있다. 일본 교토의 고잔지(高山寺, 고산사)에 원효와 의상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그림들은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였던 묘에(明恵)가 불교계의 선각자인 원효를 존경해 신라 시대의 원본 초상화를 보고 이모한 것이다. 지금은 신라의 원본이 멸실되었으므로, 묘에의 이모작이 당대의 원효 진영에 가장 근접한 초상화라고 여겨진다.
실제로 화풍에서 일본풍이 아닌 한국의 초상화 양식을 따르므로 원본을 충실하게 따라 그렸다고 추정된다. 족좌에 신발을 벗어놓은 것이 옛날 형식이고, 더부룩한 수염과 검은 피부의 담대한 인상이 문헌 기록에 남은 원효의 파격적인 행적과 걸맞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고려와 조선 대부분의 국왕 어진이 현대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극히 일부임을 감안하면, 한•중•일 불교계에 걸친 원효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유명한 만큼 원효에서 따온 이름들도 많다. 서울특별시의 원효대교가 대표적이며,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는 일제강점기에는 '모토마치'(元町)라는 이름이었는데 이를 광복 이후 개명하는 과정에서 같은 한자(元)를 쓰는 원효로로 바꿨다. 경상북도 경산시에 위치한 원효로 역시 원효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효의 46대손이 승려 석우이다. 그러나 의외로 이 부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원효의 행적이 워낙 인상 깊었던 탓에 양산형 무협지나 기타 국산 창작물에 등장하는 자칭 깨달음을 얻었다는 승려나 도인들은 술이고 개고기고 뭐고 그냥 다 먹는다. 물론 이런 '자칭'이 아니더라도, 정말로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이지만 스스로를 땡추로 지칭하고 파격적인 발언과 행동을 행한 승려들도 제법 많다. 근데 원효는 스스로 파계했음을 인정하고 본인을 스님이 아닌 소성거사라고 지칭하였다.
《원효결서》라는 예언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초 발견자가 어디선가 전달받은 것이라는 주장도 그렇고, 결국은 남사고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격암유록》이나《송하비결》 같은 위서라는 의견이 회의주의자들 사이에서 대세이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둘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떡밥이 되기라도 했지 《원효결서》는 그냥 묻혔다.
다만 위의 원효결서와는 별개로 조선 시대에 원효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도참 사상과 관련된 인물로 여겨진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16세기의 정경운의 고대일록에는 허균이 얻은 참기가 신라 승려 원효의 저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허균은 도참서를 가지고 반역을 꾸몄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또한 19세기 이규경은 원효와 의상이 도참비기의 창시자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또 서당화상비에도 마멸되어 내용이 불확실하긴 하지만 원효가 참기나 외서 등 세상에서 배척받는 것과 관련 있다고 있는 구절이 있다. 풍수에 밝은 승려가 후대에 도참서의 저자로 가탁되는 경우는 흔히 있고, 연대도 멀어 조선 시대의 기록은 마냥 믿긴 어렵지만, 어쨌든 서당화상비에도 관련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원효가 불교 이외에 도참 등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거나, 최소한 관련 있는 것으로 여겨진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의상ㆍ자장ㆍ도선 등과 함께 웬만한 고찰(古刹)들의 창건자가 원효라는 이야기가 매우 흔하다.국내의 원효 관련 사찰 분포 척 봐도 원효의 일대기와는 무관하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역사적인 신빙성이 없고 원효의 유명세를 빌려서 절의 권위를 높이려는 행위라고 보면 된다. 절들의 창건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저 승려들이 평생 절만 세우다가 입적해도 모자랄 판이다.
태권도의 유단자 품새 중 하나이자 마지막 품새인 일여(一如)가 원효대사의 사상을 토대로 엮어졌다.
한때 해골물 일화에서 파생되어 인터넷 상에서 '~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인 줄 알았을 땐 만족했는데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나니까 화난다.'는 내용을 줄여서 해골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원효와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 중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졌고, 이런 고사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층의 드립에서도 종종 쓰일 정도로 인지도가 있었다. 별 상관은 없지만 어감 때문인지 고인물 드립에 응용하기도 했으며, 와 샌즈! 드립이 확대된 이후로는 샌즈물 드립도 생겨났었다.
또한, 현재 뉴진스님 캐릭터로 활동하는 윤성호의 행보가 그와 매우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식 출가만 하지 않았을 뿐, 원효대사의 민중친화적인 면과 유사하며, 이로 인해 조계종에서도 그의 이런 활동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신선한 반응을 불러왔다. 다만 대승 불교와 부파 불교 간 관점의 차이로 인해 말레이시아에서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6. 관련 문서
나무아미타불
대승기신론소
판비량론
금강삼매경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