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 앞에서 사는가
<미 비포 유>(티아 샤록, 로맨스, 12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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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으로 말하면 현실성과 대단히 거리가 먼 이야기다. 갑부의 남자가 교통사고 후 사지마비로 누군가에 의존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고, 그를 간병하기 위한 여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 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하는 처지다. 두 사람이 만났다? 결말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야기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소설은 어떤 지도 궁금해졌다. 장애인 영화치고는 장애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현실을 표현하는 것에 인색하고, 장애의 극복을 말할 생각은 도무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존엄사 논쟁을 불러일으킬 목적이었을까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러면 관점을 달리해서 여자가 갑부인 장애를 간병하다가 그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인생을 산다? 도대체 이런 황당하면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가 있을까 싶다. 영화를 감상한 후 그저 시간 보내기 좋은 영화로 여기며 극장을 나섰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영화 제목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당신 앞에 있는 나”, 당신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를 말할까? 간병인 루이자가 나이고, 윌이 당신일까? 아니면 그 반대? 제목과 관련해서 이런 의문이 들면서 영화를 다시금 곱씹어보았고, 그러다보니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로맨스만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왼발>이라는 영화가 몇 차례 언급된 것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내용은 이렇다.
시골 마을에서 카페 점원으로 일하다 폐업하는 바람에 졸지에 실직자가 된 루이자, 그녀는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또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녀의 원색 일변의 패션은 그녀가 주변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지 않고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오직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 꿈도 포기한 채 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야 했고, 그녀의 원색 패션은 그녀의 마음과 형편을 잘 표현해준다.
이에 비해 윌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지가 마비되어 더 이상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로 살고 있다. 오히려 나빠질 가능성만 있을 뿐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사고 후에는 그것을 모두 상실했다. 깊은 좌절감으로 죽기를 시도했지만 거듭 실패했다. 존엄사를 요구하는 윌에게 부모님은 6개월의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고 한다. 그 사이에 설득해보자는 심사였다. 루이자는 6개월 동안의 시간을 두고 간병인으로 고용된다. 혹시 그 사이에 윌의 마음은 바뀌게 될까?
루이자가 6개월의 의미를 처음부터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간병하는 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이 일 때문에 루이자는 마음에 큰 부담을 느껴 일을 포기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동생의 권고를 받아들여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윌과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경험할 계획을 세운다. 혹시라도 윌의 결심을 바꿀 수 있을 기대를 갖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루이자와 윌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마음이 순수한 여인을 얻고 또 그녀와 함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면서 혹시 윌의 마음은 바뀌지 않을까? 윌의 부모는 물론이고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갖는 기대였다.
그러나 윌에게서 그런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도 또 그녀와 함께 하는 삶의 아름다움도 그의 결심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죽음은 삶보다 더 강한 것인가? 윌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여 미래를 포기한 것일까? 심적으로는 수긍한다 해도 존엄사의 정당성을 설득하는 장면도 없이 존엄사를 너무 당연시하는 윌의 모습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루이자 역시 윌의 이런 결심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진다. 그녀가 놓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부족해서 윌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일까? 루이자는 자책감에 괴로워한다. 이런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는 그저 그런 영화로 마무리 될 뿐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을 재고할 이유를 발견한 것은 윌과 루이자 사이에서 가능성을 실현하며 사는 삶의 중요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영화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사실 <미 비포 유>는 <씨 인사이드>가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존엄사 논쟁을 일으킬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나의 왼발>이 말하는 사랑에 대한 좌절과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있어 준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로 볼 여지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 스토리 전개를 위한 하나의 틀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미 비포 유>는 삶의 가능성을 실현하며 사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펼쳐나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루이자가 원색의 패션을 벗어버릴 수 있었던 것도 윌을 통해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다.
이런 관점에서 윌의 장애는 가능성이 좌절된 삶을 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반대로 루이자의 삶에서 감춰져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루이자는 윌과의 관계에서 가능성의 실현을 향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은 것이다. 결국 영화는 윌의 장애를 통해 루이자의 삶이 회복되는 것을 겨냥하고 있고, 윌은 루이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장애를 단순한 장애가 아니라 루이자의 가능성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디딤돌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서, 필자는 영화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일전에 요한복음 9장에 관해 했던 설교에서 다룬 질문이 떠올랐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돌보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도대체 장애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며 다가오는 사람을 통해 얻는 은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장애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보면 장애인은 오직 은혜와 도움의 객체로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고 또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주체로서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은혜를 베풀며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사실 이런 질문은 장애인들에게 무리일 수 있다. 장애인들은 우선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가당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실로암이라는 말의 번역을 소개하면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시각장애인을 언급한다. 시각장애인은 보냄을 받은 후에 비로소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장애인에게도 부르심이 있고, 부르심에 따라 보내심도 있다. 장애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때는 바로 하나님이 보내심을 받고 순종할 때이다. 비록 장애 때문에 가능성은 사라졌다 해도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돕는 기회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닉 부이치치처럼 장애를 극복하면서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지만,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라 해도 다른 사람에게 가능성을 북돋을 수는 있지 않을까. 필자는 바로 이런 가능성을 <미 비포 유>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실현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메시지다. 교육의 목표를 말할 때 흔히 언급되는 소위 자아실현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교육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무조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육에선 인간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현실로 옮겨놓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뜻을 가능성으로 여긴다면, 그 경우에 한해서 자아실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뜻을 가능성으로 여기지 않는다. 인간은 그 생각하는 것이 악할 뿐이라고 했다. 오로지 자신의 가능성,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려 노력한 것이다. 산다는 것을 삶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할 수 없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다. 결코 뒤바뀔 수 없는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