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꿈꾸었던 국가
민간인학살 특히 보도연맹원 학살에 관해 공부하면서 드는 질문 중의 하나는 돌아가신 그 분들이 생각했던 국가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또한 독립운동하던 분들이 원하던 국가는 어떤 모습이였을까? 단순하게 말하면 ‘모두가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을까?
대구 10월항쟁 유족회 회장인 채영희 선생님은 “대구시 동구 미대동 출신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손녀다”라는 설명으로 2013년 10월 영남일보에 소개된다. “채충식 선생은 장진홍열사와 시인 이상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와 교류했으며. 그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으며,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회의협상차 평양에 다녀오기도 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채충식 선생의 아들 채병기를 “46년 대구10월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 강제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다. 그는 6.25 전쟁 때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좌파 정치범으로 분류된 뒤 그해 7월 30일 가창골(현 가창댐)에서 처형됐다”라고 한다.
여기서 46년 대구10월항쟁에 대해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해방 직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것 등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들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46년 9월 하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뒤, 이에 이어 10월 1일에서 2일 사이 대구에서 주민 봉기의 형태로 발생했다. 그리고 10월 6일까지 경북 지역으로 번졌고 12월 중순까지 남한 전 지역으로 확산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64)”고 결정하고 있다. 또한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진실화해위원회는 직권으로 조사하였고 결정 사안을 읽어보면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경까지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이 육군본부 정보국 CIC와 경찰, 헌병, 해군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과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소집·연행·구금된 후 전국에 걸쳐 집단 학살된 사실을 확인하고 진실 규명으로 결정한 사례(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03)”이다.
채병기 등의 보도연맹원 학살의 피해자는 해방된 국가에 더 나은 정책을 요구했고, 그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국가는 국민보도연맹이라는 관변단체를 만들고 요시찰 하였다. 국가는 “보도연맹원의 신분을 보장하고 완전히 전향했다고 판단되면 ‘국민’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공표하였지만(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05)”. 북한의 남하가 계속되자 후퇴하면서 학살하였다.
그렇다면 보도연맹원 학살의 피해자가 꿈꾸었던 국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자료를 찾아보니 “1946년 7월 서울 지역에서 1만 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여론조사를 보게 되었다. ‘미래 한국 정부의 형태와 구조’라는 제목으로 실제 응답자 수는 8,476명이었다. 그중에서 선호하는 경제체제에 70%가 사회주의를 선택했다(송재경, 2018, 271)”. 이들이 사회주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13%), 공산주의(10%)보다 높은 선호도를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의 깊이와 현실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조금 더 세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지만 혼자만 잘사는 그런 세상을 원하지는 않는 듯하다. 일본제국주의의 모진 고문을 당하며 참고 이뤄낸 해방된 국가에서 미군 정부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이라는 그들이 꿈꾸던 국가는 지금처럼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김낙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는 허동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는 박지향. 독립기념관장에 김형석이 판을 치는 그런 나라를 원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