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루투칼은 인구 천만 명, 면적 9만2천 평방키로미터로한국과 비슷하고 정도이고 수도는 리스본이다. 행정상으로 대서양의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도 포르투갈의 일부이다. 동쪽과 북쪽으로 스페인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해 있다. 겨울은 온난 습윤하고, 여름은 비교적 기후 변화가 없으면서 건조하다. 포르투갈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동질적인 민족에 속하며 지중해 주변 민족들과 신체적 특징이 유사하다. 국민의 대부분이 로마 가톨릭교도이고, 주요언어는 포르투갈어이다.
로마인·수에비족·서고트족·무어인·유대인이 모두 포르투갈의 영토에 영향력을 끼쳤다. 대부분의 포르투갈인들은 유럽인들의 평균키보다 약간 작고 갈색눈에 검은색의 곱슬머리, 파르스름하거나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대부분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주요언어인 포르투갈어는 로망스 제어이다.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의 주민들도 포르투갈계이다.
포르투갈은 대부분의 지역(70%)이 여전히 농촌으로 남아 있다. 인구밀도가 높은 북부와 인구밀도가 낮은 남부 사이에 인구와 촌락 형태가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농촌지역에서 이농현상이 심각한데 특히 북부 일부 지역과 중동부지역, 남부의 해안지역에서 두드러진다. 브라가와 세투발 사이에 있는 해안지대에 저지의 평원과 도시개발 등의 요인이 작용하여 많은 인구가 몰리고 있다. 중앙평원인 미뉴, 해안지역인 알가르베 같은 곳은 인구과밀현상이 심각하다.
1974년의 쿠데타 이후 주요산업이 국유화되었고, 대대적인 토지개혁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말에 들어서면서 정부는 마침내 1975년 이후에 국유화된 대부분의 기업을 민영화했고, 수용된 토지의 옛 지주들에게 보상하는 새로운 정책을 시행했다. 국민총생산(GNP)은 인구성장률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1인당 GNP는 서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사실주의 경향을 띤 현대소설로 주세 마리아 에사 데 케이로스와 주세 마리아 페레이라 데 카스트로의 작품이 등장했지만, 전통적인 서정시도 여전히 성행한다. 20세기에 들어서 회화와 조각도 실험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마리아 엘레나 비에이라 다 실바는 칭송받는 현대 추상화가이다. 전통 민속예술이 전수되어오고 있는데 민속음악과 민속무용, 그리고 포르투갈의 슬프면서 낭만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민요인 파두는 음악적 표현의 기본 형태로 남아 있다.
이베리아 반도에 사람이 거주한 것은 적어도 50만 년 전의 일이지만 포르투갈에서 발견된 독특한 최초의 문화는 약 BC 5500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BC 1000년에 켈트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하여 원주민과 빈번하게 혼인을 맺음으로써 켈트이베리아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루시타니아인이라 불리는 포르투갈의 켈트족은 이같은 통혼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BC 140년경 로마인들이 이들을 정복했다. 5세기가 시작되면서 로마 제국은 기울기 시작했고 게르만 민족인 수에비인이 이베리아 반도의 많은 지역을 침략했다. 469년 로마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서고트족을 보냈고, 수에비 군주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서고트족은 약 100년 후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되찾았으나 711년의 이슬람교도의 침공으로 그리스도교도들은 포르투갈의 북부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지역은 포르투갈 주(州)로 불렸으며, 오늘날 포르투갈을 이루고 있는 지역을 재정복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117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포르투갈 주는 아폰수 엔리케의 통치하에 왕국을 이룩했다. 뒤를 이은 왕들도 재정복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1270년 아폰수 3세 때 지금과 같은 포르투갈의 경계선이 확정되었다.
1385년 왕위가 아비스의 가문으로 넘어갔으며, 아비스 왕조의 군주정치하에 포르투갈은 유럽 최초의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아비스 왕조의 군주들은 탐험주의를 적극 권장하여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인도·인도네시아·중국·중동·남아메리카 등지를 탐험했다. 1580년 아비스 가문이 멸족되자 왕위는 혼인을 통해 스페인에게 넘어갔다. 스페인의 통치자들은 포르투갈을 소홀히 했고, 1640년 그들을 폐위시킨 혁명으로 포르투갈 왕위는 포르투갈의 브라간사의 가문에 이양되었다. 19세기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포르투갈 왕실은 1807년 브라질로 망명했다. 1815년 브라질은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포르투갈과 연합했다. 군주의 부재하에 1820년 포르투갈에서는 제헌의회가 소집되었다. 여기에서 문서가 작성되어 주앙 6세의 승인을 받았으며, 그는 1821년 브라질에서 돌아왔다. 입법주의자와 절대전제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격렬한 내란이 일어났다. 내란은 1834년 끝이 났지만 정치적 불안은 계속되어 결국 1910년의 혁명으로 군주제가 전복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공화국 역시 불안한 정치상황 속에서 수난을 겪다가 1926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정권은 결국 안토니우 데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에게 넘어갔다. 사실상 독재자인 그는 재무장관(1928∼40) 겸 총리(1932∼68)를 역임하면서 포르투갈을 통치했다. 그의 식민정책은 아프리카에서 곤혹스러운 전쟁을 수행하도록 강요받은 군부 지도자들 사이에 원성을 불러일으켜 1974년 결국 이들이 주동이 된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결과 식민지들의 독립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초기 중도·보수적 성향의 군부가 장악했던 정부는 잠시 군부의 급진파와 좌파 및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가 다시 중도파가 집권했다. 1976년 제헌의회는 사회주의로의 이양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을 승인했으며 총선에 따라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다. 1980년 선거에 승리함으로써 정권을 잡은 중도우파는 1976년의 헌법에서 좌파적 성향을 배제시켰으며, 1982년의 헌법개정으로 포르투갈의 민정이양이 완료되었다. 1983년 구성된 사회당과 사회민주당의 연립정부가 1985년 붕괴된 이후 PSD 정부가 들어섰고, 1986년 마리우 수아레스는 60년만에 최초의 민간인 대통령이 되었으며 1991년 재선에 성공했다.
카보다로카- 유럽 대륙의 서쪽 끝, 땅끝 마을인 카보 다 로카는 절벽 위 등대와 함께 절벽 아래로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인상적인 뷰를 선사한다. 눈을 감고 팔을 벌려 바람을 맞으면 모든 것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일까, 자유를 상징하는 광고 촬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관광 안내소에서는 유럽 대륙 최서단에 도착했다는 증명서를 유료로 발급해 준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사는 사람이 이곳 대서양을 바라보는 대륙의 서쪽 끝단에 서니 감회가 새롭다▼
심 산
벨렝탑- 마누엘 1세에 의해 1515년 테주강 위에 세워진 탑으로, 지금은 강물의 흐름 때문에 탑이 강물 위로 노출되어 있다. 원래는 외국 선박의 출입을 감시하며 통관 절차를 밟던 장소이며, 대항해 시대 때에는 왕이 이곳에서 선원들을 알현했던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 지배 당시에는 정치범과 독립 운동가들을 지하에 가두던 물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내부 관람이 가능하며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제로니무스 수도원-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항을 개척함으로써 비단과 향신료가 포르투갈에 들어오게 되자 마누엘 1세가 그의 부를 상징하기 위해 짓기 시작한 수도원이다. 1502년 착공하여 1672년에 완공되었으며 대지진 속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야자수처럼 생긴 기둥과 천장은 마누엘 양식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수도원 안 성당에는 인도를 개척했던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코 다 가마의 석묘와 시인 루이스 바스 데 카몽스의 석묘가 자리하고 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석묘에 밧줄을 쥔 손을 조각해 놓은 기둥이 있는데 이것을 만지면 항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조각은 사람들의 손길로 빛이 나고 있다. 수도원 내 회랑 역시 마누엘 양식의 절정을 보여 주고 있는데, 조각 하나하나의 디테일이 놀라울 정도로 예술적이며, 사각형 회랑 내에 자리하고 있는 안뜰은 잠시 쉬어 가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벨렘탑 ▼
발견의 탑- 범선을 본따 만든 약 52m의 기념비로, 항해 왕자였던 엔리케 왕자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되던 1960년에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기념비이다. 뱃머리 가장 앞에서 범선을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엔리케 왕자이고 그의 뒤를 따라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 지구를 처음으로 한 바퀴 도는 데 성공했던 마잘렌, 대항해 시대의 통치자였던 마누엘 1세 등 항해에 있어서 큰 역할을 했던 인물들과, 천문학자, 지리학자 등 총 30명의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기념비 전망대는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거나 유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과거 포루투칼의 영광을 생각나게 하는 탑이다 ▼
파티마 성당- 성모 발현을 목격한 세 명의 아이 중 남매였던 프란시스쿠와 야신타는 그 후 2~3년 뒤 스페인에서 유행했던 독감으로 인해 사망했고, 당시 제일 나이가 많았던 루치아는 수녀가 되어 코임브라 수녀원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루치아 앞에 성모의 예언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2005년 2월 13일 9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세 명의 시신은 파티마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현재 루치아는 성인으로 추대되는 심사가 진행 중에 있다. 해마다 성모가 처음으로 발현했던 5월 13일과 마지막으로 발현했던 10월 13일이 되면 엄청난 인파가 파티마의 순례지를 찾고 있다. ▼
신트라 궁전- 신트라궁은 포루투칼 신트라에 있는 궁전이다. 적어도 15세기에서 19세기 후반에 걸쳐 포르투갈 왕가가 계속 살고 있었으며, 포르투갈 내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의 왕궁 중 하나이다. 신트라 문화 경관의 일부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
리스본 광장 ▼
페드루4세 동상 ▼
리스본 대성당 ▼
리스본 트램 ▼
포루투 대성당 ▼
산타엔그라시아 성당▼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