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의 방학은 6월 하순이면 시작된다.
방학을 맞이하여 장성한 자녀들이 집으로 왔다.
애들이 오니 그동안 절간 같던 집안이 갑자기 왁자지껄해 졌다.
돌변이었다.
행복한 번잡함에 시끌벅적했다.
간만에 네 식구가 회동한 날.
기쁜 마음에 술이 빠질 수 없었다.
맛있는 부침개와 두부김치에 막걸리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수다를 떨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만난 다음 날 아침.
조식 후 커피를 마셨다.
모닝커피 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 명이 등산화를 신었다.
말하지 않아도 자동이었다.
모두 등산화를 신고 가벼운 산행을 시작했다.
우리에겐 루틴이었다.
산을 넘어가 우리들이 자주 들르는 한방 오리백숙집으로 향했다.
거기서 다시 맛있는 음식에 소맥을 곁들이며 마음껏 수다를 떨고 싶었다.
오랜만에 오순도순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애들이 크니까 네 명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딸은 곧바로 미국으로 단기연수를 떠날 예정이고 아들은 내주에 국토순례 600킬로 대장정(24일간, 부산에서 임진각까지)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가족이 함께 지내는 3일 간의 시간들.
이것이 얼마나 소중하며 의미심장한 부대낌인가.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인생이다.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건강한 발걸음으로 자신있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뒷모습이 대견하고 미덥다.
이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애들 등 뒤에서 조용히 기도해 주는 것 말고는 없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줄 것이며 이떤 가이드를 할 수 있겠는가.
할 것도 없지만 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전자 보다는 후자에 대한 원칙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청년들의 조력자이자 인생의 선배일 뿐이었다.
바로 이 원칙이 그동안 우리가 견지했던 일관된 태도였고 삶의 패턴이었다.
두 녀석 다 스무 살이 넘었다.
부모가 여전히 관여할 영역이나 부분이 남아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곤란한 상황이 아닐까 싶었다.
내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자녀들을 대할 때에 이런 원칙들이 한번도 어긋나거나 흐트러진 적은 없었다.
각 가정엔 각각의 원칙과 분명한 이정표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겸손과 배려', '헌신과 열정'을 잃지 않는 가슴 뜨거운 청춘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딸은 미국 연수 잘 다녀오고, 아들도 2년 전에 누나가 완주했던 국토순례 600K를 무탈하게 잘 하고 와라"
네 명이 시원한 소맥으로 힘차게 건배했다.
"더 뜨겁고 야무지게 세상과 부대끼거라. 청춘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사랑한다"
2012년 7월 6일.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귀가했다.
부모보다 청년들이 더 바빴다.
두 녀석들이 각자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멀리 떠난 뒤, 더운 여름보다 더 뜨겁고 의미 있는 여름방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자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