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맡은 바 역할이 중요하다
(롬 12 : 3~5)
마지막으로 전체 속에서 내 역할을 알고, 감당하게 됩니다.
미식축구 감독 중에 전설적인 감독이 있습니다.
『빈스롬바들』이라는 감독입니다.
「그린베이」팀의 감독이었는데, 1959년도에 「그린베이」팀의 승률은 10%였습니다.
10번 싸움에, 9번은 지고 한 번을 이기는 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감독이 부임하고 난 뒤에 승률이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60년대 60%, 61, 62, 63년에 NFL에서 우승했습니다. 그 때 승률은 74%였습니다.
이 감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팀이, 어떤 선수가 위대한 선수냐?하면, 이번 게임이 끝나면, 보너스에 연봉에 우승컵에 각종 시상에 관련된 것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선수는 훌륭한 선수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 선수가 어디 있습니까?
미식축구 할 때, 보면 제일 앞에 뛰어오는 선수는 120km으로 엄청난 속도로 뛰어 옵니다.
그 선수를 막아주는 선수가 있고, 그 뒤에 쿼터백이라고 있습니다.
쿼터백은 키가 외소 하더라도 지략이 있어서 제일 앞에 뛰어 오는 선수를 피해 점수를 올리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120km로 뛰어 오는 것을 앞에서 막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그 사람을 피하게 되면, 뒤에 있는 쿼터백은 그 뛰어오는 속도 때문에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돌진하는 선수를 막는 선수가 내가 희생하지 않으면, 내 동료가 다친다는 생각을 하고, 그 사람을 막습니다.
어떨 때에는 달려오는 속도 때문에 뒤로 3-4m정도 날아갈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충격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던져서 다른 선수를 보호하려는 팀플레이 정신이 있을 때 그 팀이 위대한 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선수가 위대한 선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승률 10%의 팀을 2년 만에 승률 74%의 팀으로 만든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번이라도 자기 역할이 뚫리게 되면 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게 주신 은혜와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뻥 뚫려버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자기 은사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은사에는 세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좋아하고,
둘째, 잘하고,
셋째, 옳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경영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런데 좋아하지 않으면, 그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행동을 합니다. 이것 또한 은사가 아닙니다.
반면에, 신창원 같은 사람은 도둑질을 잘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은사가 될 수 없습니다.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는 사람들의 평가까지 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정확하게 은사를 찾는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빨리 내 은사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그 은사대로 섬길 때, 아주 강한 능력으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생각이 변화되고, 생각이 변화가 되면,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고, 전체를 바라보게 되면, 지체의식을 갖게 되어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살아야 할지를 구분하게 됩니다.
로마서 12장 6~8절에 보면, 7가지 은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외에도 은사는 하나님께 구하여 받을 수 있습니다.
6절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은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라고 하였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말씀을 전하는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힘 있고 확실하게 명료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7절을 보면,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라고 하였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영적인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고 보면, 가르치는 은사는 이해시키는 은사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와서 말하면, 재미있고, 어떤 사람이 나와서 말하면,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 하면, 복잡한 것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이런 은사가 없는 사람은, 정말 쉬운 것도 복잡해지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예언의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를 동시에 받아야 합니다.
8절의 말씀은,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격려하는 은사입니다. 바나바와 같이 격려합니다.
이런 사람 옆에 가면, 넘어지지 않고, 새 힘을 얻고 쓰러지지 않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남자 청년이 결혼하고 난 뒤에 말을 잘하고, 행동도 밝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 뒤에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대부분 그 뒤에는 격려해주는 아내가 반드시 있습니다.
허수경이 쓴 ‘미소한잔 눈물 두 스푼’이란 책에 보면, 자신의 남편이 영화감독으로 계속 실패하자, 허수경이 자신의 남편을 집안에서 왕으로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었으나, 나중에는 아내의 지혜를 깨닫고, 왕처럼 행동했다고 합니다.
이 아내의 지혜는 자신의 남편이 왕이 됨으로, 자신 또한 왕비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 남편은 영화에 성공을 하였습니다.
바로 아내의 격려가 남편을 성공으로 이끈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격려하는 여자를 만나야 됩니다.
또, 그 다음에 만나야 할 여자는 밝고, 명랑한 여자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더 성숙한 남편 상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구제하는 것은, 돈의 많고 적음에 개념치 말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라, 그리하면, 흔들어 넘치게 채워주시리라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 비우면, 채워주시는 은혜가 넘칩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이 두 사람이 받은바 능력은 유사했습니다.
차이점은 솔로몬은 “나눔이 없고 회개”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재물이 많아도 뭔가를 나눠줬다는 말이 없습니다.
또 하나 인간은 범죄 합니다. 죄를 짓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회개가 있어도, 솔로몬에게는 회개가 전혀 없습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자리에 가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질서가 잡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리더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정돈된 곳에 가면, 혼탁해집니다. 뒤집어 집니다.
사람은 좋으나 그가 지휘하는 것이 사람들을 어렵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 손에 들어가면, 사람같이 보이지 않는데, 인물로 변화가 됩니다.
아둘람 굴에 있는 다윗과 같은 사람, 그와 함께 했던 사람은 모두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은사가 있는 사람은 리더가 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상대방의 아픔 속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몸부림치는 것 이것도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은사를 주셨습니까?
기쁜 마음으로 받은 은혜를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은사를 다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은사는 항상 보완적입니다.
다 필요에 의해서 서로를 돕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교회마다 은사를 주셨는데,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그냥 멈춰있다면, 큰 일이 벌어집니다.
내가 막아줘야 쿼터백이 팔이 부러지지 않습니다. 내가 감당해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신이 받은 역할을 잘 감당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지체 의식이 살아납니다.
지체의식을 가진 사람은 전체 속에서 자기 역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확하고, 합리적으로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개인적으로 만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온전한 자아실현을 하는 믿음의 신실한 종들 되기를 원합니다.
PS.
이웃을 죽이는 독이
남아프리카에서 어느 선교사가 코브라와 검은 맘마 뱀이 싸우는 광경을 목격했다
코브라가 독이 담긴 이빨로 물자, 맘마 뱀은 금방 축 늘어지면서 죽고 말았다.
코브라는 죽은 맘마 뱀을 서서히 삼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맘마 뱀 안에 있던 코브라 자신의 독이 맘마 뱀을 반쯤 삼켰을 때, 효력을 발생한 것이다.
결국 코브라도 심한 경련을 일으킨 후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이웃을 죽이는 독이 결국 자신을 죽인다는 사실이다.
- 작자 미상의 글 ‘이웃 사랑’에서 -
이웃을 세워 주는 마음은 오히려 자신을 굳게 세워 주는 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경쟁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이웃을 섬기는 겸손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은 이웃을 어떤 마음으로 만나고 있습니까?
독을 품어 넘어뜨려야 할 적입니까.
아니면, 함께 손을 잡고 협력하여야 할 동료입니까?
기쁨을 주는 이웃이 됩시다.
예수님도 자신이 아니라 이웃의 기쁨을 위해 사셨습니다.
이웃을 해치는 것은 결국은 자기를 망하게 하고 죽이는 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