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일만성철용 | 날짜 : 09-04-28 07:15 조회 : 2318 |
| | | 가파도 여행 Photo 에세이
*. 가파도 고만, 말아도 고만
여행은 욕심에 욕심을 낳는다. 제주 모슬포에서 마라도 여행을 떠나면서 모슬포와 마라도 사이에 있는 가파도에도 가보고 싶었다. 생각 같아서는 마라도를 다녀서 오는 길에 가파도에 내려 1박하면서 가파도를 보고 싶었는데 그런 배편은 없다 한다. 모슬포 항에서 마라도 행과 가파도 행은 따로 따로 있었다. 마라도는 왕복 15,500원, 가파도 행은 편도 4,000원을 받았다. 가파도에 가서 가능하다면 선주(船主) 집에 유하면서 섬과 바다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모슬포 부두에서 만난 강 사장은 가파도에서 브루오션이란 민박집을 운영하는 분이어서 함께 가파도로 왔다. 가파도는 모슬포 항에서 5.5km/ 20분 거리였다. 젊어서 제주도에 처음 와서 관광을 하는 중에 가이드가 가파도 마라도의 어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우스갯소리 소개로 해서 가파도와 마라도를 알게 되었다.
- 마라도와 가파도 사람들은 꾼 돈을 '갚아도(가파도) 그만, 말아도(마라도) 그만'이라고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이 두 섬을 이야기 한답니다.
옛날 마라도와 가파도 주민들은 너무나 가난하여 뱃삯도 갚지 못할 정도로 힘들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지만, 두 섬에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후한 인심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은 너무도 험한 파도 속에 묻힌 섬이라서 '오지도, 가지도 마라'야 하는 섬이 가파도 마라도라 해서라 해서, 이 말이 갚아도 고만 말아도 그만으로 변하였다고도 한다. . 뭍에서 가파도를 보려면 모슬포에서 가까운 송악산(松岳山, 104m)에 올라가서 볼 일이다. 거기서 보면 수평선상에 일직선으로 얇게 떠 있는 섬이 가파도다. 그 모양이 덮개 모양이라서 처음에는 개도(盖島). 개파도(盖波島). 가을파지도(加乙波知島), 더위섬, 더푸섬 등으로 불리다가, 이 근처의 바닷길 조류가 배가 난파할 정도로 심하여 더할 '加'(가), 물결 '波'(파) 가파도(加波島)라 불리게 되었자는 섬이다. 섬의 크기는 마라도 보다 2.5배가 넓은(0.84㎡) 가오리 모양의 섬으로 여기에 600여 명이 농사와 어업을 생업으로 하여 살고 있는 조그마한 섬이다. 섬 주변 거의가 암초지대여서 전복, 소라, 해삼, 멍게, 미역, 톳 과 같은 해산물이 풍부한 황금어장이기 때문이다. 농사로는 논은 없고 섬 전체가 밭농사인데 겨울에는 보리, 여름에는 고구마를 재배하는데 이는 여름에 불어오는 태풍을 막아 줄 산이 없기 때문이란다.
*. 가파도 이야기 남제주에 있는 가파도는 조선 중엽까지만 해도 마라도처럼 무인도였다. 그러다가 1842년(조선 헌종8)에 제주 목사가 나라님께 진공(進貢)하기 위하여 가파도에 흑우장(黑牛場)을 설치하고 흑우 50두를 방목하면서부터다. 그런데 영국 군함 1척이 무단 상륙하여 흑우를 잡아 배에 싣고 서해로 떠나 버렸다. 이런 일에 대비하기 위하여 40여 가구를 입주하여 개간하게 한 섬이 가파도다. 가파도에는 남북으로 2개의 선착장이 있지만 간만의 차가 심하고 수심이 낮아 큰 배의 출입이 불편한데다가 거센 기류와 조류가 부딪치는 바람에 이곳을 지나가는 외항선의 난파가 많았던 고장이다. 그중 하멜표류는 우리나라를 서구에 최초로 알린 계기가 되었다.
*. 하멜 표류기 가파도를 걷다가 만나는 이 섬의 소개 중에 ' 네덜란드의 선박이 가파도에 표착(漂着)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라는 푯말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달라서 이 기회에 하멜 표류기의 원문을 이용하여 그 진위를 밝히려 한다. 하멜(Hamel. H)은 네덜란드 사람으로 1653년(효종4) 무역선인 스펠로 호크(Sparrow Hawk)의 서기다. 이 배를 타고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다가 가파도 근해에서 난파되어 64명중 36명이 중상을 입은 체 산방산(山房山, 395m) 연안에 상륙하였다. 다음은 당시에 하멜 표류기를 단편적으로 정리해 본 일부이다.
-그때 당번은 "육지다! 육지! 우리는 육지로부터 총 한 바탕 거리 안에 있다."고 외쳤다. 정박을 시도하고 있을 때 세 겹의 물결이 배안으로 닥쳐 들어와 배가 쪼개지니 선창에 누워있던 사람들은 나올 사이 없이 익사하고, 갑판 우에 있던 몇 사람은 해중으로 뛰어내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물결에 휩쓸려 가버렸다. 육지에 표착(漂着)한 동무는 64인 중 중상 당한 36인이니 그 얼마나 비통했던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오정이 좀 지나서 세 사람을 보았는데 그중 한 사람은 소총을 갖고 그 나머지는 궁시(弓矢)를 가졌다. 그들은 중국인 비스름한 복색을 하였으나 머리에 쓴 것만은 말총으로 짜 만든 모자였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이 중국인의 만종(蠻種)이나 혹은 해적이나 아닐까 하여 매우 염려하였다. 저녁때쯤 되어서는 약 이천 명의 기보병(騎步兵)이 닥쳐와 우리 천막 앞에서 전쟁 준비의 열(列)을 지었다. -하멜 표류기(이병도 역주, 일조각)
-병사를 이끌고 이들을 본즉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해중에 난파 되어 생존자가 36명인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 또한 다르다. 눈은 파랗고 코는 높은데 노랑머리에 짧은 수염을 길렀다. (領兵往視之 卽不知何國人 而船覆海中 生存者 三十六人 語音不通 文字亦異 碧眼高鼻 黃髮短鬚) -효종 실록 권11
이들은 13년 28일 동안이나 우리나라에 억류 되었다가 하멜들 포함한 8명이 탈출 귀국하여 그중 서기였던 하멜이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와 '조선국기'(朝鮮國記)를 썼다. 이 책이 프랑스, 영국, 독일 등 많은 서구의 나라에서 각국어로 번역 간행하였는데 그 중 '조선국기' 를 보면, 한국인을 사기꾼으로 묘사 되는 둥 한국을 비하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얼굴이 뜨거울 정도로 부끄러운 기록도 있다. 서귀포 산방산에 가면 하멜기념비가 있다. 네덜란드와 한국의 우호증진을 위해서 두 나라가 각각 1만 달러씩 출연하여 난파상륙지로 추정되는 산방산 용머리에 하멜기념비를 세웠다. 그 후 그 아래 바닷가에 그 배의 모형을 만들고 그 속에 대형선박기념 전시관을 개관하여 놓았다.
*. 가파도 해안도로 산책 가파도는 제주도의 부속 도서 중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그 섬에 2개의 자연촌락인 북쪽의 상동마을과 남쪽의 하동마을이 있다. 나는 상동 선착장에서 내려 하동마을 브루오션 민박에 여장을 풀고 섬 일주를 나섰다. 해안선은 4.2km로 가장 높은 곳이 20m 언덕이 고작이다. 마라도가 아기자기한 해안 절벽이나 초원, 등대, 종교시설과 전동카트 등 아기자기한 관광지의 경관을 갖고 있는데 비하여, 가파도는 마라도 가는 중간에 있는 섬이라서 관광객들은 마라도를 보고 지나치는 곳이라서 이렇다 볼 만한 경관은 없었다. 그러나 마라도가 상혼으로 닳고 닳아 이해타산이 밝은 상혼이 사는 섬이라면, 가파도에는 순박한 인정이 남아 있는 고향 같은 섬이었다. 가파도는 바다의 나라요, 바다에 갇힌 나라여서 여기서는 시간도 멈추어선 듯 한가하고 고요하다. 섬 내에 은행도 없고 가파도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9명뿐이다. 바다는 섬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이어서 폭풍 같은 비바람은 무엇보다 한없이 두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바닷가에 신당(神堂)을 짓고 풍어와 바닷길의 무사귀한을 빌려 왔다. 그래서 섬에는 금기도 많고 무속신앙으로서의 신당도 많다. 숙소에 짐을 벗어 놓고 카메라만 들고 나서니 거기가 바로 하동 선착장이었다. .'신비한까메기 동산/하동마을 할망당 입구 '라는 이정표가 있어 제방을 향하였다. 파도가 거센 고장이라선지 해안을 높게 방파제로 막아 놓았다.
이 근처는 유어장이라서 스쿠버다이버가 작살로 고기를 잡으려면 15,000원씩을, 바다낚시를 하려면 2,000원씩을 받는 지역이라 써 놓은 입간판도 있었다. 까메기 동산이란 방파제 밖의 해안선 너덜겅지대로 거기가 바다낚시터인 모양인데 그중 둥글고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다. 선사시대 후부터 이 동산에 올라가면 꼭 폭풍이 몰아쳐서 현재까지도 관광객 및 원주민들도 절대로 안 올라간다는 금기(禁忌)의 바위였다. 까매기란 까마귀의 방언인데 여기서는 갈메기의 방언으로 쓰이는가?
-하동 할망당/ 상동 할망당 거기서 얼마 안 간 곳에 할망당으로 오르는 층계가 있다. 아까 상동부두에 닿았을 때 건너편에도 할망당이 있었는데 거기는 본향당으로 큰할망당, 하동마을 것은 작은할망당이라 한다. 하동 할망당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풍어제의 원당으로서 원주민들이 신당(神堂)으로 여기는 곳이다. 상동 선착장 건너편에 있는 할망당에서는 상동마을 원주민들이 1년에 한 번씩 객지로 나간 가족들의 무사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이다. 물론 마을의 안녕과 번영, 고기잡이 나가서의 무사귀환 등을 기원하는 곳이다. 4월은 청보리가 여물어가는 시절이라 그 물결이 바람에 너울거리고 있었고 청보리 축제로 섬을 일주하는 해안도로가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해안에는 파란 바다가 흰 파도로 억겁을 두고 만든 기기괴괴한 모양의 검은 현무암이 제주도 특유의 해안을 이루고 있다. 해안 도로에는 가로수 대신 자연석을 죽 세워 놓은 것이 석로수(石路樹)같았다. 곳곳에 쉬어가라고 멋진 이름을 가진 정자가 해안 경치를 도왔고, 방풍을 위해서인지 돌담을 쌓아 놓은 것이 제주 특유의 경치의 아름다음을 보태고 있었다.
*. 청보리 이야기 과문한 탓인지 청보리란 말을 가파도에 와서 처음 듣는다. 아깝게도 그 '가파도 청보리 제1회 축제'는 내가 오기 열흘 전에 마친 모양이다. 그 때 왔으면 섬 속의 섬 가파도 탐방, 청보리 밭 걷기 전통낚시대회는 물론 뿔소라 구이 및 젓갈 무료시식도 있었다니 그때 왔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 청보리를 가파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자랑하고 있다.
-국토의 최남단의 섬 속에 섬인 가파도에 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오면, 18만 평의 가파도의 보리가 그 푸르름을 자랑한다. 여기서 기르는 보리의 품종은 향맥으로 다른 지역보다 2배 이상 크는 제주도 향토 품종이다.
가파도 사람들은 태풍이 몰려 올 적마다 그 사나운 태풍 속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라 논농사를 못 짓는다. 그래서 겨울에서 싹이 트고 태풍이 오기 전에 수학할 수 있는 보리농사를 짓는다. 그리고 여름에는 고구마 농사를 짓는다. 집터와 도로를 빼면 모두가 농토인 가파도는 평탄한 지형에다가 토양의 풍화도가 높아 그 흙이 비옥하여 가파도 청보리와 가포도 고구마는 전국에 알려진 유명한 이 고장 의 특산물이 되었다. 이 청보리는 모 맥주회사에서 전량 출하하기로 계약 재배하는 것이다. 그 청보리 밭길을 거닐다 보니 갑자기 흥겨워져 휘파람을 분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노래가 귓가에 들려온다 둘러 봐야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
작사자 박화목은 6. 25 때 고향 황해도에서 부산으로 피난해 내려온 실향민이다. 1952년 피란지에서 고생이 오죽하였을까. 거기서 두고 온 고향의 보리밭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에다 윤용하씨가 작곡한 것이 보리밭이란 국민가요다. 그래서 그 노랫말에도 곡에도 한과 외로움이 풍긴다. 가파도에서 저녁 무렵 홀로 낯선 고장 청보리 밭을 거닐다 보니, 갑자기 내가 나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무엇이 남해 절해고도 가파도에 나를 불러 오게 하였는가. 무엇이 나를 가파도의 청보리 밭 사잇길로 거닐게 하였는가. 보리밭 노래를 콧노래로 부르며 그 사잇길을 거닐다 보니 나를 멈추게 하는 것이 있다. 가파도 청보리밭 가운데의 가파도를 살다간 사람들의 돌로 울타리 한 무덤이요, 울타리도 없이 방치된 고인돌 군이었다.
*. 고인돌의 천국 가파도 고인돌이란 말 그대로 돌을 고여 뚜껑을 덮은 선사시대의 묘로 그 속에 시체나 토기 따위를 넣었던 무덤이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납작한 돌을 세우고 그 위를 큰 돌로 덮는 북방식(北方式)과, 땅을 파서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는 남방식(南方式) 둘로 나뉜다. 그런 남방식 고인돌이 확인 된 것만도 56개가 가파도에 있으니 어찌 가파도를 고인도 천국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가파도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올라 갈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
내 생각으로는 첫째는 비옥하고 드넓은 이 평원의 농토요, 그 둘째가 식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하동마을 해안도로 해안에 있는 고망물 옆에선 입간판이 이를 증언해 주고 있다.
-고망물: 가파도에는 제주도의 유인도(추자도, 우도, 비양도, 마라도, 가파도) 중에 유일하게 샘물이 솟아나 예로부터 물 걱정 없는 섬으로 유명하다. 이 고망물은 원주민들의 식수를 해결했던 곳이며, 우측으로 50m 지점 샘물에선 개수 및 빨래터로 사용하기까지 하였다. -가파도의 무덤/ 고인돌 그런데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파도 주민들은 부모나 조부모 묘소는 돌로 바람을 막고 주위에 무꽃을 심으며 지극 정성으로 가꾸면서도, 가파도의 자랑을 넘어서 선사시대 인류 역사의 유물로 기리 보존해야 하는 세계적인 보물 고인돌은 안타깝게도 방치되어 있다.
*. 가파도의 인정들 오늘 점심은 마라도에서 그 유명하다는 해물짜장으로 간단히 요기하고 가파도에 와서 섬을 한 바퀴 두루 둘러보다 보니 시장기가 감도는데 발길을 부여잡는 그림 같은 음식점이 있다. 상동 선착장 바로 앞에 있는 '가파도 바다별장'이다. 유할 수 있는 방가로가 있고, 바다낚시 미끼도 팔고 , 50만원이면 15일 동안 숙식과 낚시를 겸할 수 있다는 것이 낚시꾼인 나를 유혹한다. 건물도 그렇지만 그 상호 자체가 하나의 시적이더니 그 팸플릿의 글귀마다 소개가 마디마디 하나의 시다. 인생은.................... 쉼이다. 가끔은 지금 그 집에 앉아 쉬며 온 길을 돌아 볼 일이다. 나도 몸으로 쓰는 시인이라 하였더니, 1만원어치 술이 먹고 싶어 ilman이라 하는 사람이라 했더니, 너무 단단해서 씹히지 않는 싱싱한 소라 회가 푸짐하다. 제주 소주에다 푸짐한 양념과 넉넉한 인심에 취하여 깊은 밤 어둠을 밟고 숙소로 돌아오다 보니 술값을 내지 않았다. '갚아도 고만, 말아도 고만인 섬'이라서인가. 다시 되돌아가 나도 가파도가 되었다.
여행은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는 것 마라도에서는 마라도가 되고 가파도에서는 가파도가 되더니 가파도에선 잃어버린 인심을 찾았습니다. 그냥이면 마라도만일 것을 가파도가 된 까닭입니다.
다시 또 올 수 없는 나이가 두려워 내일도 모래도 한라산을 탐하다가 다시 또 어느 주막에 앉아 오늘의 아름다움을 뒤돌아 보는 일만이 될 것입니다. -만남 |
| 임병식 | 09-04-28 17:24 | | 일만선생님의 국토기행 열정은 김정호선생도 울고갈 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라도 ,가파도 까지 가셨으니 이제 이어도와 중국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진도 조도만 가시면 남쪽과 서쪽은 끝은 다 가지 않는가 싶습니다. | |
| | 박영자 | 09-05-01 00:56 | | 일만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집에 가만히 앉아서 가파도 마라도를 잘 구경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라 자세히 읽었습니다. 마치 다녀온 듯 풍경들이 실감나네요. 선생님의 여행에 대한 열정과 건강이 부럽습니다. 세세한 기행문작성이 쉽지 않으실텐데 우리같은 사람에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 |
| | 최복희 | 09-05-02 09:59 | | 일만 선생님! 덕분에 처음 들어보는 섬 구경 잘 했습니다. 여전히 보헤미안처럼 유유자적 여행으로 아름다운 여생을 보내시는 모습 멋지십니다. 오래오래 여행기 읽게 해 주십시오. | |
| | 임재문 | 09-05-02 22:53 | | 일만 성철용 선생님 이 한 편을 쓰시기 위해 사진기를 들고 포즈를 잡고 또 이 한 편을 쓰시기 위해 자료를 뒤지고, 참으로 땀의 결정체가 한 편의 글로 승화된 느낌을 받습니다. 역사적이 사실까지 고증하려면 자료가 많이 필요 할거거든요. 그 땀의 결정체 만큼이나 잘 읽고 갑니다.앞으로 두고 두고 유익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많이 낳아서 걸어다닐 정도가 되었답니다. 염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 |
| | 일만성철용 | 09-05-04 10:33 | | 임 회장님. 쾌차하셨다니 불행중 참으로 다행입니다. 역경은 극복하는 사람에게 극복되는 것이고, 그런 아픔은 또 다른 불행을 막게 하여주는 게기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주도는 그 몇 편의 글을 쓰기 위해 거금을 투자도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아름다운 행복을 갖게 하였습니다. | |
| | 정진철 | 09-05-10 10:04 | | 저는 아직 마라도도 가파도도 가보지 못했는데 일만 선생님의 글을 접하고 귀중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여건이 허락하는대로 이자료를 복사해가지고 한번 다녀오려고 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