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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머릿속 좌뇌의 이야기~ !
당신의 기억은 사실이 아니다. 당신이 그랬다고 '생각하는' 고도로 왜곡되고 편향된 이미지일 뿐이다.
내 머릿속 기억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닐수도 있음을 반드시 유념하라!
'이게 사실이야' 라는 확신을 갖고 덤벼들지 마라.
한 마디로 기억이란 단순히 더 많은 생각들의 집합 일 뿐. 모든 것을 범주화, 관념화, 사물화, 양극화 하여 정보를 처리하는 우리의 머릿속 좌뇌.
우리의 좌뇌는 개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원래 있지도 않은 생각을 기억해 내기도 한다. 우리의 기억은 실제의 반영이 아닌, 좌뇌의 해석이다.
이 책은.. 늘~ 복잡한 반복패턴을 찾으려는 멍청한(?) 노력을 하는 좌뇌로 인해, 우리가 확신하는 모든 것이 정말..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지속적으로 일깨워준다.
기존에 읽었던 올리버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최인철 교수님의 '프래임' .. 기타 등등.. 여러 심리학 책 속에서 중복되어 나온 내용들..
우리가 어떤 사실이나 사물을 볼때, 개개인 특유의 해석의 틀로 세상을 보고, 때론, 이치에 맞지 않는 일들도 머릿속에서 나에게 합리화 시켜 이치에 맞는 이야기를 꾸미는 내용들에 대한 이유를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끈기있게 밝힌 책이 바로.. 이 책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마터면 깨달을 뻔/ 크리스 나이바우어
정신세계사 2017.10.20.
* 좌뇌 본연의 기능은 '분별하기'와 '판단하기'이다. 판단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 이야기에 너무 심각하게 받아 들일 필요는 없다. 좌뇌라는 해석기가 주인이 되어 만들어 내는 이갸이일 뿐이다.
*자기계발서의 코너는 서점마다 있다. 그 코너의 이름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좌뇌 해석기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즉 그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강화시켜 주는 책들> 코너로.
* "반드시 잘 해 내야 해" 라고, 생각하는 대신 " 잘 해내고 싶어" 라고 생각하라. 해석이 가벼울 수록 그로부터 야기되는 부정적 감정도 약해진다.=> 인지요법의 창시자 중 하나인 엘버트 엘리스
*아포페니아(Apophenia)라는 용어는 정신병리학자 클라우스 콘라드에 의해 50년 대에 처음 사용된 말이다. 이것은 무작위적인 것들 중에서 어떤 패턴을 보게 되는 경험을 뜻한다.==> 좌뇌 해석기의 주요 기능!
신경심리학자 피터 부루가 수행한 실험에서는 피험자의 도파민(좌뇌가 아주 좋앙하는 신경화학 물질) 수치가 높을 수록 패턴을 찾아내려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결과과 나오기도 했다.
*좌뇌의 해석하려는 노력을 깊이 들어가서 살펴 보고 싶다면, 마이클 바흐 교수의 홈페이지를 참고 하면 좋겠다. 이 사이트는 좌뇌 해석기를 위한 수많은 놀이기구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실제가 아닌 해석하는 마음의 영향을 받는다.
www.michaelbach.de/ot/index.html
*신경과학자들은 전두엽이 전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총괄자라고 본다. 미래를 내다보고 우리의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바로 뇌의 이 영역이라는 뜻이다. 측두엽을 '무엇' 시스템이라고 부른다면, 전두엽은 '만약~ 라면?' 시스템이라 부를 수 있다.
* 사회심리학에 의하면, 매력적으로 보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관계에 대한 관심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 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면, 그들은 당신을 외면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을 수록, 당신은 오히려 눈에 띄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당신이 세상을 볼 때, 실제로 당신은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의 에고를 창조하고 있는 당신 안의 그 '패턴 인식 메커니즘이' 타인들 안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그의 에고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충분히 오랫동안 외부에 관심을 두었다면, 결국 당신은 내부로 관심을 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장 : 자기계발의 역설
"둘째, 마음 주위의 빈 공간을 알아차리라. 이것은 생각의 내용에 동일시되어 매몰되지 말고 생각 자체를 지켜보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머릿속의 목소리가 되지 말고 목소리를 주시하는 자가 되라는 뜻이다." (5%)
"예컨대 당신은 전화 통화를 할 때, 상대방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그가 무례하게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혹은 길게 줄을 서고 있는 중에, '내 앞에서 새치기만 해봐!'하면서 자신이 오히려 그런 상황을 바라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7%)
"자신을 개선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말고는 없다. 애초에 에고라는 것이 망상에 불과하다면 그 망상을 개선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7%)
"얼마 전 크리스마스를 지나보내면서 사람들은 물질주의가 어떤 식으로 우리를 괴롭게 하는지에 대해 실컷 떠들어댔다. 하지만 그런 관잠은 문제의 핵심을 한참 비켜나 있다. 왜냐하면 앨런 와츠가 여러 번 언급했듯이, 진정한 물질주의자라면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소위 '물질'이라는 걸 진정으로 만끽하고 있을 텐데, 그런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단지 물질에 관한 우리의 '견해'들에 매몰되어 헤매고 있을 뿐이다." (7%)
"마찬가지로 우리는 '나에 대한 생각'과 '나'를 구분하지 못한다." (7%)
"'불안하다'라는 생각의 배후에는 '아, 정말 난 불안해하고 싶지 않아'라는 생각이 있다." (9%)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는 길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이다." (9%)
"우리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생각과 감정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가장 큰 증거이다." (9%)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생각은 죄가 없고, 문제는 생각과 현실을 혼동한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 사실을 자각한 누군가는 소위 '깨달음'의 추구를 중단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이 추구해온, 책에서 읽고 또 읽어온 그것이 사실은 그저 깨달음에 대한 하나의 '견해'일 수 있기 때문이다." (9%)
"내가 과학적 실험결과들을 인용하는 것은 내 주장이 옳다는 것을 강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직접적인 경험으로서 알게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10%)
2장 : 좌뇌라는 해석장치
좌뇌가 마치 현실에 대한 일종의 해설가이자 해석기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11%)
좌뇌는 자신이 이용 가능한 모든 증거를 토대로 아주 손쉽게 이치에 맞고 그럴싸한 설명을 전개하지만, 사실이 아닌 설명을 하더라는 것이다. (11%)
이후 30여 년간의 다른 연구들에서도 거듭 밝혀졌듯이, 정상인의 경우에도 좌뇌는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만들어내는 데 아주 특출난 능력을 발휘한다. (11%)
그러자 피험자는 행복한 연기를 하는 사람과 함께 했을 때는 본인이 흥분한 이유가 행복해서라고 믿었고, 화난 연기를 하는 사람과 함께했을 때는 본인이 흥분한 이유가 화가 나서라고 믿었따. 역시나 좌뇌는 가용한 정보를 검토하고는 그 한계 내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그럴싸한 해석을 '창조'하고 있었다. (11%)
결국 '매력적이다'라는 느낌도 단지 좌뇌의 또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더라는 말이다. 우리는 심장이 더 빨리 뛸수록, 땀이 더 많이 날수록 자신이 열정에 사로잡혔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12%)
신체적 흥분이 일어나면 좌뇌라는 해석기는 자동적으로 외부상황을 탐색한다. 그리고 긁어모을 수 있는 모든 증거를 토대로 이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 '최대한 말이 되는' 어떤 추론을 내놓는다. 모든 종류의 감정이 바로 이와 같은 작용에 의해 생겨난다 (12%)
많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그저 '해석기'로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이 해석기가 되어 있는 동안은 마음이 주인 노릇을 한다. 그들은 화가 나든, 짜증이 나든, 성적으로 흥분하든, 신이 나든, 두려움에 떨든 간에 자신의 생각과 경험이 과연 그런 식으로밖에는 될 수 없는가에 대해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13%)
좌뇌라는 해석기는 항상 커져 있다. 그것을 끌 수는 없지만, 그 존재가 한 번만이라도 알아차려지면 그 때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13%)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석기의 존재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단지 가설일 뿐인 자신의 생각을 실제 현실로 착각한다. (13%)
가자니가 박사는 이 해석기가 생쥐조차 이해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상황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질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3%)
"우리의 우뇌는 좀더 생쥐에 가깝게 행동한다. 우뇌는 굳이 현실을 해석함으로써 거기에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우뇌는 오직 현재라는 순간에서만 살아간다. 이에 반해 좌뇌는 '왜?'라는 질문과 함께 전체를 파악하려 시도하고, 그로써 늘 어떤 멍청한 '이론'을 만들어낸다.' (13%)
당신이 무슨 수를 써도 이 해석기의 활동 자체를 멈추거나 약화시킬 순 없음을 명심하라. (14%)
해석기를 관찰하기 시작하면 거기에 '분별하기'와 '판단하기'가 있음을 곧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좌뇌 본연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판단이란 것은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당신이 해석기를 예의주시하면 더 이상 좌뇌의 판단 기능은 주인공이 아니게 되고, 그로써 점차 '이야기'는 뒤로 물러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흠, 내 해석기가 또다시 작동하고 있군. 늘 그래왔듯이 사람들을 판단하고, 상황을 분석하고,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군.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말이야.' (14%)
"전기傳記는 일종의 소설이고 자서전은 끔찍한 허풍이다. 그리고 '자아(self))'는, 뇌가 허풍으로 지어낸 소설이다." (14%)
곧 당신은 "세상이 원래 그렇다니까"라는 말 대신 "그냥 내 생각인데" 혹은 "내가 보기에는"이라고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당신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거면 됐다. 이 사소한 차이는 우리의 삶의 질과 인간관계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다. (14%)
이 해석기는 일관성 있는 것을 선호하고 애매한 상황을 참지 못한다. 옳은 것과 틀린 것이 분명히 나뉘어야 하고, 질서정연한 동시에 예측 가능해야 한다. 반면 역설(paradox)은 이 해석기를 버버되게 만들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해석기에 깊이 흘린 사람들을 흔들어 깨울 때 흔히 사용된다. 바꿔 말하면, 해석기와의 동일시가 상대적으로 덜한 사람들은 역설을 한결 쉽게 받아들인다. (14%)
언어적 정보부터 사물의 공간적 지각까지, 좌뇌가 하는 모든 작업은 본질적으로 '분별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좌뇌는 늘 대립성 법칙에 기반하여 작용할 수밖에 없다. 분별하는 행위가 곧 반대극을 창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15%)
바로 범주(category)라는 것이 오직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며, 그것을 인식하려 할 때만 활성화된다는 사실이다. 범주화란 몇 가기 것들을 골라서 그것들을 하나의 무언가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그 무언가와 다르며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15%)
범주란 일종의 정신적 표상, 즉 컴퓨터로 치면 '바로가기(shortcut)'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아주 독특한 표상이엉서 바깥세상 어디서도 실제 모습을 찾을 수 없고 단지 마음 속에만 존재한다. (15%)
내가 교수로 있는 대학에 당신이 나타나서 '대학'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자. 내가 당신에게 이 건물, 저 건물을 구경시켜주자 당신은 실망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이 건물도 구경했고 저 건물도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은 어디 있냐고요." 그러면 나는 내 머리를 가리키며 요 안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지 개념으로만 존재할 뿐이어서 누구와 얘기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심지어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게 돼버린다. (15%)
사실 그런 범주들이 마음 밖에 진짜로 실재한다고 - 지도가 곧 실제 땅이라고 - 확신시키는 것이 바로 좌뇌 해석기의 주 업무이다. (15%)
해석기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흑 아니면 백으로 나뉠 뿐만 아니라, 흥미롭게도, 우리는 이런 이분법을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고려하지 않게 된다. (15%)
좌뇌는 세상을 대립하는 두 쪽으로 쪼개서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만 주의를 제한한다. (16%)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 음, 그렇다면 '분별적이지 않게끔' 생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이 진짜 이상한 이유는, 분별하는 것이 그 기능인 해석기가 스스로 '어떻게 하면 내가 나이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묻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기는 자기 자신조차 분별의 대상으로 삼는 에고적 자아를 창조해낸다. 좌뇌는 좌뇌와 우뇌를 가르고 나와 나 아닌 것들을 가를 뿐만 아니라, 에고적 마음 안에도 무수한 분열을 일으켜서 '내적 갈등'이란 관념이 생겨나게 한다. (16%)
분열이 계속되면서 해석기는 자기 자신조차 '나는 이러이러하다.'와 '나는 저렇게 되고 싶다'의 둘로 쪼개버렸고, 이것이 바로 자기 계발이라는 게임의 뿌리가 되었다. 분열이 그 본성이기에 에고는 애초부터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고, 심지어 '나'의 안에서조차 분리가 진행된다. 우리가 분열된 자아감을 갖는 이유는 자아의 창조가 분열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16%)
에고는 자기 자신조차 분열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16%)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범주화에 의한 양극이자 정신적 표상임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한꺼번에 전체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통찰을 갖게 된다. 당신 스스로 경험해보라. 대립하는 양극이 사실은 에고의 분열적 본성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임을 알아차리라. 어떤가, 흑과 백은 정말로 둘인가? (16%)
해석기를 초월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분별적이지 않게끔 생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질문할 일이 아니라 그런 질문을 던지는 해석기를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17%)
생각이란 것 자체가 분별에 의존하고, 이것을 우회할 방법은 세상에 없다. (17%)
해석기가 패턴을 인식하고, 이론을 만들어내고, 믿음을 견지하는 것은 일종의 반사적인 행위이므로 그걸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가진 대표적인 망상 중 하나이다. (17%)
심리학 실험에서 피험자들을 실험군과 대조군으로 나누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인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믿는 바를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당연한 과학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18%)
믿음을 통제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그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먄약 당신이 스스로 백만장자라고 정말로 믿을 수 있다면 내가 백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치자. 가능하겠는가? 당신이 현재 나이보다 열 살 더 먹었다고 당장 믿을 수 있겠는가? 좋아하는 음식 한 가지를 떠올리고 당신이 그걸 너무나 싫어한다고 믿어보라. 이렇듯 어떠한 노력을 해도 당신은 믿음을 바꾸기 어려운데, 그건 바로 당신이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18%)
본래 하나인 것을 이렇듯 철저하게 분열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해석기뿐이다. 그것이 해석기의 존재 이유다. (18%)
분열은 해석기의 타고난 본성으로서 그 자신까지도 분열시키지만, 실제로 나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 모든 것은 '분열이라는 생각'일 뿐이다. (20%)
믿음이나 해석이 곧 우리 자신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통제자가 될 필요도 통제를 받을 필요도 없어진다. 그냥 지금 이 순간에 하나의 생각이 있을 뿐이다. (20%)
하지만 반대로 믿음이나 에고적 생각들이 애초부터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커다란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그것들이 진짜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20%)
에고적 망상에 빠진다는 것은, 통제권이 나에게 있으므로 나의 기호를 내 입맛대로 바꿀 수 있다고 여긴다는 의미이다. (21%)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신념 그 자체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 (21%)
해석이 가벼울수록 그로부터 야기되는 부정적 감정도 약해진다. (23%)
해석을 바꿈으로써 당신은 세상에 대한 당신의 감정과 반응을 바꿀 수 있다. (23%)
그렇게 해석기를 지켜봄으로써 우리는 판단이 멈춰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이제 우리가 판단체계의 안이 아니라 밖에서 그것을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더 이상 그것이 아니다. 감정적인 반응의 전원이 뽑혀버렸다 당신이 해석기가 아니라 다만 그것에 연결된 깨어 있는 의식이라는 자각은 신념들로부터 '심각함'을 쏙 빼버린다. (23%)
'이 녀석도 나처럼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니 기쁘군.' 이것은 가장 얕은 수준의 공감이다. 이것은 단지 특정한 관점과 이야기를 강화시키고 그와 관련된 감정을 증폭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23%)
좀더 깊은 수준의 공감은, 이걸 '자비'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상대방이 그의 해석기가 지어내는 이야기에 정신 못 차리고 빠져 있음을 온전히 깨어 있는 상태로 지켜보는 것이다. (23%)
하지만 곧 종말이 올 거라고 믿는 사람이 한 명 더 는다고 해서 진짜 종말이 오는 게 아니듯이, 당신의 해석이 한 번 맞았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단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24%)
'a'라는 글자가 실재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당신 앞에 끼어든 사람을 바보 멍청이라고 믿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해석을 오직 인식행위로서만 존재한다. (24%)
패턴과 해석은 언제나 그 행위 주체의 마음속에 있다. 내가 이 점을 좀더 명확히 하려는 이유는, 이것이야말로 에고라는 망상이 배후에서 진행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24%)
당신은 에고의 패턴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냥 그렇게 바라보는 해석이 있었을 뿐임을 알게 된다. (24%)
현실의 백색소음 위에 덧씌워진 '에고적 해석'이 있을 뿐, '에고'라는 것은 애초부터 실체가 없었던 것이다. (25%)
하지만 관찰자가 없으면 에고도 존재하지 않는다. 패턴을 자각하는 것은 바로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신은 셀 수 없이 많은 선생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에고를 초월할 수 있는지 귀가 닮도로 들어오면서, 역설적이게도 그들이야말로 가장 큰 에고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그 선생들을 비롯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한 '에고적 패턴'은 다름 아닌 당신 자신 - 혹은 당신의 패턴 인식기(해석기)가 만들어낸 것 - 이다. 다만 그 손가락이 안이 아니라 밖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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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뇌라는 해석기가 만들어내는 패턴이나 해석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망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끊임없이 작동하는 좌뇌의 해석기의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바로 이 해석기를 '지켜 봄'으로부터 가능하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에고적인 망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알아차림'이라는 명상툴이 큰 도움이 된다는 의미가 된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명상하는 사람들은 '알아차림 명상'을 한다.
아마도 해석기가 만들어 내는 패턴과 해석을 지켜본다는 의미는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린다는 의미와 대동소이할 것이다.
3장 : 에고적 마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 진화심리 관점에서 에고는 생존을 높이기 위해서 발달해 왔다
외부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패턴을 파악하는 경향은 여러모로 생존에 이로웠겠지만, 그리하여 어느 시점에선가 '에고'가 탄생하게 되었다. (28%)
이렇듯 에고가 가진 속성들 - 피해망상, 적과 친구의 분별, 지금 이 순간과의 지속적인 불화 - 은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진화는 행복이 아니라 성공을 지향한다"는 진화심리학자들의 말로서 이 모든 것이 명쾌하게 설명된다. (28%)
자아라는 관념이 등장하고 나면, 그는 세상을 잘게 나누고 잘라내서 인식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나'가 됨으로써 그 외의 것들은 '나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일단 분별이 시작되면 양극 간의 긴장이 발생하여 대립성 법칙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29%)
최초의 생존 전략들은 아마도 도망가기, 꼼짝 않기, 공격하기 등의 기본적 반사행동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보다 훨씬 더 생존에 유리했던 두 번째 전략은 바로 '에고적 자아'를 인식하는 인지적 오류였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뇌가 개체성이라는 심상에 집착하는 것쯤 뭐가 대수랴. (29%)
4장 : 투명한 해석기
실재에 대한 해석이 단지 해석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해석기의 역할이다. (29%)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깨달은 자가 되려 한다면 우선 던져봐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 만약 당신의 패턴 인식기의 전원을 뽑아버릴 수 있다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30%)
감도가 높아지면 당신은 모든 것에서 패턴을 보게 된다. 이것은 불안, 걱정, 강박장애, 건강염려증, 피해망상 등의 뿌리가 된다. (30%)
패턴 인식기의 감도가 낮아지면 어떻게 될까? 이때는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30%)
에고라는 환상의 재미있는 점은, 그것이 위협을 받을 때 또는 그것이 환상일 뿐임이 드러날 처지가 됐을 때 대립성 법칙에 따라 패턴 인식기의 힘이 급격하게 강화된다는 것이다. (30%)
즉 자신의 패턴(에고)이 죽음을 맞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되면,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패턴 인식기의 감도가 올라간다는 뜻이다. (31%)
우리가 자아를 내려놓으려 애쓸수록 우리 안에 내려놓을 더 많은 자아가 발견되는 상황이 아직도 의아하고 이해가 안 가는가? 대립성 법칙은 일종의 내재된 방어기제이다. 그럼으로써 거기에 해석적인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31%)
패턴들이 관념이 아니라 실제 현실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패턴 인식기의 편집증적 특질이므로, 자아라는 것이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수록 역으로 자아의 실재성을 더욱더 확신하려 드는 것이다. 이처럼 대립성의 법칙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가장 근접한 지점이 동시에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이기도 하다. (31%)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발작적인 불안은 실은 해석적인 마음이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취하는 보상기제라고 볼 수 있다. (31%)
앨런 와츠는 이 점을 언급하면서 '영적인 우월감'(spiritual one-upmanship)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것은 에고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에고를 취하는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교묘함에도 불구하고 에고는 여전히 똑같은 에고일 뿐이다. '뛰어넘었다'는 것 자체가 결국 또 다른 분별이지 않은가? (32%)
알다시피, 하나의 두개골 안에 두 개 이상의 패턴이 공존하면 우리는 그것을 정신병으로 여긴다. 예전에는 그것을 '다중인격장애'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주로 '해리성정체장애'라고 부른다. 이것은 서로 분리된 여러 패턴들이 하나의 두개골 안에 공존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런 진단이 비판받는 이유는, 같은 환자를 두고 그 안에 몇 개의 패턴이 존재하는지를 따질 때 의사마다 결론이 전부 다르다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서든 남에게서든 어떤 패턴을 발견할 때 우리 자신의 패턴 인식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치료사들은 그들이 각자 자신의 '단일한' 패턴 인식기 - 이 하나의 인식기가 만화를 그리듯 현실을 추상화, 범주화하여 요약하고 대리하는 작업을 전부 해내고 있다 - 로서 환자를 대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32%)
내부의 현실이 외부의 현실로 투사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패턴 인식기가 내부를 향하거나(에고를 본다), 외부를 향하거나(다른 사람의 패턴을 보고 그것을 그의 '성격'이라 부른다.) 할 뿐이다. (33%)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확고한 무엇으로 착각한다. 그것은 하나의 관념, 즉 패턴 인식기에 의해 인식된 하나의 패턴일 뿐이다. (34%)
여기서 재차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진짜 사과랑 사과 그림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한쪽은 진짜 사과이고, 사과 그림은 단지 그림이잖아요." 하지만 패턴 인식기의 심상을 벗어나면 거기에는 이름 붙여질 수 없고, 생각되어질 수 없고, 분별되어질 수 없고, 오로지 영원히 지속될 뿐인 하나의 실재만이 있다. 앨런 와츠의 말마따나 "당신이 바로 그것이다." (34%)
다시 말하지만, 투명한 해석기의 존재를 망각하고는 그것이 만들어낸 관념, 해석, 정의, 이름을 실재하는 것으로 다시 믿기 시작한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은 원래 그렇게 작동하도록 되어 있다. (34%)
왜 패턴 인식기는 투명할까? 패턴 인식기는 결코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면 그것 자체는 패턴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집 짓는 자가 집이 아닌 것과 같다. (34%)
내가 세상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예술가의 감각과 비슷하다고 말한 이유는, 그것이 갖는 독특함이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보다는 동사의 속성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35%)
핵심은 이것이다. - 우리는 서로 동일한 인식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각자의 해석적 마음이 독특한 과거사를 갖고 있기에 우리는 다중의 인식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똑같은 사과를 보고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린다. 그럼에도 이 사실이 철저히 간과되는 이유는 색깔, 단어, 방향처럼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한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의실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거기에 학생들의 수만큼의 서로 다른 해석기가 저마다 독특한 인식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35%)
그동안 우리는 세상은 명사로 불리는 단단한 사물로 채워져 있다고 단정하며 지내왔다. 하지만 우리의 머릿속에는 오직 동사만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가처럼 창의적이다. 우리의 머리속에는 '저 밖 현실에 진짜로 있는 명사들'인 척하는 동사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뇌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이다. 뇌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인지하는 기관이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과 역동적 과정들을 어떤 고정된 것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망상을 창조하는 장치에 가깝다. 바꿔 말하면, 좌뇌는 세상을 '명사화'한다. 그리고 물론, 바로 그 작업을 자기 자신에게도 한다. (35%)
당신은 절대 죽을 수 없다. 왜냐면 당신이라고 하는 에고의 패턴은 애초부터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35%)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당신'은 오직 인식행위 안에서만 존재한다. (35%)
비록 패턴 인식기가 투명하긴 하지만, 종종 그것이 감도가 약해지거나 아예 꺼져버릴 때는 순수한 의식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35%)
해석하는 마음은 다른 것들은 다 이해하지만 "도대체 왜?"라는 질문에는 절대로 답하지 못한다. 우리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패턴 인식기는 패턴을 초월할 수 없고, 당신은 당신의 에고를 초월할 수 없다. '당신'이 창조되는 자리가 바로 그것의 눈(eye) 안에 있기 때문이다. (36%)
5장 : 신화, 시간을 초월하는 거대한 패턴
돈은 지도를 실제 지역으로 착각하는 오류의 가장 명확한 예이다. 물질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거라는 가치체계는 오히려 불행한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아직 더 필요해"라는 욕구, 그리고 온갖 화려한 것들이 허상이 아니라 진짜라고 믿는 투명한 해석기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37%)
자기계발이 필요하다는 에고의 생각과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물질적 욕구의 배후에는 똑같은 해석기가 있다. 그것은 언제나 그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자 한다. 더 많은 돈, 더 나은 나... 이 둘은 좌뇌의 끝없는 게임일 뿐이다. 더 많은 것을 원할수록 더 적은 것만을 얻게 된다. 반대로 부족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주어진다. (37%)
행복의 느낌은 물질이 아니라 인간관계나 경험처럼 시간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가치판단에 달려 있다. 즉 '대상'이 아니라 '과정'이 관건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인식 속에는 원래 동사(과정)밖에 없기 때문이다. (37%)
문명화가 진행돼온 지난 만 년 동안에도, 기본적 자원의 분배가 불확실했던 시기마다 더 많은 것에 대한 욕구가 생존율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의 행복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왜냐면 그것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37%)
어째서 숱한 부자들과 유명인들이 마약 같은 것에 빠지는 걸까? 간략히 답하자면, 그들은 '더 많이'는 언제나 '더 적게'로 귀결된다는 숨은 공식(대립성 법칙)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에고적 마음에 모든 것을 갖다 바친 사람들은 자신의 패턴 인식기를 잠재우려 할 때도 그만큼의 극약처방을 써야만 한다. (37%)
융은 이야기꾼, 즉 해석기가 선호하는 일종의 틀을 발견했다. 이는 '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38%)
평화는 분쟁을 부르고 분쟁은 평화를 부르기에, 대립성 법칙은 말뜻 그대로 끝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성배의 신화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것 -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 - 을 원하는 또 다른 형태의 에고일 뿐이다. (38%)
"아직 더 필요해"라는 욕구와 불만족은 해석기의 눈(eye) 안에만 존재한다. (39%)
당신은 패턴 인식기와의 과도한 동일시를 벗어나는 평화를 누릴 준비가 되었는가? 당신이 "아니요"라고 답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잘못된 것은 없다. 하지만 당신이 편안한 소파에 앉아서도 평화로울 수 없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겠는가? 인류는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오히려 불행해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유일한 종이다. 평화는 해석기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패턴들이 정말로 저 밖에 실재한다는 믿음부터 넘어서야 한다. (39%)
사실 패턴 인식기는 주인으로서는 별로지만 하인으로서는 굉장히 유용하다. 그러니 에고적 마음의 인지기능을 제거하려고 애쓸 이유가 전혀 없다. 도덕경은 이 점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경전인데 그중에서도 첫 부분의 다음 구절이 특히 인상적이다. "우주의 비밀을 보려거든 에고를 없애라 하지만 그 나타남, 현현을 보려거든 에고를 간직하라." (40%)
시간을 초월하여 전개되는 이 패턴들을 본다고 해서 잘못된 건 없다. 단, 이 패턴들이 오직 에고로서만, 창의적 인식행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다면 말이다. (40%)
6장 : 실재와의 접점을 유지하기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조현병 환자를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현실과의 접점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40%)
정상적인 조건에서 누군가 탁자 위의 컵에 손을 뻗어 집으려 한다면, 그는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동시에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엄연히 서로 독립된 시스템이다. 측두엽이 손상된 환자는 뭔가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반면 두정엽이 손상된 환자는 그게 '무엇'인지는 아는데 그게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41%)
에고는 근본적, 구조적으로 '어떻게' 시스템을 자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그걸 원한다고 해도 말이다. 오히려 그걸 원하면 원할수록 더욱 불가능해진다. (43%)
태극권이나 기공처럼 움직임이 있는 명상법을 살펴보자. 제대로 된 수행자는 공간 안에서 충분히 의식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거기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않고서 말이다. 이런 명상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헤엄치는 용 자세'를 그 이름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제대로 해내는 것과 '나는 지금 헤엄치는 용 자세를 하고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것의 차이를 명확하게 안다. (43%)
명상의 가장 간단하고 가장 흔한 방식은 숨을 그냥 따라가는 것이다. 이 '어떻게' 시스템에 집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것이 무의식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험자들은 이것이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실은 너무나 명료한 의식 상태라고 표현한다. (43%)
심리학자 미하이 칙세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는 '어떻게' 시스템을 '몰입(flow)'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뭔가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에서 맛볼 수 있는 경험을 기술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해왔다. 그는 '몰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다른 어떤 목적도 없고 오직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행위에 완벽하게 몰두하는 것. 에고는 떨어져 나가고,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낱낱의 움직임, 행위, 생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최적의 순간에 일어난다. 이것은 마치 재즈 연주를 하는 것과 같다. 당신의 온 존재가 여기에 참여하고, 당신의 능력은 극한까지 발휘된다." (43%)
'어떻게' 시스템이 실제로 '무엇' 시스템보다 현실에 훨씬 근접해 있는 의식이라는 점을 깊이 생각해보라. 그것 자체가 하나의 연습이다. 해석하는 마음으로부터 잠시라도 떨어져 나올 때, 당신은 당신 생각 속의 현실이 아니라 진짜 현실을 좀더 느낄 수 있다. 날마다 '어떻게' 시스템을 연습해 보는 것은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고, 숙련될 때까지 노력해야 할 무엇도 아니다. 왜냐면 당연하게도 그런 이름표들은 오직 '무엇' 시스템에게만 유효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44%)
의식을 '어떻게' 시스템에다 두는 것이다. (44%)
'무엇' 시스템은 그 자신을 넘어서려 할수록 더욱 그 자신 속으로 빠져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 '어떻게' 시스템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44%)
이 커크 함장과 같은 사람들은 진정으로 전사의 마음을 갖추고 있다. 그들은 전혀 '재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45%)
'어떻게' 시스템 속에는 '애를 쓴다'거나 '노력한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노력을 통해 커크 함장이 될 수 없다. 그냥 커크 선자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45%)
대립성의 법칙을 따르는 좌뇌는 '어떻게' 시스템의 영원성을 절대로 경험하지 못한다. 왜냐면 순식간에 실재가 실재가 아닌 것이 되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45%)
이 연습은 무엇이 실재인가를 돌아보게 해준다. 내가 신경 쓴 것은 주차증을 사는 데 든 50달러였는가, 아니면 나의 해석하는 마음에 의해 인식된 어떤 '이야기' 였는가? (46%)
그때 거기에 있던 유일한 실재는 나의 행위(doing)뿐이었기 때문이다. (46%)
중요한 것은 당신이 당신의 경험 속에서 이런 왜곡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는 '옳기' 위해서 현실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가? (47%)
'무엇' 시스템, 즉 해석하는 마음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애초에 '무엇' 시스템이 맡은 임무가 아니다. 그것은...당신이 할 일이다. 해석하는 마음은 자신의 실수를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당신은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해석하는 마음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게 된다. (47%)
많은 면에서 이 '무엇' 시스템은 감탄할 만하지만, 어디까지나 당신이 창조하여 그것에다 부여한 속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48%)
너무 열심히 애쓰지 말라. 그냥 그것이 일어나게끔 놔두라. 만약 애를 쓴다면 그것은 당신이 해석하는 마음 안에 갇혀 있다는 뜻이다. 노력은 해석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언제나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48%)
맥락을 구성하는 이야기와 단서를 무시하는 그것이 바로 '어떻게' 시스템이다. (48%)
심지어 바흐 교수는 그림을 초점 없이 바라볼 때의 착시효과가 가장 크다고까지 말한다. 그 말인즉, 만약 당신이 맥락과 이야기에 더 많이 주의를 뺏길수록 더 많은 망상을 경험할 것이라는 뜻이다. 일단 망상을 벗어났다면, 마음이라는 것이 본래 얼마나 조용한 것인지를 느껴보라. 이 사이트에 있는 더 복잡하고 높은 수준의 테스트를 해볼 때는 호흡을 천천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해석하는 마음의 속도도 늦춰진다. 그러니 천천히 깊게 숨 쉬고, 되도록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긴장을 풀라. (49%)
무언가에 대해 과도하게 심각해진다면 그것은 '무엇' 시스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무엇' 시스템은 심각하고 진지해야만 한다. 당신이 저 밖에 이것 또는 저것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확신하게끔 해야 하니까 말이다. (49%)
이 시스템에 도전하는 무엇인가가 포착될 때, 거기에는 주의가 '대기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해석하는 마음이 제 할 일을 시작할 때까지의 이 잠깐의 기다림 속에서 당신은 '무엇' 시스템이 아니라 당신의 의식 전체를 느낄 수 있다. 이 잠깐의 시간 동안 '무엇' 시스템을 넘어서는 다른 '무엇'의 존재가 느껴지는가? (49%)
7장 : 영원할 가치가 있는 건 무엇?
해석하는 마음은 자신이 인식해낸 패턴인 에고가 영원히 살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51%)
우리의 기억은 과거사가 그대로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아니다. 각각의 기억은 우리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고도로 왜곡되고 편향된 이미지이다. 한마디로 기억이란 단순히 더 많은 생각들의 집합일 뿐이다. (51%)
우리는 기억을 할 때(re-member/re-collect),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야기)들을 한데 모아두는 작업을 한다. 우리의 기억들 중에 단 하나도 애초에 일어났던 그 사건 자체는 아닌 것이다. (52%)
우리의 기억은 실재의 반영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52%)
에고에게는 과연 영원할 가치가 있는 것이 존재하는가? (52%)
에고라고 불리는 패턴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진지하게 그것이 저 밖에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더 나아가 그것이 언제까지나 영원히 저 밖에 실재하리라 생각하는 것, 이 모두가 '늘 심각한' 해석기의 산물이다. 에고는 언제나 동사지만 영원토록 유지되는 명사가 되고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거꾸로 보면, '기억'이 흥미로운 주제인 이유는 그것이 본래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기 때문이다. (52%)
이제 우리는 기억이라는 것도 해석이나 신념, 믿음과 마찬가지로 두뇌의 산물일 뿐 결코 우리의 진정한 본질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점에 유의할수록 당신은 '이게 사실이야"가 아니라 "나는 이랬다고 생각해"라고 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습관을 들이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연습일 수 있다. (52%)
기억은 과거에 관한 에고의 부정확한 기록이다. 그것이 에고의 구조를 지지하는 듯 보이는 이유는 거기에 지지할 만한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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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에고의 해석과 생각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렇다면 생각이라는 것은 과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 싶다.
게다가 에고가 내린 해석은 영원하기를 원하기에
우리는 저 바깥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에고의 해석이 사실이자 영원한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지는 이유이자
많은 사람들이 깨어있지 못 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기억이 에고의 해석이며 그 해석이 진실이라고
영원히 믿게 만드는 것이 에고의 역할이라면.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바로 과거의 기억과 생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리고 느끼고 존재하는 것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8장 : 하지만 진짜 그럴 뻔했단 말야
요점은, 이런 신화적인 판타지에 빠져들면 의식의 에너지를 해석하는 마음에다 쏟아 붓게 되어 결국 어떤 고통으로 이끌리게 된다는 것이다. (53%)
하지만 백일몽이나 판타지는 당신을 현실로부터 분리시키고, 머릿속에서 상영되는 그 영화를 볼 때마다 당신은 조금씩 '덜 깨어 있게' 된다. (53%)
다만 우리가 좋아하는 이 취미(영화)가 결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라는 것이다. (53%)
신경과학자들은 전두엽이 전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총괄자(master planner)라고 본다. 미래를 내다보고 우리의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바로 뇌의 이 영역이라는 뜻이다. 측두엽을 '무엇' 시스템이라고 부른다면, 전두엽은 '만약 ~라면?'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다. (53%)
나는 딸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에 갔다가 (그렇다. 이런 행사들은 이토록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모든 부모가 사진을 찍느라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미래의 기억을 위하느라 지금 여기에 머무르지 못한다. 아마도 미래의 어떤 날에 그 사진들을 보면서 말할 것이다. "오, 이 사진들 찍었던 때가 기억나네." 하지만 이것은 '과정'을 '사물'로 만들려는 뻔한 시도일 뿐이다. 지금 여기가 아니라 혹시 모를 미래 속에서 살게 하는 카메라와 비디오의 존재는 과도한 전두엽 기능(만약 ~라면)과 관련이 깊다. 가끔은 카메라를 치워버리고 사진을 찍지 않는 것 자체가 훌륭한 연습이 된다. 현실을 고정된 것으로 만드는 것과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의 분명한 차이를 느껴보라. (54%)
우리는 '만약 ~라며' 장치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때 '깨어있음'을 경험할 공간이 생겨난다. 그러니 전두엽을 제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전두엽의 기능 덕분에 당신은 골치 아픈 관계에서, 문제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도박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물론 이 기능을 '좋게' 보는 것도 '나쁘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해석기의 산물이지만 말이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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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있는 그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만약 ~라면' 시스템을 작동시킬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느끼는 것일 것이다.
생각을 하게 되면.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모든 것이 작동하게 되고 따라서.현재를 있는 그대로 못 보게 된다.
그리고 백일몽이나 판타지도 현실로부터 나를 격리시킨다는 것이다.
해석하는 마음에 나의 모든 의식 에너지를 쏟아붓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실을 고정된 '사물'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즐기는 '과정'으로 만들어라.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이 될 것이다.
10장 : 불평 없는 하루
모든 불평은 '이래선 안 돼' 또는 '그래선 안 됐던 거였어'라는 형태를 띤다. 그것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반대극 - '이래야 해' -을 만들어내는 좌뇌 해석기의 짓이다. 좌뇌는 언제나 완벽을 흠결로 바꾼다. (64%)
해석하는 마음은 불평을 사랑하기에 그것을 늦추려면 '불평하기'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나와야 한다.. 즉 깨어 있는 상태로 '불평하는 자'를 지켜봐야 한다. (64%)
바로 인지부조화이론(congnitive dissonance theory)이라는 것인데, 이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 믿음, 행동에 일관성을 갖도록 동기부여된다는 주장이다. 만약 일관성이 깨지면 긴장이 생겨나고, 그러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뭔가가 행해지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65%)
해석기가 발견되기 약 20년 전에 페스팅거가 제시했었던 이 '일관되려는 욕구'는 정말이지 좌뇌의 전형적인 기능일 뿐이다. (66%)
이것이 바로, 우리가 좋아해 마지않는 '불평하기'라는 취미가 오히려 우리를 더 불안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좌뇌는 불평과 함께 '지금 여기'에 반대되는 뭔가를 만들어낸다. 즉 모든 불평은 실재의 반대극이다. 해석하는 마음은 광범위하게 대립적이지만, 자기 안에서만큼은 '일관성'이라는 접착제로 자신의 믿음들을 유지해나간다. (66%)
반면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법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좌뇌 해석기의 힘을 뺄 수 있다. (66%)
"나는 정해진 뭔가가 아니라 그날그날 내가 보는 진리에 헌신하다." (66%)
다시 한 번 기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왜 불평하는가? 우리는 왜 현실에서 흠결을 찾는가? 이것은 항상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해석기의 욕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실재를 실재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좌뇌 시스템에게 달리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것이 자기계발이라는 헛된 노력으로, 물건들을 긁어모으는 물질적인 노력으로 구체화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66%)
모든 것을 가졌어도 거기에 실체가 없음을 아는 사람은 놀랍도록 고요하다. (67%)
안이니 밖이니 하는 구분도 오직 이 시스템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것을 '밖에서' 지켜볼 방법은 없다. 나의 불평을 지켜본다는 생각 자체가 내가 이 시스템의 밖에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것은 영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에고에 불과하다. (67%)
그럼에도 '지켜보기'는 유용한 방법이다. 마치 숲 속의 나무를 보듯 불평을 무심하게 보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불평에 대한' 불평을 그치는 순간, 대립성의 법칙이 힘을 잃는 순간 말이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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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뇌라는 해석기는 대립성의 법칙에 의해서 끊임없이 불평을 만들어 낸다.
불평 그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좌뇌가 끊임없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실재와 단절시킨다.
단점, 흠결을 찾아내고서는 자기계발에 매진하도록 만든다.
만약 좌뇌가 만들어내는 이 불평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고요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자기계발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켜보기'의 방법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명상의 한 종류인 '알아차림 명상'과 유사한데
우리는 '지켜보기'를 통해서 좌뇌라는 해석기가 만들어 내는 대립성의 법칙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11장 : 뇌, 물질세계, 그리고 당신 아닌 무엇 되기
잠깐 동안 일종의 연습으로서, 우주의 텅 빔이 곧 '의식'이며 우주가 사물화되는 것은 좌뇌의 작용일 뿐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알아야 할 전부라고 생각해보라. 이 연습의 핵심은 해석하는 마음이 결코 이런 이미지를 다룰 수 없다는 데 있다. 해석하는 마음이 보기에, 어떻게 의식이 '어떤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無 그 자체일 수 있겠는가? (69%)
다시 말해서 뇌는 그 배경(몸)에 의존하고, 몸은 그 배경(세상)에 의존하고, 세상은 그 배경(온 우주)에 의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결코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가 아니라 공간이라는 텅 빈 배경과 하나로 얽혀 있는 존재이다. (69%)
최고의 기술과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대과학은 뇌 안에서 의식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의식이란 것이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9%)
뇌가 우주에서 알려진 것 중들 가장 복잡한 기계라고 할 때, 그것은 '의식을 하는'(do awareness) 기계이지 의식을 소유하는 기계가 아니다. (69%)
경험 그 자체와 그 경험에 대한 믿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70%)
에고는 자신의 일관성을 위해서 어떤 왜곡도 마다치 않기에, 해석하는 마음은 필요에 따라 자기 존재의 근원까지도 부정할 수 있다. (71%)
의식이 뇌기능의 산물이라는 가정이 현대 심리학의 토대이기 때문에 의식은 영원히 두개골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71%)
하지만 의식이 뇌 밖으로 나오는 - 그것이 손이 되었든, 테이블이 되었든, 심지어 온 우주가 되었든 간에 - 경험들은 결코 의식의 '스크린 위에서'펼쳐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의식의 경험 그 자체다. 이런 경험들은 어떤 내용물 없이, 다시 말해 데카르트 극장 없이 펼쳐진다. (72%)
더 나은 표현으로 말하자면, 당신의 손과 당신의 뇌가 함께 '의식을 춤추게 하여 존재를 만들어낸다.'(dancing consciousness into being)고 상상해보라. (72%)
이 연습은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배경임을 알아차리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72%)
하지만 라마찬드란은 이것이 뇌에 의한 환각이라고 믿었고, 환자의 뇌를 속임으로써 통증을 없앨 수 있었다. 그는 거울을 설치할 상자를 만들어서 거기에 환자가 오른손을 집어넣으면 마치 양손이 다 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했다. (물론 왼손은 오른손의 거울상에 불과했다.) 그 환자는 오른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 그러자 고통은 사라졌다. 뇌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지 꽉 쥐어진 왼손이 펴지는 모습뿐이었던 것이다 .(73%)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사물들' 사이의 공간에 초점을 맞춰보라는 것이다. 공간에는 마음을 느리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마음은 빈 공간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73%)
즉 내용물은 얼마든지 환상일 수 있지만 경험 그 자체는 환상일 수 없다는 뜻이다. (73%)
에고와 극장은 너무나 깊이 연관되어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그 둘을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해석하는 마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극장의 내용물로부터 사이의 공간들로 옮겨가야 하며, 바로 거기서 의식은 두개골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74%)
의식을 해석하는 마음으로부터 돌려놓을수록, 당신은 당신만의 극장을 벗어나는 경험들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이 연습의 효과는 인생이 당신 쪽으로 계속해서 던져대는 듯 보이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할 때 가장 극대화된다. 짜증과 실망은 언제나 두개골 안에서 일어나는 경험이므로, 당신이 두개골 밖으로 나오면 상황은 달리 보일 것이다. 이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의식이 머리에 갇혀 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의아해질 것이다.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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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무(nothingness)나 무한(infinity)와 관련된 명상을 시도하는데 잘 안 되는 이유를
조금 알게 하는 챕터입니다.
즉,무 명상이나 무한 명상을 나의 좌뇌 해석기로 조명을 해서 데카르트 극장에서 상영을 하고 있었으니 잘 안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사물이나 내용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물 간의 공간에 집중해서 명상을 하면 좌뇌 해석기로부터 벗어나서 진정한 명상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12장 : 드라마를 지켜보며
연습의 핵심은 스스로 기분이 좋아지거나 우월감을 느끼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그것 또한 좌뇌의 분별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77%)
그러나 좌뇌는 마치 건망증이라도 걸린 듯 이 진부한 패턴들을 늘 새로운 것으로 본다. (80%)
'놀이'란 진짜 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 되어보는 것이다. (80%)
사회심리학에 의하면, 매력적으로 보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관계에 대한 관심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81%)
논리학과 물리학으로부터 사회적 환경과 마음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우주는 하나의 놀이이다. 그 게임은 본래 자기가 아닌 어떤 것이 되어보는 것이다. (82%)
승리는 패배에 빚지고 있으며 성공은 실패에 빚지고 있다. (82%)
"아주 재밌게 잘 놀았다." (82%)
그래서 다음번에 드라마를 볼 때는 세 가지 수준에서 놀아보라. 그 자체로 연습이 될 것이다. 첫째, 늘 그래왔듯이 그 드라마 자체가 되어보라. 두 번째, 그 드라마를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바라보라. 모든 패턴이 오지 인식행위 안에서만 존재하듯이 그 드라마 또한 마음이 만들어낸 연극일 뿐임을 통찰하라. 셋째, 그 드라마가 우주의 장난기 넘치는 본성의 표현임을 알아차리라.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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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나의 존재를 잊고서
완전히 놀이에 빠져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게 되면 무한을 즐길 수 있게 되고
그럴 때는 에고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서 놀아보는 것.
이것이 인생의 진정한 놀이의 의미가 될 것이다.
13장 : 타인을 나 자신으로 보기
해석기의 존재를 눈치채고 모든 믿음과 신념이 좌뇌의 창조물임을 깨닫고 나면, 우리에게는 '어떻게' 시스템과 공간의식과 지금 이 순간만이 남는다. (83%)
"우주가 우리를 통해 그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 (83%)
좌뇌의 에고를 제외한다면, 당신의 의식이 끝나고 다른 이들의 의식이 시작되는 경계선이 과연 존재하는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의식'을 알아차리는 것은 해석하는 뇌가 창조한 거짓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들을 전부 제거해주므로 무척 강력한 연습이다. (84%)
좌뇌의 에고로서 다른 마음(사람)들을 만나는 대신에, 당신 자신의 해석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바로 그 의식으로서 그들을 만나보라. (84%)
당신은 며칠 동안 안 씻은 꾀죄죄한 몰골로 자기 아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불쌍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깔끔하고, 친절하고, 관대한 정반대의 부모라는 사실을 알겠는가? 이 마음(사람)으로서 춤추는 의식이 저 마음으로서 춤추는 의식과 같은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흑이 곧 백임을 알고, 당신이 곧 타인임을 알겠는가? (84%)
우리가 보는 타인이 곧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이다. 칼 융은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했다. "투사는 세상을 숨겨진 자아의 반영으로 만들어버린다." 투사는 아마도 좌뇌의 가장 근본적인 도구일 것이다. 좌뇌는 마음이 작업해낸 것들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외부로, 즉 타인들에게 투사한다. (84%)
당신이 세상을 볼 때, 실제로 당신은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의 에고를 창조하고 있는 당신 안의 그 '패턴 인식 매커니즘'이 타인들 안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그의 에고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충분히 오랫동안 외부에 관심을 두었다면, 결국 당신은 내부로 관심을 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84%)
하지만 잠시 동안 내용물이 없는 의식, 사물이 없는 의식, 색깔도 소리도 없는 의식을 상상해보라. 신경과학자 로저 스페리 Roger Sperry는 이렇게 말했다. "뇌가 출현하기 전에도 우주에 색도 소리도 없었다. 맛도 향도 없었으며 아마도 감각도 느낌도 감정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뇌 이전의 우주는 고통과 불안으로부터도 자유로웠을 것이다." (85%)
우리가 뇌라고 부르는 이 프리즘이 활동하기 전의 의식은 대체 어떠했을까? 뉴턴의 프리즘이 빛을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으로 분리시키듯, 뇌는 의식을 수십억의 에고들로 분리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로 '당신의' 의식이 아니다. '당신의 ' 에고도 아니다. (85%)
의식이 개인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감각적인 정보가 좌뇌 해석기를 통해 의식을 묶어 놓기 때문이다. (85%)
마음이 의식의 하인이 될 때, 마음은 더 이상 실재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나누어져 있다고 독단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의식을 다른 모든 이들의 의식으로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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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나를 통해서 인식을 하므로 세상은 곧 나의 투사이자 내 마음의 반영이라는 사실.
타인을 바라봄을 통해서 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14장 : 엑스맨: 도끼를 든 남자
이 상상의 추격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저항하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에 대립이 발생한다. 에고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되기를 바라는 바로 그 순간에 분열이 시작된다. 이렇게 우리는 실재로부터 등을 돌리고는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좌절과 불안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86%)
이처럼 에고를 버리려고 노력할수록, 우리는 에고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89%)
당신이 불안을 느끼는데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그때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89%)
즉 분노란, 위협을 느낀 에고가 도주하는 대신에 그 위협의 대상에게 에너지를 쏟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있는 것은 '위협받고 있다'는 하나의 생각일 뿐이지만 말이다 .(90%)
에고는 무력한 생각에 불과하므로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90%)
공황발작(panic attack)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있지만, 행복발작(happy attack)을 앓는다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긍정적 감정과 좌뇌와의 관계가 부정적 감정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에 대해 반응하듯이 불안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을 반응할 수 있다면, 되먹임 회로는 전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91%)
행복과 즐거움은 우리를 회피와 거부 대신 온전한 받아들임으로 이끈다.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껴안으면 되먹임 회로는 곧바로 깨진다. (91%)
에고적인 생각으로서의 당신은 결코 그 받아들임의 스위치를 켜거나 끌 수 없다. (91%)
실존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ctor Franckl은 심리학계에서 대립성 법칙을 명확하게 짚어낸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다. 그는 어떻게 우리의 의도가 정확히 반대되는 효과를 야기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모순적 의도'(paradoxical intention)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악수할 때마다 손에 땀이 너무 많이 나서 고민인 한 의사를 예로 들었다. 빅터 프랭클은 그 의사에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땀을 흘려보라고 조언했고, 그러자 오히려 증상이 호전되었다. (91%)
요점은 이것이다. 부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든 긍정적인 상황을 간직하고 싶어하든 간에, 에고적 생각으로서의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not playing: 無爲)라는 흥미로운 대안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92%)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곧 에고가 환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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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성의 법칙.
어떤 것이 잘 되고 있어서
그것이 잘 되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잘 안 되는 경험들...
이런 대립성의 법칙을 유발하는 좌뇌 해석기는 계속 작동한다.
내가 생각하지 말자고 말하는 순간에도 에고는 작동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생각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
바로 생각에 저항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이 줄어들면서 곧 멈추게 된다.
즉, 에고의 작동을 멈추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바로 무위인 것이다.
그리고 공황발작은 존재하지만 행복발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매순간 행복과 기쁨으로 채워가면서 무한을 즐긴다면
그것이 공황발작의 치료제인 것이다.
15장 : 결론 따위는 없다
에고적 마음에 투자할수록 더 많은 규칙이 필요해지고, 그로 인해 우리는 점점 더 피곤해진다. .반면 에고적 마음의 규칙을 줄이면 규칙의 필요성도 함께 감소한다. (93%)
놀이에는 어떤 목표도 없다.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니다. 놀이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그 안의 분별이 죄다 거짓임을 명확히 안다. (94%)
재밌는 점은, 놀려고 '애쓰는 것'이 일을 심각하게 만들고 있음을 눈치채고 이 심각함을 '지켜보기' 시작하면 그게 어느새 다른 놀이가 된다는 사실이다. (94%)
만약 당신이 '모든 것'을 믿게 되면, 특정한 것만을 믿는 좌뇌 해석기의 방식과는 저절로 멀어지는 것이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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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좌뇌 해석기에 의해서 어떤 규칙이 많이 만들어지면 나의 몸과 마음이 피곤해진다.
이럴 때는 그냥 나의 주위를 둘러보면서 지켜보면 된다.
그러면 좌뇌 해석기의 해석에서 빠져나와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게 된다.
그러면 실재하는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실재하는 세상을 만나고 나서는 7살 어린 아이와 같이 그저 실재하는 세상을 느끼고 즐기고 놀고...
이렇게 할 때에 좌뇌 해석기가 만들어 놓은
심각한 대립성의 법칙에서 빠져나와서
무한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https://youtu.be/FEIjxLAUcA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