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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주일 [파멸과 고생의 길에 갇힌 인류]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롬3:15-18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신 것은 죄에 빠진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 곧 자연인은 파멸과 고생의 길에 갇혀있다.
인간은 본성적 죄의 성질로 인해, 파멸과 고생이라는 어두운 저주의 굴레에 갇혀 있다.
자신의 죄로 스스로 가두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정상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자기들이 처한 나쁜 상황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그래서, 빠져나올 기회도 찾지 못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부정적인 뉴스를 듣는다.
가까이 있는 것말고도 멀리있는 것도 많이 듣는데, 많은 인명이 희생된 사건이라도 남의 일처럼 여긴다.
세상의 죄와 거기에 반응하는 우리를 볼 때도, 우리 속은 사실 슬픈 생각에 잠겨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이 세상은 많은 범죄가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 환경에 익숙해져서, 이 환경은 정상적이라고 믿고, 참으며 견디고 있다.
엄청나게 슬픈 상황인데도, 슬프다고 여길 여력도 없고, 그런 통찰력도 없다.
현실을 느끼고, 깨닫는 것에 매우 둔하고, 오직 거짓에만 익숙하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절대자의 구원의 손길이 너무나 절실하다.
이것이 인류가 처해 있는 가장 슬픈 현실이다.
본문을 보면서, 굉장히 놀라울 만한 사실을 접해왔다.
우리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평가할 때, 모두 멸망할 심판의 대상임을 명확히 선언하셨다.
이런 사실을 알리시면서, 그가 계시의 선포를 주고 계시다.
그분이 보는 세상은 이미 정죄되어 있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스스로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인간은 멸망으로 치닫는 존재임이 밝혀지고 있다.
[죄에 빠진 인간성에 대한 정죄]
어떤 면에서 인간의 죄성을 규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디테일한 죄의 항목들을 소개하고, 알려주고 있다.
첫째는 인간이 성격적으로 죄인임을 죄의 목록을 통해 알려주었다.
이후에는 인간이 말을 통해 범죄하는 것을 보니, 죄인임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오늘은 인간을 기소하는 열세개의 항목 중에서 행실 카테고리의 사실을 알려준다.
자연인의 이런 행실이 죄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11. 살인하는 것]
인간은 태생적으로 살인하는 습성이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 대해 악의를 품고, 저주하는 것을 마음에 품을 뿐 아니라, 상황만 허락하면, 실제로 다른 이의 목숨도 앗아가는 존재다.
그 발은 피흘리는데 빠르다.
인간의 본능적인 기질이다. 발은 사람의 행위를 이어가는 행실을 말한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피흘린다는 것은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발이 피흘리는데 빠르다는 말은 문장 자체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적극적으로 남의 피를 흘리려고 한다.
인간들처럼 이렇게 포악하게 살인하는 존재도 없다.
아무리 짐승이 사나워도, 인간만큼 자기 동족들을 대거로 죽이지는 않는다.
물론 동물들도 필요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지만, 인간들은 상당히 계획적, 체계적으로 무수한 동족들을 한꺼번에 죽인다.
본문이 본질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우선은 전쟁에 의한 살상이다.
인간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전쟁은 항상 있었다.
가까운 시기에는 1차대전, 2차대전이 있었고, 6.25전쟁도 있었다.
그 전쟁의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대재앙이었다.
한국전쟁에도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얼핏 우리가 아는 정보만으로도 최소한 2백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전쟁 때문에 많은 생명이 무모하게 희생된다.
전쟁은 지금도 있다.
전쟁 뿐 아니라, 어떤 특정집단이 정치적 목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들은 항시 일어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대학살을 통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수없이 많이 있었다.
유대인을 향한 대학살은 인류가 두고두고 돌이키며 회개할 문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정확히 집고 있다.
이것은 옛날 일들이 아니다.
이란에서도 자국인에 대한 대학살이 있었고, 하마스 같은 무장단체도 수많은 사람들을 습격했다.
북한은 어떨까. 그곳은 일상적으로 죽인다.
이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일들은 항시 일어나고 있다.
무자비한 살상이 인간의 삶에 함께 흐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범죄를 통한 살해도 많이 있다.
어느 사회든 살인사건이 많이 있다.
물론 로마서는 당시 사회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는 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더 쉽게 사람을 죽였다.
오늘은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지금은 함부로 사람을 해할 수는 없다. 국제적인 눈치도 봐야 하고, 정보도 너무 빠르기 때문에, 대학살 수준의 범죄를 공개적으로 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사람이 살인하는 성질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다른 형태로 변환되어, 분출된다.
오늘날도 기회가 있다면, 기질에 따른 살인행위를 계속 할 것이다.
언제나 그 성질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무서운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특정 집단에 의한 조직적 학살은 어쩌다 발생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항시 가능한 위협으로 우리 삶에 존재한다.
상황이 오면, 어떤 사람들이 돌변하여, 살인집단으로 돌변할 수 있다.
이 땅에 있는 역사를 접하면서, 우리는 두루 봤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대비는 필수적이다.
스스로를 보호할 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반드시 희생될 것이다.
유럽, 아프리가, 남미에서는 매일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고, 가까이는 북한에서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물론 이 땅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단적인 잔혹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살인에 대한 인간의 본성적인 씨가 다 있어서, 잠재성을 갖고 있다.
[12. 파괴하는 성질]
또, 인간은 보편적인 파괴성을 갖고 있다.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인도 하지만, 무자비한 폭행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이런 일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
내가 길에 가서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누구든지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사태 이후에 우리가 겪은 상황을 보면,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문제임이 분명하다.
기독교인이라면서, 상상을 뛰어넘는 일을 한다.
그러나, 본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같이 하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새로운 성질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파멸은 완전히 산산조각내는 것이다.
또, 인간은 고생 속에 있다.
본문에서 원어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것 같다.
본문은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한다는 식의 고생이 아니다. 여기서 말한 고생은 극도의 비참함이다.
이 세상에서 악인들에 의한 악행과 파괴가 이루어질 때, 희생되는 자들은 어떨까.
그들은 인생이 너무 고달프다.
힘에 부쳐, 그만 살았으면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식들 때문에 억지로 사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길이 그들에게는 너무 잔인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본문은 악행에 의한 희생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만든 가해자에게도 함께 말하고 있다.
파괴를 가져온 자는 나중에 재앙을 덮어쓰고, 파멸에 이를 것이다.
언제 그렇게 될지는 모른다.
다른 인생에게 치명적인 범죄를 행하는 자도 그 행위 속에서 희열로 반응하기 보다는 마음에 어둠이 가득하여, 상쾌한 기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최후의 심판이 올 것을 알게 되기 바란다.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날이 오기 전에 마음 속은 그 전주곡이 시작되고 있다.
인생은 악을 행하는 자나 피해를 보는 자나 양쪽 모두 파멸의 위력에 억눌려 있다.
어떤 이는 아픔을 견뎌야 하고, 어떤 이는 형벌의 공포를 견뎌야 한다.
피해자나 가해자나 다 평탄하지 않다. 동료 인간에 대한 파괴행위는 결과적으로 이 땅에 해를 불러온다.
가해자나 희생자 뿐 아니라, 또 다른 파괴를 가능케 한다.
그래서, 이런 파괴행위는 모든 자연인에게 불행하다.
파멸과 고생의 그 길에 있다. 그 길은 피흘리는데 빠른 발이 가는 길이다.
성경은 인생의 길을 매우 불행하고, 처절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악인이나 희생자나 비참한 길에 갇혀서 맴돌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자들이 있다.
이기적 욕심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꺠고, 무너뜨리는 자들 많다.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하며 선동하지만, 속마음으로는 파괴를 꾀하고 있다.
본인들도 스스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겉으로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들의 모든 파괴행위에 대한 댓가를 치러야 할 것은 아마도 예감하고 있을 것이다.
당장은 일이 이루어져서 목적은 달성하겠지만, 잠시 후에는 더 비참함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13. 평강없음]
다음번 기소내용은 평강없음이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단지 평강이 결핍하여 사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강을 벗어나려는 인간의 성향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 평강을 떠나려는 생각으로 평강의 길을 일부러 기피하고 있다.
영적인 상황으로 볼 때, 사람들이 악행을 계속 하는 이유는 평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짜 평강을 모르고, 약속되어 있지도 않으니까, 유사한 것을 찾는다.
로마서가 쓰여질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사회적으로 살인, 파괴적인 일은 오늘날은 더 잘 보호되고 있지만, 악의 에너지는 여전히 다른 부분으로 쓰여지고 있다.
평안하다고 말하는 자들의 말에 움직여, 상대적으로 평안하다고 느낄 뿐이다.
우리나라 어떤가.
우리에게는 작은 행복도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지난70년간 참 달콤한 평강을 누려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특별한 은총을 받고, 많은 평강을 누려왔다.
이것은 영구적인 평강은 아니다.
그러나, 마귀는 쉬지 않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을 되돌리려고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붙들지 않고, 놔두면, 돌이킬 수 없는 저주의 시대로 빨려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땅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세상식의 평강이라도, 너무나 소중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악인들은 거짓된 평강을 말하면서, 속인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악용되기 쉽다.
자기 목적을 위해 거짓을 말하면서, 사람들을 안심시켜서, 저항하지 못하게 한다.
렘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잇속만 차리려는 탐욕만 가득하다.
평강을 말하지만, 자기의 탐욕을 이루려고, 사람들을 미혹한다.
그리스도 교회 신자들은 이 땅의 누구보다 진정한 평강에 대한 감각이 있다.
기독교 교회 신자들은 이 평강을 향한 사모함으로 오늘의 삶도 견디면서, 그 평강을 가져오려고 길을 일구어 가고 있다.
자기 본의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따르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런 부름이 있다.
그러는 동안 실제로 훨씬 실제적인 평강이 그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세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너지지 않는 평강이다.
한번 내재하면, 다시 없어지지 않는 진짜 평강.
그들은 자기 마음에 있는 평강을 사회에 구현시키려고 하는 꿈으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실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사회를 평안한 방향으로 가게 하려고 한다.
그런 중대한 기여를 하는 하늘의 일꾼들이다.
물론 성경은 이 땅에 평화의 왕, 예수가 오시기까지는 참 평안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의 평강을 위해, 오늘 중요한 일들을 할 것이 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렇게 망가져?]
왜 인간은 저렇게 불의를 계속 행하고 있을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에]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두렵다면,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왜 자꾸 죄를 범하려고 할까.
하나님에 대해 알리는 자기 속의 장치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죄에 빠져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만한 환경이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정보에 익숙해 있다.
반면 의와 진리에 대한 정보, 참된 정보는 낯설게 여긴다.
이미 그들은 거짓에 익숙해서, 세상에 방치하면, 반드시 멸망한다.
그들은 자신의 창조자를 보지 못한다. 관심이 없다.
그들은 누가 하나님을 소개하면, 눈을 부릅떠서, 육안으로 보고 확인하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마음으로 만나는 분이다.
닫혀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먼저 신자들이 갖는 경건한 두려움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분의 능력, 위엄, 영광을 볼 때, 무릎꿇게 되는 두려움이다.
잠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또, 하나님을 귀하게 여겨, 사모하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이 있다.
경건한 두려움은 모든 영적 지혜의 시작이다.
영적 감각은 참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이다.
[사모함에서 나오는 두려움]
마음으로 흠모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너무 조심스러울 것이다.
그분이 잘되길 원하고, 그분이 기쁘기 원하고, 혹시 가능하다면, 그분과 가까이 하고 싶다.
그분이 나를 기억하기 원하고, 나를 떠나지 않기 원한다.
그분이 기억하시는 것 자체가 너무 진지한 소원이다.
이것이 사모함에서 나오는 두려움이다.
행10:2,34-35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고넬료의 경우가 그렇다.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을 불러서 구원시키셨다.
고넬료는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인데, 멀찍이서 유대인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부러워했다.
멀리서 유대인의 하나님을 보면서, 흠모했다.
이것이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두려움이다.
하나님께서 절대 버리지 않을 자다.
요21:10-12,17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셔서, 그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보이셨는데, 모두 알고 있다.
모두 아무 말도 못하고, 멀찍이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당신이 누군지 감히 묻는 자들이 없다.
물론 그들은 주님이 고난받으실 때, 떠난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사모하는 두려움으로 있었다.
베드로도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사모하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이상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형벌을 의식하는 두려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형벌하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하나님을 당연히 두려워해야 한다.
<위대하신 주>
빛나는 왕의 왕 영광의 주님
온 땅 기뻐하라 온 땅 기뻐하라
광채의 옷 입고 어두움 물리쳐
저 원수는 떠네 저 원수는 떠네
영원한 주의 주 시간의 주관자
알파와 오메가 알파와 오메가
삼위의 하나님 아바 성령 예수
사자와 어린 양 사자와 어린 양
위대하신 주 찬양해 위대하신 주
모두 알게 되리라 위대하신 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이름
다 찬양해 위대하신 주
위의 가사에는 주의 위엄과 엄위가 드러난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두려워하지만,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악을 멸하시고, 하나님의 것으로 대신 바꿔주실 분, 우리를 하나님의 옷으로 입혀주시고, 하나님의 행복을 주시려고 하는 분, 그분의 위대한 위엄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가 모든 죄를 멸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말자.
믿는 자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죄를 범하려고 하지 않는다.
잠16: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잠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교만과 거만과 악한 입을 미워할 것이다.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면, 벌을 줄 것이다.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신다.
하나님은 아나니아, 삽비라부부의 목숨을 취하셨다.
고전11: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교회 성도인데,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고, 병을 주시기도 한다.
그가 징계하시는 일은 언제든지 하실 수 있는 일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해야 이상적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가 형벌하실 것에 대한 두려움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를 멀리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정말 하나님에 대해 공포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사모할 동기 자체가 없으니까, 극단적인 차원에서 그분의 심판에 대해 공포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고, 홍수로 세상을 멸하셨고, 이스라엘을 쫓아오는 애굽군대를 물에 다 넣어 죽이셨다.
또, 모세가 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 수천명을 한순간에 멸하셨다.
예수님은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더 악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너희도 망할 수 있다고 하셨다.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그렇게 된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는 벌하고, 어떤 자는 놔두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징계는 항상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것이다.
더 악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 체벌하여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내버려둔다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는 뜻이 없는 것이다.
인간이 악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자연인들은 파멸과 고생의 길에 갇혀 있다.
[파멸과 고생의 길에서 구원받은 우리 교회]
우리는 세상의 시각으로 보지 않기 바란다.
우리는 옛사람이 지나갔다. 이전의 것은 다 버리고,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의 저주와 불행에 속한 자가 전혀 아니다.
우리를 파멸에 가두고 있는 더러운 마귀의 손길은 예수로 인해 끊어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진리로 먹고 산다.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고, 평강이 있다.
가짜 평강이 아니라, 진짜 평강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일의 소망이 가득하고, 옛사람으로 돌아가지 않기 바란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완벽한 승리와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마귀에게 자신을 내어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주님이 희생하여, 확보해주신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힘차게 달려가자.
우리 앞에 기쁨의 길, 영광의 길 열려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견인하시는 대장으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시며, 승리한 길을 가는 자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닙니다.
완전히 모든 것이 달려졌습니다.
다시 돌아가지 않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가진 자들입니다.
주께서 제시하신 길을 갈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한 자로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