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에세이스트 원문보기 글쓴이: 이민혜
까치 호랑이 그림(虎鵲圖)
큰 소나무 위에서 까치가 지저귀고 그 아래에 호랑이가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호작도' 또는 '작호도'라고 부른다. 맹수인 호랑이는 잡귀를 막아주는 영물로 믿어왔기 때문에 정월 초하룻날 대문 등에 붙이는 세화의 문배용으로 사용되었고, 까치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길조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를 함께 조합하여 길상과 벽사를 위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슬기로운 까치와 골탕먹는 호랑이 이야기와 같은 민담의 내용을 도해했을 가능성도 있다.
도상은 화원들 그림인 '송호도 (松虎圖)'에서 유래되었으나 화풍은 사실적인 극세필의 원체화풍과는 달리 민화 특유의 과장되면서 솔직하고 익살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호랑이는 서민들의 오랜 친밀감이 반영되어 몸집은 고양이 같고 얼굴은 우스꽝스럽고 미욱한 표정으로 묘사되었다. 짙은 채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규모가 큰 작품에서 소폭의 목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현재 전하는 유품은 대부분 19~20세기초에 그려진 것이다.
호랑이는 단독으로 그려질 때도 있지만 소나무나 대나무를 배경으로 그려질 때가 더 많다. 소나무는 지혜롭고 굳건한 영웅호걸을 상징한다. 때로는 소나무가 용을 대신할 때도 있다. 용맹스런 호랑이가 강렬한 힘을 가진 용과 함께 서 있으니 송호도(松虎圖)는 벽에 붙여놓은 것만으로 삼재를 물리쳐줄 든든한 그림이 된다. 소나무 위에 까치가 등장할 때도 있다. 까치 역시 벽사적인 의미가 스며있다. 무속에서 까치는 서낭신의 사자로 호랑이에게 신탁(神託)을 전하는 메신저로 인정받는다.
민화 (民畵)란?
민화는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생활 속에서 우리 나라 사람이 그린 생활 그림을 말한다.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지 않는 사람들이 그린 그림만을 가리키지만, 넓게는 직업 화가가 그린 그림도 가리킨다.
민간에서 일상 생활 양식이나 관습 등 민속적인 내용을 그린 그림으로 민화는 창작적이기보다는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소재를 특별한 기법이 없이 형식화한 유형에 따라 그려 왔다.
민화에는 자연의 경치, 복을 받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종교에 대한 믿음, 생활 풍속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우리 민화에는 순수하고 소박하며 솔직한 우리 민족의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자연에 대한 사랑,
웃음을 잃지 않는 익살과 멋이 배어 있다.
민화의 시작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순수하고 단순한 내용으로 보아 우리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조선 후기에 특히 유행하여 병풍이나 족자로 만들어 사용되었다.
민화는 내용에 따라
화조도(꽃과 새를 그린 그림) · 어해도(물고기 등의 물 속 모습을 그린 그림) · 호작도(호랑이와 까치를 그린 그림) ·
십장생도(장수를 뜻하는 해 · 달 · 물 · 구름 · 돌 · 소나무 · 학 · 거북 · 사슴 · 불로초를 모아 그린 그림) ·
산수도(자연의 빼어난 경치를 그린 그림) · 풍속도(농사짓는 모습과 같은 생활의 여러 풍속을 그린 그림) ·
고사도(옛이야기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그림) · 문자도(글자로 된 그림) · 책가도(책과 문방 사우를 소재로 그린 그림) · 무속도(불교 · 도교 · 유교 · 무속 등의 종교적인 내용을 그린 그림) 등으로 나뉜다.
군호도(群虎圖) - 조선민화박물관
용인 민속촌 양반집 대문
호작도 - 영월 민화박물관
까치 호랑이 그림(虎鵲圖)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과 같이 양반이나 선비들이 즐기던 고급 문화가 서민들에게까지 전해져 유행하는 과정에서 민화가 그려졌다. 이런 현상 또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무렵에 일어났다. 이 시기는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적 여유가 생겨 문화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진 때다. 많은 사람이 판소리를 즐기고 소설책을 읽으면서 여가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도 늘어났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림으로 집안을 장식하게 되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정식 화원이나 문인 화가 외에도 그림을 그려 팔아 생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약간이라도 그림 그리기에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그림을 생업으로 삼았다. 이런 화가들은 거리의 직업 화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머리를 짜내 새로운 작품을 그리거나 새로운 구상을 시도하기보다는 이미 이름난 그림을 베껴 그려 팔곤 했다. 거리의 이름 없는 직업 화가들이 베끼듯이 그린 그림을 '민화'라고 하는데 그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예전부터 궁중이나 양반 사회에서 감상되던 산수화나 화조화는 물론, 궁중에서 의식을 치를 때 치는 장식 병풍이나 모란 병풍까지 모두 그렸다.
이들이 그린 민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이 바로 까치호랑이 그림이다. 소나무 아래에 우스꽝스런 호랑이가 앉아 있고, 나뭇가지에는 까치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게 일반적인 구도이다. 물론 호랑이 새끼가 등장하거나 여러 마리 까치가 등장하는 그림도 있다. 이런 그림들을 모두 한데 묶어 까치호랑이 그림이라고 한다. 한자어로 호랑이 호(虎)자와 까치 작(鵲)자를 써서 호작도(虎鵲圖)라고 하기도 한다. 까치호랑이 그림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화인 만큼, 내용면에서도 조선 시대 민화의 특징이 고루 담겨 있다.
청원 문의문화재단지 민화당(民畵堂) 대문
까치호랑이 그림은 연초에 인사를 하는 용도로 주고받았다. 이러한 용도로 쓰였던 그림을 세화(歲畵)라고 한다. 이런 세화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에 이르게 된다. 중국의 산동 지방에는 새해가 되면 소나무 아래에 호랑이를 그린 그림을 주고받으면서 "올해는 높은 관직에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덕담을 나누곤 했다. 호랑이는 맹수의 왕이므로 관리로 치면 1등급의 높은 관리에 비유되었다. 이러한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호랑이에 높은 관직을 상징하는 의미는 없었다.
조선에서의 호랑이는 신선을 따라다니는 동물로 주로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는 동물을 상징했고, 그 뜻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까치를 소나무 위에 그려 넣었다. 까치는 당시에도 전통적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길조의 새로 알려져 있었다.
중국의 호랑이 그림은 조선으로 전해지면서 까치호랑이 그림으로 변화해 정착했다. 유머러스할 뿐만 아니라 친근하고 다정스러운 인상의 호랑이의 모습은 변화 과정에서 탄생했는데, 거리의 민화 화가들이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 낸 것이다.
까치호랑이 그림이 이렇게 흥미롭게 탄생했지만 실은 오랜 동안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무명 화가가 연초에 그려서 문 앞에 붙이고 버리는 그림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이 그림의 가치를 먼저 인정해 주었다. 까치호랑이 그림에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머와 해학이 가득하고, 또 당시의 민중이 누렸던 생활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인정해 외국인들이 먼저 즐겨 보고 수집했다.
그런 점에서 옛 그림을 보고 즐긴다는 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런 만큼 그림을 보는 일에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이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유래는?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 얘기는 항상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로 시작했다. 호랑이가 담배를 필 리 없으니 이는 단지 먼 옛날을 표현한 말일 뿐이라고 단정하기엔 그 말의 여운이 너무 오래 남는다.'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은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
담배가 처음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1618년 광해군 때 일본으로부터였다.처음에 도입된 담배의 이름은 남령초(南靈草)나 담바고(담배tobacco의 일본 발음)라고 불렀다.남령초는 남쪽 국가에서 들어온 신령스런 풀이라는 뜻이다
"가래가 목에 걸려 떨어지지 않을 때, 소화가 되지않아 눕기가 불편할 때, 한겨울에 찬 기운을 막는데 담배를 피우면 좋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에 나온 대목이다. 담배를 약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담배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신분이나 나이를 가리지 않고 피울 수 있었다. 지금처럼 윗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격식과 예절도 물론 없었다.심지어는 4~5세 아이들조차 담배를 배우기 시작하여 남녀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고 할 정도로 담배 피우는 인구가 늘어났다.그만큼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았었고 유행이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당시에는 호랑이도 담배를 핀다고 얘기해도 좋을만큼 담배가 널리 퍼졌다.
점차 조선의 양반들은 담배를 피우는데도 위 아래를 정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 유득공(柳得恭)이 쓴 <경도잡지(京都雜志)> 에서는 "천한 자는 높은 분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엄하게 다스리고... 지체 높은 관리가 지나갈 때 담배를 피우면 잡아다 벌을 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그래서 일반 서민들은 담배를 피우다가 양반의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담뱃대를 감추었다고 한다.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특권을 양반만 향유할 수 있도록 제한한 것이다.
담배 예절이 정해지자 양반들은 담배에 관련된 모든 것에 한껏 치장을 하고 멋을 부리기도 했다. 담뱃대의 길이가 마치 자신의 권위라고 여겨 긴 장죽이 등장했고, 담뱃대에 각종 장식을 하기 시작했다.담배를 약초 정도로 귀하게 여기던 양반들은 자신들만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특권을 향유하게 된 것이다. 이제 담배는 하층민들은 함부로 피울 수 없는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 되어버렸다.
담배가 도입된 17세기 누구나 담배를 피울 수 있었던 시절이 한없이 그리울 수밖에 없다. 아무런 제한없이 담배피던 때의 그리움을 당시의 민중들은 '호랑이도 담배피던 시절' 로 표현하면서 그리워했다. 이 말 속에는 신분제의굴레 속에서 생활하던 당시에 민중들의 향수와 그리움이 짙게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묘봉인도(二卯奉寅圖) 에 대하여
두 마리의 토끼가 담배 피우는 호랑이의 시중을 들고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이묘봉인도(二卯奉寅圖)
이묘봉인도(二卯奉寅圖)
이묘봉인도(二卯奉寅圖)
'이묘봉인도(二卯奉寅圖)'는 두 마리의 토끼가 담배 피우는 호랑이의 시중을 들고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의 내용은, 태초에 하우씨(夏禹氏)가 일 년을 열 달로 나누면서 달마다 동물을 배치했는데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순이었다. 즉 1월이 십이지 중 첫째인 쥐(子)의 달이 아니고 호랑이 달인 것이다. 그래서 첫째 달을 차지한 호랑이를 둘째 달이 된 토끼가 축하 해준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바로 '이묘봉인도'이다.
즉 우리가 오래 전 이야기를 할 때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말로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하우씨(夏禹氏)가 일 년을 열 달로 나누어 태양력을 사용하면서 호랑이를 첫 번째 달인 1월에 배치했던 옛날을 이야기 하고 있는 셈이고, 이 설화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이묘봉인도(二卯奉寅圖)'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