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과 애환 그리고 이산과 실향의 아픔을 간직한 부산 영도다리.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는 평범한 영도다리 인것 같다.
왜정시대 일본은 만주대륙 침략을 위해 군수물자를 일본에서 실어와 비축할 군사기지가 필요했고, 그 리고 영도에 많은 일본인 어부들이 있어 , 그들의 어항을 쉽게 오갈수 있는 길이 필요 했기 때문에 길이 214m의 영도다리를 놓은 것이다.
이다리는 왜정시대인 1931년 공사를착공하여 1934년 11월 개토한 하녹을 들어 올릴수 있는 일엽식 도개교로 오전과오후 하루 2번씩 들어 올려 큰배가 지나 가도록 했다.
* 1966년8월까지 다리를 들어 올릴때 큰배가 지나 갔다. 그 땐 영도다리 드는것 보러 전국각지에서 여행을 왔다. 동래에서 전차도 타보고 하면 하루가 지난다. 사진에 배지나가고 다리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구경을 하는모습이 보인다.
이 영도 다리가 유명하게 된 것은 왜정시대 일본놈들에게 수탈 당하고 갖은 고생을 직한 애환이 서린 다리이며. 해방후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한국전쟁시 북한군이 밀고 내려 올때 남은 2곳 중 남은 땅 부산. 그러다보니 이곳엔 피난민들이 몰려들며 부산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뿔뿌리 헤어진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오가곤 하던 다리. 전쟁후 삼팔선이 생겨 이북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북에서 넘어 오지 못하는 실향민이 생기자. 이들 실향민들은 부모형제등 가족친지를 혹시 만날수 있을까 영도다리 를 찾곤 했던 가슴아픈 사연이 남아 있는 영도다리였기에 유명해졌다.
** 지금도 약초 판매상들이 즐비하게 있다.
** 피란민들의 헤어진 가족을 찾기위해 점집을 많이 찾아 호항을 누렸는데 지금도 있다.
그때 부산 동래에서 대신동과 영도 영선동까지 전차가 있었다. 시골에서 영도다리 드는것보고 전차타러 여행을 오고했다. 그땐 좋은 여행지 였었다.
그 다리가 내나이 16살때 인 1966년 8월 마지막으로 하루 두번씩 들어 올려 배가 지나도록한 일을 못하게 되었고 노후화되었던 것이다. 그런 다리도 부산시청이 영산동으로 옮겨가고 그 곳엔 초고층 건물이 들어게 되면서 영도다리도 없어지게 될 운명에 놓인 것을 시민들의 반대로 가까스로 그 자리에 복원한다고 한다.
부산시청이 옮겨가고 롯데에서 초고층 백화점을 직고 있다.
영도다리끝부분 영도경촬서 앞 에 애잖은 사연을 담은 영도출신 현인 선생의 " 굳세어라 금순아 ! 등 노래비가 있어 그곳을 지나면 노래를 듣고 즐길수있다.
* 그 땐 요즈음 힛트하는 노래보다 더 인기 좋은 노래였다. 국민 누구나 부를수 있었고 지금까지 불리고있는 노래다.
영도시민들이 얼마나 영도다리를 사랑하는가 하면 영도다리축제를 만들어 그 뜻을 기리고 있으며 올해도 9월 4일부터 6일 삼일간 영도다리에서 축제가 벌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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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혜천의 바람흔적 원문보기 글쓴이: 바람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