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까치 설날은
오늘이 신축년(辛丑年) 까치설날이다. 따라서 우리 우리설날은 내일이다. 중학교 진학 이후부터 여태까지 타지를 떠돌고 있는 모양새이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결혼해 둥지를 틀고 여섯 해 살다가 마산으로 옮겨와 뿌리 내려 마흔 해를 넘긴 지금에 이르렀다. 오래 전 양친께서 생존해 계실 때는 명절이 되면 고향을 찾곤 했다. 외아들이라서 그분들이 이승을 떠난 이후엔 명절을 맞아도 찾아갈 곳이 없어졌다. 게다가 추풍령 아래쪽엔 가까운 친인척이 전혀 없어 명절이 되면 우리 집은 텅 빈 절간처럼 적막강산이다. 게다가 올해는 마귀를 빼닮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고로나19)이 고약한 심통을 부려 모든 사람들이 대면(對面)접촉 대신에 비대면의 언택트(untact) 교류가 일상화됨으로써 분위기가 침통하게 가라앉아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까치설날은 어디에서 유래 헸을까. 이에 대한 정설은 없다. 몇 견해 중에 세 가지를 요약한다.
먼저 서정범 교수의 견해이다. 그의 견해를 싣고 있는 한국문화 상징사전에 따르면 섣달 그믐날을 까치설이라고 한다. 이는 ‘까치 까치 설날은’이라는 동요가 탄생하며 생긴 말이란다. 그 옛날 ‘작은설’을 ‘아치설’, ‘아찬설’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아치’는 ‘작은(小)’의 뜻을 지닌 말이란다. ‘아치설’에서 ‘아치’의 뜻을 상실하면서 ‘아치’와 음이 흡사한 ‘까치’로 바뀌었다는 얘기이다. 이의 근거로서 음력 22일 조금(간만의 차가 가장 작은 때)을 남서 다도해 지방에서 ‘아치조금’이라고 하며, 이 날을 경기만 지방에서는 ‘까치조금’이라고 한단다. 이와 같이 ‘아치조금’이 ‘까치조금’으로 바뀐 것처럼 ‘아치설’이 ‘까치설’로 바뀌었다는 견해이다.
다음으로 박갑수 교수의 견해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설’은 첫째로 ‘한설, 한 첫날’이르는 설과 둘째로 ‘아찬설, 까치설, 작은설’이라고 이르는 설 등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 ‘한설’은 작은설에 비해 큰 설이라는 뜻이다. 이는 ‘가위(中間)’ 가운데 큰 가위를 ‘한가위(仲秋節)’이라고 호칭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편 ‘한 첫날’은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가장 큰 첫날이라는 뜻으로 이들 모두는 ‘설날’을 지칭한다는 견해이다. 이에 비해 ‘아쎍설’이나 ‘아쎍설날’, ‘까치설’ 따위는 ‘작은 설’ 다시 말하면 섣달그믐, 세모(歲暮)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아쎍’은 ‘작은(小)’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까치설날’의 “까치‘는 ’아쎍‘이 변한 말이라는 견해이다.
마지막으로 삼국유사의 기록된 내용이다. 신라 소지왕 때 왕후가 어떤 스님과 내통하여 왕을 해하려 했다. 그 때 까치(까마귀), 쥐, 돼지와 용의 인도로 화를 면했다. 이 사건 이후 쥐, 돼지, 용은 12지(十二支)에 들어 기릴 수 있었다. 하지만 까치는 기릴 날이 없어 ‘설 전날’을 ‘까치설’이라는 이름을 붙여 고마움을 기리며 기념했다는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타향을 떠돌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했던 까닭일 게다. 명절에 대한 애틋한 기억은 대부분 초등학교 때까지에 머물러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으로 비참했던 시절이다. 모두가 참혹했던 전흔(戰痕)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통한의 세월에 맞이했던 명절이었다. 전쟁에 휩쓸리면서 모든 게 파괴되고 먹거리를 구할 수 없어 초근목피에 기대 봐도 기근(飢饉)과 궁핍을 면할 길 없어 내남없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 허덕이며 시련을 겪어야 했던 세상이었으니 오죽했으랴.
불과 예순 대여섯 해 전쯤인데 요즘에 비해 차례를 모시던 법도가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우리 집은 가계(家系)의 지손(支孫)임에도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계셨던 연유였던지 명절이나 기제사(忌祭祀) 때면 주위에 거주하는 일가(一家)들이 모두 참여해 몇 십 명이 모이곤 했다. 그 때마다 모두가 함께 먹을 밥이나 반찬 따위를 상상 이상으로 많이 장만해 어린 마음에 놀랄 지경이었다. 그에 비하면 요즈음 나와 두 아들 그리고 손주가 모시는 명절 차례나 부모님 기제사는 어린 아이들 소꿉장난 같은 기분이 들만큼 단출하다.
친인척이 마산 주위엔 하나도 없다. 따라서 올해 중학교 2학년에 진급할 손주 유진이가 설날 세배를 할 대상은 기껏해야 조부모인 우리 내외와 제 아비와 큰 아비 정도이다. 그렇다고 안면은 고사하고 수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은 아파트 이웃들에게 세배를 드릴 처지도 아니다. 이런 유진이에 비해 내 어릴 적에는 상황이 판이했다. 아마도 시골에서 성장했기에 더욱 그랬을 게다. 설날 아침 식사를 마치면 서둘러 할아버지를 비롯해 가족 어른들께 세배를 드렸다. 그 뒤에 친인척과 동네 어른들을 빠짐없이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노라면 하루가 훌쩍 지나 해질녘에 이르곤 했다. 신이 나서 이웃 동네까지 한 바퀴 돌며 집집마다 찾아가 세배를 드리면 예외 없이 모든 집에서 떡을 위시해 맛깔스런 설음식을 챙겨 주며 덕담을 했다. 아마도 하루 종일 찾아가는 집마다 맛있는 음식이나 주전부리를 듬뿍 주셔서 어린 마음에 더더욱 흐뭇하고 신명이 났으리라. 가난에 연유했던 걸까. 요즘처럼 세뱃돈 대신에 정성스레 차린 음식 대접이 그 시절의 보편적인 정서였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운 집일지라도 세배객을 맨 입으로 돌려보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아이들에겐 다과상, 어른에게는 다과와 함께 술대접이 따랐고, 때가 되면 식사 대접을 당연시 하던 접대문화가 대세였다. 그런 때문에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계셨던 우리 집엔 온종일 세배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 같은 관습이 통용되었던 까닭에 내 어머니는 특히 설날이면 이른 아침부터 추운 부엌에 들어가 밤늦게까지 손님 접대 상차리기를 수없이 되풀이 했다. 그러다가 삼시 세끼를 찾아 먹을 겨를이 없어 부엌에서 웅크린 채 대충 끼니를 해결하던 안쓰러운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요즘 젊은 며느리들에게 그런 역할을 맡겼다면 어떤 사달이 발생했을까.
세월 따라 변하는 게 풍습이고 윤리이던가. 요즘은 세배는 설날에 하는 것이라는 사고가 불문율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교통이 불편하고 어수선한 사회였던 게 이유였을까. 이웃에 사는 경우는 요즘처럼 설날 세배를 했다. 그런데 새해가 되면 멀리 계시는 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와 새해 문안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인식이 상식처럼 굳어졌던가 보다. 그래서인지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계시는 우리 집에는 정월 보름 무렵까지 새해 문안인사나 세배를 오시는 친인척이 무척 많았다. 6.25 전쟁 휴전 직후로 교통이 불편했기에 그렇게 방문했던 대부분은 하루나 이틀 머물다가 귀가하는 경우가 숱했다. 그럴 경우 먹을 음식 장만이나 대접은 어머니 몫이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서먹서먹한 손님들과 한 방에서 잠자리를 함께하는 불편으로 어린 마음에 무척 신경이 씌이기도 했다.
나와 유진이는 예순 두 살 차이이다. 지난날 명절에 운 좋게 운동화나 새 옷 선물을 받는 것은 요즘 표현으로 한다면 ‘대박’으로 로또 당첨쯤에 비유되는 행운에 버금갈 지경이었으리라. 초등학교 시절 내게 한두 번 세뱃돈을 주신 경우는 백부(伯父)와 내 선친뿐이다. 그것도 그 당시 ‘눈깔사탕’ 한두 개 살 정도에 지나지 않아 어쩌면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지 싶다. 내 경우에 비해 유진이는 어떨까. 요즈음 유진이에게 그렇고 그런 메이커 옷이나 신발을 명절 선물로 사 준다면 시큰둥해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게다. 은근슬쩍 눈치를 살폈더니 내일 아침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세뱃돈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가 초미의 관심사 같다. 평소 필요한 용돈을 거절하거나 대폭 낮춰준 적이 없건만 왜 그리 돈에 집착하는 걸까. 하기야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심지어 파이어족*이 생겨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한다. 방금 전에 부산의 D대학에 재직하는 제자인 S박사가 설 인사차 방문했었다. 그녀가 떠나면서 유진이에게 건네준 신사임당의 존안이 새겨진 몇 장의 세뱃돈에 신이 나서 입을 헤벌쭉 벌리고 히죽대는 꼴이 결코 밉지 않다.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설날은 오늘이래요.....”라는 동요가 떠오른다. 내일이 설인데도 우리 집은 발길 끊겨 한산한 도린곁* 같이 고요가 잔뜩 내려앉은 모양새이다. 내일 아침 기껏해야 두 아들과 손주가 차례를 모시고 나면 딱히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지 싶다. 그렇다고 이래저래 10시간 이상 예상되는 성묫길에 나설 엄두도 내기 두려워 포기한지 오래이다. 이런 까닭에 간단히 차례를 모시고 나면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벗어날 요량에서 서둘러 산을 찾아 묵언 수행하는 구도자처럼 오로지 걷고 또 걸을 게다. 그 길에서 지난날들을 곰곰이 반추하는 성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날들에 대한 나름의 꿈을 그리며 다짐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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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어족 : 30대 말이나 40대 초반까지 조기 은퇴를 목표로 사회생활을 하며 20대부터 소비를 최대한으로 줄여 은퇴 자금을 마련하려는 부류를 파이어(FIRE :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이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조기 퇴직을 위해 수입의 70~80%를 저축하며 생활한단다. 결국 이들은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을 바탕으로 자발적인 조기 은퇴(Retire Early)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가치를 지향한다. 그런데 이들의 목표는 부자가 아니라 비록 덜 쓰고 덜 먹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람답게 살겠다는 철학을 가진 부류이다.
* 도린곁 : 사람이 별로 가지 않는 외진 곳
2021년 2월 11일 목요일
첫댓글 아치설에서 구전되어
까치 설날도 변했다는 서정범 교수님의 견해가 다가옵니다.
교수님 저도 어릴때 설날은 외갓집 큰집 오촌당숙댁으로 다니며
세뱃돈을 받았답니다. 어머니가 사 주신 설빔 입고 언니 오빠들 따라 세배가는 기분은 왜그리 신나는지... 아마 맛있는 음식도 먹고 무엇보다 세뱃돈 받는다는 즐거움이 컷겠지요. 유진이 처럼요. 친척집을 돌며
집에 올땐 그 친척들이 합하여 다시 저희 집 부모님께 세배 드리러 오고 어머니는 손님 맞이에 분주 하셨지요. 교수님 글 속에 제 유년의
설날이 테잎 풀리듯 재생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수필을 감상하면서 어린시절 설날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설날에 입을 빨강색 골덴 옷을 설이 되기전에 입고싶어서 손꼽아 설날을 기다리며 만지작만지작 안달이 났었지요.
까치까치 어릴적 설날이 그립습니다.
교수님의 소중한 글에 정겨운 옛 추억을 감상 잘했습니다. 교수님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