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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9년 5월 26일 주일오후설교
도르트 신조 강해
렉시오나리 : 시67; 계21:10, 22-22:5
본문 : 약1:15-18; 엡1:1-14
제목 : “하나님의 선하심”
주일오후찬송
경배찬송 - 시138편 1,2
렉시오나리 후의 찬송 - 시117편(고정)
아멘찬송 - 시92편 1,2,3
폐회찬송 - 시91편 1,5
도르트 신조 : 첫째 교리 -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제 10조 : 선택의 근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이 은혜로운 선택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있습니다. 이 선하신 뜻은 하나님께서 모든 가능한 조건들 가운데서 사람의 어떠한 자질이나 행위를 택하여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삼으신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죄인들의 무리 가운데서 특별히 어떤 사람들을 그분의 소유로 삼으신 사실에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성경의 기록을 보십시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1-13). 또한 성경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르트 신조의 가르침을 주일 설교를 따라서 충실하게 따라오고 계시는 분들이라면 지난 주일의 설교 등을 통해서 점점 이 사실, 곧 “결국 그렇다면 선택이란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해야겠구나”라는 점을 점점 더 깨달아가고 있으시리라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선택에 대한 가르침이 시작되는 6조로부터 지금 10조에 오기까지 계속 이 사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죄에 대하여 우리를 건지시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며, 이 행동은 다른 어떤 요소로부터 침해를 당하거나 위태로워지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작정이 오로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만 기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배우기 위해 ‘잘못’ 가르치는 아르미니안의 오류도 여러 번 다루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르미니안은 선택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람 사랑’ 혹은 ‘관계적 사랑’이라고 보기보다는 ‘객관적인 어떤 조건의 충족’이라고 보는 경향이 많고, 또 나아가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보다는 심지어 하나님보다 더 절대적 가치인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깎거나 쇠퇴시키는 경향을 보여왔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선택을 찬양합니다. 여러 번 인용되고 있는 에베소서 1장 말씀의 선택에 대한 가르침,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게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의 말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셔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신다......라는 사실을 배우고,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어떠함이나, 인간이 본연으로부터 갖고 있는 의지 같은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그분의 어떠하심, 그분의 성품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배우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배운 이런 내용들이 10조의 앞부분에 나타나 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제가 방금 말씀드린 우리가 이전에 배웠던 내용들의 요약입니다. 찬찬히 보십시오.
“이 은혜로운 선택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있다.”
“이 선하신 뜻은 조건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소유로 택하신 사실에 있다.”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다시 되새기면서, 오늘은 우리가 살핀 이 주제, 즉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 그분의 뜻에 달려 있다”는 말씀을 또 조금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과 성품
우리의 전체 주제를 다루기 위한 도입으로 먼저 요한일서의 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오늘은 일부만 보겠지만 사실 요한일서 전체에는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 중요한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일서 여기저기에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에, 아예 이 주제를 기준으로 잡고 요한일서를 읽어도 훌륭한 읽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몇 부분을 찾아보면서 그 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먼저 1장에서 6절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제가 성찬 시간에 종종 드리는 말씀이기 때문에 성도들께서 익숙하신 내용이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을 하는데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와 비슷한 언급이 다른 곳에도 많이 나옵니다. 2장 4절부터 6절까지 말씀도 보십시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앞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저를 아노라”라고 말은 하는데 행동에서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이런 사람을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요한일서에는 이 주제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9절부터 11절도 보겠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이후에도 계속 요한일서에는 이 내용이 나오는데, 공통된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말로는 이러저러하게 하면서 실제로 행동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요한일서는 이런 일들을 말함으로써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단순히 “행동하는 신앙!” 이것을 말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일까요?
요한일서 이 내용들의 본의는 요한일서를 시작하는 1장 1절에 이미 명기되어 있습니다. 사실 지금 저는 순서를 거꾸로 말하고 있지만 요한일서는 첫머리인 1장 1절에서 주제를 딱 말해 놓고, 그 다음에 그 예시들로서 우리가 방금 읽었던 본문들의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럼 함께 1장 1절을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아멘!
우리말로는 “말씀”이 참 흔한 단어다보니 실감이 잘 안 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이 “생명의 말씀” 할 때의 “말씀”이 “로고스”입니다. “말씀”이라고 하면 실감이 잘 안나시는 분은 저 부분을 “로고스”라고 바꿔 읽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요한일서 1장 1절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는 로고스를 손으로 만졌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고스를 눈으로도 보고, 손으로도 만졌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말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헬라 세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로고스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진리입니다. 특히 플라톤 철학에 익숙한 헬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진리는 만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이 서신의 시작을 “우리는 로고스를 만졌다!”라고 시작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로고스”는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줄은 성도들께서도 다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그 의미를 생각하십시오.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로고스라면, 그 때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인간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 간섭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까? 로고스가 땅에 왔고, 그래서 사람이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게 그렇게 일하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어떠함들이 언제나 이 세계 속에 보이는 모습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인 로고스는 절대 이 세상 저 너머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성육신!’ 곧 육의 모습으로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경험될 수 없도록’ 저 너머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경험되도록’ 이 세계에 오십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이 1장 1절 말씀을 주제구로 적은 다음에, 이것이 구체적으로 신자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를, 우리가 앞서 읽었던 방식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 1장 6절,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말은 하는데 행함이 어두움 가운데 있다면 너는 거짓말쟁이이다.”
: “하나님과의 사귐”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 사람이 진실로 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갖고 있다면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함에 있어서도 이것이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코 “어두움 가운데 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말을 하면서 행함은 어두움에 있다면 그건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2장 4절,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하면서 행함으로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다.”
: 같은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하는 것은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이지요. 그런데 요한일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하는데 행동으로 계명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반드시 행함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 같은 장의 9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 말은 하면서 행함으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사실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다.”
: “빛 가운데 있는 것”은 경험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세계의 일이지요. 하지만 만약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이 행동으로는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는 영적 세계인 빛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바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일서의 말씀이 보여주는 진리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신비의 세계의 일’을 그 세계 속에 걸어 잠궈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기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을 ‘여기 있는 이 세계 속에’ 보이도록 하십니다. 이것을 신자의 삶에다 적용해서 말하자면 “믿음에는 반드시 실천이 따르는 법이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고, 이것을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 선택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반드시 그분의 일에서 드러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택에 대해 배우면서, 결국 우리의 선택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핵심이 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선하고 좋은 분이라면 우리의 선택은 아름다운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악하고 괴팍한 분이라면 우리의 선택 역시 두려운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신실한 분이라면 우리는 선택을 믿어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우유부단하고 판단을 바꾸기를 자주 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선택이 우리에게 유익한가? 어떤 것을, 무엇을 주는가? 에 대한 분명한 판단은 언제나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를 묵상하면 우리는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어떻게 알 수 있지?”라고 질문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봐,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반드시 그분의 일에서 나타나게끔 되어 있고, 우리는 그분이 인류의 역사 속에 행하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이 ‘창조’와 ‘구속’인 것을 압니다. 즉 우리는 ‘창조’와 ‘구속’을 묵상하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분명히 알 수 있고, 그 때의 하나님을 근거로 하여 우리의 선택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선하심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길을 가고 계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10:17)라고 물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첫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물론 이 대답에서 예수님은 질문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모르고 말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만, 동시에 이 대답 안에는 중요한 진리, 곧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선한 것이 없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즉 하나님은 ‘선함의 원천’이십니다. 하지만 ‘원천’이라는 말이 사실 부족한 것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단지 ‘원천’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유일한’ 원천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밖에 선한 이가 없습니다. 선함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옵니다. 모든 선함이 그분께만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역시 동일하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여기 “각양”이라고 번역된 말은 정확하게는 “모든”입니다. 모든 좋은 은사, 온전한 선물은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옵니다. 마가복음과 같은 이야기죠. 하나님 외에는 아무 데서도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선함의 원천이시오, 모든 좋은 것들이 나오는 근원이 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어떤 하나님을 먼저 떠올리십니까? 죄를 너무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금요일에 스터디 때 공부했는데, 성경의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벌하실 때 ‘기뻐하심’이 부각되지는 않습니다. 통상적으로 죄에 대한 징계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라고 하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반대 구절이 있습니다. 에스겔 18장과 33장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성경에서 하나님은 정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뜻으로 구원을 얻고 거룩하게 될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지난 금요일에 제사 제도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불태워 드릴 때 “향기로운 냄새니라”라고 말씀된 부분을 배웠는데, 제물을 죽이고 피를 뿌리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향기롭다”하지 않으시고, 태울 때에만 “향기롭다” 하신 것은 희생 제사에서 죽이고 피를 뿌리는 것은 ‘속죄’를 나타내고, 태우는 것은 ‘거룩케 됨, 정결’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이 죽는 것을 ‘기쁘다’고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앞의 에스겔 말씀처럼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신다 했습니다. 반대로 제물을 통해 거룩과 성결이 나타날 때 하나님은 ‘기쁘다’, ‘이것은 향기로운 냄새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징벌하십니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본연을 정확하게 읽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방금 들은 대로 마가복음과 야고보서는 하나님을 “선하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같은 곳에서도,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같은 말씀들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이 선하심이 창조에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창조에 드러나는 그분의 선하심
마이클 리브스는 그의 유명한 책 “선하신 하나님”에서 이슬람의 알라신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초대 교회의 영지주의 사상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 곧 창조 사역은 선물이며, 아름다운 곳, 행복한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창조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합니다.
우리말에는 “좋다”라는 말에 보통 ‘취향’이나 ‘선호’가 담겨 있어서 “좋다”와 “선하다”는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영어 같은 언어에서는 이것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고, 히브리어에서는 강력하게 이 둘은 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토브’라는 단어는 ‘좋다’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선하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한 번 보십시오. 창세기 1장,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1장 4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8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쉽게 말하자면 ‘좋은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굳이 여기에 토를 좀 더 달자면, 우리말 성경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되어 있어서 ‘눈으로 보기에 좋았던 것처럼’ 그렇게 읽히는 경향이 있는데, 원문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셨다, 그랬더니 좋았다(키 토브).”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다”와 “좋았다”는 다른 문장입니다. “보기에 좋은”이 아닙니다. “보았고, 그 결과로 좋았”습니다. 따라서 여기 좋다는 것은 그야말로 보기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진짜로 좋은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기에는 괜찮았지만 실제로는 품질이 나쁜 사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셨고, 좋아하셨지만, 실제로 이 세계는 좋았습니다. 즉 하나님은 ‘좋은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똑같은 말을 우리가 익숙한 시편 23편 말씀에서 봅시다. 시편 23편 6절 말씀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멘!
‘토브’, “좋았더라”를 찾으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할 때 저기 “선하심”이 ‘토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창세기를 시편 23편과 함께 읽으니까 무엇을 알게 됩니까? 우리가 앞서 들었듯이, 우리말에서는 “좋다”와 “선하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좋다”는 것은 선호의 말이 강하고, “선하다”는 것은 도덕적 가치 기준입니다. 우리말에서는 “나는 너를 좋아해”라는 말과 “너는 착해”라는 말이 같은 말이 아닙니다. “좋다”는 “선하다”처럼 도덕적 가치 기준이 들어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창세기를 시편과 함께 읽어보면 히브리어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좋게”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선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때에만 세상이 “좋지만” 동시에 “선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창조는 어떤 것입니까? 시편 19편이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우리는 하늘이 굉장히 ‘멋드러지게’ 지어졌다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편 19편은 창조를 노래하면서 곧 몇 절만 더 지나가면 이 시가 창조의 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변화합니다. 창조를 노래하던 논조를 그대로 율법에 적용시킵니다. 이 시의 7절부터는 이렇게 나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아마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에게 엄마가 “얘야, 아침 햇살은 참 착한 거란다”라고 말하면, 그 아이는 곧바로 엄마의 잘못을 정정해 줄 것입니다. “엄마! 햇살은 ‘착한’ 게 아니라 ‘아름다운’ 거예요”
맞습니다.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햇살은 ‘착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무슨 가치 판단이 있겠습니까? 세계는 가치 중립적으로 보입니다. 바위나 산은 ‘멋질’ 수는 있지만 ‘착한 것’은 아닙니다. 휴일에 나들이를 가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면 마음이 확 트일 정도로 바다는 광대하고 광활하지만, 그건 바다가 ‘착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을 아는 신자는 그 아이가 몰랐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피조 세계는 하나님이 ‘착하게’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나서 창세기 1장에서 시편 23편과 똑같은 단어로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선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세상은 우리말로 하자면 ‘좋으면서’ 동시에 ‘선합’니다.
현미경으로 나뭇잎의 잎맥을 들여다 보신 분이 계십니까? 그 작은 세계 속에 얼마나 정밀하고 아름다운 것이 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저분해 보이는 파리의 더듬이를 확대해서 보면 얼마나 경이로운지 모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놀랍고’, ‘경이로운’ 것 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선합’니다. 즉 우리는 신자이기 때문에 이제는 나뭇잎의 잎맥이나 파리의 더듬이를 보고서도 “나뭇잎도 선하고 파리도 선하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지으신 창조세계는 모두 선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야고보서의 내용,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의 의미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볼 수 있게 때문에 창조로부터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기댄 선택이 우리에게 좋은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구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일하심 중 구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합시다.
사실은 이 주제는 너무나 방대하고 다룰 것이 많지만 창조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한 고로, 그리고 구속이라는 주제는 다른 곳에서도 많이 다루는 주제이므로 조금 간단하게 한 본문만 생각하고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겠습니다.
구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 제가 간단하게 사용할 방법을 요약하면 ‘이 위대하신 전능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만드신 일이 결국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제만 듣고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에베소서의 이 한 구절로 쉽게 이해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3절부터 5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아멘!
3절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주신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 주목하십시오. 이 복은 분명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입니다. 여기 분명히 “모든”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지으실 때 크게 세계를 두 영역으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다들 배우셨을 것입니다. 한 편이 하늘, 또 한 편이 땅입니다. 그리고 이 때 ‘하늘’이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저 하늘이 아닙니다. 저기는 창세기 1장에서는 ‘궁창’이라고 다들 배우셨죠? 이 때 제가 말씀드리는 하늘은 ‘보이지 않는 하늘,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세계를 지으실 때 한편으로는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를 지으셨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보좌, 천사들이 있는 영계를 지으셨습니다. 이 둘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은 우주 전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틀린 것이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주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 우주를 지으실 때 대강, 힘이 남아돌아서, 여력만을 가지고, 혹은 손가락을 하나 튕겨서, 그렇게 지으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우주는 하나님의 대단한 작품입니다. 우주는 “하나님의 수천만 개의 지으실 수 있는 가능성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우주는 대단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를 두고 에베소서는 3절에서 말합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이 때의 “하늘” 역시 궁창하늘이 아닙니다. 영적 세계의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3절의 “복 주시되”를 어떤 말이 받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다르게 말하자면 “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무엇입니까?
네......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신 것이 바로 우리를 구속하여 그분의 아들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주를 볼 때에도 하나님이 손가락을 하나 튕겨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의 구속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나 여러분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일은, 하나님이 해변가에 앉아서 콜라를 마시면서 발톱을 깎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그래......오늘 저녁은 치킨을 먹어볼까”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이야말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쉬운 일도, 가벼운 일도, 별로 가치롭지 않은 일도 아닙니다. 한 사람이 죄의 노예로 있다가 굴레를 벗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만드신 일과 필적할 위대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구원이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임을 생각할 때,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이 여기 깃들어 있다고 할 때, 최고의 하나님의 최선의 작품이 구원임을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과 각별하심이 여기 우리 구원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보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선함과 자비로우심이 들어 있다!
정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