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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으럇차차대한민국
2010년12월호
국군의 뿌리는 신흥무관학교 광복군 청산리전투의 주력군
특별인터뷰| 2011년은 신흥무관학교 창립100주년_ 설립자 이회영의 손자 이종찬 전 국정원장
이승만, 안중근의 조카 광복군 안춘생을 첫 정규 육사교장 임명한 뜻은…
글 박성현 월간중앙 차장[psh@joongang.co.kr]
사진 박상문 월간중앙 사진팀장[moonpark@joongang.co.kr] 기자
올해는 광복군 창설70주년이 되는 해다. 임시정부는1940년 중국 충칭에서 김구 주석 등 주요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광복군을 결성했다. 이와 관련해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 즉 출발점을 광복군 나아가 광복군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올 한 해‘우당 이회영 일가 망명100주년 기념사업’을 펴온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회영의 손자)은 내년 신흥무관학교 창립100주년을 맞아 국군의 역사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국군의 단절된 역사를 바로 이어야 한다는 논지다.
12월3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는100년 전 이날을 기리는 음악회가 열린다. 바로‘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 망명100주년 기념음악회(가칭)’다. 1910년의 이날은 우당 선생 여섯 형제가 서울의 전 재산을 처분해 항일 망명길에 오른 날이다. 이날 삼삼오오 흩어져 집을 나선 우당 일가는 이튿날 얼어붙은 압록강을 썰매로 건넜으며, 중국 단둥을 거쳐 유하현 삼원보에 정착했다. 우당 일가는 이곳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가 배출한 인재들은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무장항일투쟁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우당 집안은 일제강점기 지도층의 솔선수범, 즉‘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 명문가로 손꼽힌다. 우당(友堂) 이회영과 다섯 형제는 임진왜란 때 국방과 외교에공을 세운 백사 이항복의10대손이다. 우당 집안은 경주이씨 상서공(尙書公)파로 백사 이래9명의 영의정과1명의 좌의정 등 정승만10명을 배출해 세간에서 최고의 명문가를 뜻하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렸다. 우당 형제의 아버지도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 씨다. 우당 형제들이 처분한 재산은 당시 화폐로40만원이었다. 쌀로 계산하면600억원이라는 설도 있고, 황소로 계산하면1만3000두라는 설도 있다. 중구 명동의YWCA 건물과 뒤편 주차장 그리고 명동 성당 앞부분 일대가 모두 그 당시 처분한 땅이다. 매천야록>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양주(현 남양주)에서 한양으로 오는데 남의 땅을 밟지 않고도 올 만큼 광대한 토지를 보유했다. 지금의 시세로 따지면 수천억원대에 이른다는 추산이다.
한겨울에도 훈훈한 열기를 내뿜을 법한 뜻깊은 음악회에는‘우당 찬가’를 작사할 정도로 우당을 열렬하게 추종하는 임웅균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를 비롯해 국내 음악인이 다수 출연한다. 또550석에 이르는 객석은 우당 일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의 후손, 독립운동단체 관계자, 일반 시민이 메울 전망이다. 올해와 내년은 우당 일가에게 의미가 깊다. 올해가 우당 일가 망명100주년이고, 내년이 우당6형제와 이상룡·이동녕·이상설 등 독립운동가들이 힘을 모아 결성(1911년 초)한 경학사(耕學社·신흥무관학교의 전신) 창립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경학사는 그 해5월 신흥강습소를 세워12월40여 명의 청년 독립운동가를1회 특기생으로 배출했다. 이는 비밀독립운동기관이던 신민회의‘신’자와 다시 일어난다는‘흥’자, 현지인의 시선을 피하고자 붙인‘강습소’가 합쳐져 만들어진 중견 군사간부양성학교라고 신주백 연세대 연구교수는 설명한다. 중국의 영토에 설립된지라 공식적으로는 강습소라는 명칭이 사용됐지만 내부적으로는 신흥무관학교라 불렸다.
서울 종로구 신교동의 우당기념관에서 만난 이종찬 전 국정원장(우당장학회 명예이사장)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도 이번 기회에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국군의 출발점으로 알려진 국방경비대(1946년 창설)가 아니라1911년 신흥무관학교, 나아가 대한제국의 군대로 까지 연원을 확장해야 한다고 힘줘 말한다. 내년에 거행 될 신흥무관학교 창립100주년 기념행사 주요 의제 중 하나로 국군의 연원, 즉 출발점이 어디냐는 논쟁을 적극 제기한다는 입장이다. 이 전 원장은“헌법전문에‘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뿌리가 임시정부에 있음을 분명히 했음에도 국군의 뿌리를 임시정부의 군대 광복군, 나아가 신흥무관학교에서 찾지 않는 것은 자기 모순”이라고 강조했다.
― 현재 국군의 출발점은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요?
“각종 기록이나 문헌을 보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국방경비대(훗날 조선경비대)로 나와 있어요. 6·25전쟁 당시 임관한 장교들의 모임인‘50동우회’가 펴낸국군의 뿌리― 창군·참전용사>는 국군의 모체를 국방경비대로 설명합니다. 이와 관련해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대한민국 국군은 그 뿌리와 정신적 연원을 찾는 데 깊이 고민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교수는 국군은 일제식민시기를 민족사의 단절기간으로 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예가 바로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30년사>입니다. 여기에는‘구한말 신식군대의 간부 양성기관이던 대한제국 무관학교는(중략) 일제의 강제에 의한 군대 해산령과 대한제국의 붕괴에 이은 일제의 식민통치 등으로 인한 명맥의 단절로 말미암아 광복 후 신생 대한민국 국군 창군에는 아무런 연대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연원을 밝힘에 있어서 대한제국의 무관학교를 그 시초로 삼을 수 없다’는 취지로 돼 있습니다. 과거 군의 역사를 기술하는 분들이 국군과 육군사관학교의 뿌리와 연원을1946년에 만들어진 국방경비대와 군사영어학교(1945년 설립)에서 찾은 것은 역사를 끊어내는 행위로 적절치 않았다고 봅니다. 대한민국은 유구한 전통을 지녔고 앞으로도 오래 번창해나갈 나라인데 국군의 연원을 어느 시점에 끊어 여기서부터 시작이라고 하는 건 온당치 않지요.”
학계·군, 국군의 뿌리 재조명 필요성 공감
― 과거는 그렇다 쳐도 요즘의 군 전문가들이나 학계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국군방송은8·15 특집방송에서 이 내용을 짚었습니다. 국군방송은‘의병, 독립군, 광복군의 역사적 전통을 이은 세계10위권 안의 강군으로 우뚝 선 민족의 군대인 우리 대한민국 국군’이라며 국군의 뿌리가 독립운동에 맞닿아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현재 국군의 연원을 독립운동으로까지 끌어올려야 한다는 공감대는 대개 이뤄진 듯한데 하나의 정론(正論)으로는 정립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흥무관학교 설립100년을 맞아 이번 기회에 정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국군의 연원, 출발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논란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백기인 연구원은 국군의 뿌리를1946년1월15일 창설된 국방경비대(훗날 조선경비대)에서 찾고 있다. 백 연구원은“조선경비대는 육·해군을 갖췄고 정부 수립에 대비해 공군도 준비하는 등 제도적·인적·물적 차원에서 국군의 모체가 된다”고 설명했다. 임시정부가1940년 기존 독립군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합류하면서 좌우 합작 성격의 광복군이 창건했지만 규모가1개 대대 정도에 불과하고 육군만 갖췄기에 그 자체만으로 국군의 모체로 보기에는 비약이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백 연구원은“임정의 광복군은 정규군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추지 못해 국군이 광복군의 정신적 법통성 정도를 계승한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해방 이후부터 국군이 출발한다는 시각인 셈이다.
― 임시정부는 어떤 입장을 취했나요?
“임시정부는1940년9월17일 중국 쓰촨성 충칭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이날 임정의 외교부장이던 조소앙 선생은 경과 보고에서‘정미년(1907년) 8월1일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 날이 바로 광복군이 창립된 날’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광복군은 대한제국 군대의 의병정신을 계승한다는 말이지요.우리나라가 힘이 약해 타력에 의해 군대의 역사가 끊겼지만 정신은 계속 이어졌다는 뜻입니다. 광복군은 비록1940년에 창건됐지만 임시정부는1907년으로33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대한제국 군대 해산일에 광복군이 다시 시작됐다고 정의한 것이지요. 선열들은 그렇게까지 역사의 맥을 연결지어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 역사를 끊어버리고1945년에 생긴 군사영어학교, 1946년의 국방경비대를 국군의 원조인 양 말하는 것은 역사의식이 희박하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 한 발 더 나아가 이 전 원장께서는 국군의 연원을 신흥무관학교로까지 앞당겨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 근거는?
“광복군 창건식에서 조소앙 선생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07년8월1일부터 시작된 광복군은) 민족의 해방을 위해 오랫동안 저항해왔고 민족의 영웅과 혁명 선열을 부단히 배출해왔다. 동삼성의 신흥학교와 미국 호놀룰루의 병학교, 중국 윈난성의 사관학교는 기미년(1919년) 이전 한국광복군 간부 양성소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우당 일가와 독립운동가들이, 병학교(兵學校)는 하와이 독립운동가인 박용만 선생이 세웠습니다. 중국 윈난성의 사관학교는 중국 국민당이 만들었지만 이곳 졸업생이 광복군에서 활동했습니다. 대한제국 군대의 장교 중에서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한 이들이 많습니다. 이청천, 김형선, 이장녕, 이관직 같은 분이 대한제국 군대의 장교로서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냈습니다. 따라서 국군의 뿌리는 엄밀히 말하자면 신흥무관학교, 더 나아가 조소앙 선생이 말씀하신 대한제국 군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회주의혁명까지 겪은 러시아의 경우1904년 인천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와 전투를 벌이다 자폭한 러시아 순양함 바리야크호에 걸렸던 깃발을 인천시로부터 대여받으려고 이번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기간에 대통령까지 움직였습니다. 역사의 연속성을 중시한 결과죠. 우리도 러시아의 이런 점은 본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독립군이 얼마나 되나요?
“대략3000명이라는 설도 있고, 2000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졸업생 명단을 아직 다 찾질 못했기에 어떤 게 정확하다고 단정하지 못하겠습니다. 제1공화국의 외무장관을 지낸 변영태 선생이나 님 웨일스의 소설아리랑>의 주인공이자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던 김산(본명 장지락)도 이 학교 출신입니다. 얼마 전 국군방송에서는 청산리전투에 소년병으로 참전했던 이석이라는 분이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다는 내용이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 이 학교 졸업생은 대략 어떤 경로를 거쳐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나요?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광복군, 또 하나는 조선의용군입니다. 좌우로 갈렸다고도 봐야겠습니다. 임정 산하의 광복군이 되거나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조선의용군이 된 거죠.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 김좌진 장군이 중심이 된 북로군정서, 안동 출신 이상용 선생이 지도하던 서로군정서를 창설하는 데도 중심세력으로 기여했습니다.”
광복군3개 지대장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
― 신흥무관학교 출신 중에서 광복군에 활동한 인사로는 누가 있나요?
“광복군은 이청천 총사령관 밑에3개 지대로 편성됐습니다. 1지대장 김원봉 선생은 김약산이라는 가명으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졸업 직전 퇴교,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결성했습니다. 2지대장 이범석 장군은1916년 중국윈난육군강무학교에 입학, 수석 졸업한 뒤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됐습니다. 3지대장 김학규 장군은1919년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서로군정서에서 무장투쟁을 벌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광복군의 요람인 셈입니다. 그래서 신흥무관학교가 국군으로 연결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 뚜렷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해방 직후 국군의 역사가 단절된 배경은?
“조금 사연이 복잡하고 깁니다. 오광선이라고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서로군정서 중대장, 한국독립당 의용군 중대장을 지낸 분이 있습니다. 해방 직후 국내에서 국군을 조직하라는 김구 주석의 명에 따라 서울 동대문 숭인동에 광복군 국내지대 본부를 조직, 치안을 담당하고 김구 선생을 경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정이 모든 군사단체 조직의 해산을 명령하는 바람에 창군작업이 중단됐습니다. 이후 미군이 조선경비대(국방경비대 후신)를 만들었지만 그 정신적 연원을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둘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명분도 아니었죠. 그래서 임정과 협의를 통해 국방장관 격인 통위부장에 임시정부 참모총장과 국무위원을 지낸 유동열 장군을,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광복군 지대장을 지낸 송호성 장군을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차츰 일본 육사 출신이나 만주군 출신이 실세로 부상하면서 신흥무관학교 사람들은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 광복군 출신 인사들이 초기 군대에서 몰락하게 된 다른 배경도 있나요?
“먼저 일본 육사 출신 인사들의 계급이 높았습니다. 또 광복군 출신 인사들은 처음엔 군 합류를 망설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범석 장군이 국방장관에 기용되자 그제야 입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국군으로참여가 늦어진 셈이죠.”
― 그래서 건군 초기 국군의 출발을 해방 이후로 보는 시각이 자리하게 된 것이군요.
“저는 건국 직후 국군을 조직하고 육성해온 분들의 공로를 인정합니다. 대한민국 군 발전에 큰 공로를 세웠다고 봅니다. 그리고6·25 북의 남침 때 생명을 걸고 열심히 전투하고, 나라를 지킨 분들입니다. 해방 직후의 군대 조직활동은 긴 역사 속의 한 대목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걸 다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해방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헌법정신과도 어긋납니다.”
― 이승만 박사가 친일 인사들을 중용한 것과도 관련이 있나요?
“이 박사가 친일파에 둘러싸여 민족의 정통성을 잃어버렸다는 비난이 많았죠. 하지만 이 박사는 나름의 관점이 있었습니다. 정규 육군사관학교 교장만큼은 일본군 출신이 아닌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를 앉히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전쟁통이던1952년4년제로 바뀐 육사의 초대 교장에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춘생 장군을 앉힌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있습니까?
“4년제 육사가 출범하던1952년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 장군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이종찬 장군은 저와 같은 경주 이씨 집안입니다. 1952년 당시 임시수도이던 부산에 정치파동이 일어났고 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하라던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해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됐습니다. 이후 육군대학 총장으로 재직할 때 제가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이종찬 장군은 제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육사 교장은 소장 내지 중장 직위였다. 하지만 안춘생 장군은 준장으로 교장에 올랐다. 이 대통령은 안춘생 준장을 콕 찍어 교장에 임명했다’고 말이죠.”
― 이 대통령이 육사에 광복군·독립군 정신을 불어넣고자 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종찬 장군은 또 이 대통령이 다음과 같은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도 하셨습니다. ‘나는 뜻이 있어 안춘생 준장을 교장으로 임명하는 것이오. 그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가 아니오. 그의 가문은 모두 애국애족으로 몸바친 가문이오. 그래서 이런 가문에서 성장했고, 또 그 자신 광복군에서 활약했던 안춘생을 뽑은 것이오. 이제 육사에서 배출한 장교 가운데 한 명이라도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인물이 탄생된다면 육사 교육은 성공한 것이오. 안 장군이 잘해주기 바라오.’ 이 대통령은 당시 육사가 있던 진해의 공개석상에서 이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고 이 장군이 전했습니다. 전쟁 전인1949년에도4년제 정규 육사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그때도 광복군 출신인 김홍일 장군이 교장에 임명됐습니다. 이 모든 게 이 대통령의 원려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비록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일본군 출신 장교들을 간부로 기용했지만 장래의 국군이 광복군의 전통을 이어받게 하려는 배려를 한 게 아닐까요.”
― 의외의 증언이군요.
“이건 제가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또 안중근 의사가 일본 검찰에 심문받을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대한제국의 군인이다. 나를 포로로 취급해 달라.군인이 적의 장수를 쏴 죽인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이 말 역시 대한제국의 군이 해산되지 않고 아직도 살아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정신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정신을 대한민국의 국군에 계승시키고자 안춘생 장군을 교장으로 임명했을 것입니다.”
― 국군의 뿌리와 관련해 이 전 원장님의 견해를 반박하는 사람은 없나요?
“과거의 관성에 따라 반대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소위 친일했던 분은 대한민국 건국 이전의 활동을 인정하기 싫겠지요. 일제가 한국 근대화에 더 기여했다는 분도 쉽게 인정하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일부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제기하는데 저는 생각이 달라요. 우리가 좀 더 개화를 일찍 했더라면 우리 민족 역량이 더 근대화했을 것입니다. 일제의 침탈 때문에 우리 근대화가 더 늦어졌습니다.”
독립선열들 나라의 근대화 구상했다
― 그런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보십시오.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은 나라만 찾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라를 찾은 후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주장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문화국가를 만들겠다고 하였고요. 우당 할아버지도 자유협동체론을 제시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앙정부의 권력을 과도하게 강화시킨 국가주의는 필연코 제국주의나 패권주의로 간다. 그러므로 지방으로 분권하고, 지방을 풍요롭게 만들어서 자유협동체로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의 세계로가는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그분들은 이미 근대화된 나라의 모델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 북한의 항일무장투쟁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고 있나요?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 무장독립투쟁을 너무 소홀히 다룬 바람에 많은 역사를 김일성에게 빼앗겨왔습니다. 임시정부에서만 언급할 뿐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것이죠. 북한은1912년생인 김일성이1926년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했다고 하는데 이는 거짓말입니다. 불과14살에 어떻게 그걸 만드나요. 나름대로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론입니다. 대신1932년4월25일 자기네 끼리 모여 한 것은 있습니다. 동북항일연군이라고1930년대 김일성이 중국 공산당원 주보중(周保中) 밑에서 함께 항일투쟁을 벌였습니다. 빨치산1세대인 최헌·김책 등이 모두 주보중 밑에서 활동했습니다. 북한은 이 부대가 조선인민혁명군이고, 부대장이 마치 김일성인 양 부풀려놓았습니다. 북한의 선군주의도 김일성의 항일운동에서 뿌리를 찾아1932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에 맞서 대한민국도 김일성이 태어나기 전부터 무장투쟁을 했다고 해야 올바른 통일운동이 가능합니다. 경술국치 이후 임시정부 수립까지의 무장투쟁사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 국군방송에서도8·15 특집으로 국군이 의병, 독립군,광복군의 전통을 이었다고 했다니 국군의 연원에 대한 재검토와 정리작업에 속도가 붙을 수도 있겠습니다.
“논의가 상당히 성숙된 상황입니다. 이제 정론화 과정에 접어들어야 할 시점입니다. 지금 국군의 고급 장교들이 모두 제 후배(이 전 원장은 육사16기다)입니다. 얼마 전에 함께 식사를 했는데 국군의 뿌리를 제대로 다시 잡아야 한다는 의견에‘맞다’며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호응했습니다.” 우당 여섯 형제가 기득권을 버리고 망명을 결심하는 과정에서 현실의 안락함과 보장된 미래를 선뜻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구한말의 고관대작 상당수가 일제가 수여하는 작위를 받았고 권력과 부를 누렸다. 오늘을 사는 사람의 눈에 우당 일가의 망명은 고뇌에 찬, 그래서 내부적 반발도 있었을 법한 결정으로 비춰질 수 있다.
― 누군가 주저하거나 반대하진 않았나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조선시대 충신을 배출했습니다. 대과급제한 이가170명, 정승8명, 대제학이3명이며, 백사 이항복, 충무공 이수일 장군도 우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대대로 충신을 배출한 우리가 일제에 빌붙어 살 수 없다, 망신당하지 말고 떠나자는 쪽으로 의견이 집약됐습니다. 이런 큰 명분이 있었기에 가산 탕진은 문제가 될 수 없었지요.”
한 가지 우당 형제의 발걸음을 붙잡은 근심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선영과 봉제사다. “당시는 의병장도 부모상을 당하면 싸우다 말고 상을 치르던 시절입니다. 제사와 선영 관리를 소홀히 하면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였죠. 다 떠나고 나면 제사는 누가 모시며, 선영은 어떻게 돌볼 것인지 막막했지요. 이 문제는 훗날 처리키로 하고 일단 형제들이 함께 떠났습니다. 우리 집안의 선영은 현재 비무장지대인 장단 지역에 있습니다. 망명 후에도 큰할아버지(이건영)의 이런 걱정이 끊이질 않았고 그래서1920년 중반에 큰할아버지는 귀국해 장단의 선영을 돌봤습니다.”
삼한갑족이라 불리던 우당 일가도 오랜 망명 생활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영국인이 운영하던 상하이 전차공사에 취직한 우당의 아들과 조카가 벌어온 돈을 임시정부 운영자금, 우당 형제 활동비, 가족 생활비로 쪼개 써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피붙이를 중국 국민당이 운영하는 구빈원에 맡겨야 할 때도 있었다. 망명길에 나선 여섯 형제 중 해방 후 살아서 돌아온 이는 성재 이시영(다섯째)뿐이었다. 우당은 옥사했으며 형제들 대부분이 중국에서 숨을 거뒀다. 우당 일가의 구국 결단과 고행은 오늘날 한국인의 메마른 삶을 성찰케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