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자라서는 학교의 선생님으로부터
'항상 중용을 취해라'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마라'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배우고 그렇게 살도록 다짐받는다.
하지만 그 잘난 중용이나 균형이란 것을 잘못 취하다 보면, '한쪽으로 치우지지 마라'고 주의 받던, 바로 그 극단에 가 있는 수가 있다.
10의 중간은 5의 언저리일 것이지만 100의 중간은 50의 언저리이며, 1000의 중간은 500의 언저리다.
이런 식으로 중용을 추구하다보면, 어느 사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보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위치에 서 있게 된다.
존경받던 어른들이 어쩌다 우리의 실망을 사는 경우는 바로 그 사안에서 '기계적 중립'을 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중용이 미덕인 우리 사회의 요구와 압력을 나 역시 오랫동안 내면화해왔다.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보라.
모난 사람, 기설을 주장하는 사람, 극단으로 기피하는 인물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언제나 '중용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 더
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
첫댓글 예 백번 공감가는 말씀입니다. 핵발전소의 실체를 알고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말하고 글을 쓰고 걷고 한 사람 한 사람 깨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게 되지요. 생사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서야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요. 핵 앞에서 중립을 얘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핵에 대해서 아직 무지하다는 자기 고백일 뿐이지요. 핵없는 세상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세상입니다. 핵없는 세상, 핵없는 삼척, 핵없는 영덕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