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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소망
고전 15:51-58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1-58 / 그러나 이제 신기하고 놀라운 비밀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다 죽지 않고 새로운 몸을 얻을 것입니다. 52)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들릴 때 죽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순식간에 결코 죽지 않는 새로운 몸을 가지고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살아 남아 있는 우리들도 한 순간에 새로운 몸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53)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죽을 수밖에 없는 땅 위의 몸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하늘의 몸으로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54) 이런 일이 일어날 때 ㄴ) `승리가 죽음을 삼키리라'는 성경의 말씀이 사실이 될 것입니다. (ㄴ. 사25:8) 55-56) ㄷ) 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있느냐?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죄, 곧 죽음을 가져오는 독침은 없어지고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율법도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재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ㄷ. 70인역 호13:14) 57)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어찌 이루 다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58)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장래의 승리는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니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에 항상 힘쓰십시오. 부활은 분명히 이루어지며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본장에서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부활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단락에서는 부활의 비밀과 죽음에 대한 승리를 선포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51-53) 마지막 나팔 곧 재림의 때가 이르면 첫째는 죽은 자들이 먼저 살 것이고, 둘째는 살아 있는 자들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기서 “썩는 것”은 부활 전의 몸을 의미하며, “썩지 아니하는 것”은 부활 후의 몸을 의미합니다(52). 이 변화를 통해 인간을 짓눌러왔던 사망의 권세는 끝이 날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비밀이란 아무나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를 입은 자만이 알고 믿게 됩니다. 육신의 몸은 죽으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성도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썩어 없어지지 않는 변화된 몸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54-56)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는 말씀은 바울이 이사야 25장 8절의 말씀, 곧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54). 그리고 호세아 13장 14절의 말씀 곧 “사망아 네 형벌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침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인용하여 죽음을 조롱합니다. 사망이 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은 죽음의 독이 죄라는 독침을 통해 사람 속에 들어가 사람을 죽인다는 원리를 말합니다. 죽음의 세력은 죄를 통해 인간을 지배합니다. 또한 죄는 인간 안에서 각종 탐심을 일으켜 죄를 범하게 만들고 율법의 정죄하는 권세를 통해 인간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제 죽음은 더 이상 승리를 자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57-58) 바울은 이런 부활 사상에 근거하여 권면을 합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쇠하여지고 썩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습니다. 부활의 세계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삽니다.
적용: 바울은 부활의 신앙으로 승리를 선포하였습니다. 만약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의 재림이 일어난다면 당신이 순식간에 변화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 당신에게 어떠한 소망을 전해줍니까?
불평과 불만, 상처를 주고받는 세상 언어들 속에 살다가 부활의 날 갑자기 천국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민망한 일일까? 부활을 꿈꾸는 자여, 천국 언어를 연습하라! 가정에서부터 천국을 연습하자. 지시와 감시와 불신의 말이 아니라, 믿어주고 참아주며, 서로 축복하고 늘 긍정적이며 소망으로 가득한 언어를 사용하자. 아직 건강하고 살아 있는 동안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믿어주며 천국의 말을 연습하자. 자녀들에게 천국의 언어를 배우게 하는 가정을 만들자.
< 설 교 >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고전 15:48~57 / 지용수목사
‘사람은 물의 포로다.’라고 합니다. 물을 떠나서는 하루도 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이 흐르는 곳에 도시를 세우고 냇물이 흐르는 곳에 마을을 세웁니다.
또 사람은 물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아는 큰 호텔이나 큰 백화점, 큰 식당에서는 인공 폭포를 만들어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게 합니다. 또 아름답게 물결치는 인공 시내를 만들어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사람은 목욕하는 것, 물에 잠겨 있는 것도 좋아해서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도 “시원하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우스개도 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아빠와 함께 목욕을 갔습니다. 아빠가 탕 안에서 “어, 시원하다!”하고 하니, 아이가 첨벙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너무 뜨거우니 바로 뛰어나오면서 “세상에 믿을 놈 아무도 없네.”라고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사람은 물을 좋아합니다.
사람은 물 속에서 생겨 그 때부터 10개월 간 물 속에 둥둥 떠 있다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물과 친한 것입니다. 물소리를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람은 흙을 좋아합니다. 흙에서 나는 오곡백과 먹기를 좋아합니다. 또 땅 차지하기를 좋아해서 서로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립니다. 전쟁을 벌이는 것도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땅을, 흙을 좋아합니까? 우리의 근본이 흙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7절 말씀대로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흙입니다. 저희가 어릴 때는 가까운 곳에 약국도 없고 병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꼴을 베다 낫에 손을 베어 피가 흐르면 그곳에 흙을 뿌렸습니다. 그러면 금방 피가 멈추고 다음 날에는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흙으로 지어져 흙으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은 죽으면 흙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져서 흙을 먹고 살다 죽으면 그 날로 썩기 시작해서 흙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부자라도 아담의 후예는 모두 정해진 시간을 살다가 죽으면 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어서 흙으로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우리도 부어라 마셔라 하며 막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어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비참한 운명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흙으로 지어진 분이 아니십니다. 흙에 속한 사람은 흙에 속한 사람과 같습니다. 아담의 후예는 아담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흙으로 지어지신 분이 아니라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이 땅에 오셔서 나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존재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법칙을 만드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안에 성령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은 바뀌지 않습니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지, 봄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지, 가을이 오지 않습니다. 또 사과가 바람에 떨어지면 공중으로 올라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이 중력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취침 기도를 드릴 때 “주여, 제가 잠을 자는 동안에 제 몸이 천장에 달라붙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력의 법칙이 있어서 우리 몸이 바닥에 있지 공중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법칙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물며 성경의 법칙이 변하겠습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천국 시민권자가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립보서 3:20)
이것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께서 오시고, 성령께서 임하시면 하늘나라 시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미국에 사는 우리 교민들 중에 불법 체류자가 많습니다. 이민 허락을 받지 않고 여행 비자로 갔다가 미국에 눌러 앉아 사시는 분이 적지 않은데, 그분들은 늘 긴장한 상태에서 삽니다. 언제 추방 당할지 모릅니다. 취직도 안 됩니다. 혹 취직이 되어도 일용직이나 임시직으로밖에 들어가지 못하고, 정상적인 직원들이 받는 봉급의 절반도 받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습니다. 자녀들도 신분을 속이고 학교에 보내지만 학교에서도 차별 대우를 받습니다. 시카고의 학교들은 불법 체류자들의 자녀는 받아 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LA는 조금 덜한 편입니다. 그러니 시카고의 불법 체류자의 자녀들 중에 학교를 다니기 위해 LA에 와 있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또 불법 체류자들은 미국을 벗어나게 되면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미국 우리 교회 집사님의 한 친척이 불법 체류자로 있었는데, 멕시코로 일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LA에 있는데 혼자 멕시코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일만 생각하다가 불법 체류자라는 사실을 잊고 그만 국경선을 넘어 이산 가족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불법 체류자들은 꿈에서도 소원이 미국 시민권을 얻는 것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얻으면 시장이나 국회의원 선거도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장관이 될 수도 있고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도 있습니다. 미국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미국 시민권도 하늘나라 시민권에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갈 때 우리 몸은 이대로의 몸이 아닙니다. 영혼은 갈 수 있어도 몸은 이대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몸은 썩고 병들기 때문에 이대로의 몸으로는, 혈과 육으로는 영광의 기업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법을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흙에 속한 사람으로 흙으로 된 형체를 입었지만, 성령을 모시니 하늘나라의 시민권자가 되어 죽어도 천국에 갑니다.
여기에 큰 비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비밀을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밀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세상에 큰 이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서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할렐루야!
우리가 천국에 그냥 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 51절 말씀처럼 순식간에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이 지구촌을 뒤흔들 때 무덤들이 열리고 산들이 부서질 것입니다. 산 속에 있는, 무덤 속에 있는 시체들이 다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도 폭발하여 해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다가 삼킨 자, 바다에서 죽은 자들이 다 도로 나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불신자들은 그 몸으로 영원한 제2의 죽음, 심판, 지옥으로 들어가고, 믿는 우리는 영광의 몸을 입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썩지 않고 피곤하지 않는 몸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도 예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 몸이 업그레이드 됩니다. 병들고 썩고 죽을 몸이 영원히 썩지 않고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사는 몸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듯이,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통 사고로 다리가 불편하신 분도 그 날에는 건강한 몸으로 부활되는 것입니다. 수술을 받아 칼자국이 있는 사람도 그 날에는 칼자국이 없는 몸으로 부활되는 것입니다. 말을 못하던 분도 말하게 되고 어두운 귀를 가졌던 분도 밝은 귀를 갖게 되고 보지 못하던 분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클레이 폴이라는 철학 교수가 친구 집에 가서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친구의 여동생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어서 몸뚱이만 갖고 사는 그 여동생이 너무나 쾌활하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클레이 폴 교수가 그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내가 네 처지라면 나는 못 견딜 것 같다. 그런데 너는 그 몸으로 어찌 그리 기쁘게 사니?”
“아저씨, 내게 팔 다리는 없어도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입이 있고 좋은 명작을 읽을 수 있는 눈이 있고 가족의 사랑이 있고 친구의 사랑이 있습니다. 더더구나 내게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신데 내가 기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또 그 소녀에게는 ‘지금은 팔다리가 없는 몸이지만, 부활할 때는 나도 팔다리가 있는 몸으로 부활하게 될 거야.’라는 소망이 있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도 그렇게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신바람 나는 일입니까?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젯밤에 설교 준비를 하던 중, 한 분이 생각났습니다. 21년 전쯤, 태백산 기슭에 있는 한 교회에 가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곳은 공기도 좋고, 식사 때마다 태백산 나물이 여덟 가지나 아홉 가지가 나와서 참 좋았습니다. 그때 안수 집사님 한 분이 점심을 대접하면서 울머이시며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어떤 일로 교회가 싫어지고 목사님이 싫어져 교회를 나가지 않았답니다. 그러다 보니 육 개월 간이나 교회를 나가지 않았는데, 그분의 집에 어느 날 도둑이 들어 많은 돼지를 다 싣고 가버렸답니다. 그때 그분이 ‘아, 하나님께서 나를 치시는구나.’라고 깨달았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가 싫어서 교회를 나가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큰 인삼밭에 있는 인삼을 다 도둑맞았답니다. 도둑이 차를 대놓고 인삼을 다 뽑아간 것입니다. ‘내가 주일을 범하니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시는구나.’라고 깨달았지만 여전히 교회에는 나가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집회 전 날 캄캄한 밤에 하늘에서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자는 교회당으로 모여라.”하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래서 그분도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러 쏜살같이 교회로 달려갔답니다. 밖에는 시커먼 지옥의 불길이 막 타올라 아우성 소리로 야단인데, 교회만 밝은 빛이 비취고 있더랍니다. 교회로 들어가니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더랍니다. 그분도 자리에 앉아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얼마 후에 금줄이 내려와서 보니 그 금줄 끝에 금 명찰이 있더랍니다. ‘○○○ 목사’ 목사님이 그 줄을 잡으니 줄이 주르르 올라가더랍니다. ‘○○○ 장로’ 장로님이 그 줄을 잡으니 또 줄이 주르르 올라가더랍니다. 차례차례 금 명찰이 내려와 교회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줄을 붙잡고 올라갔답니다. 남은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더랍니다. 그래서 그분이 부르짖었답니다.
“하나님, 제 명찰도 내려 주세요. 제 명찰도 내려 주세요. 왜 제 명찰은 내려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래도 명찰은 내려오지 않고 나중에는 지옥의 불길이 교회에까지 들어와 확 에워싸더랍니다. 그분이 너무 무서워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게도 명찰을 주세요.”하고 기도하다가 깨니 꿈이더랍니다. 그런데 자기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날 새벽에 교회에 나왔는데, 교회를 보니 그렇게 좋고 목사님 얼굴을 보니 그렇게 반갑더랍니다.
그분이 점심 식사 대접을 하면서 “제가 참으로 바보짓을 했습니다. 참으로 바보짓을 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 생활하시다가 제 얼굴이 보기 싫고 교회에 나오기가 싫어지는 때가 없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싫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분의 꿈이 현실이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
예수 영광 중에 구름 타시고
천사들을 세계 만국 모든 곳에 보내어
구원 얻은 성도들을 모으리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잔치 참여하겠네」 할렐루야!
그 날은 우리에게 반드시 옵니다. 이것은 만화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약속입니다. 그때 우리 중에 이름표가 내려오지 않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 올라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사망을 삼켜버려 우리에게 사망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독은 죄입니다. 죄의 독이 우리를 사망하게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
죄의 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담배 독도 무섭고 술독도 무섭지만 담배 독이 술독보다 훨씬 더 무섭답니다. 미국의 워싱턴 대학에서 2년 간 담배를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술로 죽는 사람이 천 명이라면 담배로 죽는 사람은 만 명이 된답니다. 그리고 2년 간 동물들에게 담배 연기를 뿜어댔더니 담배 연기가 닿는 부분에 암이 발생하는 비율이 44%였답니다. 하지만 담배 독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독입니다. 담배나 술은 육신의 생명만 죽이지만 죄는 영혼까지 죽이는 것입니다.
그 죄의 독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해독되었습니다.
뱀에게 물려 독으로 죽어가는 자들이 모세가 만든 놋뱀을 바라보는 순간에 해독되어 살았듯이,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는 순간에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는 사망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호세아 13장 14절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호세아 13:14)
이사야 25장 8절에도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사망을 영원히 이긴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암에 걸릴까, 교통 사고를 당할까, 전쟁이 일어날까 걱정합니다. 암에 걸리거나 큰 교통 사고를 당하거나 전쟁이 일어나면 사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사망을 이겼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이긴 자가 된 것입니다.
사망을 이긴 우리에게 인생에서 이기지 못할 문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망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갖가지 문제를 이기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가 이기기를 원합니다.
제가 제 아들을 사랑하니 제 아들이 이기기를 원합니다. 제 막내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미술학원에 다닐 때 간간이 친구들에게 얻어맞고 다녔나 봅니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있고 아주 풀이 죽은 모습으로 들어오곤 했습니다. 하루는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이 제게 “아빠, 오늘은 아이들 네 명이 나를 둘러서서 때리는데, 내 간이 떨어지는 것 같았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속이 상합니까? 그래서 제가 고민하다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남자로 태어나서 그렇게 맞고 다니면 안 된다. 너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권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쯤 가르친 후에 전략까지 세워 주었습니다.
“성찬아, 한 아이가 덤비든 열 아이가 덤비든 상관없다. 아이들은 똑같다. 한 놈만 집중해서 공격하여 코피를 내면 다른 아이들은 다 도망을 간다. 한 놈만 집중해서 공격해라.”
그 후 어느 날, 미술학원의 아이 네 명이 또 제 아들을 때리려고 에워쌌답니다. 제 아들이 제게 배운 대로 가장 큰 아이를 집중해서 팍 치니 그 아이의 코피가 터졌답니다. 그러니 다른 아이들이 다 도망을 갔답니다. 그 날, 제 아이가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빠, 코피 냈다!”
그 후로 제 아들이 간간이 친구들을 때리고 왔습니다. 하루는 모 회사 이사의 아들을 때려 코피를 내고 왔는데, 그 부인이 저희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의 아들이 사람을 칩니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좋았습니다. 자식이 맞고 오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마귀에게 얻어터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를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면 이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기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이기게 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할렐루야!
이기는 비결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뚝이는 아무리 내동댕이쳐도 오뚝 섭니다. 아무리 집어던져도 오뚝이는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섭니다. 왜입니까? 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뚝이의 추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가 어디에 처박혀도 우리는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실패해도 이깁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면 우리를 당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뚝이의 추를 뽑아내면 오뚝이가 던져진 대로 처박혀 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무엘하 8장 6절에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사무엘하 8장 14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지용수가 어디로 가든지,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조건이 붙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동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과 동행하면 걱정이 없지 않습니까?
부모와 함께 가는 어린아이는 태풍이 불어도 괜찮고 비가 와도 괜찮습니다. 도랑을 만나도 아빠가 안아서 건네주니 걱정 없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걱정 없습니다. 엄마 아빠가 늘 보호해 주고 때가 되면 먹여 주니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면 어떤 문제가 와도, 캄캄한 일을 만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사 홍해를 만난다 해도 우리 주님께서 갈라 주실 것을 믿으니 괜찮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오셔서 항상 우리를 떠나지 않고 계시지만 우리가 잘못 살 때는 일하지 않으시고 괴로워하시고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즐겁게 해 드릴 때 주님께서 활동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29절에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여러분, 내 마음을 아내에게 속일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 속일 수 있습니다. 내 아내가, 내남편이 내 마음을 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지저분한 것, 냄새나는 것을 두면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의 방에 있는 쓰레기 같은 것, 더러운 것,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성령의 불로 태우고 주님의 피로 청소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꽃 같은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 넣어야 우리 주님께서 기쁨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내 아내를 속일 수도 있고 부모를 속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얼마나 잘 속입니까? 영어 사전 한 권을 사면서 돈을 세 번이나 받아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엄마, 영어 사전 사게 돈 주세요.” “엄마, dictionary 사게 돈 주세요.” “엄마, 콘사이스(concise) 사게 돈 주세요.”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서울에서 가난하게 사는 어느 부부가 하루는 등산 갔다 내려오는 길에 아주 싼 포도를 보았습니다. 포도밭에서 따온 포도를 파는데, 가게에서 파는 값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었습니다. 형편이 여의치 못해 아이들에게 과일 한 번 제대로 먹이지 못한 엄마는 아이들 생각이 나서 포도 한 상자를 사 가지고 집으로 왔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잘 먹는지, 삽시간에 포도 반 상자를 먹었습니다. 모처럼 아이들에게 과일을 실컷 먹인 엄마의 마음이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 설거지를 마치고 숨을 돌리려고 하는데,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사시는 시어머니께서 오셨습니다.
“어머님, 이렇게 이른 아침에 웬일이세요?”
시어머니께서 손에 들고 계신 것을 내놓으며 “네 시동생이 나 먹으라고 포도 몇 송이를 사왔더라. 그런데 애들 생각이 나서 못 먹고 갖고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도 가난하여 포도를 사 드시지 못하는데, 작은아들이 사온 포도를 먹고 싶어도 참고 손자들이 눈에 선하여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날 밤에 포도를 먹을 때 시어머니께도 포도를 갖다 드리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가지 않았던 며느리가 얼마나 미안합니까? 큰일났다 싶었습니다. 베란다에는 아직 포도 반 상자가 남아 있습니다. 큰일났다 싶었지만 일단 어머니를 방에 들어오시게 했습니다.
“어머님, 어서 들어오세요. 아이고, 이 포도 맛있겠네요.”
“그래, 맛있겠지? 냄새가 달콤하더라.”
어머니께서는 한 송이도 드시지 않고 냄새만 맡으신 채 그대로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며느리는 집에 있는 포도를 감추기 위해 “어머님, 저도 한 송이 먹어도 되지요?” 하면서 포도를 들고 나와 씻는 체하면서 숨길 곳을 찾았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숨길 곳은 세탁기뿐이었습니다. 며느리는 세탁기 속에 포도 상자를 넣고 옷으로 덮었습니다. 바로 그때 전화가 왔습니다. 학교로 스케치북을 갖다 달라는 아들의 전화였습니다.
“어머님, ○○가 스케치북을 갖고 가지 않았대요. 얼른 갖다 주고 오겠습니다.”
스케치북을 갖다 주고 오니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베란다에 나가셨다가 세탁기 안에 빨래가 많으니 세제를 넣고 세탁기를 돌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그 포도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결국 어머니께서 엉망이 된 빨래를 보시게 되었습니다.
“너희 집에서는 포도도 세탁해서 먹니? 포도를 상자로 사다 놓고 먹으면서도 내게는 한 송이도 가져다 주지 않니?”하시며, 몹시 섭섭해 하시면서 바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너무 미안해서 그 이후로 포도를 한 번도 사 먹지 않았답니다. 며느리가 감추려고 했던 것이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드러나지 않게 감출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오래 전에 우리 교우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여자의 몸으로 하루 열두 시간 기계 앞에 서서 일했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찬송을 들으며 버텼습니다. 회사에는 제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언니들이 있어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언니들이 저를 강제로 나이트클럽에 끌고 가, 두 번이나 갔었습니다. 억지로 끌려갔지만 교인이 나이트클럽에 가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여러분의 발길이 머무는 그 곳에 여러분의 자녀가 가도 복이 되는 자리입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마음이 찔려서 고민하다가 그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 회사에 있으면서 나이트클럽에 가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 직장을 주셔서 들어가보니, 사장님이 장로님이시고 사모님이 집사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주일성수도 잘 할 수 있고 보수도 지난 번 회사보다 더 많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분이 ‘내가 가는 자리에 내 아들딸이 가도 좋은 자리인가?’하는 그것 하나만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중합니다. 우리 생활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구멍가게를 여시면 실패하시겠습니까? 반드시 성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사를 경영하시면 실패하시겠습니까? 반드시 성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장인으로 들어가시면 직장을 무너뜨리시겠습니까? 직장을 세우고 직장에서 성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학교에 입학하셔서 공부하시면 반드시 우등생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회하시면 승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게를 하든 식당을 하든 병원을 하든 공부를 하든 목회를 하든 하나님께서 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학생들도 하나님과 함께 공부해야 됩니다.
저는 전화할 때도 그냥 하지 않습니다. 어느 장로님이나 어느 집사님께 전화할 때 꼭 기도하고 합니다. 제가 하는 전화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직원회의에 임한 적이 없습니다. 기도 방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하나님, 우리 직원회의를 하려고 하는데, 어떤 말씀을 전해야 되지요?’하고 기도한 다음에 합니다. 우리 장로님들을 모시고 회의할 때도 꼭 무릎을 꿇고 ‘하나님, 오늘 장로님들과 의논할 건데 어떻게 해야 하지요?’하고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게 해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따라 합시다.
“우리는 승리자다. 우리는 승리한다.”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늘 주님과 함께 걸어가셔서 승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장 50~58절 / 이충섭목사
지난주일에 우리교회에 새로 들어온 여자 고등학생이 있습니다. 이름이 <강하양>입니다.
이름이 하양이란 순수한 한글 이름입니다. 이름의 뜻을 물어 보았습니다. <안좋은 것들에 물들지 말고 항상 깨끗하고 맑게 살아가라>는 뜻이라고 아버지가 이름짖어 주셨다고 합니다. 저는 이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고난주간에 있는 주일에 왔습니다. 고난주간에 들어오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이름을 뜻가진 사람이 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교회를 통해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실려는 놀라운 계획이 있습니다.
오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동시에 승리교회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는 교회입니다. 승리교회가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이 부활절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세상에서 절망하고 낙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희망이 있는 사람으로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교회가 되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가슴 속에 희망이 있으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을 준 사건입니다. 교회는 이땅의 소망입니다. 부활절은 인류의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 십자가로 부활의 희망이 있습니다.(50-52절)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4장 17절)입니다. 천국은 회개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갑니다. 천국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면 좌절합니다. 사람은 그 어떤 절망적인 환경 가운데서도 희망을 찾아 몸부림 칩니다. 사람은 가슴 속에 희망이 있으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의 빚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 지시고 사흘 만에 그 빚을 다 갚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든 죄가 눈 녹듯이 녹아 버리고 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것 없이 모두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 승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당하셨던 멸시와 조롱은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멸시와 천대를 대신 당하시는 그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흐르셨던 그 피는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병들고 상처받는 마음을 치료하는 은혜가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흐르신 불은 창자국의 피와 물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뜨거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십자가에서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끊을수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창립 2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복음 전파를 하셨고, 병든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전파하시고 병든자들을 고치신 이유가 다 예수님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살지 말고 의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십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영에 사로잡히지지 말고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병든 인생이 아니라 건강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재벌로 살아야 합니다.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천재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나를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새로운 생각을 주시고 날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하십니다. 새로운 일에 시도하는 것을 주저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는 삶입니다. 기쁨과 희락이 있는 삶입니다.
2. 부활로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54절)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을까요?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져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셔서 사람을 대표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2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종교는 인간의 소원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만이 죽음을 격파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부활을 통해 죄를 청산하시고 삶의 의미를 확립하시고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제 절망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는 소망밖에 없습니다. 죄와 무의미가 사라졌습니다. 죽음도 사라졌습니다. 천국과 영생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법을 이기시고 생명의 법으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고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을때 사망이 극복됩니다. 사망보다 더 강한 생명, 원래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영원토록 산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사망의 두려움에서 극복된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두려워할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야 말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정상적으로 살 때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삶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도 죄를 짓고 살면 이것은 사망의 삶입니다. 즉 생명과 사망은 목숨이 붙어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도 있겠지만 살아 있을때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느냐가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썩어질 수 있습니다. 목숨은 살아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썩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부터얻은 생명은 죽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망이 우리를 잠깐 이겼으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망을 극복하는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생명의 은혜를 얻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세상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줄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공급되어 있는 교회는 이세상의 아무런 희망이 없다 할찌라도 소망이 있습니다. 왜나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이기고 새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망이 있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1mm만 떨어져도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3. 새 생명으로 부활의 승리가 있습니다.(57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신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가상의 부활이 아니고 이론의 부활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호흡을 다시 하는 것이고, 의식이 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한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며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새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은 다른 길을 통해서 생기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수 있습니다. 새 생명은 사망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김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새생명을 얻는 사람이기에 우리는 사망을 이기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사마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망을 향하여 물러가라고 강하게 선포하는 능력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이미 사망을 이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이김을 허락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감사하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새생명을 얻음에 감사하는 사람은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새 생명을 얻음에 감사하는 사람은 또 다른 새 생명을 얻는 일에 용기가 있습니다. 새 생명을 얻는 일에 헌신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생명의 일을 계승하고 이어 갑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로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새 생명을 얻었고 우리는 아직까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새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할 일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얻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한 영혼을 살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시고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한 영혼을 전도하기 위해 예수님처럼 고난과 사랑을 감 수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교회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교회에 다니고 계십니까?> 이 질문은 새생명을 찾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새생명을 찾아가는 삶은 풍요롭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사도바울이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역을 이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망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을 힘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사망을 이길 수 없으나 주님이 주신 생명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얻는 새 생명을 누구도 뺏을 수 없고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 사역을 이어가는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이긴 사람들이고, 이기기로 준비된 사람들이며 이기기로 예정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새생명을 찾는 일에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에서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새생명에서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흔적이 나와야 합니다. 나의 시선의 초점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마음의 초점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영혼의 초점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삶의 초점이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이길수 있는 승리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동시에 승리교회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 초점을 두고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망이 아닌 절대 희망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승리
이수영목사 / 고린도전서 15:50~58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 앞서서 부활의 타당성과 확실성을 역설했습니다. 이제 그는 부활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본문 50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다”는 앞부분의 말과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뒷부분의 말은 사실상 같은 내용의 말을 반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혈과 육”이라 한 것은 우리의 현재의 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몸은 썩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썩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썩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살기 위해서는 썩을 현재의 몸을 벗고 썩지 않을 새 몸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썩지 않을 새 몸을 입는 부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살게 될 사람들이 썩지 않을 새 몸을 입어야 할 것을 말한 사도 바울은 이어서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라.” 하는데 여기서 “비밀”이라고 번역된 말은 사실은 “신비한 것”을 가리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고 따라서 아무도 본 적도 없으며 그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 신비스러운 일이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미리 들어 깨달아 안 예언자처럼 확신에 가득 차서 말합니다. 본문 51-53절을 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사도 바울은 먼저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잠 잔다”는 말은 죽음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라”는 말은 부활과 놀라운 변화의 사건이 일어날 마지막 때 살아있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죽지 않고 살아있을 사람들에게는 부활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부활하리라”는 말 대신 “변화되리라”는 말을 씁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과 놀라운 변화의 사건이 나팔소리와 함께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현현을 표하기 위해서, 또 예배나 커다란 축제나 대관식 같은 특별한 행사나 공공집회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군대에 전투준비를 지시하기 위해서 나팔을 불곤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나팔”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다시 오심을 알리는 소리일 것입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는 경고음일 것입니다. 온 천하 사방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신호음일 것입니다. 죽은 이들을 무덤으로부터 불러일으키는 신호일 것입니다. 사탄과 악의 세력에게 최후의 일전을 알리는 함성일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인 신호일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의 완성된 그의 나라로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나팔소리가 나면 그때 살아있을 사람이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사람이나 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영원히 썩지 않을 새 몸을 입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라”는 것은 새 몸을 입는 놀라운 변화가 순식간에 일어나리라는 뜻도 있지만 그 부활의 때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게 갑자기 오리라는 뜻도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순식간에 벌어질 이 대사건이 상상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와는 전혀 다르면서도 그 때와 유일하게 맞먹을 만한 천지개벽이 될 것입니다. 그런 천지개벽은 전에도 없었고 또 다시 없을 천지개벽이 될 것입니다. 이때 그야말로 천지가 진동할 것입니다. 나팔소리 때문에라기보다 죽었던 모든 이들이 일시에 다시 살아나는 것 때문에 진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모두가 다 썩지 않을 새 몸을 입게 되는 일 때문에 천지가 진동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주의 모든 역사 속에서 3대 사건 중 세 번째가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천지창조였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이었는데, 세 번째가 부활과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시작이라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입니다.
이렇게 우주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사건이 일어날 것을 마치 그림을 보여주듯이 설명한 사도 바울은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나 호세아 같은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이미 알리신 일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54-55절을 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여기서 “기록된 말씀”이라 한 것은 사도 바울이 사25:8과 호13:14의 말씀을 70인경에서 자유롭게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종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라고 했습니다. 누가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라는 말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나 입기는 우리가 입지만 우리 스스로 입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주체이실 것입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게 되는 것”도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곧 우리의 것이 됩니다. “사망을 삼킨다”는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망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존재에서 영원히 죽지 않을 존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우주에 사망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뜻하셨던 것을 성취하시는 일이겠지만 그 일등 수혜자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을 삼키시고 이기심으로써 우리가 사망을 삼키고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승리인 것입니다.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만듦으로써 얻은 줄 알았던 승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얻은 줄 알았던 그 승리를 완전히 뒤엎으시며 사탄과 인류의 죄와 악의 역사를 완전히 종식시키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하는 말씀은 죽음이 우리를 이기고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결정적 원인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죽음이 사람을 이기고 자기 권세 아래 두던 시대는 끝나고 더 이상 죽음이 없는 세상이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최종승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두시는 것이고 우리가 영원히 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말씀은 사망의 비밀병기 즉 사망으로 하여금 우리를 죽이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이 무엇인가 묻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 또한 죄가 우리에게 치명상을 입혀 죽게 만드는 시대는 끝나고 우리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승리라는 것입니다.
옛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던져진 그 물음들에 대해 이제 사도 바울이 답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이 쏘는 것은 죄라”는 말의 뜻은 죽음이 우리를 이기고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결정적 원인, 그 치명적 독은 죄라는 것입니다. 즉 죄 때문에 우리가 죽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라”는 말은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이 자연적인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부터 사람은 누구나 웬만큼 살다보면 죽게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는 한 영생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 때문에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생하게 하시는 창조시의 본래의 계획을 이루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폐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폐하시기 위하여 죄를 소멸시키신 것입니다. 죄를 소멸시키시기 위하여 우리를 율법 아래에서 믿음의 법 아래로 옮겨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승리인 것입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는 말의 뜻은 죄가 우리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되었고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에 따라 의롭다고 인정되거나 정죄되는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끝났고 이제는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택하셔서 믿음을 주신 백성이 자유롭고 복된 삶을 영원히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승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57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하며 말하는 승리가 그 승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는 율법이 더 이상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우리를 죄인 만들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우리를 죽음은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쏘는 것인 죄를 무력화시키셨기 때문에 사망 자체가 힘을 잃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율법의 행위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죄의 권세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에 대해서도, 죄에 대해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다 승리를 거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는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게 하시는 승리이고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시는 승리이며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는 승리입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가 무엇인지를 밝힌 사도 바울은 부활에 관한 확신에 차고 소망이 넘치는 그의 글을 마치기에 앞서 그런 승리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앞에 놓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해 권면합니다. 본문 마지막 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율법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함을 얻고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받은 우리에게 이제 이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흔들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힘쓰지 못하게 만들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즉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행하는 그 어느 것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 위에 견실하게 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과 부활과 영생의 소망 위에 견실하게 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두셨고 또 거두실 승리의 기쁨을 맘껏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소망
고전15장 50절 ~ 58절 / 손상률목사
생명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삼일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되는 것이며,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만이 가지는 최상의 소망인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가장 큰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도 죽음이 눈앞에 오게되면 모든 것은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마귀는 항상 죽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위협하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사실 삶과 죽음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일이지만(히9:27), 마귀는 갖은 방법으로 죽음의 공포를 조성하면서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여간 담대하고 큰소리 치던 사람도 죽음이라는 무기를 들이대면 마귀에게 손을 들고 맙니다. 그러나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도리를 믿는 사람에게는 마귀의 위협이 전혀 먹혀 들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를 공포에 몰아넣거나 낙심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4:8-10).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을 축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이 진리가 우리들의 믿음과 생활에 미치는 신령한 교훈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Ⅰ. 죽음 앞에 선 인간 모습
창조주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전도서 3:1에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은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삼상20:4). 인생을 제대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음 앞에 서 있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곤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을 정의할 때 호흡이 끊어지므로 신체에 생명작용이 정지된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서 12:7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 죽음을 선고하였습니다.
창세기 2:16-17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히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뱀의 꾀임에 빠져 그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창3:6).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남으로써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창세기 3:22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하고 그들을 멀리로 격리시키며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 나무의 길목을 지키게 하였습니다(창3:24).
(2) 죽음으로부터 도전받는 삶
욥기 5:7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서 2:23에는 사람이 일평생 근심과 수고로 밤낮없이 쉬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생의 고난이나 근심은 모두 죽음을 유발하는 갖가지 고통들입니다. 질병, 재난, 사고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 조여드는 갖가지 불안과 공포증은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의 고통을 재촉하는 현상이 됩니다.
로마서 7:24에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탄식하였습니다.
사실 죄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죽음의 공포에서 자기를 방어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하려 하지만 자기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히브리서 2:15에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려 하심이니"라고 복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3) 죽음을 보고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성경은 "천하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은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전3:1-2)라고 하여 죽음을 매우 평범한 진리로 가르쳐 줍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 죽음을 선고하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창3:19). 죽음이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임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할 때 이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마냥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피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담담하게 받아 들이며 여기에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죽음을 앞둔 다윗이 그 아들 솔로몬에게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왕상2:2).
솔로몬은 죽음의 의미를 가치있게 평가하면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전7:1-5)
Ⅱ. 기독교의 부활 신앙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근원이며 참 생명의 공급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에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근본이시며 생명의 공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본체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었습니다.
만일 무덤 속에 장사 지낸바 된 그 상태에서 계속 머무셨더라면 예수님을 참 생명이라고 한 말은 허구에 그쳤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3:29-30에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고 하였습니다.
(1) 부활 신앙의 예표
신·구약의 모든 성경은 그 계시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습니다(요5:39). 구약은 여러 시대에 걸쳐 인물과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에게 소개하는 예언서입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것과 그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리스도 사역의 예표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 중 가장 초기의 인물로 알려져 있는 욥은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내다보면서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욥19:25-26).
민수기 17:8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각 지파 두령들이 자기 지파의 이름을 쓴 지팡이를 하나씩 거두어 회막에 두었는데 하루밤 새 레위 지파의 대표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고 하였습니다.에스겔 37:1-10에는 에스겔이 본 마른 뼈의 환상이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에스겔은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언할 때 생기가 들어가서 해골들이 살아 일어나는 광경을 본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사는 부활의 예표들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님께서는 평소 제자들에게 그 자신이 유대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실 것과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누차 말씀 하셨습니다(요2:19-20). 마태복음 16:21에 보면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40에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은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하여 새 무덤에 장사지내졌습니다(마27:59). 그때 대제사장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군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무덤을 수직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평소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마7:62-65). 과연 예수님은 그가 말씀하신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무덤이 열리고 수직하던 군병들은 무서워 죽은 사람 같이 되었습니다(마28:1-4).
이 사건은 안식후 첫날 이른 새벽 무덤을 찾아갔던 사람들에게 그곳에 나타난 천사가 직접 증거해 주었습니다(마28:5-7). 그후 예수님께서는 사십일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행1:3, 9-11).
(3) 성도의 부활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부릅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되는 예수님의 부활 도리를 논증하고 있는데 먼저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예언이 성취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3절). 그는 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부활의 사실성을 증거하였습니다(5-8절).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인간의 상식이나 과학적인 지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신비로운 도리임을 역설하였습니다(35-49절).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말씀의 가장 큰 비중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성도들의 부활과 직결된다는 사실입니다.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51-52절에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촌으로 죽은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신 자리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요11:25-26).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에 대한 예고편입니다.
Ⅲ. 그리스도인의 소망
죽음이 인생에게 최대의 절망이라면 부활이야말로 모든 것을 이기게하는 승리의 첩경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확실한 소망을 안겨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소망을 강조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는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였습니다(17-19절).
이와 같은 논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확실하므로 우리의 신앙과 소망에 조금도 이상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 고난의 가치
성경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신앙적인 차원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의를 추구하면서 당한 고난이나(마5:10),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성도가 핍박을 당하는 경우(딤후3:12), 진리를 파수하고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과(벧전1:7) 주와 복음을 위하여(행5:41), 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골1:24) 당하는 고난을 매우 가치있는 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하였고(벧전2:19), 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2:21).
의롭게 당하는 고난이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에게 부활이 있고 천당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당하는 고난은 그 날을 위해서 준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8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2) 확신과 인내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확실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소망은 미래를 기약하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농부가 가을에 거둘 열매를 바라고 이른 봄부터 씨를 뿌리고 가꾸면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약5:7).
그는 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약5:11).
로마서 8:24-25에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3) 궁극적인 승리
죽음 앞에 인생을 빼앗기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잃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죽음을 당해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욥은 삽시간에 재산과 자녀를 다 잃었지만 저는 잃은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욥1:21). 오히려 그는 죽음 다음에 오는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욥19:26). 또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욥23:10).
이처럼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저력을 발휘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기독교의 부활 신앙을 논증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15:57).이는 성도에게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노래
고전15장 50~58절 / 윤창용목사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하여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활장은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오해하고 있는 분들 때문에 쓰인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까지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의심하는데 대한 답을 주고 있으며, 35-49절은 죽은 자들이 산다면 어떻게 살며 어떠한 몸으로 사느냐에 대한 답을 주고, 50절 이하 오늘 본문은 부활 신앙의 결론으로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한 자의 승리의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의 군병들에게 찢기고 조롱당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라고 고린도 전서 15장 13절, 14절에서 말씀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렇습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신앙의 근간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확고하게 믿어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부활은 있습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부활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가 하는 질문은 수세기 동안 신앙인들을 괴롭혀 온 난제입니다. 믿자니 이성이 울고 안 믿자니 믿음이 없는 것 같고.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안 믿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지는 못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용감함을 믿습니다. 그의 임진왜란 때 활약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옥포해전, 한산도해전의 승리, 노량해전에서 적의 화살을 맞고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죽은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역사가들의 증거를 통해 압니다. 또 세종대왕의 숭고한 업적을 믿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훌륭한 인품을 믿습니다. 모두 만나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만나보고 전해 준 사람들의 역사적 증거를 통해 믿습니다.
1.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이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 전서 15장 말씀 전인 5절부터 8절가지의 말씀에서 부활의 목격자로 베드로, 열 사도, 5백 여명의 제자들 그리고 바울에게까지 나타나셨다고 증거합니다. 한두 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5백 여명이 일시에 본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환상일 수가 없습니다. 복음서에도 목격자들이 많습니다. 마리아 등 여자들이 보았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과 음식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하다 순교하기도 하고 고난 당했습니다. 만약 이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거짓말 때문에 제자들이 죽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 조작된 허구를 위해 죽을 사람은 없습니다. 베드로 같은 제자는 주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못 박힐 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린 소녀 앞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담대하게 그리고 거칠 것이 없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베드로를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가 부활을 확신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떻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 수 있었겠습니까?
2.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희망과 힘을 줍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20절과 21절을 보면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이 말씀은 이 부활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제 그 분을 믿는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으로 인해 얻은 죄를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사함을 얻을 수 있고 아담으로 인해 우리에게 찾아온 죽음이라는 멍에를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부활의 신앙이 힘이 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부활합니까?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의 개념이 아닙니다.
3. 부활의 몸이 따로 있습니다. 지상에서도 사람이나 짐승, 새의 육체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육체라고 다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는 하늘의 형체가 있습니다. 지상의 썩을 몸은 부활의 썩지 않을 몸으로, 육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난다고 합니다. (고전15:43,44)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썩을 몸이 썩은 후에 영원히 있을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신령한 몸을 적절히 표현하기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우리 중에 누구도 그 몸을 입고 부활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는 것, 본 것, 경험한 것을 말하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에 오해가 있기도 합니다. 하물며 아직 경험하지 않은 신령한 몸을 우리의 언어로 잘 말할 수 있을까요? 잘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의 제한적인 삶과는 다른 시공을 초월한 영원의 세계의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어렴풋이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볼 수 있었습니다. 도마 같은 이는 만져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육안을 가지고 있음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눅23:13-35)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음식을 함께 잡수셨습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몸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몸과 같지 않다는데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만약 지금같은 몸으로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주님 부활한 후에는 제발 제 키를 5cm만 더 늘려서 부활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 분이 있다고 합니다. 나이 드셔서 하나님 나라 가신 권사님이 원하시는 것은 부활하신다면 젊었을 적 예쁜 소녀와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활이후는 아픔이나 죽음이 없습니다. 작고 큰 것도 없습니다. 잘생기고 못생긴 것도 없습니다. 뚱뚱하여 다이어트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얼마나 희망적입니까? 물론 이중에는 지금도 잘 생기고, 지금도 예뻐서 부활해도 걱정 없고, 지금도 미모에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만, 어쨌든 바울은 우리가 부활 후에 입게 될 신령한 몸이 신비하고 아픔도 없는 몸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부활이후에 우리가 누리게 될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같이 살펴 본 본문은 사망을 정복한 부활과 승리의 노래입니다. 부활신앙은 어두컴컴한 죽음의 무덤이 삶의 희망찬 노래로 바뀌는 것입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55절에서 말하자면 희망가를 부르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여러분 얼마나 기세 등등합니까? 얼마나 위풍당당합니까? 사망이라도 무섭지 않다는 바울의 각오가 배여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 때 이런 말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을 보면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바울과는 얼마나 대조적인 말씀입니까? 죄의 너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 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런 바울이 이제 부활의 신앙을 확신하고 다시 신앙의 승전가를 부릅니다. 부활을 확신하지 않고서는 이런 신앙고백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지휘관이 군기가 빠진 자신의 부대원들에게 기합을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북한군과 싸울 때 공군력은 확실히 우세한데. 그러나 육군이 문제이다. 제군들은 북한군 한명을 맞닥트렸을 때 싸워 이길 수 있는가?
그러자 어느 병사가 손을 번쩍 들더니 "저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정도는 문제 없습니다" 일당 백은 아니지만 일당 둘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랬더니 그 옆의 한 병사가 또 손을 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저는 저 사람을 대신해서 집에 가겠습니다" 군인들이 해병대 마저도 일반인들에게 무기를 뺏기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군인들이 전의를 상실한다고 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대해 아무 관심도 나라에 대한 신념도 없다는 반증입니다. 이렇듯이 신앙인들도 싸울 태세가 되어있지 않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승전가를 부를 때까지 영적 전쟁에서 싸워 이겨야 한다는 분명한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부활을 확신하는 한 신앙인의 이 승전가는 바울의 것만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좋으냐? 나쁘냐? 이것은 전적으로 부활신앙으로 무장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 후에 사망이 우리를 묶었습니다. 그 사망의 끈을 끊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 사망의 끈을 끊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가장 위대한 승리
고전 15:50-58 / 서화평목사
우리 기독교의 최대의 절기인 부활절 아침입니다. 오늘 예배하기 위해 모인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유일한 특징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오직 예수만이 이루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새생명의 종교인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를 하신 부활 예수를 이 시간 모시고, 큰 기쁨과 영광을 함께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옛부터 이 부활절에는 계란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1071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회교도들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다시 찾기 위하여 기독교의 청년들이 모두 십자군이 되어서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 무렵 자그마한 마을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어느 날 이 마을에 얼굴이 예쁘고 고운, 그러나 남루한 옷을 입은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모자린드(Mozarlind)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마을에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군대에 나가고 집은 고약한 사람에게 빼앗겼습니다" 부인을 본 집 주인은, "참 안되었군요 저의 집에 남은 방 한 칸이 있으니 거기서 사십시오." 하고 인정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부인은 감사하다고 절을 하면서 그 날부터 이 마음씨 고운 주인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줄을 지어 이 부인에게 먹을 것과 생활용품을 갖다 주었습니다. 모자린드 부인은 이 고마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하여 닭을 사다가 길러서 마을 사람들에게 보답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원래 유럽 쪽에서는 닭이 매우 귀했습니다. 부자들이나 닭을 길렀습니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닭을 기르는 집이 한 집도 없었습니다. 모자린드 부인은 멀리 가서 닭을 몇 마리 구해왔습니다. 닭은 잘 자라서 알을 낳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알은 다시 병아리가 되었습니다. 닭의 숫자도 많아지고 알도 많이 낳았습니다.
그 해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모자린드 부인은 동네의 어린이들을 모두 초청하여 잔치를 하였습니다. 맛있는 요리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좋아하였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부인은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뒷동산에 가서 나무 밑에다가 새둥지를 하나씩 만들어 놓고 그 둥지에 이름을 달아두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왁자지껄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새둥지를 만들어 놓고 왔습니다. 부인은 아이들에게 마실 쥬스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노는 동안에 준비하였던 달걀 그릇을 가지고 뒷동산에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새둥지에 달걀을 하나씩 놓고 돌아왔습니다. "자 이제 다시 뒷동산으로 가서 자기가 만든 둥지에 있는 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아이들은 뒷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둥지에는 색칠을 예쁘게 하고 예쁜 글씨를 쓴 달걀이 한 개씩 들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달걀을 가지고 기뻐서 떠들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달걀에는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자. 하나님은 사랑이 있고 마음 착한 사람을 도우신다" 이 말은 모자린드 부인 가정의 가훈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고 모자린드 부인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그 날 오후 모자린드 부인은 낯선 소년을 만났습니다. 그 소년은 앓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러 먼길을 걸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부인은 그 소년에게도 부활절 달걀을 주었습니다. 소년은 달걀을 받아들고 부지런히 길을 갔습니다.
어느 산 고개를 넘을 때 소년은 길에 쓰러진 기진한 병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그 병사가 너무 불쌍하여 가지고 가던 달걀을 주었습니다. 병사는 고맙게 달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달걀에 쓰인 글씨를 보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병사는 이 달걀이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달걀을 준 부인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이 병사는 모자린드 부인의 남편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갔다가 제대하여 돌아왔으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찾아다니다가 지쳐 쓰러진 것입니다. 모자린드 부인은 그 달걀 때문에 헤어져서 소식도 몰랐던 남편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살던 집도 다시 찾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인류의 가장 큰 패배는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으면 끝장입니다. 지금까지 문화가 발달해 왔고 최근에는 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한 아직도 고개만 숙일 뿐입니다. 아직까지 죽음을 정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늘 관심사는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이지만 누구도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떠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직장도, 가족도, 모든 재산도 떠나게 합니다. 죽음 앞에는 꼼짝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와서“가자 하면”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남극도 북극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도, 달도 우주도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1.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승리입니다.
1) 예수님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승리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입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둔 예수님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신 곳을 보라(마28:5-6절).”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약속대로 삼일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부활의 몸을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또한 사도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어느 기적 보다 위대한 것이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은 가장 위대한 승리입니다. 부활신앙으로 삽시다. 부활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를 살리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절).”첫 열매가 있으면 계속해서 열매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장차 예수님 재림하실 때 다 부활할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의 기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지만, 부활은 그것과 다릅니다. 그들은 잠시 살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살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절).”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 바라보지 맙시다. 다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부활로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루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 성도들은 부활의 소망과 기쁨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2)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노래합시다.
성경을 보면 많은 노래들이 나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감격하여 노래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말입니다. 또한 홍해를 건넌 모세의 감격의 노래도 있습니다. 기도로 얻은 아들 사무엘로 인하여 기쁨으로 부른 한나의 노래가 있으며,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바울의 노래가 있습니다.(롬8:37-39)
그러나 이런 노래 보다 더 위대한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을 이긴 노래입니다. 오늘 본문 55절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사람이 죽음을 이긴 경우는 없습니다. 사망의 독침에 모두 쓰려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망의 독침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부활의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렸습니다. 놀라운 역전입니다.“사망이 이김의 삼킴바 되리라(Death is swallowed up in victory).”
우리는 가장 위대한 승리인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해야 합니다.
조지 몰간 목사님이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어느 시골 교회를 목회 하실 때의 일입니다.(잡지사에 글을 기고함) 톰이라는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발로 걸어다닐 수도 없는 그런 처지였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총명했고 믿음이 좋았습니다.
부활절을 앞둔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이 어린아이들에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계란 하나씩을 주었습니다. 그 계란 속은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일주일 동안 잘 생각해서 이 계란 속에 생명을 넣어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어느 아이는 그 속에 꽃을 꺾어서 넣어왔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꿈틀거리는 곤충을 잡아서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톰은 빈 플라스틱 계란을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선생님은 톰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몸이 불편하니까 다른 아이들처럼 과제를 해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톰아 숙제를 못 했어도 괜찮다."고 오히려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톰은 심각한 얼굴로 "저는 이 속에 생명을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생명을 담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톰은 부활신앙으로 비어있는 예수님의 무덤을 생각하고, 이 속에 참생명을 담아 가지고 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아이는 얼마 후에 하늘나라고 갔습니다.
오늘은 종일 부활의 노래를 불러 봅시다. 가장 위대한 노래는 예수님의 부활노래입니다.
우리는 영생하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을 가진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을 노래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1) 부활신앙은 우리가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51-52절).”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는 다시 살고, 산 자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을 것을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막델라나라는 14살 된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은 중병에 걸려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임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간,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루터가 딸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아이를 진정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데려가려 하시다니요."
루터는 딸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막델라나, 너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좋으니, 아니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이 좋으니?" 그러자 딸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며,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어요." 라고 말하고는 눈을 감았답니다. 순간 방안에는 침묵이 흐르고 모두들 눈물조차 흘릴 수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막델라나야! 편히 쉬거라, 이제 너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날 것이다. 그리고 곧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래, 우리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 우린 아주 잠깐 헤어져 있는 게야, 난 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련다. 우린 조금도 뒤 다시 만날 테니..." 다시 사는 부활이 있기에 슬픔도 소망으로 바꾼 것입니다.
2) 부활신앙은 감사하며 사는 생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가 죽음을 이긴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믿었습니다. 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생명이 있기에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3) 부활신앙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영원히 사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견고한 믿음으로 살면서 세상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흔들리지 않고, 굳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승리
고전15장 50-58절 / 김영대목사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기쁨과 감격으로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는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울부짖음은 그 날 그 한시간만으로 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녀의 통곡은 기쁨으로, 애곡은 찬양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새로이 만났고, 그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한순간 목이 쉬도록 통곡할망정 예수님의 시신은 그곳에 없어야만 했습니다.
*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없었기 때문에 그 분은 무덤과 죽음을 뛰어넘어 우리의 부활, 우리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없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없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그분의 기쁨으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없었기 때문에 그분은 절망에 빠진 우리를 일으키시사 소망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없었기 때문에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을 때 예수님의 시신이 여전히 그 무덤 속에 있었더라면 어찌 그분이 오늘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분이 지금 나의 힘, 나의 소망이 되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고, 위로가 되시고, 소망이 되시고, 영원한 소망을 주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 - 그것은 예수님이 죽은 채로 무덤 속에 누워 계신 시체가 아니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 나셨습니다. 성경의 약속대로 장사 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멸망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요3:16).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천국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요14:6). 그러므로 부활절은 우리 성도들이 기쁨으로 맞이하는 '승리의 날'입니다. 우리 모두 오른손을 들고 '할렐루야~'를 외침으로 부활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기독교는 결단코 죽은 자의 무덤을 찾아 순례하고 참배하는 무덤의 종교, 죽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무덤과 죽음을 뛰어넘는 참 생명의 종교, 영원한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무덤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명당을 찾을 필요도, 명당에 묻히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부활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깨닫게 했고,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케 하였으며,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소망 중에 죽을 수 있게'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모든 신앙의 터전이나 오늘 전하는 설교나 찬양이나 모든 교회에서 행하는 일들, 이 예배당조차도 다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는 '부활'이라는 터전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나게 합니다. 아무리 명성이 뛰어난 사람도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다 죽음으로 끝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많이 배운 사람, 똑똑한 사람,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머리가 좋은 사람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지식과 경험을 그가 죽을 때 다른 사람의 머리로 옮겨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공부를 안 해도 될 텐데'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이 모든 기대와 생각들을 다 소용없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 제자들도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잃어버렸다고 실망했습니다. 꿈도 야망도 다 무너지고 자기들도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골방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면서 제자들에게 친히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자 제자들은 다시 용기를 갖게 되었고 확신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불의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악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시던 바로 그 법정에도 담대히 설 수 있었습니다. 죽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망 권세와 율법과 심판을 다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은 잠깐이요, 하나의 과정이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부활신앙과 관련하여 우리의 생애를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 모태에 있는 생명은 그야말로 아무 근심걱정이 없습니다. 더없이 평안하고 좋기만 한 그 속에서 잘 자라납니다. 코로 숨쉬거나 입으로 먹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와 연결된 생명줄인 탯줄을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아 생명의 성장을 이룹니다. 어머니의 태는 한 생명의 우주인 것입니다. 생존의 방식은 전혀 달랐지만 여기계신 모든 분들이 다 그런 생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태를 벗어나 세상 밖으로 태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출생이라고 합니다. 곧 생명으로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출생을 모태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모든 것 염려할 필요 없는 그 좋은 곳에서 춥고 덥고 배고픈 곳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줄이었던 탯줄이 끊겨버립니다. 죽음입니다. 아이는 기겁을 하여 웁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 듯이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이제 코로 숨쉬고, 입으로 먹어 사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태, 세상이라는 새로운 태(胎)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열 달을 살고는 세상으로 나와야 하듯이, 8-90년 이 세상에 살다가는 이 세상 탯줄을 끊어버려야 할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이 죽음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 죽음을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죽음 뒤에 생명이 없다면 말 그대로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세상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되도록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렇게 부활생명 안에서 사망을 이해하고 부활생명 안에서 생명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세계관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더 이상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맞이하는 죽음은 어떤 죽음이든지 안타깝고 우리를 침통케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범죄한 인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죽음의 공포와 절망 속에만 가두어 두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의 값을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거나 절망적이거나 파괴적인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의 삶을 살던 어린아이가 새로운 세상인 이 세상으로 나오기 위하여 힘든 산고를 겪어야 하는 것과 같이, 이 땅에서 맞이하는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부활과 영생의 나라로 들어가는 산고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죽음은 세상적인 고통이 모두 종결되고 참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성도의 죽음을 죽음이라 말하지 아니하고 '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깨어남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성도의 죽음이 잠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치의 병으로 죽게 된 여덟 살 먹은 아들을 가진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의사와 부모는 그 사실을 숨기려 하였지만, 영리한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어머니에게 죽음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어려운 질문을 받은 어머니는 잠시 부엌에 가는 체하고 지혜로운 대답을 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순간 하나님은 지혜를 주셔서 이렇게 대답하게 해 주셨습니다. 얘야! 너는 가끔 거실 마루의 소파에서 T.V를 보다가 잠들곤 했지. 그러면 아빠가 너를 안아 2층의 너의 방에 눕혔고, 네가 깨어날 때는 1층의 소파에서가 아니라 2층 네 방의 침대에서였지. 죽음은 네가 잠시 잠이 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히 살 너의 집으로 안아 옮겨 놓으시는 거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 안에 살고 있는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의 죽음을 귀중히 보신다고 시편 116편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마다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부활이 우리에게 없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셨고 나는 길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면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는 성경 고전 15:32에 있는 말씀과 같이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 먹고 마시자"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에 참여할 우리들에게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권면하고 있습니다. 실로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초청인 것을 믿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린아이가 2층 침대에서 깨어났을 때, 때론 식구들이 이미 직장으로 학교로 떠난 후여서 잠시동안 식구들을 볼 수 없게 되지만, 저녁이 되면 다시 식구들이 다 한 자리에 모이는 것과 같이, 우리 모두 인생의 황혼 때에 하나님 아버지가 부르셔서 그 예비하신 집으로 돌아가면 잠시 헤어졌던 우리의 식구들과 성도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부활의 소망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이며,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이며, 미움과 저주와 분노에 대한 사랑의 승리이며,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장례식을 집례해 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명의 주관자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젊은 아들도 관에 손을 얹고 말씀 한 마디로 살리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다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생명이 다 그로부터 나오며 그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입니다.
얼어붙었던 대지에 봄이 되면 싹이 나는 것도,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아나는 것도 모두 생명의 힘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이깁니다. 부활의 생명은 사망을 정복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어떤 죽음도 패배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요 승리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는 관문이며, 주님 오시는 날에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는 준비일 뿐입니다.
마틴 루터는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책에만 기록한 것이 아니고 봄에 자라는 나무 잎마다 쓰셨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알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의 승리가 내 개인과,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안에서 성취될 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있고,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생활에서 진리가 뿌리내리고,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고, 생명의 존엄을 들어내고 살 수 있을 때 부활이 안겨주는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생명과 연결된 일이기에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의 모든 신앙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실을 영원으로, 고통을 평안으로,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그리고 순간의 삶을 영생으로 이르게 한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나의 것으로 연결되어야 하겠습니다.
뜻깊은 2021년 부활절을 맞이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소망과 부활의 승리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망이 죽던 날
고전 15장 50~58절 / 이정선목사
인간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습니다. 인간 자체가 발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인간 이외의 어떤 동물도 발전이라는 것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환경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일은 동물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능동적으로 어떤 발전을 이룩한 예는 없습니다. 가령 사자가 얼룩말 사냥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는 얘기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사자는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방법으로 얼룩말을 사냥합니다. 갈매기들의 비행기술이 나날이 발전해서 오늘날의 갈매기들은 100년 전의 갈매기들보다 더 빠르고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갈매기들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날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100년 전의 인간의 삶과 오늘날의 인간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릅니다. 그만큼 인간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특히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말처럼 빨리 달릴 수 없지만, 오늘날 인간은 어떤 동물보다도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마침내 한국에서도 고속철이 개통되었는데, 시속 300km로 달린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인간에게 하늘을 난다는 것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어떤 새보다도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발전은 끝이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인간은 지구를 벗어나 그 활동영역을 우주로까지 넓혀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가장 큰 한계는 아직까지 극복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어도 그 돈 쓰지 못하고 죽어야 합니다. 아무리 큰 권력을 가졌어도 죽으면 한 가닥 바람만도 못합니다. 제갈공명 같은 천재적인 머리도 죽으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과학적, 비과학적인 시도가 수도 없이 있어왔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고, 성공에 근접한 적조차 없었습니다. 자신이 이룩한 절대권력을 영원히 향유하기 위해서 불로초를 구하려고 했던 진시황은 겨우 4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 그리고 식생활의 개선으로 인간의 수명이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죽음이라는 대명제 앞에서는 너무나 초라하고 희미한 반딧불에 불과합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인간을 복제한다는 개념과 실험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죽음이 가장 두려운 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데 성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지금까지 불패의 신화를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까 그 막강한 죽음을 향해서 외치는 소리가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놀라운 도전의 외침이 아닙니까? 한번 덤벼보라는 것입니다. 그 날카로운 침으로 한번 찔러보라는 것입니다. 이제 죽음이라는 막강한 권세가 꺾이고 힘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망을 이기고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망이 힘을 쓰지 못하고 죽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무슨 근거와 확신에서 사도 바울은 죽음을 향해서 이렇게 담대하게 외치는 걸까요?
먼저 우리는 죽음의 속성을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합니다. 죽음이 그토록 강력하게 인간을 압제하고 지배하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에게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하는 것은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죽음이라는 것이 생겼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죽음이 언급된 것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언약에서입니다. 이 언약은 행위언약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말씀하시고 그 결과에 따라 그의 운명이 결정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보세요.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아담에게는 그 열매를 먹거나 먹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였든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반면에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뜻보다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더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볼 때마다 아담은 그것을 한번 먹어볼까 하는 짜릿한 유혹을 느꼈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볼 때마다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흐트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추슬렀을까요? 결국 아담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 된 것입니다.
죽음이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하고, 또 우리가 그 한계를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에게 막강한 권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즉 그 권능의 근거는 율법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죄를 지은 자에게는 죽음의 형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본질적인 의미이고,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에 사로잡힌 죄인들에게 한 가지 희망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공짜입니다. 은혜는 용서입니다. 율법은 죄에 대한 형벌을 말하지만, 은혜는 그 죄의 용서와 형벌의 면제를 말합니다.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나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인 인간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면제해 주기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형벌의 면제가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 당하도록 내어주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요즘 세간에 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가 떠들썩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 12시간의 과정을 집중 조명한 내용입니다. 아직 보지 못하신 분은 꼭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처참하게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바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시고 우리 대신 그 형벌을 당하셔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 죽음의 권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셨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로잡은 죽음은 대단한 승리의 잔치를 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창조주를 죽음에게 빼앗긴 모든 피조물들은 넋을 잃고 슬퍼하며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언제까지 그렇게 죽음의 권세 아래 붙잡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때려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입니다.
이제 죄값은 이미 지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으시고 무덤의 깊은 어둠 속에 갇히신 것으로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죄의 사슬이 끊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악을 가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죄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는데, 죄가 떠났으니까 죽음도 떠나야지요.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담대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할 때, 우리는 역시 그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악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난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지요? 혈과 육은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직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이지요. 죽어 썩어질 인생으로는 썩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 육신도 썩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던 것처럼 살아날 것이고, 아직 죽지 않고 있던 사람들도 썩지 않고 죽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정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저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또 말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단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우리에게 씌워졌던 죽음의 저주와 형벌을 말하지요. 죽음의 세계, 사탄의 지배, 죄의 권능,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이김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계속해서 하는 말이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라고 합니다. 이 부활의 신앙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흔들리기 쉬운 이유는 세상에서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말하면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당한단 말이지요.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성적인 세상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 사망을 결박하시고 그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모두 참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 차고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복음을 온 세상에 널리 전하는 부활의 전령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의 삶
고전 15장 50~58절 / 박덕기목사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는 한 무덤이 있고, 거기 수정으로 만든 화려한 관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세기의 한 풍운아가 방부 처리되어 누워있다고 합니다. 그의 가르침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수천만 명의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레닌입니다. 그 관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 모든 나라들,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세상의 구세주였다!’ 세상의 구세주였다니요?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 쓰인 시제가 모두 과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과거에 이러저러했다는 말입니다. 그의 시체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때 그처럼 영향력이 강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모든 가르침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시체와 함께 그의 모든 가르침도 헛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는 이 지구상에서 거의 종말을 고하게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레닌과 다릅니다. 너무도 다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레닌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실뿐만 아니라,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인류 역사와 우주 만물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된 후, 로마 군인들은 철통같이 그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원수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공적으로 죽였다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리고 마귀와 지옥의 세력들은 이제 하늘나라는 이 땅에 임할 수 없다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되던 날 새벽 미명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러 무덤에 갔을 때, 하늘에 빛난 광채가 비취고 산이 진동했습니다. 그들이 가보니 바위 문은 열려 있고, 파수하던 군인들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창검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치고, 그리고 그 바위 위에 앉은 천사는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너희가 찾는 예수는 이미 살아나셨느니라.” 그들이 본즉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만 그 머리맡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부활의 시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쓸쓸하고 어둡고 고요하고/음산한 갈보리 언덕으로부터/두 군인이 내려오며/하는 말을 나는 들었다/하나가 말했다. 밤이 늦었네/강도들의 목숨은 끈질기기도 하이/또 하나가 말했다/나는 무서워/왜 그런지 몰라도.
같은 언덕으로부터 두 여자가/울며 내려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하나는 꺾여진 장미꽃/또 하나는 불꽃같았다/하나가 말했다/그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후회 할 게예요/또 하나는 눈물 흘리며 말했다/내 아들아! 내 아들아!
새벽 동틀 무렵에/두 천사가 노래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광채 나는 옷을 입고/빛나는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하나가 노래했다/죽음은 정복되었다/황금의 목소리로 또 하나가 노래하였다/사랑이 모든 것을 정복하였다/하늘이여, 땅이여, 기뻐하라!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입증되었다는 시입니다.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한 시입니다. 진리가 허위보다 강하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한 시입니다. 예수님! 과연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 생명의 주가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대로의 부활이었습니다. 고전 15:3-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중심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전 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구하는 무리들에게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에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시므로, 자신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과 부활을 예고하였습니다. 마 16:21절에서도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하신 날 오후에 그러한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근심에 싸여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들과 동행을 하면서 자신에 대하여 구약에 예언된 성경을 풀어 주시므로, 그 제자들의 가슴에 부활 신앙이 불타오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는 성도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1. 부활 신앙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부활 신앙은 우리에게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담대함을 줍니다. 사도 바울은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한 열정 때문에 무수히 많은 환난과 핍박과 곤고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힘들고 괴로운 삶을 한 번도 원망하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고통과 핍박과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같은 신앙을 가질 수 있었는가 하면, 그것은 사도 바울에게 확실한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확실한 부활 신앙이 있었기에 모든 곤고한 삶 뒤에 있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모든 어려움을 기쁨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부활의 소망이 없는 자같이, 이 세상 일로 낙담하고 좌절하며 우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도대체 이 모든 것을 능히 극복하고 밝고 기쁘게 살아가게 하는 부활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눈이 이 세상의 물질과 부귀영화 그 이상의 것들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과 눈물과 한숨과 좌절과 낙심으로 고개를 숙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찬란한 소망을 향하여 눈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비로소 현재의 어려움이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내 앞에 다가오는 어떠한 삶의 어려움도 담대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가올 영광스런 천국과 부활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실낙원을 쓴 영국의 문호 밀턴은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죽음에 대하여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마을 앞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에다 ‘내부 수리 중’이라고 써놓았더랍니다.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중’ 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가게 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 맞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이나 마찬가지야!’ 언젠가 우리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덤 문을 닫아 놓고 ‘내부 수리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부활하신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그날 까지 ‘내부 수리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우리 몸은 정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입성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는 부모님처럼 믿고 의지하던 오라버니를 잃고 슬피 우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고, 이에 마르다는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는다면 먼저 떠난 내 아버지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먼저 떠난 우리 어머니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나보다 먼저 떠난 내 남편, 내 아내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내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고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내 아들, 내 딸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불구의 몸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그 부활을 바라볼 때마다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소망을 가지지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나이가 들면 손발이나 몸이 떨립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수전증이라 합니다. 그것은 몸의 기능이나 힘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부활 신앙이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죽을까 봐 떨고 망할까 봐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만 확실하면 떨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롬 8:35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했고, 8:38-39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은 그 어떤 내적 갈등이나 외적 억압이나 영향에도 자기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신앙 고백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에게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데 죽음이 겁날 리 없고,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주님이 계시는데 걱정될 리 없고,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고 핍박을 받아도, 힘주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도 바울이 우리가 만일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고 합니다. 집이 흔들리면 무너집니다. 나무가 흔들리면 뿌리가 뽑힙니다. 신앙이 흔들리면 그 영혼이 침몰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두 가지 사건 때문에 힘을 얻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 힘써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따르고 좇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이 났다면, 충성을 바쳐 따르고 섬길 대상이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순간으로 끝났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감격과 충성의 대상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까?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젊어서도, 늙어서도, 우울한 날에도, 즐거운 날에도, 주의 일에 항상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주님을 위한 너희의 수고가 하나도 헛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은 힘주어 역설합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부활 신앙의 전파자가 되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목격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증거 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파하는데 전 생애와 목숨을 걸었으며 설교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목숨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외에 인류에게 다른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교를 믿던 터키 사람이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읽다가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슬람교 교사들에게 들켜서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심문하는 교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게 질문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질문인데?’ ‘일전에 내가 어디를 가다 길을 잃었는데 옆을 보니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두 명이 있었습니다. 내가 길을 물어 본다면 어떤 사람에게 물어봐야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지.’ ‘그런 줄 알면서 왜 당신은 죽은 사람에게 길을 물어 보라고 하십니까?’ ‘아니 이 사람아, 누가 죽은 사람보고 길을 물으라고 했나?’ ‘당신들이 믿으라고 하는 마호메트는 죽은 사람이요, 내가 믿으려고 애쓰는 예수는 산 예수입니다. 어찌 죽은 마호메트를 의지하겠습니까? 길 되신 예수를 따라야 할 것이 뻔한 노릇인데 인도자를 찾아가는 나를 왜 괴롭히십니까?’ 그러자 이슬람교 교사는 아무 대답도 못하다가 한참 후에 ‘네 마음대로 하라.’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다고 합니다.
역사를 보는 한 가지 안목이 있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이 세상을 보면 죄는 반드시 정복됩니다. 세상의 모든 악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반드시 심판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악하고 더러운 세상은 하나님 앞에 심판받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영원히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영생을 얻는 축복의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보면 인류에게는 큰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인류의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죽음은 인생 최대의 강력한 원수입니다. 그 때문에 사망이 이기는 것도 많습니다. 사망이 돈을 이깁니다. 그래서 돈 많은 자도 죽습니다. 사망이 권세도 이깁니다. 그래서 권세 있는 자라도 죽습니다. 사망이 과학을 이깁니다. 그래서 과학자도 의사도 죽습니다. 원자 과학도, 인공 산소 호흡기도, 사망이 삼키고 맙니다. 사망이 철학자도 이깁니다. 사망이 청년도 이기고, 남자도 이기고, 장부도 이깁니다. 어린이도 이깁니다. 이렇듯 죽음은 인간 최대의 원수요 최후의 원수요, 원수 중의 원수입니다. 인간 중에 죽지 않는 자 누가 있습니까? 석가도 죽었습니다. 공자도 죽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어린이도 다 죽음 앞에서는 굴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같이 인생에게 절대적인 권세로 왕 노릇하던 죽음의 원인을 제거하시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 세상에 죽음이 죄 때문에 찾아 왔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 무섭고도 저주스런 죄 값을 십자가상에서 다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천하무적인 죽음의 쇠사슬을 부활의 권능으로 끊어 버렸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약속이야말로 인류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과 영생의 꿈을 확실하게 성취시켜 주실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을 소리 높여 찬송하는 한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에릭 사우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즉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지금 내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두 부활 사이에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즉 그것은 주님의 부활 소식을 힘써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송정 중앙교회 성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도움을 받아서 능력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살게 되기를 오늘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변화와 만남과 얼굴 봄
고전 15:50-58, 살전 4:13-18, 계 22:1-5 / 김명혁목사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제로 오늘 아침 일곱번째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저에게 베푸실 궁극적인 은혜는 저를 아버지 집으로,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쓴 성경 다섯 책 중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을 천국을 묘사하므로 마무리했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어거스틴은 그의 영혼의 자서전인 「참회록」의 마지막 13권 마지막 부분을 천국을 묘사하므로 마무리했습니다. “오 주 하나님! 당신의 평화를 주시옵소서. 평온의 평화를, 안식의 평화를, 저녁이 없는 평화를 주시옵소서.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없고 석양이 없습니다. 당신이 창조의 사역 후에 일곱째 날 안식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영생의 안식의 때에 당신 안에 쉬게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또한 인류 역사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신국론」의 마지막 22권 마지막 부분을 역시 천국을 묘사하므로 마무리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복 주심과 거룩하게 하심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쉬고 보며, 보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도성 곧 끝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어거스틴에게, 저에게 그리고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베푸실 궁극적인 은혜는 저와 여러분들을 아버지 집으로, 천국의 축복으로 데려가시는 일입니다. 그 천국의 축복은 주님이 재림하시므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저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하면 “내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너무 확실한 때에는 미래형 대신에 과거형을 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앞으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실 은혜가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미래형 대신에 과거형을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변화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가장 큰 문제와 가장 큰 고민은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 기질입니다. 이기적인 기질과 정욕적인 기질과 위선적인 기질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문제와 가장 큰 고민입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기도를 많이 하신 기도의 사람이셨지만 자기는 늘 화를 잘 내는 나쁜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기도와 성령의 사람이었지만 자기 속에 죄의 기질이 항상 자리잡고 있다고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노라 이 사망의 법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화도 잘 내고, 거짓말도 잘 하고, 미워도 잘 하고, 싸우기도 잘 하고, 때로는 도둑질도 잘 하고, 때로는 사기도 잘 치고, 때로는 간음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탄식하면서 살아갑니다. 나의 못된 기질 때문에, 가족의 잘못된 기질 때문에, 때로는 신자들의 잘못된 기질 때문에, 우리는 항상 탄식하고 고민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들에게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씀했습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아담과 하와로부터 내려오면서 잘못 만들어진 나의 못된 기질이 변화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나 자신의 잘못된 삶으로 잘못 만들어진 나의 못된 기질이 변화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죄의 기질과 죽음의 기질이 변화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기적인 기질이 사라지고 대신 이타적인 기질이 생기고, 정욕적인 기질이 사라지고 대신 무 정욕적인 기질이 생기고, 위선적인 기질이 사라지고 대신 진솔하고 투명한 기질이 생긴다는 일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게도 닮기를 원하던 주님의 성품을 닮게 된다고도 말씀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우리들이 주님과 같아진다고 까지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요일3:2). 우리의 못된 기질에 변화가 일어날 뿐 아니라 우리의 못된 기질과 존재가 주님과 같아진다는 말씀은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저는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이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멍하니 이 말씀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어떻게 우리 못된 피조물인 인간들이 주님과 같아질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신성 모독 같은 말씀같이 느껴져서 그저 멍하니 그 말씀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으로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 만남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가장 큰 슬픔과 아픔은 죽음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일입니다. 아니, 죽음 이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만 하는 일이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제가 11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과 헤어진 일은 저에게 있어서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던 아들 철원이와 죽음을 통해서 헤어진 일도 저에게 있어서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헤어지는 일은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사랑하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마지막 이별을 고하면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고 했습니다.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전송하니라”(행20:37,38).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뿐 아니라 빌립보교회 성도들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보고 싶어했고 그들과 헤어질 때에는 마음에 슬픔을 느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보고 싶어했고 그들은 사도 바울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보고 싶지도 않고 헤어져도 슬프지도 않은 사람은 정상적인 성도들은 아닙니다.
헤어짐의 슬픔을 지니고 사는 성도들에게 만남의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주께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그리하여 우리가.” 여기 ‘우리’는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 모두를 가리키고 주 안에 살아남은 자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들이 모두 함께 만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저는 제가 가장 사랑하던 어머니와 제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철원이를 반갑고 기쁘게 만날 것입니다. 저에게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시고 순교의 피를 흘리신 저의 아버지도 반갑고 기쁘게 만날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길선주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도 모두모두 반갑고 기쁘게 만나서 무릎을 꿇고 감사와 기쁨을 나타내 보일 것입니다. 최근에 별세하신 이중표 목사님도 반갑고 기쁘게 만나서 손을 붙잡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과 항상 함께 있을 것이고, 사랑하던 사람들과 항상 함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큰 기쁨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처럼 너무 기뻐서 얼싸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만남이 주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으로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 얼굴 봄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는 낙원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중세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visio Dei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 보기를 갈망했고, 사도 바울도 주님의 얼굴을 보기를 갈망했고, 사도 요한도 주님의 얼굴 보기를 갈망했습니다.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13:12). “우리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3:2). “그의 종들이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계22”4).
저와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으로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아버지 집으로,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살게 하시는 일입니다. “보아라 즐거운 우리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우리의 일생이 끝나면 영원히 즐거운 곳에서 거룩한 아버지 모시고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222장). 이것이 우리들이 누릴 궁극적인 은혜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책 마지막 장을 천국을 묘사하므로 마무리합니다. 아마 그래서 어거스틴도 그의 「참회록」과「신국론」을 천국을 묘사하므로 마무리했는지 모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22장을 천국을 묘사하므로 마무리했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 천국에는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천국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죽음이나 죄나 저주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에는 또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와 통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에는 또한 그의 종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섬긴다고 묘사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이나 돈에 무릎을 꿇거나 섬기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어린양만을 섬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얼굴을 가까이서 직접 보면서 살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황송한 일이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최고의 은혜와 기쁨입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일보다 더 즐겁고 더 기쁘고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들을 대신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신 사랑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살게 되고, 우리 대신 죽으신 사랑하는 주님의 얼굴을 보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그리고 온 우주에 비취시는 빛이 되신다고 묘사했습니다. 다시는 어두운 밤이 없고 등불과 햇빛이 필요 없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빛은 행복이고 기쁨이고 사랑이고 영광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아버지의 빛 가운데서, 행복과 기쁨과 사랑과 영광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영원토록 행복과 기쁨과 사랑과 영광 가운데서 살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으로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저와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으로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로, 우리들의 잘못된 기질과 존재가 변화되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사는 기쁨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에 베푸실 최고의 은혜입니다.
이와 같은 천국의 은혜를 바라보고 믿으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근심이나 걱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원망이나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절망이나 좌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나 돈에 대한 애착도 염려도 있을 수 없습니다. 천국의 은혜를 바라보고 믿으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오직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제물 되는 삶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천국을 준비하는 수고와 헌신의 삶이 있을 분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영원한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제발 세상에 붙어서 불행하게 살지 말고 천국을 바라보고 누리면서 멋지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4:7,8). 딤후4:7,8).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천국의 축복을 누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영원히 영광에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복된 신앙
고전 15장 50~58절 / 이종윤목사
오늘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죽음’의 의미와 공포, 그리고 부활의 중요성과 영광을 연결시키면서 그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죽음(사망)이 정복되었다는 것입니다(55-57절).
Ⅰ. 마지막 원수 사망을 이김.
이 세상에는 큰 악들(죄, 고통, 사망)을 부인하는 낙관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죄와 고통, 그리고 사망의 실존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죽음을 보신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요11:35).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의 예수님의 우심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믿지 못한 이들의 불신앙을 슬퍼하시어 우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죽음(사망)이 우리의 원수임을 확인해 주셨던 것입니다. ①이 죽음은 단순한 원수가 아니고 가장 큰 원수, 즉 마지막 원수임을 뜻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우리의 영과 육을 갈라놓기 때문입니다. ②그래서 사도바울은 죽음을 마지막 원수라고 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마지막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57절). ③무슨 승리를 주시는가? 죽음이 최종적으로 우리의 영과 육을 갈라놓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들어가게 되는 관문이고, 부활로 하나님의 시간에 들어가게 되는 승리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Ⅱ. 현재의 승리.
①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까지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성도는 죽어서 십자가상의 한편 강도에게 약속했던 낙원, 즉 하늘에 갔습니다. 그곳은 아브라함과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으로서 천국은 아니지만 행복한 곳입니다. ②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그는 낙원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낙원을 바라보고 죽은 자들에게 그의 죽으심의 혜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실 때, 그는 이들을 천국으로 옮겨 주셨습니다(③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죽음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죽음 이후에 대하여 막연한 소망만 있었습니다(욥, 다윗도 마찬가지였음).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었습니다(시116:15). 따라서 죽음은 더 이상 무서운 것이 아니며, 승리의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
Ⅲ.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가 아는 것.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 진리는 단순히 철학이나 신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①그리스도는 사실로 죽으셨습니다. ②그리스도의 부활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4복음서 전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화나 작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입니다. ③그리스도의 부활은 진리가 거짓을, 선이 악을, 사랑이 미움을,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는 진리를 알게 합니다.
맺는말.
①지금 당신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②고난, 죽음, 대적자, 죄 때문에 주의 일에 어떻게 견실하고 흔들리지 않을까? 분명한 사실은 사망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반석으로 하고 그 위에 서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③우리는 오늘 사망을 정복하신 그리스도 위에 교회도, 인생도, 가정도, 사업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큰 복을 받고 누리시는 우리 서울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망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고전 15장 50~58 / 김동호목사
제 상담실에 짧은 글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무지 바쁘시거나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무엇인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삶이 힘들고 피곤하고 답답하고 꼬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문제가 좀처럼 잘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라는 이름으로 그 글을 올린 것을 보면 그와 같은 일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저는 그와 같은 문제가 비단 그 글을 쓴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중에 그와 같은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고 축복의 근원이신 분이십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생명과 축복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삶이 곤고하고 피곤하고 자신의 삶속에 생명과 복이 역사하지 못하고 사망과 불행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을 당할 때 우리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셔서 멀리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졸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이후 아담과 하와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입니다.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 동일한 모습과 조건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짙은 구름이 껴서 그 빛을 가리듯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동일한 모습으로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죄악이 너무 관영하여 하나님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상에는 비가 오고 해가 보이지 않아도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올라가 보면 항상 밝은 태양이 비치듯 우리 죄의 구름을 걷어낼 수만 있다면 항상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못 살게 하고 불행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문제는 가난한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라 부요한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가난함도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짐이 우리에게 주는 어려움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 생명과 사망의 문제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어도 부자는 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부자로 살 수는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얼마든지 세상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죄가 관영하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닮아 적당히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세상을 사는 요령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듯이 그와 같은 행동이 우리에게도 언제나 나타납니다.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를 못살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들의 죄가 우리를 못 살게 하고 힘들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우리는 죄를 짓기만 할 뿐 지은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장로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우리 인간을 구원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죄를 지었을 때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기회는 내가 죄를 지은 상대방에게 있습니다. 그가 용서해 주기 전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사과를 하기도 하고, 보상을 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와 같은 가해자의 행동을 보고 그를 용서해 주기 때문에, 합의해 주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에 합당한 피해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사과하고 보상하지 않으면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것을 용서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사과와 보상이 없다면 용서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용서 받지 못함의 원인 즉 책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과와 보상만 있다면 언제나 용서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용서와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용서와 구원에 관한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그 죄 사함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즉 생명과 성공과 행복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죽는 게 당연한 일이고, 죽도록 힘들게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답답하고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적인 현실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운명을 깨트리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 죄 값은 대신 하나님이 치르셨습니다. 남은 일은 우리의 회개 뿐 입니다. 믿고 회개하는 것 뿐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우리의 그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확인 시켜 주시기 위하여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오늘 부활하셨습니
다. 부활은 우리 기독교 최고의 그리고 최대의 계시입니다. 부활은 계시입니다.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십니다.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회개만 하면 됩니다. 죄를 뉘우치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서 돌아서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치르신 대가가 너무 커서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그 구원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사탄도 그에 대하여 시비 걸 수 없습니다. 송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8장 31절에서 33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 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 모두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모든 사망으로부터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불행과 역경과 실패와 좌절의 사슬을 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부활의 아침 우리 모두의 고백의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빌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아멘. 사망에 대하여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도 죄의 그늘로 인해 생기게 되는 모든 사망과 불행과 실패와 고통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망과 불행과 고통과 실패는 우리의 운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를 결박하고 있는 모든 고통과 불행과 역경과 어려움은 그 뿌리가 죄입니다. 한 마디로 해서 죄의 사슬입니다. 죄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과 같아서 스스로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 죄의 결박을 푸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피를 대가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그 모든 사망과 고통과 실패와 불행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활로 우리의 부활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약속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 여러분을 얽어매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환난이십니까? 곤고함이십니까? 박해이십니까? 기근이십니까? 아니면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십니까? 그것은 본시 우리의 운명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운명을, 그 결박을 풀어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꽃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의 부활을 믿는 것이 신앙의 결국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믿음으로 사망에 대하여 큰 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현재 우리를 결박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에게 대하여 바울처럼 한번 외쳐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에 대하여,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외쳐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망에 대하여 여러분이 부활할 것임을 승리할 것임을 믿음으로 선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모든 사망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영원한 승리의 노래
고전15장 50~58 / 이필재목사
한 역사가가 남긴 유명한 말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사건은 세 가지이다. 첫째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 사는 세상에 오셨다는 것, 둘째 사건은 하나님을 인간들이 죽였다는 것, 세 번째 사건은 죽으신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이 세 가지가 가장 크다.” 인간은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두 가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눈으로 확인된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 또 하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입니다. 과연 인간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인가? 이 두 가지 의문은 인간 누구나 관심 갖는 문제라서 절대 부정도, 절대 긍정도 못하는 일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배경을 보면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 지방에 전도하러 가셨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몇 가지 장점을 지닌 도시였습니다. 제일 큰 특징은 교육 도시입니다. 헬라 철학의 본 고장! 그것이 고린도입니다. 헬라의 상업 도시로 부유한 경제 도시입니다. 지중해의 동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항구도시로서 세계인의 발걸음이 머무는 활력 있는 도시였습니다. 기원전 146년 로마의 왕 맛묘스가 이 도시를 파괴했는데 100년 후에 줄리어스 시저가 다시 복구했고, 기원 27년에 아가의 수도가 되어 발전한 도시입니다. 또, 당시 세계에서 제일 유명했던 신전인 세라피스 신전과 아프로디테 신전이 바로 여기에 있어서 세계적인 종교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의 사람들은 헬라 문화의 철학적이고 사변적 영향을 받아 인간의 모든 문제를 사변적 이해에 초점을 맞춰서 해석하는 지식과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장에 바울 사도가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니까 고린도 사람들의 사변적 지식에 절대로 맞지 않았습니다. 합리적 이해가 성립되지 않는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받아들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바울 설교의 초점은 그리스도 부활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5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은 헬라의 사변적 철학에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니까 바울이 전하는 진리를 “미련한 것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헬라 철학의 본고장에 와서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그런 미련하고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 이렇게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보면 바울과 고린도 사람들의 항변적 반박 성명 같은 말이 계속됩니다.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람들이 하도 미련하다고 하니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1장 22절로 가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 전달! 고린도 사람들에게 항변적으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서 29절로 가면 바울이 더 심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혜를 너무나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십자가의 진리와 헬라 철학이 맞서는 분위기로 고린도서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은 “이 구원의 진리는 그래서 진리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밀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다.” 본래 이 계시라는 말은 뚜껑을 열어주었다는 뜻입니다. 감추어진 비밀! 지금 여기 항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밖에서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서 보여주니까 그 속의 비밀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밀인데 하나님이 계시를 주어 즉, 뚜껑을 열어 보여준 자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다.” 이런 진리를 역설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비밀을 알게 된 자는 얼마나 큰 힘이 있는가? 이 비밀을 안 사람들은 무엇에나 다 이기는 능력자가 된다.” 오늘 55절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부활의 진리를 알기 전에는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는 겁니다. 사망 권세 앞에 모두 다 굴복합니다. 우리 육체의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믿기 때문에 인간이 제일 두려워하고 있는 존재는 사망 권세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망 권세 앞에 인간은 벌벌 떨고 종노릇해왔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위협하는 마지막 카드가 뭡니까? 죽인다는 겁니다. “너 죽여 버릴 거야!” 이러면 꼼짝 못하는 겁니다. 사망의 권세가 그렇게 무섭다는 겁니다. 저는 외국 생활을 많이 해서 비교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언어에는 폭력적인 말이 많습니다. 욕이 얼마나 많은지,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수없이 죽었을 겁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만났다 하면 “너 죽일 거야!”입으로 학생들, 친구들을 날마다 죽이고 날마다 부활하고….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았는데 아주 무식한 언어로 자기 자녀들도 날마다 죽입니다. 말 안 들었다 하면 “나가 죽어라, 이 놈!” 날마다 자식들을 죽이는 겁니다. “죽어라”는 말은 고상한 언어입니다. “나가 거꾸러져라! 뒈져라!” 별 소리 다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가? “군인이다. 경찰이다. 깡패다. 강도다. 도둑놈이다.” 여러분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죽일 테면 죽여라!”하는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이 사람은 겁나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것을 믿고 행패적 생활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마을에서 큰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동네가 항상 소란하고 서로 만날까봐 벌벌 떨고 “죽일 테면 죽여라!” 막 행패 부리면서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매우 연약해 보이는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이 이 행패자를 가로막았습니다. “야, 이놈아! 너가 뭔데 동네에서 행패부리며 돌아다니는 거야?” 야단을 쳤더니 “너는 뭐야? 너 죽고 싶어?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야! 덤빌래?” 막 서로 붙었습니다. 이 허름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는 한번 죽었었어!” 그러니까 그 의미가 뭔지 사람끼리는 통합니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아이고! 형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 죽은 겁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 같은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공갈 협박, 악의 세력이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왜? 이미 우리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보세요. 예루살렘에서 벌벌 떨고 문을 잠그고 “나가면 죽습니다.” 그러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부활 신앙을 갖게 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잠근 문고리를 자기들 스스로 열어젖히고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 거리로 튀어 나가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는 살아나셨다. 그는 메시야다. 주 예수를 믿으라!” 사람들이 놀라서 “아니, 저 놈들이 죽을라고?” “죽일 테면 죽여라!” 이것이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악의 세력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창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 축복을 받은 존재이지 않습니까? 만약에 인간이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 방법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동물만도 못합니다. 차라리 동물과 같이 사는 시간까지 살다가 모르는 가운데 죽어버리면 훨씬 더 행복할 텐데, 보세요. 인간은 “나는 죽는다. 틀림없이 죽는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일지 모르겠다.” 이러면서 날마다 사니 인간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여러분이 “벤허”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벤허”의 다른 제목은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작가 윌리스와 잉게르솔, 두 사람의 작품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본래 이 사람들은 생각이 다른 데 있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유명한 도서관을 다 찾아다니면서 재료를 수집했습니다. 재료 수집을 왜 했느냐? “허구의 소문이 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이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이 허위를 밝혀내는 것이다. 내가 하겠다.” 그래서 자료 수집을 위해서 온 세계를 다니면서 유명한 책들은 다 뒤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를 연구하다가 성령이 충만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작품으로 변하여 발표된 것입니다.
오늘 사망의 권세를 이겨낸 영원한 승리의 노래가 뭐라고 들립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는 이깁니다. 사망의 권세, 악의 세력, 이 세상천지를 개벽시킨다고 해도 굴복하지 않습니까? 바울 하나를 로마가 못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리에 서있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부활신앙을 가진 형제들이여!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의 권세는 얼마나 힘이 강한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마저 죽여 무덤에 가뒀습니다. 거기서 만약 끝났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는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무섭게 생각하고 있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진리의 승리, 인간 승리의 영원성을 우리에게 선포하셨으며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의 고백자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부활의 권세를 선물해 주신 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부활절 예배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 집행한 악의 무리들은 3일 동안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예루살렘 거리에서 악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우리가 승리했다. 이겼다.” 그때 진리는 땅 속에 묻히고 정의는 사라졌고 어두움의 세력자들이 나누는 축배의 흉악한 웃음소리가 소름끼치게 예루살렘 거리를 가득하게 매웠습니다. 그들의 세계는 3일로 끝났습니다. 안식 후 첫날 미명에 그 무덤에 돌은 소리 없이 옮겨지고 진리가 승리하는 조용한 소리가 천사들로부터 들려왔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간혹 우리는 마귀의 세력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마귀 세력이 굉장한 힘을 발휘하는 듯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치 온 세상이 그 폭력적 세력 밑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세상의 악의 세력은 아무리 힘이 강하다 하여도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이미 항복한 권세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시킬 때 “이 땅의 마귀가 가득하여도 그리고 우리를 삼키려 하지만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라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가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진리의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오늘 우리는 진리의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바울이 선포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겁니다. 교회사 공부를 하면서 놀라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처음 들어갈 때 어느 나라나 기독교 말살 정책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가 들어왔어? 다 죽여 버려!” 어느 나라나 다 똑같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수없이 죽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악의 세력이 승리한 것인가? 그들의 피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아침 세계 모든 나라나 특별한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예수는 다시 사셨다.”고 부활을 찬양할 것입니다. 온 세상은 지금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의 찬가로 가득 찬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승리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악의 세력 앞에 굴복하지 마라.” 어떤 때는 악의 세력이 힘있게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굴복하지 마라. 그 세력은 벌써 이미 항복한 권세다.”
음악과 문학의 천재적 은사를 가진 젊은 청년 하나가 살았습니다. 그의 탁월한 음악적 감각이나 문학적 재능이 주변 모든 사람들의 감탄을 얻었습니다. 그의 장래성에 대해서 누구든지 화려한 성취 예언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아마도 너는 대한민국의 베토벤이 될 것이다. 아니면 톨스토이가 되어라!” 자신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 자신을 보면 남보다 훨씬 뛰어난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문이 많이 났습니다. 한 대한민국의 재벌의 딸이 그에게 관심 있게 접근해서 남편감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저 청년에게 다소 힘이 되어 준다면 분명히 저 사람은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큰 출세인이 될 것이 확실하다.’ 자기 남편감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연주회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면서 수만 관중 앞에서 장엄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지휘자가 되거나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문필가의 고상한 남편감을 기대하면서 사랑을 주고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청년이 어느 날 소명을 받아 목사 공부를 하겠다는 겁니다. 이 여학생은 온갖 힘을 다하여 그 생각이 바뀌도록 설득했습니다. “당신은 대한민국의 베토벤이 될 사람인데 왜 목사가 되려고 하는 겁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이 여학생은 낙심이 되었습니다.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내가 목사 부인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새벽기도 나가고 개척교회를 하면 그런 거 따라다녀야 하고…. 이를 어쩌면 좋으냐?’ 어느 날 이 처녀는 파고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공원 한쪽 구석에서 몇 명의 청년들이 요란한 북을 울리면서 몇 사람의 찬송가 합창이 막 들려오는 겁니다. “♬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병 같으니♪” 막 떠드는 겁니다. ‘이건 또 뭐야?’ 몇 명의 청년들이 노방전도를 하러 나온 겁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 한 청년의 등에는 북이 매달려 있습니다. 여름 방학인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삼복더위에 장단을 맞춰 북을 “둥당둥당” 울리면서 예수 믿으라고 땀을 흘리고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전도를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공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열심히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노방 전도해 보셨죠? 누가 관심 갖습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은 핀잔만 줄 뿐입니다. “어휴! 저런, 저런 젊은 사람들이 뭐 할 짓이 없어서 저러고 돌아다닐까? 창피하게….” 다만 할 일이 없는 할아버지 몇 사람이 없는 것보다는 덜 심심하니까 그냥 바라보는 겁니다. 등에 북을 메고 둥당 거리면서 창피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그 청년이 바로 자기가 남편감으로 정해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하도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습니다. ‘저게 뭐냐? 저게 젊은 사람이 할 짓이냐? 저 고상한 사람이 거리의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무슨 약장사인 것처럼 북을 둥당거리면서 저 짓을 할까? 할 수 없다. 체념이다.’ 떠나버렸습니다. 이 신학생은 6·25 동란 때 포로가 된 중공군 수용소를 찾아갔습니다. ‘내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 그래서 상처 난 환자들을 돌보면서 중국말을 할 수 있는 통역자를 구해서 열광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상처 난 중공군들을 씻겨주려고 세숫대야에 물을 뜨러 가는 길에 쓰러져서 30대 초반에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남대문 교회 배명준 목사님이 집례한 추모 예배에는 맨 앞자리에 검정색 옷차림의 한 여학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들지 않았고 중공군 포로들이 화선지에 먹 글씨를 써서 보내준 추모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평화의 왕자, 사랑의 사도시여! 선생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복음을 이 불구의 몸을 끌고 돌아가 중국 땅에 전하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우리는 전쟁 때문에 한반도를 온 것이 아니라 복음의 생명수를 받아 중국 땅에 심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선생이 가르쳐준 찬송가를 중국 땅에 가서 우리는 울리게 할 것이며 마지막 설교 시편 23편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중국군 형제들은 일제히 소리 내어 통곡합니다. 우리 모두는 선생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기를 소원하는데 그 해답을 선생이 가르쳐주신 예수의 부활의 진리에서 찾았습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영원히 영원히 선생과 함께 있을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 안에 있을 것을 약속합니다. 어쩌면 선생은 우리와 영원히 같이 있기 위하여 우리 곁에서 이 세상을 떠나셨나이다. 십자가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사실을 선생이 가르쳐준 대로 우리는 믿겠습니다. 선생은 우리 때문에 돌아가셨고 우리는 선생 때문에 영원히 살았습니다. 우리 다시 만나 함께 살아갈 부활의 그 날을 기다리면서 선생의 생명을 바쳐 사랑했던 중국군 포로 일동.”
오늘 바울이 전하는 부활의 진리가 우리 모두의 똑같은 고백이 되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왜 부활하셨는가? 왜 부활의 진리를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아니하는가? 부활의 신앙이라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 바울이 전하여준 진리를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받아들여서 매우 강인하고 담대한 부활의 신앙으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권위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부활 신앙의 승리적인 삶
고전15장 50~58절 / 손상률목사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살게 되는 부활의 도리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행 24:15).
세상의 어떤 종교도 부활을 논하거나 죽음에서 살아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만이 가지는 특징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막아보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지만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생명의 본체이기 때문입니다(요 1:4) 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예표하는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온 세계에 다니면서 이 부활의 복음을 전했고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신앙을 논증하고 그리스도인이 이 신앙으로 승리적 삶을 살게 되는 비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1. 부활 신앙의 근거.
바울이 헤롯 아그립바 왕에게 부활의 도리를 증언할 때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일이 아니니이다”고 하였습니다(행 26:26). 이 말은 누가 조작해서 만들어냈거나 또는 몇 사람이 은밀하게 퍼뜨린 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자신 있게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1) 성경 계시와 언약입니다.
고린도전서 15:4-5에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 하였던 바를 실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가지 방면으로 이를 암시해 주었습니다. 시편 16:10에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마 16:21).
2) 예수님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1:25).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죽은 사람을 셋이나 살려내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자는 아이 깨우듯이 일으키셨고(막 5:38-42), 상여에 실려 가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향해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여 살려내셨습니다(눅 7:11-16).
그리고 죽어서 장사지낸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를 불러내었습니다(요 11:40-44).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무덤에서 살아나신 일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은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이 굴러 나가는 것을 보았고 빈 무덤 안에서 천사를 만났습니다. 천사의 말이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28:6).
3) 지상교회의 생명력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신앙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님의 분부대로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것이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곳에 성령이 강림하셨고 그 권능을 힘입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운동의 산실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것처럼 지상교회도 수많은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사멸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종교의 실증입니다.
2. 부활 신앙의 내용.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하신 사실을 소개하고 이어서 이 부활의 도리가 기독교 신학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지식이나 논리로 설명하기에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적으로 이해할 때 이는 확실한 진리요 또한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고전 1:18-24).
1) 복음의 신비(神秘)입니다.
고린도전서 15:12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쉽게 받아들이고 수긍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신비로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51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밀’이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신비(μυσΤєριον)를 뜻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신비를 말할 때 땅에 뿌려지는 씨앗이 밀이나 어떤 곡식의 알갱이지만 심겨지기 전과 전혀 다른 형체로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36-38절).
그리고 밭에 뿌린 씨에서 첫 이삭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곧이어 모든 이삭이 다 패어지는 것의 표본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 모두의 부활에 대한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20절).
2) 혈(血)과 육(肉)은 아닙니다.
본문말씀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죽은 자가 부활할 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상태의 몸과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말 하는 것입니다. 42-44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주님의 재림과 함께 부활합니다.
본문 51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지막 나팔’이란 예수님의 재림 때를 의미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3. 부활 신앙의 능력.
그리스도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세상에서 승리적인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고 천당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고 하며 절제되지 않은 행동을 하면서 뜻없이 살게 될 것입니다(32절).
1) 소망의 확신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땅위의 장막집’이란 육신을 의미합니다. 언젠가는 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시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뜻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 처하더라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자기의 소임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11-12에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2) 담대함과 인내력을 발휘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왕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하였으나 그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 3:17-18에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소아시아에서 심한 고생으로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나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거뜬히 이겨냈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8-9).
3) 승리적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부활의 신앙에 기초한 삶을 사는 사람은 가장 무서운 죽음의 세력 앞에 맞서면서도 흔들림이 없이 이를 이겨나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승리에 대한 확신과 용기, 그리고 능력을 발휘합니다. 부활의 성격이 곧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망을 삼키고 이긴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53-54절). 더 적극적으로 죽음을 향해서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고 도전장을 낼 수도 있습니다. 죽음 정도는 우습게 여기며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하노라”하고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은혜
김명혁목사 / 고전 15:51-58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세 가지 은혜를 받았습니다. 첫째는 죽음을 이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을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둘째는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른 일에 힘쓰지 않고 주의 일에 힘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셋째는 하늘을 바라보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이 상 주실 것을 바라보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 가지 은혜를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저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이 세 가지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은혜
사람이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 앞에서 비굴해 지기도 하고 무력해 지기도 하고 연약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는 죽기를 무서워하는 인간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히2:15). 베드로도 죽기를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잡혀서 죽지 않기 위해서 그런 비겁한 짓을 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에도 열 제자들은 한 곳에 모여 문을 닫아 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요20:19). 잡혀서 죽지 않기 위해서 그런 비굴한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목적 중의 하나는 죽기를 무서워 하는 우리 인간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놓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죽음의 무서움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음의 위협과 협박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죽음의 무서움에서 벗어나는 일만큼 멋진 일은 없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놓여 나는 일만큼 자유롭고 여유로운 일은 없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사망을 향해서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의 외침의 근거는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서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전15장 첫 머리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고전15:3). 사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자기는 이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직접 체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8).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고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내가 죽어야 할 저주의 죽음을 나대신 죽으신 것을 믿기 때문이고 내가 살아야 할 영원한 부활의 삶을 나대신 먼저 사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고 다시 산다고 바울이 증거했습니다(고전15:23). 바울은 주님이 죽은 지 삼 일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몸도 죽은 다음 다시 영광의 몸으로 부활 할 것을 분명하게 믿었습니다. "우리가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니라"(고전15:51-52).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죽음을 사모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8).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욱 좋으나"(빌1:23). 바울은 참으로 자유롭고 여유롭고 멋진 삶을 살았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죽는 것을 무서워 하십니까?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까? 그러면 비굴해지고 불쌍해지고 불행해 집니다. 당당하게 죽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멋지게 죽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담담하고 가볍게 죽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2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은혜
사람의 가치는 무슨 일에 힘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다음부터 주의 일에 힘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살아계시고 부활의 주님이 자기에게 할 일을 맡기시고 부활의 주님이 자기를 인도하시고 부활의 주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고 부활의 주님이 자기를 축복하시는 분이심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6).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서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소아시아에 가서 선교했고 드로아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마게도냐에 가서 선교했고 에베소와 두로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도 주님의 분부를 받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23:11). 바울은 한 평생 주의 일에 힘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인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이와 같은 바울의 삶의 비결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데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여러분들, 자기 일에 너무 힘쓰고 있습니까? 피곤해 지고 공허해지고 서글퍼지고 맙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부활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삶은 보람과 기쁨과 감격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3 하늘을 바라보는 은혜
사도 바울은 전에는 땅을 바라보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다음부터는 하늘을 바라보며 살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하늘에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이미 하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스데반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
사도 바울은 인생의 최후 결산이 하늘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판단이나 자기 자신의 판단을 중요하기 여기지 않고 마지막 날 주님이 하늘에서 자기를 향해서 어떤 판단을 하실지를 항상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이시니라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4,5). 사도 바울은 천국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1,2,8). 사도 바울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하늘에서 주님이 상 주실 것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
하늘을 바라보면서 땅에서 주의 일에 힘쓰며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땅을 바라보며 땅에 얽매어서 사십니까? 하늘을 바라보면서 자유롭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주님이 상 주실 것을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부활의 승리
고전 15장 55~58절 / 유영설목사
부활사건은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사건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구속사건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인의 믿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생각과 삶이 달라졌습니다. 증인됨을 말합니다. 증인은 체험하여 알고 있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고 체험했습니다. 안티 기독교 세력들의 공격원인은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와 거짓, 그들이 부정하는 사건들 가운데 첫째가 “부활사건”일 것입니다. 교회사에 보면 부활을 부정하는 이유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기절설입니다. 주님이 죽기 전에 장례 시간 지난 후에 정신이 돌아와 깨어난 것을 부활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도적설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가 어디에 숨겨 놓고 살아났다고 거짓소문을 퍼뜨립니다. 세 번째로 환상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아가신 예수님을 환상 중에 보고 살아나셨다고 거짓 소문을 낸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 역사적 사실이 부정 되는 것, 이것 이외에도 많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공격하며 부정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체험된 신앙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체험으로 증명되기까지는 계속 반대자들의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부활절의 핵심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요16:33에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승리하신 주님을 만나는 절기입니다.
1. 생명의 승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각양각색이지만 ‘죽음’이 가장 무섭습니다. 세상 영웅호걸, 열사는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죽음은 잔인함, 과부의 외아들, 무남독녀의 외딸 데려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습니다. 죽음에 관심 있는 것, 생명에 관심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였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살고 죽는 것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입니다. 다만 생명과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은 중요하다고 보셨습니다.
2. 사랑의 승리입니다. 인간사는 갈등과 미움, 경쟁, 시기, 질투,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가인이 아벨 죽이고, 요셉이 형들로부터 버림받고 아들이 아버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발생합니다. 삶을 지배하는 것은 고통과 상처들, 두려움, 걱정들입니다. 이 무거운 짐들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죽음을 맛보게 합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이는 자기표현 못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 인생을 승리하게 하는 원동력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승리를 믿습니까? 물리적인 힘, 육체에서 나오는 힘은 이적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혈기 없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육체의 힘을 쓰면 멸망, 사망하기 때문에 안 쓰는 것입니다. 부활의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물리적, 육체적 힘을 쓰는 사람은 자연인, 생긴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체험하는 자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부활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사랑의 확신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사랑의 승리를 가져오는 성도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3. 정의의 승리입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불의한 판결, 죄 없는 예수님을 여론의 방향대로 판결합니다. 육체를 입은 예수님은 그렇게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육체의 무상함입니다. 연약함을 기억하는 성경의 저자들은 시90편(아침에 돋아나는 풀과 같다.)과 야고보서 4장 14절(너희생명이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육체로 승리했다고 말하는 인생은 어리석은 것이다.)에서 말합니다. 육체로 승리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승리의 수단이 아닙니다.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는 육체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와 불의의 대결입니다. 선과 악의 대결에서 예수님이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공평하고 정의로운가요? 국회의원 선거 공천에서 내가 탈락하면 원칙 없는 공천이라 합니다. 법대로, 원칙대로만 되는 세상이 아닙니다. 불법 행하고, 속이기도 힘듭니다. 이것이 다수가 될 때 인간 사회는 혼동에 빠지게 됩니다. 다수는 불의불법을 행하도록 압력 넣고, 믿지 않으면 심판받는 것입니다. 부활사건은 불의에 대한, 악한 음모에 대한 승리입니다.
빌라도 법정의 불의한 판결 3일이 채 지나기 전에 그들이 우려하던 대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정의의 승리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싸우도록 가르쳐 줍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십자가를 진다”란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의를 행하며 사는 일입니다. 이것 위해서는 부활신앙이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면류관,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기독교인의 본질적인 삶은 주님 제자로서 십자가 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지킬 것을 지키고, 안할 것을 안 하고, 남들이 못하는 것을 행하고, 남들이 싫어하는 것을 내가 담당하고 이런 사람은 승리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란 “빌려온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당연한 가치도 이것도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가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매우 높은 가치입니다. 정의를 행하면 승리합니다.
부활 신앙 있는 자는 승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됩시다. 생명의 승리, 사랑의 승리, 정의의 승리를 맛보는 삶은 존귀한 인생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고전 15장 55~58절 / 이상호목사
오늘 특별히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거룩한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체와 자녀들 위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껏 인류를 영원히 불행케 했던 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영원한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불행케 했던 숙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요, 또 하나는 죽음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류는 불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와 죽음은 이 세상의 어떤 철학, 어떤 종교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죄의 본성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부터 인간은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롬3:10). 그러므로 인류는 아무리 돈과 권력이 많아도 죄의 종노릇을 하다가 그 죄값으로 영원히 사망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롬3:23, 6:23). 죄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으나 성공한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죄에서부터 승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던 것입니다(고전15:20).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사건이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죽은 자를 따라가며 죽은 자에게 길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을 지니고 오셔서 완전한 죽음을 맛보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으며, 죽음 가운데서 사망 권세를 이기심으로써 완전히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면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우리에게 부활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57절)
본문 57절을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데살로니가전서 5: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는 축복의 열쇠입니다. 감사는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이 넘쳐나게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압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 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죄 용서함 받아 구원받은 천국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이상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더라도 다시 부활합니다. 이 부활의 은혜를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늘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셔서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주일날 주님 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2. 믿음에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58절 상반)
본문 58절 상반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목사님께, 성도들에게 시험 들어 믿음이 흔들립니다. 아무리 충성 헌신 봉사해도 칭찬도 없고 댓가도 없다고 생각할 때 믿음이 흔들립니다. 열심히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속히 없을 때 믿음이 흔들립니다. 정말로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도리어 더 삶이 더 힘들어지고 물질의 문제 등이 더 악화되고 더 어려울 때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렇게 열심히 충성하여 주의 일을 했는데 결국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다른 사람이 그 공로를 차지할 때 믿음이 흔들립니다. 한번 마음먹고 전도 열심히 해 보려고 하는데 전도를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전도의 열매가 없을 때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믿음이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우리를 흔들어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믿음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리고 감사가 없고 불평불만이 생긴다면 더러운 마귀가 나의 믿음을 흔들어 나에게 축복을 못 받게 하려고 지금 공격해오는구나 얼른 눈치 채고 기도로 물리쳐야 합니다. 이렇게 마귀는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게 하고, 성도들 원망하게 하고, 목사님 원망하게 하고, 교회 원망하게 하고, 결국 예수 믿는 믿음까지 까먹게 하여 지옥 보내기 위하여 온갖 계략과 작전으로 우리를 공격해옵니다. 이 때는 마귀의 교묘한 계략인 줄 알고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신앙을 가지고 항상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3. 우리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58절 중반)
본문 58절 중반절을 봅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우리가 더욱 힘써야할 일은 주의 일입니다. 우리가 더욱 힘써야할 주의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 부활신앙을 가지는 우리는 모이기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공식 예배와 모든 공식 모임에 잘 참석하여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봉사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아침 일찍부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주님의 전에 나와서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깨끗이 청소함으로 낮은 자리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귀하고 귀한 물질을 드려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물질로 헌신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주일날 성도님들을 위하여 식사봉사를 하며 설거지를 하며 열심히 봉사합니다. 이렇게 여러 성도님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여러 분야에서 봉사하며 주의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신 수고와 봉사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도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도 바로 전도이셨습니다. 전도는 우리의 사명이자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주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전도하여 주님의 일을 하면 주님은 내 일을 대신하여 해 주십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 전도하여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전도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전도의 씨를 뿌리면 반드시 전도의 열매를 맺습니다.
4. 우리의 주안에서 일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58절 하반)
본문 58절 하반절을 봅니다.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는 주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둡니다. 주님을 위해 힘쓰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의 일에 힘쓴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늘에서 상급과 면류관을 받습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만 살고 끝이라면 우리가 죽음으로 끝이라면 이 땅에서 우리의 수고는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부활하신 그 능력과 권세와 힘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의 부활로 만드는 부활 신앙만이 어렵고 힘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부활신앙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십시오.
믿음에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마세요.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세요.
주 안에서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아멘!
승리를 주신 하나님
고전 15장 55~58 / 이용효목사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 잡혀 절대 절망 가운데 빠진 인류에게 최대의 승리를 안겨 준 승리의 확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진리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생명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도 중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부활이 사실 이라면 기독교의 진리도 진실입니다. 반대로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진리도 가짜입니다. 만약 부활 사건이 거짓이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의 예배도 헛되고, 우리의 헌신도 헛되고 우리의 전도도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게 되며,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고전15:17~19절) 그러므로 믿음 생활을 잘 하려면 부활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려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5장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며 확실함을 믿게 하려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여러 가설들이 있었습니다. 1)제자 도거설입니다. <마태복음28:11~15절>에 보면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에게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돈을 주어 제자들이 밤에 와서 시신을 훔쳐 갔다고 하라고 하여 이 거짓말이 민간에 퍼지면서 제자들이 예수님 닮은 사람을 내세워 부활을 조작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군병들이 굳게 지키고 있었고 무덤의 문은 2톤이나 되는 돌이기에 제자들이 훔쳐갈 수 없었습니다. 2)기절설입니다. 1828년 플러스 라는 학자가 주장하기를 예수님이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하였다가 서늘한 무덤에 뉘어 놓아 깨어났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양손과 양발이 못 박혀 피를 흘렸고, 옆구리에 창을 맞아 물과 피를 다 쏟아서 살아날 수 없었습니다. 군병들도, 사형집행관도, 빌라도도, 장례를 치른 요셉도, 제자 요한과 여인들도 모두 사망을 확인하였고 무덤에 장사 지냈습니다. 3)환상설입니다. 1835년 스트라우스라는 학자가 주장하기를 실재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워하다 환상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나타나셨고 자주 나타나셨고 40일 동안 머물러 계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많이 말씀하셨던 것을 보면 환상이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영혼설입니다.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혼이 나타났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고, 손에 못 자국과 옆구리에 창 자국을 만져 보라고 하여 도마가 만져 보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은 제자들과 여인들 그리고 동시에 500명에게 나타나 보이셨고, 기록된 것만도 11번 나타나 보이셨고, 더군다나 박해하던 자에게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바쳐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제자 마태는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 폭도들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가는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부활을 전하다 손발이 묶인 채 끌려 다니다 가죽이 벗겨져서 죽임을 당하였고,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던져져서 목숨을 잃었고, *안드레는 티 자형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이 넘어가면서 예수 예수를 내 주를 불렀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처럼 십자가에 바로 달릴 수 없다고 하여 거꾸로 메달려 죽임을 당하였고, *도마는 인도의 마드리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 베임을 당하여 죽었고, *맛디아, 바나바,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였고, *바울은 로마에서 목 베임을 당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이 어찌 이리도 담대하게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부활을 증언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활을 목격한 초대교회는 핍박 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부흥되었고 반대하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주님께로 돌아온 것을 보면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토마스 아놀드>박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보다 더 완전한 증거에 의해 입증된 사건은 인류 역사에 하나도 없다” 고 하였고, 하버드대학 법학과를 명문으로 끌어올린 <사이몬 그린리프>교수는“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 어떤 사건보다 더 확실한 법적 증거로 증명되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미국 생물학 학회장인 A.C. 아이비 박사는 “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이나 생물학적인 지식을 근거로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과학적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 고 말했습니다. 부활은 과학 이상으로 성경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 과학자의 3분의 2가 크리스챤이라는 사실이 이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2. 부활은 우리에게 몇 가지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1)부활은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확신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그 누구도 하지 못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나는 부활이요” “나는 알파요 오메가 처음과 나중”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수고하고 무거운” “내가 곧 길이요” 이 말씀을 들어보면 그가 그의 말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거나 아니면 미친 사람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주장이 모두 진리임을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이 진실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도 진실입니다. 2)부활은 신자들은 살아계신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모하메드, 공자, 석가의 무덤과 뼈들은 지금도 찾아 볼 수 있고, 그들은 썩어서 그곳에 묻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마18:20절, 마28:20절, 히13:5,8절) 3)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오랜 경기 침체로 많은 사람들이 실직의 공포에 휩싸여 있고,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쓰러지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스트레스, 두통,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너무 많습니다. 청년실업200만명 시대의 힘들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회 고위층들 많은 정치인들이 부패에 연류 되었다는 소식은 국민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어두운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 어두움의 세상에 찬란한 희망의 빛이 되어 믿는 자들의 마음을 부풀게 합니다. 부활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고, 불안이 변하여 평안이 되었으며,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이 당신의 생애를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당신이 바라는 해답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이 세대 사람들에게 우리는 부활의 메신저가 되어 희망을 선물해야만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4) 부활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봄이 되어 만물이 소생하고 있습니다. 곡식 알갱이나 벌레들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데 만물의 영장이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말겠습니까. 성경에는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놀라운 약속들이 주어졌습니다. <고린도전서15:20~30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셔서 주님을 믿는 모든 잘들은 주님과 함께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리나 벼의 첫 이삭이 필 때 곧 다른 이삭들도 피어날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이 입으신 그 몸과 같은 몸을 입고 부활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몸은 신비로운 몸입니다. <42~44절>에는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49절>에는“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이 형상을 입으리라” 고 하였고, <에베소서3:21절>에서는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활절 아침에 이런 확신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3. 부활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1)부활은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의 영적인 시각을 흐리게 만들어, 예수님보다 다른 곳을 쳐다보라고 유혹합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보다는 세상의 부귀영화,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합니다. 마귀는 환경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게 하여 우리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다가 방황하는 사람들도 많고, 변질되는 사람들도 많고, 넘어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부활하셔서 지금 우리가운데 살아계시는 주님께 붙잡혀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세상에서 몇 년 썩을 승리의 관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태능 올림픽 합숙 훈련소에서 세상을 등지고 구슬땀을 흘리며 인내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부활에 참여할 확신을 가졌다면 이 세상이 주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 부활신앙을 견고히 잡으셔서 흔들리지 않는 신자가 되십시오. 2)부활은 세상의 핍박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주님은 살아생전 예언하신 그대로 살아나셔서 그 백성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우리들이 어떤 역경을 만났을지라도, 어떤 시련을 당하였을지라도, 부활신앙은 이 모든 것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 속에서 놀라운 영향력과 자취를 남겼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에는 카타콤이라는 지하묘지가 있습니다. 로마 제정 시대에 극심한 박해가 가해 졌을 때, 기독교 신자들은 이 카타콤에 폭 1미터 높이 3미터 가량의 지하도로를 만들고 그곳에 기도처와 은신처를 마련했습니다. 현재 이탈리아에 산재해 있는 카타콤을 합치면 그 전체 길이는 880킬로미터나 되고, 벽에는 약 700만 명에 이르는 기독교 신자의 시체가 매장 되어 있다고 합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이 지하묘지에서 250년 동안이나 박해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세대에서 다음세대로 믿음을 전수하여 신앙을 지켜 드디어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힘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진하여 기꺼이 자기의 목숨도, 재산도, 명예도 아낌없이 내던진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히 살아계신다는 이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삶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부활생명을 가지게 된 성도가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고 담대히 명령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주의 일에 충성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우리들이 부활을 확신한다면 주일 한 번만 나오고 말겠습니까. 성경공부도하고, 전도도하고, 헌금도하고, 순모임도, 참여하고 교회 봉사도 하고, 이것저것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국민일보 신문에 임윤재집사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2001년 3월 방광암 진단으로 첫 수술을 받고 8개월 간 항암치료를 마친지 3개월 후 또 다시 암이 번졌다는 진단을 받고 2002년2월 다시 재수술을 받았습니다. 사랑의 교회 박남규목사님의 심방을 거부하였지만 결국 그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난주간 3일간 금식하며 기도원에서 보내고 부활절아침에 충만한 은혜를 가슴에 안고 호스피스선교회로 달려가 말기 암 환자의 남은 생을 돌보아 주는 봉사자가 되었습니다. 2007년2월에 직장암이 생겨 다시 수술을 받고 매달 한차례 병원을 찾아 검진을 받습니다. 당뇨까지 겹쳐 하루 두 번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합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가 말기 암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재발하지 않을까 병원에 갈 때 마다 걱정이 안될 수 없지만 제게는 그것을 극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 신앙이지요 주님의 부활은 저에게 더 큰 소망을 꿈꾸게 합니다.” 성도여러분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부인할 수 없는 수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고 부활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
고전 15장 57~58절 / 피종진목사
사람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열심히 개미처럼 일하다가 죽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할까요? 일의 내용을 보면 보람된 일도 많고, 또 죽도록 수고를 했는데 그 일 자체가 의미 없는 일, 보람 없는 일도 있습니다. 성경에 말씀한 참으로 귀한 일은 바로 주의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주의 일과 상관이 없는 그저 육신의 일을 위해서 일평생 동분서주하면서 힘쓰고 애쓰다가 허무하게 죽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주의 일 때문에 눈물과 땀을 흘리고, 시간과 물질, 지혜 등 모든 재능을 바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열심히 주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참으로 칭찬하시고,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주의 일을 할 때 중요한 것은 ①주의 일은 자원해서 해야 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보다도 자원해서, 하고 싶어서,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②주의 일은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 다른 일을 다 하고서 시간이 남으니까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 6:33) ③주의 일은 열정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열심’이란 말은 히브리어에 보면 ‘정열적으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 정열적으로 해야 합니다. ④주의 일은 항상 해야 합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 15:58) 우리는 항상 즉 죽을 때까지,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심장의 고동이 멈출 때까지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는
첫째, 사탄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본문 말씀을 한 사도 바울에게는 항상 사단의 도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복음을 들고 외치는 제자들에게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복음을 전파하려고 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고 기뻐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욕과 핍박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사탄의 도전을 받아 핍박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고 주님께 부르짖으면서 끝까지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자에게 반드시 승리를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배후에서 함께 하여 주시고, 힘을 주셔서 승리를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열심을 품고 전진할수록 하나님이 배후에서 도와주십니다. 핍박을 받을수록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성도들에게 하늘의 상을 크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핍박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조그마한 일을 할 때에는 핍박이 작아도. 큰일을 맡으면 핍박도 더 커집니다. 그러나 하늘의 상은 더 클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주의 일에는 반드시 실패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주의 일을 할 때 주님이 함께 역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사망의 권세도 이겨놓았습니다. 사단의 권세도 이겨놓았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에는 마귀가 승리한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승리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핍박을 받는 것 같아도, 승리의 주님과 더불어 이미 승리한 자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많은 핍박을 받고, 투옥을 당하고, 순교를 당하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반드시 승리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승리가 곧 기독교인들의 승리입니다. 지옥권세를 멸하신 그 승리가 기독교인들의 승리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승리가 기독교인들의 승리요, 지옥문을 닫으시고 천국문을 열어주신 그 승리가 여러분과 저의 승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험이 있다고 좌절하는 사람은 사단에게 지는 것입니다. 주의 일은 주님이 맡겨 주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승리를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셋째,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헛되다.’는 히브리어에 보면 ‘허무하다.’라는 뜻입니다. 전도서 1:14에 보면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했고, 잠언 11:18에 보면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영원히 헛되지 않습니다. 허무한 것에 투자하지 마시고, 세상의 헛된 것에 너무 골몰하지 마시고, 주의 일에 땀 흘리는 것에 절대 후회하지 마십시오. 내 모든 생활 속에 하나님에 관한 일이라면 나의 마음도, 나의 생각도, 나의 시간도 나의 모든 삶 전체를 언제나 아끼지 말고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기 5분전에 공통적으로 하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조금 더 참았을 걸’, ‘조금 더 베풀었을 걸’, ‘조금 더 용서해 주었을 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매일처럼 내가 죽기 5분전이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악을 행치 않을 것입니다. 용서와 베푸는 생활을 하며 살 것입니다. 내 모든 삶이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줄 알게 되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되면 나의 건강도 하나님이 보장해주시고, 내 사업도 보장해주시며, 내 지혜도 보장해주시고, 내 자손도 보장해주시며, 내 모든 삶을 주께서 보장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모든 삶 전체를 하나님이 책임져주시고 역사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의 일 중에 가장 큰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 천하를 무대로 주셨습니다. 65억이라는 인류가 바로 우리의 목장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넷째, 신령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육으로 심는 것은 육으로 거두지만, 영으로 심는 것은 영으로 신령한 열매를 하나님께서 거두게 하십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우리는 영의 관한 것을 많이 심어야 합니다. 신령한 것을 심을 때 하나님께서 신령한 것을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고, 칭찬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고 축복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육체를 위하여 심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신령한 것과 연결되기를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업을 축복해주십니다.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려고 하면 사단의 도전을 받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의 일은 절대로 그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되고, 반드시 신령한 열매가 맺혀지는 줄로 믿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헛되지 않은 수고
고전 15장 57~58절 / 피종진목사
우리의 삶은 삶 자체가 수고입니다. 수고란 히브리어에 보면 ‘혹사한다, 큰 고통을 당한다’라는 뜻이고, 헬라어에 보면 ‘아주 많은 괴로움을 당한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어떤 일을 할 때에 하는 육체적인 수고도 수고지만, 정신적으로 겪는 괴로움도 있습니다. 정신적인 괴로움은 육체의 어떤 뼈의 아픔과 살의 찔림의 아픔보다도 더 큰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많은 수고 속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전도서 1:3에 보면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한 줌의 흙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헛되지 않은 수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헛되지 않은 수고의 사람이 되어서 우리 자신에게는 유익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되고 은혜를 끼치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수고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수고가 헛되지 않은 수고일까요?
첫째, 주님께 바쳐지는 수고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58절) 이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주의 일’이라고 하는 이 이름 자체가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일, 내세에 관한 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 영의 일 이런 모든 일들이 이 세상에서 헛되지 않은 주의 일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수고가 따른다’는 말은 고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수고에 대한 상급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기에서 죽음을 복이라고 한 것은 우리 예수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고 하나님의 선물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권세 지위를 가졌든,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든 없든 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삽니다. 왜냐하면 불신자의 죽음은 곧 지옥 형벌의 고통이요, 이를 갈며 통곡하는 날이요,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 속에서 세세무궁토록 이를 갈며 심판을 받는 그런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는 그 순간부터 눈물과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이 다 끝이 나고, 천국에 들어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바쳐지는 수고란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받들어 충성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주님의 복음을 힘써 전하며,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로 정성을 다하여 주의 사역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일보다도 주의 일을 가장 기뻐해야 됩니다.
둘째, 성령으로 봉사하는 수고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주의 일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우리의 손과 입과 몸을 통해서 성령께서 역사해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할 때에 손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손도 축복의 손이 있고, 도적질하는 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입니다. 어떤 분은 이 땅에 태어나서 흉악한 일만 하다가 감옥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싸매주며, 위로해주고 붙잡아주며, 이끌어주고 축복해주다가 길이 길이 그 이름이 빛나고 후대사람들에게까지 존경을 받으며 성령으로 봉사하는 수고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입이지만 저주와 악담을 하는 사람은 쓴물처럼 그 입에서 온갖 원망과 불평, 독살스러운 말, 거짓말, 혈기 분노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봉사하는 수고를 하는 사람은 그 입에 항상 은혜와 진리의 샘이 흘러 사랑의 말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말,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축복된 말을 하며 삽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기 이전에 한 말과 성령을 받은 이후에 한 말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사와 이적을 보며 영적 훈련을 받았던 베드로가 성령을 받기 전에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라고 맹세했지만, 막상 주님이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 앞에서 모욕을 당하실 때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마 26:70,72,74). 그러나 그가 오순절에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이후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했을 때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주님을 믿기로 결심하는 능력과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쓰임 받는 사람은 절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자랑합니다. 예수를 높입니다. 예수를 찬양하고 전파합니다. 자기 삶에 있어서 최고가 예수님입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자가 삶의 목적도 예수요, 자기의 모든 삶의 방법 전체가 예수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중심의 삶이 되었을 때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힘 받고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쓰임 받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분서주하며 애쓰고 힘쓰고 있습니까? 만일 그 일이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면 남는 것은 허탈과 허무감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핍박을 받고, 주를 위해서 금식기도와 철야기도도 하며 전심전력을 다하는 수고는 곧 성령으로 봉사하는 수고입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는 일과 자기 육체의 힘으로 봉사하는 일은 다릅니다. 성령으로 일을 하게 되면 그 일이 기뻐지고, 그 일을 자원해서 하게 되며, 그 일을 열정적으로 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라고 말씀하셨을 때,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자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강제적으로 일을 맡겨서 하는 것도 좋으나 스스로 자원해서 하는 것은 더 좋습니다. 로마서 12:11에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했습니다.
셋째, 생명을 살리는 수고입니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잠 10:16) 생명을 살리는 수고란 지옥에 갈 자를 천국에 가게 하고, 저주 받을 자를 축복 받게 하는 수고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힘쓴다면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도와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즘 자연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서도 애쓰는데, 지옥 가는 저 생명들을 보고도 어찌 우리가 방관만 하고 있어서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저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생명줄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주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 교회에 사명을 부여한 것입니다.
이 세대가 점점 더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생명을 사망에서 건짐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만히 있게 된다면 과연 누가 이 세대를 건지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고 고백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수고야말로 헛되지 않은 수고입니다.
요한복음 3:16,17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넷째, 복음을 위한 수고입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 2:22)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디모데를 소개할 때에 다른 것을 소개하지 않고 그가 복음을 위해서 나와 함께 수고한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수고가 많이 있지만 복음을 위한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은 수고입니다.
다니엘 12:3에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말씀했고, 시편 126:5,6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한 수고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2에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씀했고, 마가복음 16:15,16에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바쳐지는 수고, 성령으로 봉사하는 수고, 생명을 살리는 수고, 복음을 위한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은 수고입니다. 헛되지 않은 수고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우리 자신에게는 유익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되고 은혜를 끼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