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잡조는 만력연간 사조제라는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 무술서라기보다는 당시의 사건이나 일화등을 모아 적은 책이었는데, 그렇다 보니 아마 당시에 꽤 화제가 되었을 무림의 사건도 몇 개 적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이 소림이 조정의 명을 받아 녹림을 토벌하다가 패한 내용이었다.
대충 내용을 살펴보자면,
"무예십팔반은 모름지기 백타 - 즉 권법 - 이 최고이다. 당대의 사람으로서는 소시박이 대적하는 자가 없어 작은 호랑이와 같고, 또 양홍보는 촌리에서 능히 영웅호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이것을 실전에서 쓰기에 아직 반드시 이롭다 할 수 없으니 많은 부족함이 있었다. 하남 소림사의 권법은 천하에 다시 없는 것으로써, 그 스님으로 사방을 떠도는 자는 모두 수십 명을 대적할만 했다.
어느날 유적 - 즉 떠돌이 유민이 난을 일으키자 누군가의 건의로 관에서는 이들을 후한 상을 약속하고 모집하여 5백 명의 정예를 얻을 수 있었는데, 처음 그 소식을 들은 도적들은 무척 두려워했었다.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자 도적들은 거짓 패하여 도망침으로써 토벌군을 유인했고, 방심하고 있던 소림사의 승려들을 밤에 기회를 보아 기습함으로써 모조리 섬멸하고 말았다. 결국 빼어난 정예를 두고서도 그것을 잘못 운용한 결과이니, 병사를 단련하는데는 장수를 가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이 사건을 소재로 무협소설이 하나 나온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약간 윤색을 가해 정황을 달리 설명하고 있었다.
원래 중국에서는 도적과 농민이 따로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농사를 짓다가도 먹고 살기 힘들면 심심찮게 마적이 되거나 화적이 되거나 산적이 되곤 했었다. 먹고 살만 하면 농사를 짓고, 살기 어려워지면 무기를 들고 도적질에 나서고, 그래서 역대 중국 정권이 골치를 앓았던 것이 흉년이나 기근이 들면 일어나는 이들 도적들이었다. 농투성이 무지랭이들이지만 대개는 비밀결사로 엮여 살기 위해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이들이란 - 더구나 약탈이 끝나면 어느새 평범한 농민으로 돌아가곤 하는 이들의 존재는 꽤나 상대하기 껄끄러웠으니까. 또 이들은 지역유지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아마 기록에 나온 유적은 "난"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으로 보아 홍수나 가뭄등으로 고향을 떠나 떠돌던 유민들이 도적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아마 소림사를 동원한 것으로 보아 하남이나 산서 인근에서 일어난 소요일 것이다. 대개 이런 경우 사병을 동원하고자 한다면 지역의 유지들로부터 동원하는 것이 통례일 테니. 오잡조 자체가 만력연간에 쓰여진 책인 것으로 미루어 재정이 고갈되어 있던 명으로서는 관군을 동원하기보다는 약간의 특혜와 상을 약속하고 이러한 토호들을 끌어들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고. 즉 소림사 자신이 하남의 토호로서 도적화된 유민을 토벌하는 데 동원되었던 정황인 셈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천하공부출소림이니 하여 중국무술의 정종을 자처하는 소림이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무술에 능한 개인의 집합에 불과한 터라, 그리 두려워하던 도적들이 유인과 기습을 병행하자 한 순간에 5백이라는 결코 적지 않는 병력이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저자도 "병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이 패착이고, 병사를 다루는 것은 장수를 고르는 것이"라 조롱하지 않던가. 아무리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히고 있어도 제대로 전술을 갖추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오잡조에는 또 하나 조정에서 천하의 무술인들을 모집한 기록이 나오는데,
"정통 14년 기사년 변 - 토목보의 변, 명의 정통제가 친정에 나섰다가 오이랏족의 엣센에 의해 패하여 포로로 잡힌 사건으로 한때 북경이 엣센에 의해 포위되기도 했었다. - 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천하에 용사를 모집했다. 산서 사람 이통은 경사에서 무예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십팔기에 두루 통달한 사람이었다. 가히 당대에 함께 싸워 당할 자가 없어 일등으로 뽑히게 되었는데, 그때 세운 공적으로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긴 가정연간에도 다수의 무술인들은 동원하여 일본군과 싸우게 하기도 했으니, 그로 인해 죽어나간 당대의 고수들이 적지 않았었다. 아무래도 중국무술이라는 것이 집단전보다는 개인간의, 혹은 소수의 작은 집단간의 싸움을 전제한 것이다 보니 그와 같은 대규모 싸움에는 적합지 않았던 터라. 더구나 왜구가 쓰던 일본도는 당시 중국 무술인들로서는 일찌기 경험해 보지 못한 예리하고 흉험한 무기였다. 그 기술도 정교하고 강했고. 그래서 중국에서도 싸움이 끝나고 왜도술이라 하여 일본도와 그 기술을 일본의 무술체계 안에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여튼 워낙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군사를 조련할 때 중점을 두는 것이 개인무술이라, 진법이나 기동도 역시 중요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개인무술이었고, 그런 만큼 민간의 무술가에 대한 기대도 제법 높은 편이었던 때문에 이렇듯 조정의 필요에 따라 불려가기도 했던 것이다. 또 그러면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고. 물론 왜구토벌이나 기사에 나온 경우나 보더라도 무술고수라고 제몫을 한 경우는 별로 없지만 말이다. 무술이 능하다고 싸움을 잘 하는 건 아니니.
또 하나 오잡조는 특이하게도 소림권을 두고 소림사 권법이라 기록하고 있기도 했는데, 이것은 당시까지는 없던 것으로서 아마 이 오잡조의 기사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아무래도 무술인이 아닌 저술가에 의해 쓰여진 책이어서가 아닌가 싶은데, 덕분에 지금도 소림권과 소림사 권법은 거의 같이 쓰이고 있는 중이다.
결론은... 소림무술 쥐뿔이라는 거다. 당대의 소림절기를 깨친 무승 5백이 나서서 고작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녹아버렸으니... 소림의 정예랄 5백 나한과 녹림의 싸움은 이로써 녹림의 승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무협소설대로라면 무당, 화산 등 정파가 나서서 정사대전이 벌어져야 했겠지만... 뭐 역사는 역사 무협은 무협이니까. 그런거다.
첫댓글 전략과 전술과 무술의 차이가 그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