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3일(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실천과 믿음
윤리는 영성과 선교가 만나는 곳이다. 그리스도교는 서양에서 4세기 초에 로마 제국 황제에게 공적으로 인준을 받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즈음부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도시를 떠나 사막으로 가고 또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 그게 수도 생활의 시초다.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지 않았던 거다. 그들은 예식에 참석만 할 뿐 생활은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았던 거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실천이 관건이다. 믿음은 마음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이다. 사람은 믿는 대로 행동한다. 실천과 믿음은 선순환 관계다. 실천하면 그 믿음에 더 확신이 생긴다. 그 믿음으로 실천이 더 수월해진다. 예수님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다. 그들은 바위가 나올 때까지 땅을 파서 그 위에 집을 짓는다. 그런 집은 홍수가 나서 집 주변 흙이 다 쓸려가도 무너지지 않는다. 순교자들이 그런 대표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순교자들의 속마음을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시니 나는 두렵지 않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주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나는 내려다보리라.”(시편 118,6-7) 외아들을 내어놓기까지 나를 영원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나에게 이랬다저랬다 하는 갈대 같은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는 거다.
극보수 개신교 목사들과 교인들 또는 이단과 사이비 교주들 그리고 극우 정치인들 사이 관계를 다루는 TV 대담 프로를 보게 됐다. 목사라고 불려서는 안 될 거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하느님을 부르며 자신의 주장이 하늘의 뜻인 양 말한다. 21세기, 모든 게 다 드러나 있고 조금만 찾아보면 그 진위를 금방 알 수 있는 요즘에 허황된 주장과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음모론을 주장한다. 거기에 초강대국 미국 정치인들과 일부 대학들이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악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그 영향력만은 분명히 느낀다. 태어나는 아기가 어떻게 원죄에 물드냐고 비난하지만, 그런 그들이 무식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아님을 생각하면 이 교리를 무시할 수 없을 거다. 정말이지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도 휩쓸려 갈 거다.
우리 믿음은 단순한데 그 실천으로 그렇지 않다. 우리 실제 삶은 얼키설키 복잡하다. 그래도 그리스도 예수님의 길은 하나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서 그 길을 찾는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거다. 그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이 내 뜻과 맞지 않더라도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거다. 그러면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성인과 순교자들이 겪었던 일들이 그대로 내게도 벌어진다. 하느님이 변하시지 않는 거처럼 세상 속 악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유혹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놈은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강하다. 그런 그놈도 나가라는 예수님 말 한마디에 그 즉시 쫓겨났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예수님과 친밀감을 유지하고 더 친해지지 않고서는 이 복잡한 세상살이에서 주님의 길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예수님, ‘그래봐야 죽이기밖에 더하겠냐’는 그런 마음이 들기를 바랍니다. 제가 주님 편에 있기를 바라는데 무엇이 저에게 덤빌 수 있겠습니까. 황당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TV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고 때론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을 하는 조용한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더, 그들 숫자와 비교할 수 없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저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라갑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 앞에서 매일 그리고 수시로 어머니와 눈을 마주칩니다. 그러니 저는 길을 잃지 않는 줄 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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