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순국선열
제3편 광복군의 후기 활동
제1장 각 부대의 활동
제2절 제1지대
1. 지대 본부
1942년 4월 16일 임시정부 국무 회의의 결정에 따라, 종전의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하고, 조선의용대 대장 김약산(金若山)[김원봉(金元鳳)]이 5월 21일부로 제1 지대장 겸 총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미묘한 사정으로 광복군 개편 선언은 7월에 가서야 있고, 김약산이 총사령부 부사령관직에 취임한 것은 동년 12월 5일이었다.
이 날, 김약산(金若山) 부사령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 앞에서 임시정부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선서식(宣誓式)을 거행한 후에 정식으로 부사령직에 취임하였던 것이다.
이 보다 앞서 12월 1일, 김약산 지대장은 중경(重慶) 방송국을 통하여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취임 연설을 하였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 지대로 개편되는 동시, 본인이 지대장 겸임 광복군 총사령부 부사령에 취임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조국의 해방을 위하여는 민족의 총역량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한국 인민은 마땅히 독립군 진영에 참가하여 한국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해야 할 것이며, 한국이 나라를 빼앗긴 지 벌써 32년이 되는 동안 우리 한국 인민은 쉬지 않고 무력으로 저항하였으니, 한국의 광영(光榮)적인 역사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면 반드시 오랜 시기의 간고(艱苦) 분투를 거쳐야만 바야흐로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1)
김약산이 부사령직에 취임한다는 소식을 접한 재미 한교 연합회 집행부에서는 축하
_______________
1) 국사편찬위원회 펴낸≪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 p.296.
- 369 -
전보를 쳐 오고 ≪신한민보(新韓民報≫는 축하의 논설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광복군 제1 지대장 겸 부사령 직에 취임한 김약산은 부대의 재정비와 아울러 대원의 교육 훈련에 힘을 경주하는 한편, 중국군 당국이 제정하여 실시되고 있는 소위 9개 행동 준승에 대한 개정을 촉구하기 위하여 총사령을 보좌하면서 광복군 지위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중국 군사위원회 당국에 교섭을 추진하였다.
당시 광복군 총사령부 및 제1 지대 본부는 중경에 있었는데, 이곳은 양자강(揚子江) 상류가 사천성(四川省) 경내에서 민강(岷江)과 가릉강(嘉陵江)으로 분리된 중간의 3각 지점의 분지이며, 인구는 백만, 기후는 아열대에 가깝고, 민강 북안은 강북현(江北縣) 이다. 총사령부는 임시정부가 있는 칠성강(七星崗) 연화지(蓮花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고, 제1 지대 본부는 가릉강 남안의 양자강 원류(原流) 가의 탄자석(彈子石) 150호 2층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대 본부에서는 주로 대원들의 군량수급사무(軍糧需給事務), 신입 대원에 대한 교육 훈련과 연합군 측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을 요청할 경우의 인원 파견, 그리고 교육훈련이 끝난 대원들을 지대장 특명으로 수시 적 점령 지구인 적방으로 파견하여 초모 선전, 정보 수집 및 연합군과의 합작 공작 등 임무를 수행하게 하면서, 각 구대의 공작 활동을 지휘 감독하였다.
1942년 11월 광복군 개편 이후, 중경에 있던 제1 지대 본부의 편성과 대원 명단은 아래와 같았다.
[제1지대 주유(駐渝) 대원 명단]
지 대 장
김약산(金若山) [김원봉(金元鳳)]
지 대 부
신악(申岳)
부관 주임
손한림(孫漢林)
비 서
이달(李達)
사 서
장경군(張競郡)
사 서
요준덕(廖峻德)
총무 조장
이집중(李集中)
- 370 -
조 원
요서병(姚西屛)
사 서
이우송(李友松)
조 원
한지성(韓志成)
조 원
주세민(周世敏)
사 서
왕성우(王成宇)
군 의
한금원(韓錦源)
사 약
이명수(李明守)
부대장
성현원(成玄園)
대 원
마일신(馬一新)
대 원
정상산(鄭象山)
대 원
왕현덕(王賢德)
대 원
서진무(徐振武)
대 원
한태은(韓泰恩)
대 원
김건옥(金鍵玉)
대 원
김복옥(金福玉)
대 원
윤규운(尹虯雲)
대 원
최우강(崔友江)
대 원
장희수(張熙守)
대 원
양동근(梁東根)
대 원
김영주(金令洲)
대 원
박시창(朴始昌)
대 원
최창례(崔昌禮)
대 원
진가명(陳嘉明)
대 원
왕통(王通)
대 원
윤징우(尹澄宇)
대 원
조빈(曺斌)
- 371 -
대 원
이소원(李蘇元)
대 원
문정진(文靖珍)
대 원
송영순(宋英順)
대 원
이병숙(李丙淑)
대 원
최동선(崔東仙)
대 원
김상엽(金尙燁)
대 원
박신숙(樸新淑)2)
그리고, 제1구대는 호북성(湖北省) 노하구(老河口)에 있고, 제2구대는 절강성(浙江省) 금화현(金華縣)에 있다가 왜군의 침공 작전으로 인하여 그 후 강서성(江西省) 연산(鉛山)으로 이동하였으며, 본부 구대는 지대 본부와 같이 있었다.
제1 지대는 1942년 5월 21일 광복군으로 편입될 대부터 종전 후 1946년 5월 16일 복원될 때까지 다음과 같이 지대장의 교체가 있었다.
제1 지대 역대 지대장 명단
초 대
김약산(金若山)
2 대
이집중(李集中)
3 대
송호성(宋虎聲)
4 대
이준식(李俊植)
5 대
채원개(蔡元凱)
1945년 6월에 이 집중 지대장 명령에 의하여 제1 구대의 전방 공작원을 제외하고 호북성(湖北省) 균현(均縣)[노하구(老河口)가 왜군에 점령됨에 따라 제1 구대가 이동된 곳]에 집결하고 있었는데, 대원 중 장철부(張哲夫) 등 30여명을 중경 제1 지대 본부로 집결하여 운남(雲南)에 있는 한·미 합동 기갑부대(機甲部隊) 전차훈련반(戰車訓鍊班)에서 3개월 과정의 교육 훈련을 받으라는 지시에 따라, 대원 30여명이 8월초 중경에
_______________
2) 추현수 펴낸 ≪자료한국독립운동≫ 3. p.184.
- 372 -
도착하였으나, 8·15 해방으로 인하여 교육 훈련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8·15 해방 당시의 제1지대 본부의 편제와 대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제1 지대 본부 편제표 (1945. 8. 15)
지 대 장
채원개(蔡元凱)
부지대장
신악(申岳)
부관주임
김승곤(金勝坤)[황민(黃民)]
경리주임
(중국인 장교)
의무주임
한금원(韓錦源)
비 서
조빈(曺斌)
부 관
손한림(孫漢林)
부 관
유충성(柳忠成)[유경로(柳景魯)]
본부구대장
김승곤(金勝坤)[겸직]
제2 분대장
정훈(鄭薰)
제3 분대장
나영학(羅榮鶴)
제4 분대장
최명선(崔明善)
지대 본부 요원 문정진(文靖珍)·최기옥(崔基玉)·유시보(柳時保)·김근수(金根洙)[왕석(王石)]·이의신(李義臣)·이무중(李武重)·박석권(朴錫權)·박재희(朴載喜)·홍동산(洪東山)·이정득(李廷得)·이동초(李東初)·홍종윤(洪鍾允)·강홍모(姜弘模)·배상갑(裴相甲)·방충국(房忠國)·안중달(安仲達)·김득명(金得鳴)·권혁주(權革柱)·이봉선(李奉先)·표경화(杓徑華)·노원근(盧源根)·김장균(金長均)·이천의(李川義)·이제형(李弟兄)·정일수(鄭一洙)·강명호(姜明鎬)·장철부(張哲夫)·전월순(全月順)·허지수(許志秀)·이백규(李白奎)·부병일(夫炳一)3)
그리고, 전방 공작 중 왜군에게 희생된 대원은 1944년 5월에 하남성(河南省) 신향(新鄕)에서
_______________
3) 제1지대 편찬위원회 제공. 김승곤(金勝坤) 증언.
- 373 -
제1구대 소속 유시훈(柳時勳)이 동년 9월에, 부병일(夫炳一)이 남경(南京) 부근 무호(無湖)에서 순직(殉職)했으며, 이성근(李成根)은 동년 12월에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에서 왜적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3년 형을 받고 신의주(新義州) 형무소에서 복역 중 8·15 해방으로 석방되었다.
2. 제1구대
제1구대는 제5전구 이종인(李宗仁) 사령관 관할 지역인 호북성(湖北省) 광화현(光化縣) 노하구(老河口)에 주둔하여 현지 중국군 당국과 긴밀한 협조 하에 적 점령 지역에 대한 초모 공작 및 대적 선전 공작, 왜군 포로 심문과 적 문서 번역, 적정 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신입 대원에 대한 교육 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초기의 구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제1 구대 편성표]
구 대 장
김준(金俊)
구 대 부
김창국(金昌國)
서 기
임평(林平)
제1분대장
오명해(吳鳴海)
제2분대장
유원해(柳原海)
제3분대장
김석산(金石山) [이하 생략]
그런데 1942년 4월초, 광복군 제1 지대로 개편되기 직전인 조선의용대 시절에 제1·제3 구대(區隊)의 약 1백 20여 명 대원이 섬서성(陝西省) 연안(延安)의 공산군 지역으로 들어가 버린 다음 제1 구대 재건에는 상당한 애로와 난관이 수반되었다.
황포 군관 학교(제4기) 출신의 구대장 김준(金俊)은 구대부(區隊附) 김창국(金昌國)과 간부 유원해(柳原海)·오명해(吳鳴海)·김석산(金石山)·임평(林平) 등과 협의하여 구대를 재건 확장하기 위하여 우선 공작 중점을 초모 공작에 두고, 처음에는 개별적인 전방 공작을 실시하였으며, 공작 기반이 조성됨에 따라 다시 공작을 확장하기 위하여 5개 초모 공작만을 편성 하였으며, 구대 본부는 여전히 호북성(湖北省) 노하구(老河口)에
- 374 -
있으면서 공작 반원 교육을 실시한 다음, 아래와 같은 5개 공작반을 후방 및 전방 지구로 파견하여 각각 공작 거점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① 제1 공작반
반장 오명해(吳鳴海)
거점 하남성 정주(鄭州) 지구
② 제2 공작반
반장 유원해(柳原海)
거점 하남성 남양(南陽) 지구
③ 제3 공작반
반장 김창국(金昌國)
거점 안휘성육안(安徽省六安) 지구
④ 제4 공작반
반장 한재갑(韓載甲)[한복(韓復)]
거점 안휘성 태화(太和) 지구
⑤ 제5 공작반
반장 김석산(金石山)
거점 호북성 담현(潭縣) 지구4)
상기 각 공작반은 다시 적 점령 지구인 개봉(開封)·신향(新鄕)·봉구(封邱)·탑하(漯河)·서주(徐州)·한단(邯鄲)·창덕(彰德)·석문(石門)·북평(北平) 등 지구로 침투하여 애국 교포를 교섭하며 공작 거점을 확보했는데, 1942년 7월에 제1 공작 반장 오명해(吳鳴海)는 본시 개봉(開封)에 주재하였는데, 중국군 유격군 제8 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활약하던 한재갑(韓載甲) 등과 만나 이들을 제1 구대로 후송하였으며, 1943년 9월 제5 공작반 반장 김석산(金石山)은 한재갑(韓載甲) 등과 함께 개봉(開封)으로 침투하여, 이곳에서 윤재담(尹在潭)·김택수(金澤秀)·이성근(李成根)·박태례(朴泰禮)·장호강(張虎崗) 등과 접촉하며 거점을 구축하는 동시, 윤재담(尹在潭)·
_______________
4) 당시 제4공작대 대장 한재갑(韓載甲) 증인.
- 375 -
고병찬(高炳燦)·김지산(金志山)·이무중(李茂重)·마정(馮程)·최상제(崔相濟) 등을 인솔하고 중국 유격대 지구를 경유 제1 구대로 입대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1944년 3월에 김석산(金石山) 일행은, 다시 개봉(開封)·신향(新鄕) 등지의 거점에서 포섭한 애국 청년 강홍모(姜弘模)·계정희(桂晶熙)·유시보(柳時保) 등 10여 명을 인솔하고, 삼엄한 왜적의 경계망을 뚫고 황하(黃河)를 건너 본대로 귀대하였다.5)
동년 4월에는 왜적이 황하(黃河)를 넘어 정주(鄭州) 및 낙양(洛陽) 등지를 침공해 오게 되자, 제5 전구 사령부의 요청에 의하여 구대장 김준(金俊)은 간부 오명해(吳鳴海)·김석산(金石山)·유원해(柳原海)·한재갑(韓載甲) 및 대원 서정천(徐廷天)·최대길(崔大吉)·황학규(黃學圭)·허윤송(許潤松)·유시훈(柳時勳)·이무중(李茂重)·마정(馬程)·김지산(金志山)·고병찬(高炳燦)·최상제(崔相齊)·오춘보(吳春寶) 등 15명을 지휘하여 최전방으로 출동, 중원 작전에 참전하여 대적 선전 공작 및 적정 수집 또는 왜군 포로 심문 업무 등을 수행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7월에 노하구(老河口) 본대에 귀환하였다.
동년 8월에는 제5전구 사령 장관부 정훈처와 교섭, 최인기(崔麟麒) 등 12명이 제5 전구 소속 전시(戰時) 간부훈련단(幹部訓練團)에 특설한 정공간부(政工幹部) 훈련반(訓練班)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3개월간에 걸쳐 정훈 교육을 받았고, 제2기생 2백여 명 중 광복군은 12명이었는데, 광복군의 졸업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제5전공 간부 훈련단 특설 정사(政士) 간부 훈련반 제2기 한국 학생 졸업 명단]
최인기(崔麟麒)·최상제(崔相劑)·김홍도(金弘道)·마정(馬 程)·이무중(李茂重)·서정천(徐廷天)·김지산(金志山)·최대길(崔大吉)·황하규(黃河奎)·한재갑(韓載甲)·오춘보(吳春寶)·고병찬(高炳燦)6)
1944년 12월에는 제5전구 유격 지역 호북성 담현(潭縣)을 전방 기지로 하여 무한삼진(武漢三鎭) 일대를 지하 공작 대상으로 삼고, 김석산(金石山)을 공작 대장으로 한재갑(韓載甲)을 부대장으로 임명, 서정천(徐廷天)·최대길(崔大吉)·장철부(張哲夫)
_______________
5) 광복군 동지화보 제20호‘개봉 지구의 지하 공작 개황’참조.
6) 제5전구 사령 장관 사령부 대전(代電) 광근(光瑾) 제310 호 참조.
- 376 -
·황학규(黃學圭)·이무중(李茂重)·고병찬(高炳燦)·마정(馬程)·심세혁(沈世革)·부병일(夫炳一) 등을 대원으로 한 공작대를 편성하고 담현(潭縣) 공작반을 증강 확대하여 집중적인 공작을 전개하였다. 1945년 3월에 왜군이 담현(潭縣)·노하구(老河口)·남양(南陽) 등지를 침공하여 옴에 따라, 김준(金俊)·권준(權畯)을 비롯한 30여 명 대원이 제5 전구 휘하의 정예 부대인 제5 사단과 합류, 침공해 온 왜군에 대하여 맹렬한 총반격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일시 점령당했던 담현(潭縣)·노하구(老河口)·남양(南陽) 등지를 하나하나 탈환하는 동시에 왜적에게 막대한 물자와 인명의 피해를 주고 왜군을 많은 포로를 얻는 대전과를 올렸다.
1945년 1월초, 제3 지대 지역인 안휘성(安徽省) 임천(臨泉)에서 한광반을 졸업한 학도병 출신 등 50여 명이 중경으로 가던 도중 노하구에서 보급품 수령을 위하여 20여 일을 머물게 되었는데, 이 때 피부병(옴)으로 보행이 곤란한 김영록(金永祿)·안광언(安光彦)이 이곳에 잔류하여 제1 지대에 편입되었으며, 이평산(李平山)은 치료 후 중경으로 향하여 갔다.
1945년 4월, 왜군의 침공으로 구대 본부를 호북성 균현(均縣)에 옮긴 김준(金俊) 등은 다시 전방 공작을 전개하면서 종전의 공작반을 공작대로 확대 개편하는 동시, 한재갑(韓載甲)을 제10 전구 장관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는 안휘성 입황(立煌) 지구 공작대장으로 파견하여, 전방으로부터 왜군 진영(陣營)을 탈출한 20여 명의 한적 사병을 중국군으로부터 인계 받아 입황 공작대에서 훈련 교육을 실시하다가 동년 7월에 후임자 허윤송(許潤松)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한재갑은 다시 안휘성 태화(太和) 공작 대장으로 전임하여 공작 거점을 확고히 한 다음 김성렬(金聲烈)·마정(馬程)을 북평 및 천진으로, 이환연(李煥淵)을 귀덕(歸德)·개봉으로 각각 파견하였는데, 도중 8·15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보다 1945년 6월에 중경의 제1 지대장 명령에 의거, 구대장 김 준은 전방 공작원을 제외한 장철부(張哲夫) 등 30여 명을 운남성(雲南省)에서 실시하게 된 한·미 합동 기갑 전차 훈련반에 입교시키려고 중경 지대 본부로 후송하였으나, 8·15 해방으로 전차 교육 계획은 부득이 중단되었으며, 제1 지대 주임 김승곤(金勝坤)[황민(黃民)]을 포함한 10명을 인·면(印緬) 공작대로 파견하게 되었는데, 버어마
- 377 -
전구의 작전 종료로 인하여 중지됐다.
3. 제2구대
제2 구대는 고축등(顧祝同) 사령 장관의 제3 전구 지역인 절강성(浙江省) 금화(金華)에 주재하고 있었는데, 이소민(李蘇民)을 구대장으로 하는 제2 구대는 조선의용대 시절부터 그 지역에서 현지 중국군 당국과 긴밀한 협조를 유지하며, 초모·선전·첩보 공작 및 포로 심문·적문서 번역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광복국으로 개편될 당시의 구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제2 구대 편성표]
구대장 이소민(李蘇民)
구대부 강진(康 晋)[강홍구(康弘久)]
서 기 김지강(金志剛)
제1 분대장 선우국풍(鮮于國風)
제2 분대장 성현원(成玄園)
제3 분대장 문정일(文正一)7)
구대장 이소민(李蘇民)은 금화(金華) 지구를 근거지로 하여 전방 공작을 수행하던 중 제3전구 사령 장관부의 지시에 따라 왜군에 의한 침공 작전, 특히 절공작전(浙贛作戰)에는 항전하는 현지 중국군을 도와 대적 심리 작전에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지역에 김문호(金文鎬)가 인솔하는 광복군 징모 제3 분처가 파견되어 오면서는 때로 알력과 대립의 현상을 나타났으며, 따라서 공작 활동이 일시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는 중, 이소민(李蘇民) 이하 간부 전원이 분발하여 직접 적 점령 지구에 내왕하면서 활발하게 초모 공작을 전개한 결과, 1944년초에는 김순재(金珣裁)·김용(金龍)·김여재(金如載)·박시준(朴時晙) 등이 금화(金華)의 광복군 진영으로 오고, 그해 6월에는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에 주둔한 왜군내의 한국 학도병 출신 왜군 소위(少尉) 성동준(成東準)·김영남(金映男) 등과 접촉이 되어 이들을 포섭하는데
_______________
7) 대한민국 24년 10월 27일 ‘군무부 군사 보고’ 참조
- 378 -
성공하였다. 따라서, 성동준(成東準)·김영남(金映男)·유재영(柳在榮)·박영(朴英)·최덕룡(崔德龍)·정병훈(丁炳薰)·김봉옥(金鳳玉) 등이 무기를 휴대하고 왜군 진영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오게 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 남창(南昌) 지구에서는 김응전(金應篆) 등 수명이 정보 수집 및 초모·선전 공작을 전개한 결과, 윤우현(尹宇鉉)·유재영(柳在榮)·박종선(朴鐘善)·김득만(金得萬)·박병두(朴炳斗)·김대준(金大俊) 등이 왜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 진영으로 가담하게 하는 데 개가를 올렸으며, 이러한 사실이 중국 각지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국제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도 되었다.8)
특히 구대장 이소민(李蘇民)은 중국 황포 군관 학교 출신인 관계로 제3 전구내에 많은 선배·동창·후배 등이 있어서 섭외 활동이 원활하게 진행되었으며, 또 구대장 자신이 중국군 상교(上校)로 중국군에도 군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과의 연결이 잘 되었다. 그러나, 광복군으로서의 공작 활동은 다소 소홀한 감마저 있었기 때문에 지대 본부로부터 경고를 받은 일도 있었다.
1944년 9월경에는 다시 왜군의 소위 소탕 작전으로 인하여 구대 본부를 강서성 연산(鉛山)으로 옮기었고, 1945년초에는 이소민(李蘇民) 자신이 전방 공작에 나서서 얼마동안 구대장의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2월경에는 제3 전구 사령 장관 고축동(顧祝同) 상장(上將)이 중국 군사위원회로 제2 구대장 후임 문제를 조회(照會)한 일도 있었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