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권력의 한국불교 법정 스님의 《부처님 전상서》 !!!
이 내용은 2010년에 쓴 것입니다.
《부처님 전상서》 내용이 매우 길기 때문에 3회로
나누어 올립니다.
※낯선 용어는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한글 한자(漢字)”를
같이 썼습니다.
■부처님 전상서(前上書) <1편>
▶서장(序章)
부처님! 아무래도 말을 좀 해야겠습니다.
심산(深山)에 나무처럼 덤덤히 서서 한세상 없는 듯이 살려고
했는데 무심한 바위라도 되어 벙어리처럼 묵묵히 지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또 입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 울적(鬱寂)한 마음을 당신에게라도 말 하지 않고는
답답해 배기어 낼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먼저 저는 당신 앞에 당신을 욕되게 하고 있는 오늘
한국불교도의 한사람으로서 엎드려 참회를 드립니다.
당신의 제자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신의 이름을
팔아 무위도식하고 있다는 처지에서-.
오늘 우리들 주변이 이처럼 혼탁하고 살벌한 것도 저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연유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이라는 이 헐벗은 땅덩어리 안에서
자비하신 당신의 가르침은 이미 먼나라로 망명해버린 지
오래고, 빈 절간만 남아 있다는 말이 떠돕니다.
그리고 이른바 당신의 제자라는 이들은 투쟁견고(鬪諍堅固)
시대의 나목(裸木)같은 군상(群像)들로 채워져 있다고 합니다.
당신의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가진 제자들이 오늘날
이 겨레로부터 마치 타락된 정치가들처럼 불신을 받고 있는
점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가을은 나눔과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나눌만한 자비도 거두어 들일만한 열매도 없습니다.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이 불모(不毛)의 황무지에 밝은
씨앗이라도 뿌려졌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에서 저는 이제
제 주변을 샅샅이 뒤져 헤치는 작업이라도 해야 겠습니다.
말하자면 내일의 건강을 위해서 오늘 앓고 있는 자신의
질환에 대한 진단 같은 작업을-.
▶교육의 장
부처님!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기치 하에서는 걸핏하면 3대사업
(교육, 역경, 포교)이 어떻고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말 만큼 그 일은 시급한 저희들의 과제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긴요한 것이 당신의 혜명(慧命)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교육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이 집안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일들은 지금껏 입으로만 축문(祝文)처럼 외워지고
있을 뿐 실제로는 거의 무시되고 있습니다. 지금 몇몇 사원에서
벌리고 있는 강원(講院)이나 선방(禪房)이라는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당신의 뜻을 이어받을 눈 밝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한낱
도량장엄(道場裝嚴) 정도로 차려놓은 것에 불과한 인상입니다.
그것은 실로 「교육」이라는 말조차 무색하리만큼 전근대적인
유물로서 박물관 진열장으로나 들어가야 할 쓸모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현대적인 방법론도 구체적인
계획성도 부재합니다.
도제교육(徒弟敎育)의 기초기관인 강당에서 현재 수행되고 있는
그 방법이란 철저하게 훈고적(訓誥的)인, 그러니까
한문서당에서 상투 틀고 가르치던 그 습속을 소중하게
너무나 소중하게 물려받고 있습니다.
한 강사가 여러 클라스를 전담해가지고 강의를 하고 있으니,
전체학인을 명령일하에 통솔하기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강사자신의 육체적인 부담과 정신적인 편견, 그리고 강의 받는
사람들이 섭취할 건더기가 얼마나 있을 런지 뻔 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 이력 과목이라는 게 이조중엽(李朝中葉)에 비롯된
것이라는데, 지금의 형편이나 피교육자의 지능 따위는 전혀
무시하고 또 시대적인 요구도 아랑곳없이 하나의 타성으로서
비판 없이 답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나마 얼마동안의 배워마친다는 정해진 기간도 없이-.
이처럼 <무모한 교육?>이 어느 다른 사회에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의 경우 가르치는 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종교>가
무엇인지, 혼미한 오늘의 현실에 <종교인>으로서 어떠한
사명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풍문으로나마 가르치고 배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깨우친 목소리를 듣기위한 훈고적(訓誥的)인 문서의
전달도 필요한 것이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현대라는 시점에서
소위 일체중생의 길잡이가 될 인재를 기르기 위한
종교교육이라면 동시대적인 사명감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것
이어야 할 것입니다.
철학이 두뇌의 영역이라면, 종교는 심성의 영역일 것입니다.
메마른 심장으로서야 자신은 고사하고 어떻게 이웃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겠습니까?
또 당신의 제자된 사람이 당신의 가르침에는 아예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비좁은 자기 나름의 소견에만
집착하는 이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선방이란 곳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본래의미를
곡해한 듯 전혀 당신의 가르침에 대한 기초교육도 없이
선(禪)자체에 대한 오해마저 초래케 하는 수가 흔히 있습니다.
선(禪)이 수행의 구경목적이 아니고, 그것이 깨달음으로
향한 한낱 방편일진대, 보다 탄력 있는 시야쯤은 갖추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첫 문에 들어선 초발심자에 있어서는-.
<알음알이 내지말라>라는 말과
<배우지 않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는 그 의미가 분명히
다른 줄 압니다.
흔히 참선자가 선(禪)에 참(參)하기보다는 선(禪)에 착(着)하기가
일쑤이고, 따라서 종교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배타적(排他的)이고 독선적(獨善的)인 벽(壁)속에 스스로를
가두면서도, 그것으로서 오히려 자락(自樂)을 삼는 것은 모두
이러한 결함에 그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당신이 만약 이 사회에 계신다더라도 당신의 제자들을
이렇게 무모(無謀)한 방법으로 가르치겠습니까?
어설픈 화신(化神)들
이러한 교육환경의 불합리성 때문에 이 나라의 시정에 있는
절간에 가면 기이한 현상이 있습니다.
젊은 우리 사미승(沙彌僧)들이 그늘진 표정으로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흔히 목격합니다.
절에서는 먹물 옷을 입고 절문 밖에서는 세속의 옷을 입는-.
마치 낮과 밤을 사이하여 치장(治粧)을 달리하는 박쥐라는
동물처럼. 불전(佛殿)에서 목탁(木鐸)을 치던 한낮의 손이
해가 기울면 학원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배우고 싶은 일념에서 이처럼 어설픈 화신(化神)을 나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왕성(旺盛)한 향학(向學)의 욕구를 절간에서는 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 학자금의 출처란 대개 떳떳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삼보(三寶)에 기부(寄附)한 정재(淨齋)가 잘못 유용될 수도
있을 것이며, <낯을 익혀둔> 신도(信徒)들이 떨어뜨리고 간
지폐에 의존하는 수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도가 돈을 쥐어줄 때 그것으로서 세속의 업을
익히라고 내놓지는 안했을 것입니다. 순수할 수 없는
학자금으로 그 건전한 회향(廻向)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잘못하면 주는 편이나 받는 편이 함께 지옥에 떨어지는
업(業)만 익히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
모처럼 어린 마음으로 구도(求道)의 길에 들어섰던 그들이
도업(道業)을 이루기에 앞서 다시 세속(世俗)을 기웃거려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산사(山寺)에서 간신히 이력과정을 마친 학인들이 외전(外傳)을
갖추기 위해서라는 명분아래 하산(下山)한 뒤로는 거의가
불귀(不歸)의 승이 되고 맙니다. 미래를 기대해야할 젊은
출가자들이 -.
이와 같은 불유쾌한 현상이 어찌 그들만의 탓이겠습니까?
이런 일을 언제까지고 모른 체하고만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잘못된 너무나 잘못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습니다.
요즘 한국 불교계에는 급조승(急造僧)이란 전대미문의 낱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승려(僧侶)라면 일반의 지도적인 입장에 서야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 자질여부는 고사하고
일정한 수업도 거치지 않고 활짝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기가
바쁘게 삭발과 의상교체가 너무나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로서의 품위나 위엄이 말할 수 없이
진흙탕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낙후된 경제사회에서 부도(不渡)가
나버린 공수표(空手票)처럼-.
더구나 이들이 사원(寺院)을 주관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그저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들이 언제 수도 비슷한
거라도 겪어볼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가출(家出) 이전의 세속적(世俗的)인 행동여지가
그대로 재현될 따름입니다. 그래서 신문의 사회면에서는
가끔 사이비승(似而非僧)이란 기사거리와 더불어 세상의
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어떤 사원(寺院)에서는 처음 입산하려는 사람의
학력이 학부출신이거나 좀 머리가 큰 사람이면 더 물을 것도
없이 문을 닫아 버립니다.
무슨 자랑스러운 가풍이나 되는 것처럼.
거절의 이유인즉,
「콧대가 세서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표면적인 구실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다루기가
어려워서일 것입니다. 우선 지적(知的)인 수준이 이쪽보다
우세하기 때문에 하나의 열등의식에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반증(反證)으로서 인간적인 기본 교양도 없는 만만한
연소자(年少者)는, 그나마 노동력이 필요할 때 틈타서 받고
있는 실정이니 말입니다.
부처님!
이와 같이 구도자(求道者)로서의 자질과 미래상이란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우매(愚昧)한 고집들이 수도장(修道場)을
경영하는 동안, 당신의 가르침인 한국불교의 표정은
갈수록 암담할 수밖에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오늘 우리사회에서는 너무나 크게 설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종단(宗團)의 의결기관인 중앙종회에서는 몇 군데
계획적인 수도장(修道場)으로서 총림(叢林)을 두기로 했다지만,
이러한 무질서가 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 법정 스님 “부처님 전상서”를 읽은 독자 기고글
「부처님 전상서」를 읽고 전번 귀지(貴紙)에 실린
「부처님전상서」를 읽었습니다.
답답해 견딜 수 없어 쓰신, 그 스님의 피맺힌 글을 읽어가면서
저는-.
가슴이 환히 트이는 환희에 가득 찼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준렬(峻烈)한 자기비판, 가차 없는 자기진단이
있는 한, 이 나라의 불교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결단코!
어떤 스님은 세 번을 내리 울면서 읽었다고 합니다.
이 진지한 목소리가 이 땅 방방곡곡에 메아리칠 때, 모든
가슴은 다 같이 울 것입니다.
깊은 회오(悔悟)와 간절한 염원으로 해서......
또 한가지, 마음 든든한 것은 귀지(貴紙)의 양심과 용기입니다.
다른 어느 기관지가 샅샅이 자기 집안의 멍든곳을 들어내어,
파헤치고 뉘우치는 작업을 감히 게재 할 수 있습니까?
누구 앞에서도 자랑할 수 있는 우리만이 갖는 힘이요,
성심입니다.
오랜 세월 고난의 역사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겹쳐진 묵은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들어 고쳐야 할 시급한
질환이 있더라도, 그렇더라도 우리의 불가(佛家)는 살아있습니다.
적어도 내일은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러한 피맺힌 부르짖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를 기울이는 뜨거운 가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듯 건강한 기관지가 발간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지헌 합장 1964. 10. 12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