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진정한 소명은 자기가 하는 일의 성공 여부에 있지 않습니다. 이게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네가 하고 있는 사역의 성공 여부, 네가 이룬 업적, 너의 영향력이 곧 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다 속아 넘어갑니다. 이 사실을 부정하고 우리의 소명을 다른 것에서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짜쓱, 목회의 열매가 별로 없으니 저런 이야기로 자기 삶을 카바치네” 이런 조롱이 곧바로 날아오니까요.
주변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도 말로는 위로도 해주고 격려도 하지만 초라한 삶과 사역의 현실을 보고 뒤에서는 거의 다른 말을 합니다. “목회 안 하는 것이 저 사람에게는 더 나을 것 같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세상이 이렇게 굴러간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참 살기 어렵고 목회하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짜 소명과 정체성은 이 직을 수행하면서 주님을 더 닮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업적과 열매는 반드시 우리를 망칩니다. 지난 8년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설교를 참 많이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목사님들도 참 많이 만났고요. 그런데 교회 크기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비교적 안정된 목회지에서 목회하는 분들 중에도 주님 닮은 분들이 많으셨습니다.
참고로 저는 큰 교회 목사님들에 대해서는 좋은 생각을 별로 안 가지고 있었던 사람인데, 이찬수, 유기성 목사님을 만나보니 진짜 목사님들이 맞더군요. 이찬수 목사님은 너무 소탈하시고, 검소하시고, 사람을 참 따뜻하게 배려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유기성 목사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목사님 하면 생각나는 바로 그런 진짜 목사님이셨고요. 직원들을 대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에서 저분은 진짜구나 싶었습니다.
물론, 큰 교회 목사님들 중에 진상들도 많았습니다. 실명공개 할까요? 참겠습니다. 그런데 작은교회 목사님들은 대부분 괜찮으셨지만 목회에 대한 열패감, 상처, 한, 열등감 때문에 거칠고 모난 인격을 드러내는 분들이 꽤 있더군요. 교회가 작다고 자동으로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결론은 우리가 부름받고 있는 자리와 목회의 열매가 우리의 소명을 완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에요. 예수 믿기 더 유리한 조건도 없고, 우리의 소명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는데 더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도 없습니다. 어떤 현실에도 자신의 소명과 정체성을 지키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폴 트립의 《목회, 위험한 소명》에 나오는 글귀를 소개합니다.
“목회자라는 것은 나의 소명일 뿐, 나의 정체성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나의 지체, 그것이 곧 나의 정체성이었다. 나는 성화를 이루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여전히 구원과 변화와 능력과 자유를 주는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었다.”
김관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