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 비틀
독일의 자동차 제조사 폭스바겐에서 1938년부터 2019년까지 생산했던 소형 자동차. 폭스바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명실상부한 얼굴마담이자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명차로 평가받는다.
비틀은 영어권에서의 이름이고, 독일에서는 'Käfer(케퍼)'라고 부른다.
2. 개발 배경
1933년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나치 독일의 퓌러가 되었다. 그는 독일 국민들의 자가용 생산/보급 계획인 이른바 "국민차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공학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셰에게 의뢰를 하였는데, 그 요구 조건은 아래와 같았다.
독일노동전선 산하 여가 기관인 카데에프(KdF)가 주관하는 여가 프로그램에 따라, 일반적인 독일인 가정의 단위에 맞춰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 혹은 성인 4명을 태울 수 있을 것.
시속 100km의 속력으로 아우토반을 달릴 수 있을 것.
1,000마르크로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하고 튼튼한 차를 만들 것.
후방 엔진 후륜구동 방식을 적용하되, 독일의 추운 겨울 환경을 고려하여 공랭식 엔진을 탑재할 것.
나머지는 둘째치고 당시 저 정도 비용이면 오토바이나 만들 정도라서 개발이 불가능해 보였으나, 포르셰는 이웃나라 체코의 자동차 회사 타트라에서 생산하던 T97의 구동계 레이아웃과 엔진 설계를 그대로 따라서 만들어냈다.
그렇게 완성된 최초의 비틀은 1938년 카데에프바겐(KdF-Wagen)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됐으며, 프로토타입은 총통 아돌프 히틀러와 노동부 장관 로베르트 라이 등 나치 정부의 지도자들에게 주어졌다. 히틀러는 카데에프바겐을 마음에 들어해서 자주 사열차로 이용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비틀은 흔히 악마와 천재의 합작품이라고 불리운다. 최근까지도 명맥이 이어지면서 그야말로 장수만세 브랜드였다.
히틀러는 폭스바겐 기념 우표를 발행해 독일인들에게 900마르크어치를 사면 폭스바겐을 주겠다고 홍보했다. 많은 독일인들이 우표 구매에 나섰지만, 슬슬 폭스바겐을 뿌려야 할 때쯤 폴란드 침공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이 때문에 타이틀은 국민차였지만 실제로 국민에게 지급된 차량은 0대. 원래대로라면 이미 우표를 다 모아 차량을 지급받아야할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전쟁 등의 이유로 지급 날짜가 차일피일 미뤄졌다. 많은 이들이 전쟁만 이긴다면 차를 지급받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계속해서 우표를 구매했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기념 우표 사업 외에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작 630대를 생산하는게 전부였다. 즉, 히틀러의 대범한 대국민 사기극 겸 좋은 전쟁자금 공급원이었다.
한편 전쟁이 시작되자 팔러슬레벤에 건설된 폭스바겐 생산 공장은 즉시 폭스바겐을 기반으로 한 군용차량인 퀴벨바겐과 슈빔바겐 생산 공장으로 전용되었다. 폭스바겐을 기반으로 한 두 차종은 전쟁기간 동안 각각 50,788대와 14,276대가 생산되어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에 사용되었다.
자료 출처: <나무위키>에서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