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룩한 입맞춤
고전 16:13-24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전 16:13-24 / [마지막 부탁과 인사] 위험에 대처할 수 있도록 깨어 있으십시오. 주께 진실하십시오. 장부답게 씩씩하고 굳세게 살아가십시오. 14) 그리고 무슨 일이나 친절과 사랑을 가지고 행동하십시오. 15) 스데바나와 그의 가족을 기억하시겠지요? 아가야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들은 지금 사방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16)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십시오. 그리고 그들처럼 여러분을 위하여 몸 바쳐 일하는 사람들을 최대한으로 도와주십시오. 17)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이곳을 방문해 주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대신해서 나를 도와주었고 18)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격려가 된 줄로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해 주기를 바랍니다. 19) 이곳에 있는 아시아의 여러 교회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또 예배를 드리러 그의 집에 모이는 사람들이 모두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20) 여기 있는 모든 형제들도 여러분에게 문안해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만날 때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십시오. 21) 이 편지의 마지막 말은 내가 직접 씁니다. 22) 만일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24)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본문은 고린도 교회에 모범적인 신앙인을 추천하며 문안 인사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인정하고 높여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13-14) 깨어있으라고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믿음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믿음의 눈, 하나님의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수평적 관계에서만 보지 말고,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때까지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즉 용기와 분별력을 가지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모든 문제마다 파헤치어 해결하려고 하면 서로 상처를 주어 증오로 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15-18)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 지방의 첫 열매이며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을 본받고 함께하며 순종하라고 합니다. 또한 바울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자기를 방문해 주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합니다. 이들이 고린도의 성도들이 자신을 만나지 못해서 생긴 부족한 것들, 곧 아쉬운 것들을 채워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과 고린도의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칭찬합니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9-24)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평생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는 사람들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이들 부부가 고린도 교회에 안부 인사를 합니다. 동시에 여기 모든 성도도 뜨거운 마음과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합니다. 끝으로 바울 자신은 친필로 안부를 전합니다. 그러면서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저주받은 자라고 외칩니다(요 3:16-18).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이를 통해 교회 안에서 마땅히 일어나고 지속되어야 하는 성도의 교제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적용: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주는 네 가지 권면이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 주님은 누구이기에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 저주(요 3:16-18)까지 선포하며 무엇을 기대하고 있나요?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자주 볼 때는 그 사람이 귀한 줄 모릅니다. 곁에 있던 그가 떠난 뒤에야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내가 그에게 얼마나 소홀하게 대했었는지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그립다는 생각은 거의 해보지 못했는데, 떠난 후에야 비로소 그가 그립습니다. 그의 흔적들을 볼 때마다 때론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아직 곁에 있을 때 더욱 반갑게 인사해야겠습니다. 감사와 덕담을 나누며 전해야겠습니다.
< 설 교 >
믿음에 굳게 섭시다
고전 16장 13절 / 강성찬목사
(고전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 되었던 자의 눈을 고치셔서 밝히 보게 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에 대하여 제자들은 누구 죄 때문에 날 때부터 소경 되었느냐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소경과 같은 무서운 병은 반드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아직 죄를 지을 기회도 없이 소경이 되었으므로 누구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혹시 그 부모의 죄 때문에 그 사람이 모태에서부터 소경 된 것이 아닌가 라고 추측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의해 그 사람이 소경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소경 된 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눈에 붙은 진흙을 씻을 때 그의 눈은 뜨여지고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자 이웃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잘 몰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을 때 고침받은 자는 예수님께서 자기 눈을 고쳐 주셨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자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능력을 증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고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고치셨음을 전해 듣고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그러한 이적을 행할 수 있느냐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소경 되었던 자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 있게 선지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기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 되었다가 고침받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지 못하여 그의 부모를 불러 확인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들이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 부모는 모른다고 말하며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으면 유대교에서 출교 당하므로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 9:20-21)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자신이 인류를 모든 부족함과 죄의 고통에서부터 구할 수 있는 메시야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후에 홀로 기도하시기 위해 제자들만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뒤 예수님께서는 배로 떠난 제자들에게 가기 위해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바다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도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거세게 불어 풍랑이 일자 베드로는 곧 두려움에 빠져 물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믿음으로 걸었으나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에 빠져 믿음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연약해져 바다에 빠졌으나 죽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능하신 주님께서 그를 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의심은 정신적으로 흔들린다는 뜻으로 주저 동요 혼동의 뜻이 있는 말입니다. 신앙은 의심이라는 분위기 속에서는 성장 할 수 없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연고입니다. 의심은 마귀의 궤계입니다. 에덴 동산의 마귀의 궤계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궤계입니다.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의심이 많습니다.
(마 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이라는 말씀에서 이적을 의심하는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눅 7: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라는 말씀에도 의심하는 인간의 모습이 있습니다.
(벧후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벧후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라는 말씀에 주님의 재림을 의심하는 모습을 봅니다
믿음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믿음은 추상적이나 관념적이 아닙니다. 지, 정, 의가 결합된 믿음이 참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을 원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 8:29)을 신뢰하기 때문에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전적으로 그를 의지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가 많습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로 행세하다가도 교회 밖을 나서는 순간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교회에 처음 들어와서 신앙을 갖기로 한 초신자는 신앙 세계에 대해 생소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불신자를 교회에 데려다 놓는 일만이 아닙니다. 데려온 그 초신자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교회 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전도 영역에 포함됩니다.
초신자 중 교회를 떠나는 대표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존 성도들의 무관심과 냉정함이라는 지적을 합니다. 초신자에 대해 관심과 기도가 없음으로 그들은 당황하고 흥미를 잃게 되어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는 또한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여전히 옛 습관에 매여 방황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의 유혹으로부터 탈피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신령한 습관에 길들이도록 권면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롬14:1)고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환난과 핍박이 많은 환경 속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서는 담대함이 필요한 고린도 교회에 바울은 편지를 통하여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승리하기를 기원하며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합니다.
깨어는 일반적인 경계나 도덕적인 주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곧 일어날 종말론적인 사건들에 대비한다는 의미로 주요 사용 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사건들이 곧 일어날 것으로 나타냅니다
(고전 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고전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종말론적인 지평 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조명해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마 24:42-4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느 해운 회사에서 무선사를 모집하는 중에 필답 고사 합격자들이 면접하기 위하여 시간 전부터 20여명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접견실에서는 아무도 부르질 않고 스피커로 감미로운 음악 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대기하던 청년 중 한 명이 아무 소리 없이 일어나더니 접견실로 무턱대고 들어갔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20여명 다른 대기자들이 의아해 하며 귀추를 주목하고 있을 때, 좀 전에 들어갔던 청년이 신나는 모습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그 연유를 물은즉 “나도 여러분들처럼 초조해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노라니까 음악 소리와 함께 무선 신호(모리스부호)로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은 즉시 접견실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듣고 뛰어 들어가 합격하고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무수한 세상의 소리가 있으되 언제나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고 깨어 있는 자가 하늘 위로와 복과 영광의 자리를 참여하게 됩니다.
'남자답게'(안드리제스데)는 '성인 남자'(아네르) 혹은 '남편'을 가리키는 말에서 온 말로 때로는 힘의 상징으로서의 남성을 가리키기도 했으며 '남자다워라'는 의미로 신앙을 지키는 것을 '남성다움' 또한 '강건함'과 연관짓고 있기도하 독립적인 교훈의 말씀이기도 하며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성다움이 있어야 함을 교훈 합니다.
바람의 나라에 마루라는 무휼왕의 친구의 마지막 화형 장면에서 남자다웁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는 믿음입니다
'강건하여라'(크라타이우스데)는 항상 강하게 되어라는 뜻인데 수동태로 쓰여서 그리스도인이 갖는 신앙의 힘이 타고난 육체적인 힘과는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인 것임을 나타냅니다.
가뭄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미국 중서부 지방의 이 작은 마을은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비는 농작물 재배에도 중요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도 필수적이었습니다. 갈수록 문제가 심각해지자 마을의 교회는 비를 매려 달라는 대대적인 기도회를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인디언 원주민들이 행하던 기우제를 연상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교회 앞마당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목사님이 도착하고, 신도들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마침내 단상에 올라선 목사님은 이제 군중을 조용히 시키고 집회를 시작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모두를 향해 조용히 해줄 것을 요청하려는 순간 목사님은 맨 앞줄에 앉은 열 살 가량의 소녀가 눈에 띄었습니다. 소녀는 흥분과 기대에 찬 얼굴로 천사처럼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빨간 우산 하나를 꼭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그 순수한 믿음에 목사님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잃어버렸지만, 이 어린 소녀만은 아직도 순수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비를 매려달라는 기도를 하기 위해 모였으나, 이 소녀는 신이 틀림없이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굳게 서서(스테케테)는 '흔들림 없는', '확실한', '의심없는' 등의 의미로 믿음의 상태가 견고함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다룬 후의 권면인 흔들리지 말고 라는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믿음'(피스테이)은 하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와 의심 없는 복종을 뜻합니다
더욱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역사적인 객관적 사실로 인정한다는 것(fides quae creditur)과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주관적 진리로 확신하는 것(fides que creditur)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부활의 가르침을 진리로 확신 하는데 갈팡질팡 하였음을 고전 15:58의 흔들리지 말고 라는 말씀에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이해하고 그 위에 든든히 서라는 교훈을 주며 믿음위에 굳게 서라고 합니다
1858년 뉴욕의 어느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고 시력도 극도로 나빴습니다. 게다가 천식까지 앓아서 앞에 있는 촛불을 끌 힘도 없는 호흡 곤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하여 드디어 열 한 살이 되던 날 아버지는 이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가진 장애는 장애가 아니란다. 네가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고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와 함께 한다면, 오히려 너의 장애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너를 주목할 것이고 너는 진실로 역사에 신화 같은 기적을 남기는 놀라운 삶을 살 수 있단다.” 그 후 그는 23세가 되던 해에 뉴욕 주를 대표하는 의회의 의원이 되었고, 28세에는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뉴욕 주지사가 되고, 부통령을 거쳐 미국 역사의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미국의 신화를 재건하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06년에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였던 이 사람은 바로 데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입니다.
신앙적 시련을 겪은 초대 교회와 같이 현대의 성도들도 환경 속에서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이때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었기에 핍박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의 성도도 세상의 권세나 명예, 학문, 재산에 자신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오직 영원한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의 집에 있는 것과 같이 안전할 것입니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나폴레옹이 타던 말이 도망을 쳤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쌘 병사가 도망간 말을 붙잡아 왔습니다. 나폴레옹은 애지중지하던 말을 찾게 되자 너무 감격해 엉겁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맙다. 대위!” 그 말을 들은 병사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얼른 경례를 붙이면서 “감사합니다. 장군님!”하고는 즉시 사병 막사로 가서 짐을 챙겨 장교 숙소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낡은 군복을 벗어 버리고 대위 군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폴레옹 앞에 나타났습니다. “장군님 명령대로 즉시 실행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대위 정말 멋있다. 앞으로 더 잘하기 바란다.”며 대위 계급을 인정했습니다. 한번 한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어 책임을 진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한 약속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분명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틀림없이 받을 수 있습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믿음 위에 굳게 서는 우리가 되어 사명감당하며 영광돌립시다.
시원시원한 사람
고전 16장 13~18절 / 류철량목사(부천동광교회)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담이 하와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은 나를 사랑해?” “예, 사랑해요.” 아담은 아침 먹고 물어보고, 점심먹고 물어보고, 저녁 먹고 또 물었습니다. 더워죽겠는데 짜증이 난 하와가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야, 임마!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냐? 있으면 너 같은거 사랑 안해” 그 뒤로는 지금까지 묻지 않는답니다. 더운날 답답한 남편과 사는 아내들에게 위로를 보냅니다. 우리 모두 수고하는 아내들에게 손뼉을 칩시다.
“시원시원한 사람”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성격이나 행동이 시원합니다. 그런 사람은 언행이 활발하고 서글서글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소리만 들어도 시원시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 처리가 시원시원합니다.
남자다운 믿음으로
시원시원하게 하는 것은 남자다운 믿음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 하라”(13절)
이 세상은 어디서나 남자다운 사람을 찾습니다. 남자다운 사람은 어디에서나 인기 만점입니다. 남자다운 사람이란 외모가 준수하고 우락부락하고 큰소리를 치고 때로는 주먹질도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처럼 남자다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성경은 이렇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남자”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눈에 띄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튀는 행동으로 눈에 띄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눈에 띄는 것입니다. 온유함이 없고는 남자다운 신앙은 아닙니다. 온유함은 온화함이요.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남자다움에는 명예가 따릅니다. 그 명예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개인에게, 어떤 공동체에 유익을 줄 때 주어집니다. 그는 자기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추구합니다. 그걸 보며 남자다움을 느낍니다.
시원시원함을 주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믿음에 굳게 서 있습니다. 기둥이 주초 위에 굳게 서 있듯이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것으로 남자다움을 보여줍니다.
남자답다(manhood)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고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것입니다.
J.F. 케네디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훗날 역사의 심판대 앞에서 이런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용기 있는 인간이었느냐? 우리는 참으로 현명한 인간이었느냐?” 우리는 참으로 성실한 인간이었느냐? 우리는 참으로 헌신하는 인간이었느냐?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지금 깨어 있는가? 지금 믿음의 반석 위에 서 있는가? 지금 남자답게 강건한가?
노총각이 중매로 아가씨를 만났습니다. 그 남자는 여자와 사귀어본 일도 없어 여자 앞에서 눈도 바로 못 뜨고 끙끙대며 시간을 보내다가 불쑥 한마디했습니다. “우리 결혼합시다!” 여자가 뭐라 한지 아세요? “그러지요” 말주변은 없지만 남자다운 도전이 그녀를 쓰러뜨려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세상은 남자다운 사람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불러 남자다운 자가 되게 하십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을 타작 기계같이 만드십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손을 들고 기도하여 남자답게 시원시원한 사람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시원시원하려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4절)
세계인의 놀이 공원 디즈니랜드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된 세계 최고의 공원입니다. 그 회사에 신입사원 교육이 있습니다. 숙련된 교관들이 신입사원 교육을 시킬 때 회사의 기초적 이념을 주입시킵니다.
교관이 묻습니다. “우리는 무슨 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누구나 맥도날드는 햄버거를 만드는 줄을 압니다. 디즈니는 무얼 만든다고 생각합니까?” 신입사원들은 모두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만들어줍니다!”
교관이 “네 정확합니다. 디즈니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팝니다. 그 사람이 누구든,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무슨 일을 하든, 출신이 어디든, 피부색이 어떻든, 그런 것들은 중요한게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일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들에게 행복을 만들어 주려고 채용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칼 없이 왕국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사랑으로 지배되는 나라입니다.
대립과 갈등이 생겼을 때 힘으로 안되면 법으로 합니다. 법으로도 해결이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법으로도 안되면 사랑으로 합니다. 다 안 돼도 사랑으로 하면 됩니다.
포르투갈 격언 중에 “사랑의 안중(眼中)에는 법률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법을 찾지 사랑이 있으면 법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이 적으면 과오가 커 보이고 사랑이 많으면 과오는 적어 보입니다. 사랑의 마음에는 모든 것이 포근하게 안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시원시원한 사람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시기질투는 옹졸하여 짜증나게 합니다. 사랑은 넓고 깊고 높아서 모든 사람을 시원시원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보자기는 온 세상을 덮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사랑의 폭을 넓혀 가십시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여 시원시원하기를 힘쓰십시다. 힘쓰면 됩니다.
섬기기를 작정함으로
신앙 생활을 시원시원하기로 작정해야 시원시원해집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15절) 스데바나의 집안 사람들은 아가야에서 제일 먼저 예수를 믿은 가정인데 성도들을 섬기며 살기로 작정한 고린도 교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20:26-28)
지도자가 되려면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되지 않으면 큰 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으뜸이 되려면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지도자라 하지 않고 “나의 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섬기는 일은 크고자 하는 자가 할 일입니다. 그 일은 작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섬기기를 작정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자식 사랑은 본능적입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하고 먹이고 보살핍니다. 부모 섬기는 일은 작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도 작정해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마음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57:7)
사도 바울은 스데바나의 집을 칭찬합니다.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 집안 식구들이 작정하고 성도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16절)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애쓰는 사람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그의 인격과 직분으로 애씀을 인정하고 그와 보조를 맞추어 선한 일에 동참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보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올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17절) 부족하면 시원하지 못합니다. 만족하게 채워주면 시원합니다.
행복한 교회는 전체의 행복을 위해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족한 것을 찾아 채워줍니다. 작정하고 하는 일은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해서 합니다.
청년부가 일본 선교여행을 준비하면서 교우들이 부족한 것을 채우다 보니 넘쳤습니다. 청년부장로님, 1,2부 부장들이 각각 금일봉을 내놓았습니다. 부족한 것을 서로 돕겠다고 나서다 보니 풍성하게 된 것입니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아2:5)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건포도에서 힘을 얻어 사과처럼 시원한 섬김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18절)
여러분! 이렇게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섬기는 교회학교 교사로, 주방에서 섬기는 일로 땀흘리며 봉사하는 여러분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알아줄 사람은 가려운데를 긁어주는 사람입니다. 서로의 오해를 풀고 안아주는 사람입니다. 땀흘리며 일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을 내놓는 손길입니다.
시원시원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싶으면 믿음에 굳게 선 남자다운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면 됩니다. 어떤 일도 사랑으로 하여 시원시원하시기 바랍니다.
섬기며 살기로 작정하면 됩니다. 섬기려고 오신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며 사시기 바립니다. 찜통더위 불볕 더위에 시원시원한 사람이 되십시다!
다른 사람을 향해 시원시원한 사람! 하지말고 자기를 향해 시원시원한 사람이 되라! 하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건강한 교회생활의 5대 원리
이한규목사 / 고린도전서 16장 13-14절
<건강한 교회생활의 5대 원리 >
본문 13-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Be on your guard; stand firm in the faith; be men of courage; be strong. Do everything in love).” 한국어 성경은 4개의 명령문으로 표현되지만 영어 성경은 5개의 명령문으로 표현됩니다. 이 5가지 명령은 건강한 교회생활의 기초 원리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깨어 있으라(Be on your guard).
“깨어 있으라!”는 말은 뭔가 영적인 공격자가 있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근신하라는 말은 자기를 쳐 복종시키라는 말입니다. 자기를 처 복종시키면 문제가 상당 부분 줄어들고 마귀가 틈탈 수 기회를 현저하게 줄일 수 있습니다. 깨어 기도하면서 자신을 절제시켜야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이깁니다. 마귀는 멸절한 상태가 아니기에 어떤 경우에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방심하면 당하지만 방심하지 않으면 마귀의 공격이 아무리 강해도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2. 믿음에 굳게 서라(Stand firm in the faith)
어떻게 마귀를 이깁니까? 자신의 힘만으로는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를 이기려면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굳게 서야 합니다. 가끔 큰 문제를 당할 때 믿음 안에 굳게 서서 문제해결을 위해 기도하지만 문제가 더 어려워질 때도 많습니다. 그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문제로 인해 실망이 되고 낙심도 되지만 그래도 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님을 믿습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때에 신실한 믿음을 보여드리면 하나님이 그때를 인생의 가장 기억이 남는 때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문제 안에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 문제는 보다 나은 사역으로 올라서는 시발점이 됩니다.
3. 용기 있는 남자가 되라(Be men of courage)
축복은 대개 용기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용기가 있으면 자신의 가능성을 발휘할 기회라도 주어지지만 용기가 없으면 자신의 가능성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디모데처럼 선천적으로 소심한 성격을 가졌어도 믿음과 사명감으로 소심함을 이겨내고 십자가를 지는 일에는 앞서야 축복된 교회생활이 펼쳐집니다. 용기 있게 도전하는 사람만이 행복과 축복의 가나안 땅을 얻습니다. 놀이동산에 가서 놀이기구를 탈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어야 놀이기구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수시로 다가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이길 수 있어야 한 단계 복된 삶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4. 강건하라(Be strong)
이 말씀은 “육체적인 힘이 강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쉽게 흔들리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누구나 순간적인 용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용기를 꾸준히 지탱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잘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강한 사람은 좋은 일이 있어도 마음이 흔들려서 방심하지 않고 나쁜 일이 있어도 마음이 흔들려서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의 할 일을 하고, 웬만한 일에는 상처도 받지 않고 시험도 들지 않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야 교회는 건강하게 됩니다.
5.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라(Do everything in love).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결국 사랑이 없는 문제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문제의 근본 해결책은 사랑에 있습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할 때 그 모든 일들은 가장 바람직한 모습을 띕니다. 모든 행복과 축복의 시작은 사랑에서 시작되고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사랑으로 결론이 납니다. 가장 유능한 사람은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고 가장 똑똑한 사람은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두 가지는 꼭 하십시오.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감사해서 사랑을 나눠줄 때 나라가 잘되고, 교회가 건강해지고, 가정은 행복해지면서 자신 앞에 복된 길이 열립니다.
믿음으로 굳게 서서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16장 13절 ~ 14절 / 지태일목사
본문은 고린도전서의 마감 부분으로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과 인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로서, 교회의 중직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아름다운 삶입니까? 어떤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삶입니까? 오늘은 짧게 두 가지 말씀만 먼저 나누고자 합니다.
1. 믿음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13절을 보면 성도가 세상 살아 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합니다.
첫째, 깨어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레고레이터'는 현재 명령형으로 일시적인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를 유지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끝날에 있을 징조를 설명하면서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도 사용하신 바 있습니다(마 24:42;25:13). 성도는 무엇보다도 깨어 있어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항상 환란이나 위험이나 핍박중에 중에 있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위험이 크면 클수록 깨어 있어야 안전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여러가지 위험 중에 있었습니다. 큰 당파 싸움과 큰 무질서와 그들의 중요한 교리를 부패시키려고 속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깨어 있지 않고는 덕과 경건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그러한 위험의 환경에서는 깨어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도 역시 안전하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믿음에 굳게 서 있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믿음에 굳게 서서라는 헬라어 '스테케테'는 '흔들림 없는', '확실한', '의심없는' 등의 의미로서 믿음의 상태가 견고함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테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역사적인 객관적 사실로 인정한다는 것과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주관적 진리로 확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권면한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이해하고 그 위에 든든히 서라는 것입니다. 즉 깨어 믿음에 굳게 서라는 것은 세상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위에 굳게 서 있어야지 다 그 무엇위에 세운다든지, 다른 무엇으로 대치되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위에 서서 고수해야 하며 세상 지식으로 대치하거나 부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위에 굳게 서서 죽도록 고수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믿음에 고정되어 있어야지 포기하면 안 됩니다. 유혹을 이길 힘은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가 서는 것도 믿음입니다(고후 1:24). 세상을 이기는 것도 믿음입니다(요일 5:4). 세상이 유혹하고 위협할 때에도 믿음위에 굳게 서야 충성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 여기서 '남자답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드리제스데'는 '성인 남자' 혹은 '남편'을 가리키는 헬라어 '아네르'에서 온 말로 때로는 힘의 상징으로서의 남성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원래 동사로 '남자다워라'는 의미이며, 본절에서는 동사로 신앙을 지키는 것을 '남성다움', 또한 '강건함'과 연관을 짓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서 성도들은 남자답게 굳세게 끈기있게 교회와 성도들을 분열시키고 타락시키는 자들을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여 유혹이나 위협을 당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답게 되어라! 건전한 판단과 확고한 결단으로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방어하고 충성을 유지하고 원수와 싸울 때에 남자답게 굳게 서야 합니다.
다음으로 '강건하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타이우스데'는 수동태 명령형으로 그리스도인이 갖는 신앙의 힘이 타고난 육체적인 힘과는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인 것임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하면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것은 세상의 일로 인해서 마음 흔들리지 말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부활을 바라고 사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부활이 그 마음속에 뿌리 깊이 살아 있다면 사라질 세상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2. 모든 일을 사랑안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충고합니다(14절). 이 말씀은 무슨 일을 많이 하라는 말이 아님니다. 적게 일하든 많이 일하든 얼마를 하든 모든 일을 "사랑안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가페'는 '사랑을 가지고'로 번역하기보다는 '사랑안에서'(in love)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전치사 '엔'이 '도구' 혹은 '기구'의 용법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본절에서는 '범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행동을 위한 부수적인 수단이 아니라 행동 그 자체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마지막 권면에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사랑을 최고의 것으로 본 동시에 최종적인 열매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끈기는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에 있어서 남자답게 행할 때에 사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13절에서 “깨어 믿음위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말씀처럼 남성적이고 거칠면서도 터프하게 14절에서는 모든 일에 섬세하며 자상한 사랑의 삶을 요구합니다.
사실 이러한 성향을 얼마나 적절하게 사용하고 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 교회는 그 목적을 향하여 순조롭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 성도들도 이런 성도가 아름다운 성도입니다. 사람중에 아마 이런 남자가 있다면 여자들이 좋아하는 표상일 것입니다. 강하면서도 섬세하며 사랑이 넘치는 남자, 일은 힘있게 추진하면서도 남을 배려해주고 챙겨주는 남자, 여자들은 대단히 좋아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습니다. 분쟁과 분파가 있었고,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했고, 자체 내에 다툼이 있어서 서로 송사 하는 일까지 있었고, 음행이라는 죄를 그냥 묵인하기도 했고, 이혼의 문제도 있었으며, 서로의 은사를 자랑하고 우월감을 내세우는 등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한마디로 집약합니다. 그것은 곧 고린도 교회가 깨어서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기 때문이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마치면서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한다해도 단지 돈을 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그 마음 자세가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해도 전도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상대방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사랑이 곧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초점을 행위에 두지 말고 그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오직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남자답게 강건하게 복음의 진리를 말하고 무슨 일을 해도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라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과 복수심과 개인적인 우월감과 사소한 감정을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이라는 법칙에 매이지 않을 때 그 순간 자기의 것을 앞세 우게 됩니다. 자존심을 앞세우게 되고 우월감을 앞세 우게 됩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특별히 22절에 보면 아주 엄한 경고가 나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말씀이 곧 고린도전서의 결론이 될 수 있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참으로 무서운 심판의 말씀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 주님 사랑으로 모든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저주'를 대비시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저주를, 심판을 받습니까? 그렇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 즉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그의 진리를 부인하며 그의 제도를 경멸하고 인간의 지식과 식으로 그의 계시를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경고로 주어져 있으며 그들의 죄악에 대한 견책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든가 아니면 뭘 좀 배웠다고 좀 아는 체하며 세상의 지식으로 신앙을 바보로 취급하고 가장 중요한 말씀들, 교리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들을 믿지 아니하고 성경의 진리를 모순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영향으로 복음의 순수성과 성결한 생활을 하게 되는 원리들을 버리지 말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원한을 가지며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말을 들으면 그리스도교를 배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일에 대하여 저주를 받을지어다하고 엄중한 충고를 합니다.
여기에서 '저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데마'는 어떤 사건과 관련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맡겨진 것'을 의미합니다.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르치는 바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없이 자기 생각과 행동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의 결과는 저주입니다.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어떤 결과가 도래한다는 것을 바울은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경멸하고 버림으로 무서운 파괴를 초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거룩하고 진실한 사랑이 없이 그저 입술로만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으로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결코 복종하지 않습니다(눅 19:27). 이런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를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이보다 더 큰 죄가 있겠습니까? 사랑보다 더 귀한 사랑의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고 몸을 버리시고 피를 흘려 사랑을 증거한 그를 이처럼 나쁘게 거역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랑에 감동을 받지 못하고 이러한 구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무슨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무엇을 한다면 주님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음으로, 또 사랑으로 행하지 않음으로 그의 분노하심을 당하고 왼편에 서서 그에 의하여 저주를 받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주께서 파멸시키시면 누가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고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멸망되고 구제되지 못합니다.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참다운 신앙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찬송가 241장. ♬ 구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어긋난 딴 길로 가다가도 예수의 사랑만 생각하면 곧 다시 예수께 돌아오리. 주 예수 이렇게 사랑하니 우리는 어떻게 보답할까.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무서운 심판을 면하려면 주님을 사랑하고 모든 일에 대해 주님 사랑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 모든 주의 성도들은 그 무엇보다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같이 강건한 성도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의 그 기쁨과 즐거움을 만인에게 전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모든 일을 사랑안에 행하면서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통해서 증거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 신앙을 소유한 성도가 살아야 할 마땅한 모습인줄 믿습니다. 아멘.
바른 교회가 되는 길
고전16장 13절 ~ 24절 / 김태복목사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많은 문제를 거론하고 그 치유책을 언급한 후에, 16장에 와서 결론적으로 바른 교회가 되는 길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바른 교회가 되려면 믿음으로 강건해야 합니다.
13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금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무질서하고 혼란에 처해 있습니다. 교회가 큰 시험에 빠져 있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바울은 13절에서 세 가지로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1)‘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왜 교회가 시험에 듭니까? 깨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든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러한 경고를 받고도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치는 큰 시험에 빠졌던 것입니다.
아무리 운전에 능숙한 자라도 고속도로에서 존다면 큰 사고를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 날 논산 부근 집회 장소까지 9시에 도착하기 위해서 새벽예배를 마치고 오전 5시 30분에 출발하였습니다.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음성 부근인가 지나는데 졸음이 옵니다. 지금 대부분 차가 120킬로로 달리므로 같은 속도로 가고 있는데, 만약 그 때에 단 1초라도 졸면 큰 사고가 발생할 것입니다. 할 수 없이 휴게소에 들려서 잠깐 쉰 다음에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최고의 차량, 최고의 운전수라도 졸면서 운전하면 자기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목회자와 지도자들, 좋은 건물을 가진 교회라도 기도로 깨어 있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려운 조건에서도 지금까지 성장 발전해 온 것은 깨어서 기도에 힘쓴 탓인 줄 믿으시고 계속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2)‘믿음에 굳게 서라’고 했습니다.
왜 교회가 시험에 듭니까? 믿음에 굳게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여름에 많은 건물들이 홍수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기초공사가 단단히 된 건물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어디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고린도 교회가 시험에 들었습니까?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 등, 인간을 중심으로 파들이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됩니다. 교회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어느 교회 목사는 자기가 세웠다고 하면서 자기가 마음에 안 들면 나가라도 호통을 칩니다. 어느 교회 장로는 자기 공장에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가 마음에 안 들면 직원 갈아치우듯 쉽게 내 보냅니다. 그런 교회는 결코 바르게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세웠든지, 내가 재정의 반을 담당하든지, 자기가 거의 담당하다 시피해서 교회당을 건축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과시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든든히 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3)‘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여자 분들이 다시 못 마땅합니다. 고전14:34에서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더니 이 구절에서는 ‘남자답게’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철저히 남성우월주의자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당시에 상황이 여자들은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 사회적인 풍토이기 때문에 교회 덕을 세우기 그런 태도들 보이는 것이 좋다는 표현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문화가 들어오기 전의 사회가 이런 악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계급에 의해 높은 대접을 받든지 천한 대우를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지금부터 100년 전에는 양반과 상놈으로 나누었습니다.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라도 상놈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말할 수 없이 천대를 받았습니다. 특히 칠천반(七賤班)이라 해서 일곱 직업을 가진 사람들, 즉 포졸이나 광대, 무당이나 고리장, 기생이나 갓바치, 백정은 가장 천대를 받았습니다.
특히 그 때 백정들은 얼마나 천대를 받았는지, 시집을 갈 때도 가마를 못 타고 널빤지를 탔고 사람들 앞을 지나갈 적에는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개처럼 땅을 향해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돌에 맞거나 곤장을 맞아야 했고 죽을 때에는 상여도 타지 못하고 거적으로 말아 묻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 사회는 얼마나 평등하게 되었습니까? 아니, 이제는 정육점이나 우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살고 높은 대접을 받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여자 분들은 물론이고 과거 천대 받던 직업을 가진 분들은 예수님에게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 우리나라가 이처럼 모순이 많은 사회였다면 이천년 전에 유대나 헬라 사회는 오죽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이 여자 분들에게 지나친 표현을 쓴 것처럼 보여도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 표현 보면 강건을 강조하기 위해서 ‘남자답게’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특징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보니까,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 50가지」가 나옵니다. 그 중에 재미난 몇 가지를 소개하면 “남자의 얼굴은 20대는 설계도, 30대는 기초공사, 40대는 마무리, 50대는 준공이지만, 여자의 얼굴은 20대에 완공, 30대에 균열, 40대에 붕괴, 50대에 폐가가 된다. 남자들은 모이면 여자얘기를 꺼내고 여자들은 자식얘기부터 시작한다. 남자는 사랑의 대상에, 여자는 사랑의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모르는 것도 아는 체 하고, 여자는 아는 것도 모르는 체 한다.”
“여자는 끝까지 ‘사랑해’라고 말한 사람을 잊지 못하고, 남자는 마지막으로 ‘행복하게 사세요’라고 말한 여자를 잊지 못한다. 남자가 유명해지면 명함에 쓸 것이 많아지고, 여자가 유명해지면 핸드백 속에 남자의 명함이 많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차이가 많습니다. 대부분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부드럽습니다. 남자는 크게 보고 여자는 섬세하게 보는 특징이 있습니다. 남자는 명분이 강하고 여자는 실리에 밝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큰일은 남자와 의논하는 것이 좋고 실리를 따질 일은 여자와 의논하는 지혜롭습니다. 특히 남자는 의지적이고 마음이 큰 반면, 여자는 감정적이고 마음이 좁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남자처럼 강건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통을 좀 크게 가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속이 좁고 옹졸하면 못씁니다. 속이 좁은 사람은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다투고 스스로 시험에 듭니다.
그러나 마음이 넓고 강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말을 듣더라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갑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서로 분쟁을 일삼고, 은사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것은 마음이 좁아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자주 시험에 드는 사람은 마음이 좁아서 그렇습니다. 속이 비좁은 사람은 큰 믿음을 가질 수가 없고, 또 절대 큰일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속이 비좁은 사람하고 같이 지내면 매사가 피곤합니다.
이해할 줄을 모르고 관용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연약한 성도를 붙들어 주고, 주를 위해서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분량대로,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작은 만큼 역사하시고, 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크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이왕 예수님을 믿는 바에는 큰 믿음, 큰 그릇이 되셔서 주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2. 바른 교회가 되려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14절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카페적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교회라도 사랑이 없는 교회는 병든 교회요, 점점 죽어가는 교회입니다.
비록 교회당은 초라하고 교인 수는 부족해도 아카페적인 사랑이 가득한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일어난 모든 문제, 성도들 간에 발생한 모든 문제는 곧 남을 위한 사랑 대신에 자기 이기주의가 판을 침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가정이 왜 좋습니까? 서로 아끼고 위해주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교인 간에 서로 아끼고 위해 주는 이타주의 사랑으로 가득차면 누구든지 그런 교회 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의 자세로 섬기려고 하는 교회에 하나님은 함께 하셔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기계에 기름이 메마르면 거슬리는 소리를 내고 고장이 납니다. 그러나 기름을 채우고 발라 주면 아주 부드럽게 돌아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교회에서 봉사를 할 때 사랑 없이 하면 서로 다투고 싸우면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물론, 모든 신자들은 사랑이 무엇보다도 좋고 귀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사랑하려고 하는 데는 대단히 인색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교회가 사랑이 없다면서 교회가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재정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자기 주머니에서 단 돈 몇 만원을 내어 불우한 교우들을 위해서 구제하는 일에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를 사랑 충만한 교회로 만들기 원하신다면 여러분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 간판을 ‘사랑의 교회’라고 붙여도, 서로 사랑하자고 외쳐도 자기를 희생하지 않으면 사랑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물질을 주는 교회가 사랑의 물질로 채움 받습니다. 목회자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그 중의 하나가 도와달라는 곳이 너무 많은 데 있습니다. 사방에서 청구서와 전화가 옵니다.
그것을 교회에 일일이 청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는 내 주머니에서 나갑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친구 목사들을 매월 돕습니다. 그러면 놀랍지요. 하나님이 번번이 그 이상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는 자, 주는 교회가 받습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어느 날 가진 돈이 반 크라운 1.2실링 6펜스 밖에 안 되는데, 마침 가난한 집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갓난아이를 안은 엄마가 몸져누워 있었습니다.
하룻밤을 넘기기 힘든 엄마와 아기였습니다. ‘이 돈이 1실링짜리 동전 2개와 6펜스 동전 하나라면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1실링을 기쁘게 줄텐데.’하는 생각이 그에게 들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에는 자비로우시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고 권면하는데 마음속으로부터 ‘이 위선자야, 이들에게 사랑 많으신 하나님 운운하면서 네 주머니에 반 크라운을 움켜쥐고 있다니.’라는 소리가 울려왔습니다.
가책을 받은 허드슨 테일러는 그들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반 크라운을 꺼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골길을 지나 단칸방으로 걸어오는 발걸음은 그의 빈 주머니만큼이나 가벼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하기를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빌려드린 것이 오래 가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내일 점심부터 굶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다음 날 우체부 편으로 반 소프린 1.10실링 텝 금화 하나가 우송되어 왔습니다. 테일러는 즉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앞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모든 충성과 봉사를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음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의 일을 행할 때마다 진정한 사랑의 자세로 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바른 교회가 되려면 선한 일꾼들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15-18절까지 보면 바울이 칭찬할 만한 일꾼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선한 일꾼으로 소개하면서 이들의 믿음의 충성과 봉사를 알아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들은 어떠한 일꾼입니까?
(1)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자였습니다.
15절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스데바나는 아가야의 첫 열매로, 바울이 고린도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을 때 첫 번째로 회심하여 교회에 들어온 자로 바울에게는 너무나 귀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를 더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가 성도들을 섬기기로 작정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자료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하는 일에서부터 병든 자나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돕는 일에 헌신적이었고, 그의 집안 모든 식 구들이 다 그러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그러한 신앙은 누구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은 자로서 자원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그 교회의 첫 열매 신자라면 곧 그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교인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성도들을 그렇게 섬긴다는 것은 결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교회들마다 오래된 신자들이 텃세하면서 주인 노릇 하려고 하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므로, 교회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습니다. 개척교회 처음 설립 멤버들이 목회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스데바나는 교회에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목회자의 심정을 가지고 눈물을 쏟은 자였으며,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귀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 앞장서서 충성하던 교인들이 시험에 잘 듭니까? 교회에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충성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직 선거 때에 자기보다 충성하지 않은 사람은 되고 자기는 안 되면 쉽게 섭섭한 마음이 들고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체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봉사를 하되 오직 성도들을 섬기는 정신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2)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준 자들 이었습니다.
17절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사이에 중간 역할을 잘 해 주어서 서로에게 만족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와서 고린도 교인들의 허물과 약점을 털어 놓은 것 이 아닙니다. 비록 교인들의 허물이 태산같이 많았지만, 그들은 좋게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마음에 기쁨이 생겼습니다. 또한 교회에 돌아가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에 대해서 좋게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도 기쁨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영어로 ‘피스 메이커(peace maker)’라고 합니다. 흔히 중간에 있는 사람이 역할을 잘못 함으로써 상한 감정이 더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이 온 것을 내가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교회에는 스데바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교회로 인해 시험에 든 신자들을 찾아가서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에 대한 오해나 불편한 마음이 풀리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목회자에게 찾아가서도 아무리 문제가 많고 허물이 많은 신자라도 좋게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시험 들어 있는 성도의 가정에 구역장이 심방을 왔다 가고 나면 더 깊은 시험에 빠진다면 얼마나 잘못된 일꾼입니까?
또한 교회 중직이 목회자에게 다녀가고 난 후에 목회자가 성도에 대해서 더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은 불화를 조성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마다 서로 부족한 점들을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사람들은 많은 데 그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언제나 목회자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성도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자였습니다.
18절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문제들로 인하여 사도 바울의 마음이 괴롭고 안타까웠는데,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를 만남으로써 마음에 시원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주의 종의 마음에 걱정과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성숙한 신앙으로 주의 종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분자들 가운데서도 맡겨진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에 본이 되지 못해서 성도들과 목회자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직분자들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직분을 잘 감당함으로써 성도들과 목회자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즈음 광고 중에 ‘산소같은 여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바나와 두 사람은 고린도교회의 산소와 같은 일꾼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와 같은 일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특히 교회는 그런 일꾼들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선한 일꾼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시험 들게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판을 치게 되면 교회는 선한 일꾼, 알곡 같은 일꾼들은 점점 줄어들므로 가라지만 가득한 교회가 되어갈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부분에 가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어떤 분들입니까?
바울과 똑같이 천막을 제작하는 직업을 가진 자로서 같이 동업하면서 같이 선교여행을 다니는 동역자들 이었습니다. 사실 동업하다 보면 많은 결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같이 선교 동역자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롬16:4에 보면 이들 부부는 자기 목숨을 위해서는 자기 목이라도 내어 놓는 자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을 위해서 아주 헌신적으로 협력하는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헌신적인 분이 될 수 있었습니까? 무엇보다도 바울이 이들의 충성과 헌신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분들을 알아주는 교회, 이런 분들이 앞장서서 충성할 수 있는 교회에는 많은 선한 신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반드시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들은 사람들이 알아주기 위해 충성하지 말고 하나님이 각자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믿음으로 충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은혜와 복을 주실 줄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한참 박해를 받던 시대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열 두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며칠 동안을 굶긴 후 얼음 구멍 열두 개를 뚫게 하였습니다. 한 구멍에 한 사람씩 벌거벗겨서 넣은 다음 두 팔을 벌리라고 했습니다. 그 옆에는 따뜻한 방을 준비해 놓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은 다음, “누구든지 지금이라도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나아오라. 그리하면 살 것이요. 저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누구 하나 그리스도를 저버릴 수 없다고 사력을 다해 견디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그만 물위로 올라오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그들을 지키던 군인 하나가 하늘을 우러러보니 열 두 천사가 열 두 개의 면류관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한 천사가 도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군인은 재빨리 군복을 벗고 그 얼음 구덩이로 들어가며 “이 사람이 버린 예수를 내가 믿겠다.”라고 하며 순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충성자를 혹 사람은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반드시 알아주십니다.
사랑하시는 홍익의 여러분들이여, 이제 결실의 계절 가을이 왔습니다. 앞으로 각자 하나님이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충성 봉사하되 깨어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굳건히 서서 큰마음으로 하십시오. 더 나가서는 사랑으로 섬기는 자세로 할 뿐 아니라,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는 자,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자들이 다 되심으로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과 상급을 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교회
고전 16장 14절 / 김광일목사(벧엘교회)
어느 교회의 부흥회 마지막 집회시간에 허리가 굽은 팔순이 넘은 여자 권사가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젊어서 간첩으로 남파되었던 그녀는 체포되어 20년 복역 후 예수 믿고 권사가 되었습니다. 자신은 그 동안 지은 죄를 모두 용서받고 구원 받았다고 믿었는데, 부흥회를 통하여 죄 사함 받은 믿음이 가짜였음을 알게 되었노라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공산당원이 되고 또 간첩이 되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짓이든지 다 했습니다. 자식 하나 데리고 남한으로 내려와 도덕적으로 문란하여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는 전도자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모든 죄를 한 순간에 용서 받을 수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죄를 숨겨둔 것이었지 죄 사함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바라보며 믿어야만 자신이 어떤 죄에서 용서 받았는지, 어떤 죄인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용서 받았다고 믿었지만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없었고 타성이 되어버린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결국 오래 믿는다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아닌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성령을 거역하지 마세요. 죄는 너무나 무섭습니다. 용서받아도 그 흔적이 남습니다” 라고 눈물로 회개하며 간증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 구원받은 우리들을 얼마나 더 사랑하시는 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믿음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습을 바꿉니다. 우리의 태도를 바꿉니다.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바울은 고린도서를 통하여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여기의 ‘사랑으로’에 해당하는 원어 ‘엔 아가페’는 ‘사랑 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전치사 ‘엔’은 범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행동을 위한 부수적인 수단이 아니라 행동 그 자체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마지막 권면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사랑을 최고의 것으로 보는 동시에 최종적인 열매로 간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봉사, 사랑이 없는 섬김, 사랑이 없는 예배, 사랑이 없는 돌봄, 사랑이 없는 나눔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몸된 교회의 사역을 사랑으로 하여야 합니다. 사랑이 행함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지 못할 일은 그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도록 항상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첫째로 영혼을 구원하게 하소서
사무엘 모리스(Samuel Kaboo Morris)라는 흑인이 16세의 어린 나이에 회심하였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다른 부족에 의해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을 번한 상황에서 선교사를 통해 극적으로 구출 받았습니다. 그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습니다. 한번은 배를 타고 뉴욕으로 가는데 흑인을 미워하는 말레이시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흑인 모리스를 보고 술에 취한 채 칼을 들고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리스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칼을 내리고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말레이시아 사람이 중한 열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워낙 잔인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리스는 선실로 그를 찾아가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말레이시아 사람은 모리스의 기도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자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녹아졌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회심을 하고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배에서 사무엘 모리스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리스는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려던 사람까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하였습니다. 그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 사랑이 상대의 마음을 녹였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혼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최고의 윤리, 곧 사랑의 윤리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구절가운데, ‘이처럼’에는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이웃의 영혼을 그렇게 사랑하며 구원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을 받았기에 이웃을 향한 구원으로 그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전도의 구령열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영혼 구원의 동기가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혼을 구하는 전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혼을 향한 구원의 열망이 타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전도하십니까?
둘째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소서
헨리 크로웰(Henry Parsons Crowell)은 미국에서 가장 큰 오트밀 회사 ‘퀘이커 오츠’(The Quaker Oats Company)의 창립자입니다. 9살 때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역시 폐결핵에 걸려 절망 가운데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무디의 집회에 참석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디 의 “오직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 하나님께 쓰임 받는 위대한 생애를 살라”는 설교를 듣고 하나님 앞에 서원했습니다. “저는 무디처럼 말씀을 전할 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어 무디와 같은 전도자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저로 하여금 돈을 벌게 해주시고 하나님 사역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시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그는 남북전쟁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 아침부터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우유만 부어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가격이 저렴한 ‘오트밀 시리얼’을 개발하였습니다. 시리얼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거부가 되었습니다. 크로웰은 사회 참여에도 힘을 써서 범죄를 줄이고 빈민계층을 돕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매 순간 “하나님은 내가 이 일하기를 원하실까? 이 일이 하나님을 영광되게 할까?”를 고민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무디 성경학교 호튼 교장이 추도사를 낭독했습니다. “헨리 크로웰은 제가 만나본 사람 중에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한 모든 일에서 본인을 숨기고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는 세상 박수갈채를 원하셨던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잘했다는 인정을 받고 싶으셨을 겁니다. 크로웰의 훌륭한 모습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분은 겸손하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예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하면 존경 받습니다. 사랑으로 일하면 원망도 없고 지치지도 않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의 문제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확신을 가지면 흔들림이 없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사랑이 없이 사명을 감당하려 했기에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사랑이 없어 주인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마음은 떠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질 때 그 사랑으로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염려 또한 사라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사랑이 있으면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마음이 기쁘고 평안해 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하십니까?
셋째로 부흥을 일으키게 하소서
‘미친 듯 하나님을 사랑하라(Crazy Love)’ 의 저자 프랜시스 챈(Francis Chan)은 미국 코너스톤 교회의 목사입니다. 1994년 창립 멤버 30명으로 시작된 교회를 2,000명 이상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으며 교회 헌금의 절반 이상을 선교와 구제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을 말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한낱 우리 같은 자를 사랑한다는 사실 앞에 미친 사랑으로 반응해야함이 마땅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챈 목사는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죄를 지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할까봐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길 원하신다. 우리가 변할 수 있도록 목숨까지 내어놓으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면 그분과 남들을 사랑하는 일이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그분을 좇으면 참된 만족이 찾아온다. 불안해하며 거짓 만족이 있을 곳을 기웃거린다면 그것은 그분께로 달려가는 것을 멈춘 탓이다.” 챈 목사는 미적지근한 신앙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진짜 삶을 사는 것에 대해 강조합니다. 그의 생모는 출산하는 과정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새 어머니는 아홉 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마저 열두 살 무렵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프랜시스 챈은 청소년 시기를 거치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목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그를 붙잡아 주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데 헌신하였습니다. 월드임팩트(World Impact)와 아동 기아재단(Children’s Hunger Fund) 이사회 멤버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입의 90퍼센트를 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놀라운 부흥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할 때 우리를 부흥의 주체로 삼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통하여 마음을 같이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미움과 불신과 비난과 정죄를 없애고 서로 돕고 하나 되는 일에 오로지 힘썼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또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나누어 먹었습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사랑의 말만 하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사랑의 교제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자 하나님께서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같이하여 사랑으로 행합니다. 서로 돕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사랑으로 기꺼이 헌신하고 충성합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고 부흥을 위해 서로 힘을 다합니다. 조금 부족하고 모자라도 사랑으로 행하기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날마다 부흥을 일으키고 계십니까?
남미에 가면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 혹독한 무더위로 많은 풀들이 시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 폭우가 쏟아지지만 짧은 시간에 내린 비는 금방 흘러가기에 식물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난히 한 종류의 꽃은 싱싱하게 삭막한 벌판을 환히 밝히고 있습니다. 싱싱한 이유는 꽃 위에 잎으로 물받이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꽃 스스로가 물받이를 만들어서 물을 받는 것입니다. 이 꽃도 바람이 휘몰아 칠 때는 넘어지지만 속히 복원을 하고 잎을 세운다고 합니다. 다른 풀들은 쓰러져 죽어가지만 이 꽃만큼은 물받이 속에 물이 고입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속에서도 받아놓은 물을 통해 사막 한 가운데서도 싱싱하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랑의 물받이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하여 모든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올 한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흥을 일으키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고전 16:15-18 / 송기성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 속담에 “고향에서는 이름으로 알아주고 타향에서는 의복으로 알아준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고향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만으로도 그 사람과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을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에 타향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의복을 보고 알아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복을 보고 알아주는 것보다는 이름으로 알아주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자기에게 온 것을 기뻐한다며,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스데바나의 노예였거나 노예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어 스데바나와 함께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에게 파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였기에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하였을까요? 그들이 실로 그들의 고향에서 뿐만 아니라 타향에서도 알아주어야 할 사람이 된 데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알아주어야 할 사람들은 섬김을 작정하고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6:15-16에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하였습니다.
스데바나와 그의 집(오이키안) 곧 그의 가족과 친척은 노예들까지 아가야의 첫 기독교 개종자가 되었습니다.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입니다. 따라서 아가야의 첫 열매인 스데바나와 그의 집에 속한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의 창립 교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스데바나와 그의 집 사람들에게만 친히 세례를 주었습니다 (고전1:16).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 선교의 첫 열매로 고린도 교회의 미래를 열어갈 희망이었습니다.
바울의 아가야 선교와 고린도 교회의 희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아가야의 첫 열매인 스데바나와 그의 집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작정한 바대로 함께 일하며 수고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같은 사람들에게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환언하면 이같은 사람들의 리더십을 따르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유감스럽게도 사분오열 되어 있었던 고린도 교인들이 스데바나와 같은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았으며, 그런 사람들의 리더십을 따르지 않고 있었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같은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아주어야 사람들은 아가야의 첫 열매인 스데바나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길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성도 섬기기로 작정하고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회복지시설인 “꽃동네”를 설립한 오웅진 (1944.3.22~)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충북 청원의 가난한 농부의 4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난 그는 6.25 전쟁 시 굶어 죽어가는 피난민들과 어느 부녀의 처참한 모습을 목격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평생을 바쳐야겠다는 결심을 실천하여 사제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1976년5월3일 사제 서품을 받고 충북 음성군 무극천주교회 주임신부로 부임한 그는 9월12일 동냥깡통을 든 최귀동 (베드로)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다리 밑에서 살고 있던 걸인 18명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은 빌어 먹을 힘조차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거지 성인’으로 불리는 최귀동 할아버지는 강제징용으로 일본 땅으로 끌리어 갔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어 불쌍한 사람들을 모아 가마니를 깔고 다리 밑 걸인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 신부님은 최 할아버지를 통해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가지고 있던 돈 1300원으로 시작하여 무극리 용담산 기슭에 방 다섯 칸 부엌 다섯 칸짜리 ‘사랑의 집’을 짓고 1976년11월15일 그들을 입주시켰습니다. 이것이 기원이 되어 음성군 금천리 3만 여 평에 “꽃동네” 복지 마을을 이루고 2000여명의 사람들이 평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2014년8월 꽃동네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웅진 신부를 만난 후 “나는 꽃동네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꽃동네가 가장 보잘 것 없는 작은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나누는 보금자리가 됐으면 한다.” 고 격려하셨습니다. 교황이 꽃동네에서 만난 그리스도는 꽃동네 사람들로부터 ‘작은 예수’로 불리웠던 최귀동 할아버지와 그의 사랑과 섬김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오웅진 신부님 등을 가리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20:27-28에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모든 사람의, 막10:44)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으뜸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섬김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시는 주님 앞에서 자리 다툼을 하고 서로 분노하며 분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알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주어야 할 사람들은 섬김을 작정하고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 교우들과 이웃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함께 수고하며 일하심으로 주님께로부터도 인정받고 상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알아주어야 할 사람은 부족한 것을 채우며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6:17-18에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고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그들이 나와 너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하였습니다.
스데바나와 브도나도와 아가이고가 사도 바울에게 온 것은 크게 두 가지 일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바울에게 의논하며 지도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목적은 사도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데바나와 그 일행이 그에게 온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는 이 세 사람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의 사정과 문제를 상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쓰게 되었으며 그들을 통해서 서신을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세 사람의 방문을 기뻐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고린도 교인들의 부족한 것을 채웠으며,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물질의 부족과 사랑의 부족이었습니다.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에게 별로 순종하지 않았고 그들을 알아주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부족한 것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족한 것을 채웠으며 사도 바울과 교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종과 교우들의 마음에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They have made up for your absence and have cheered me up, just as they cheered you up.)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아주어야 할 사람들은 아가야의 첫 열매 스데바나처럼 부족한 것을 채우며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2015년 10월 우리 교회창립 130주년을 맞으면서 창작 칸타타 <시토스> (SITOS,밀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총 비용 7천만 중 5천만 원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난감했습니다. 이렇게 비용이 많이 들 줄 몰랐습니다. 기획위원회를 나흘 앞두고 5천만 원을 모금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흠 없는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도 중에 다섯 분을 만나 각각 천만 원씩 헌금을 부탁드리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수요일 저녁 예배 후에 그리고 금요일 연합속회 개강예배 후에 권사님 두 분으로부터 기꺼이 헌금을 하시겠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토요일 새벽기도 후에 장로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나머지를 다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방문 보은감사연주 등을 고려해서 1억 원을 헌금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복이 너무 많다며 눈물을 짓던 장로님의 모습에 저 또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후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흉상과 부조 제작을 위하여 원로장로님 한 분이 5천만 원을 헌금해 주셨습니다.
시토스,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으신 예수님이 그 원조이십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보여 주신 아펜젤러 선교사님 역시 시토스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토스 찬양을 부르고 듣는 우리들도 시토스 정신과 헌신을 배우고 익히게 되었습니다. 기꺼이 재능기부를 해주신 작곡가와 조각가 장로님, 자비량으로 미국 방문 보은연주에 참여한 60여명의 작은 시토스들, 동상 설치비 등 필요할 때마다 넉넉하게 채워주신 밀알들, 그리고 비전과 사명을 함께 담당하고 헌신한 자랑스런 시토스들,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25:34-36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25:40) 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있는 자들 곧 하나님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를 알아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곧 예수님의 형제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주님께 하지 않은 것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주님 앞에서 어린 아이들과 병든 자들이 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책망하셨을 뿐 결코 그들을 알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알아주어야 할 사람들은 부족한 것을 채우며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몸 된 교회와 교역자들, 교우와 이웃의 부족한 것을 채우며 마음을 시원하게 해줌으로 주님께로부터도 인정받고 복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바나, 그 이름의 뜻은 ‘면류관’ 입니다. 면류관은 왕과 대사, 제사장과 승리자가 쓰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을 ‘왕 같은 제사장들’ (벧전2:9)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여러분과 저도 스데바나 곧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바나 라고 해서 다 알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의 스데바나는 명실상부한 면류관이었기에 알아줄 수밖에 없는 인물로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너희는 이같은 사람들을 알아주라. 우리 교회에는 알아주어야 할 스데바나 곧 면류과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명실상부 하게 그 이름 값을 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과 교우들로부터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도 알아주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알아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섬김을 작정하고 함께 일하며 수고하십시다. 그리고 부족을 채우며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십시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알아주시는 스데바나. 명실상부한 면류관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좋은 사역자들과의 연합
고린도전서 16:15-18 / 김영규목사
좋은 사역자들
바울은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과 함께 했던 몇몇 일군들의 이름을 거론합니다. 스데바나와 그 집 사람들, 브드나도, 아가이고,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 등등. 이들은 고린도교회의 밑거름이 된 좋은 일군들입니다. 교회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좋은 일군들과의 연합입니다. 좋은 일군들과 함께하면 신앙이 쑥쑥 자랍니다.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딜 수 있습니다. 바른 신앙 지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즐거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일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내 인생을 좌우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정윤교회 성도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또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를 주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바울이 소개한 사역자들의 좋은 점들입니다. 이들은 어떤 점에서 좋은 일군들인가? 둘째는 그런 좋은 일군들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바울이 언급한 사역자들의 좋은 점입니다.
첫째로, 이들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15절)
스데바나는 아가야 지역에서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집안사람들과 함께 사도와 교회를 섬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공동체에서 가장 고마운 분들은 섬기기로 결심하는 분들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지만, 교인들 위에 군림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서 논산훈련소장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만나는 교인마다 시련을 주고, 시험에 들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서 AP, UPI, AFP, REUTER 통신사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좋은 소식, 안 좋은 소식을 만방에 퍼 나릅니다. 그런 가운데 섬기기로 결심한 일군이야 말로 좋은 일군입니다.
우리 교회 일군들은 제가 억지로 시켜서 섬기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다 자원해서 섬기는 분들입니다. 교회 봉사는 억지로 시킨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평생봉사이니만큼 스스로 즐겁게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봉사의 결과가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 봉사의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줍니다. 저는 매주일 예배 후에 점심을 먹으면서 첫째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둘째는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매주 식단을 짜고, 가락시장에 가서 식재료를 준비하고, 조리를 하고, 설거지 청소까지, 모든 수고의 손길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디 가서 먹어봐도 우리 교회만큼 맛있는 식단이 없습니다. 여어 분야에서 결심하고 섬기는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교구 일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교통정리로, 안내로, 기도로, 숨은 섬김으로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께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냉수 한 그릇의 섬김까지 상급을 주십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들의 부족을 채워주는 사역자들입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17절)
여기 스데바나 외에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이름이 거명됩니다. 이들은 고린도교인들의 질문서를 가지고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만나러 온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이 갖고 온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사도를 돕는 일에 고린도교인들의 부족함을 채워준 사람들입니다. 또한 고린도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가 여러 모로 어려울 때에, 교인들의 부족한 신앙을 흡족하게 채워준 사역자들입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의 부족을 채워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쓸개를 떼어냈습니다. 저는 쓸개 빠진 사람입니다. 사람의 몸은 신기합니다. 어떤 부분이 떨어져나가면 다른 부분이 작용해서 몸이 유지됩니다. 폐나 간의 일부를 떼어내고 위를 떼어내도 인체가 유지됩니다. 신체의 다른 부분들이 떨어져나간 부분을 대신하여 역할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든 교회든, 우리는 다 약점이 있고 결점이 있습니다. 그 결점을 얼마나 서로 보완해주느냐가 공동체 건강의 지표입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을 덮어주고 대신 채워줍니다. 병든 공동체는 서로의 약점을 찌르고, 드러내고, 아프게 만듭니다. 남이 잘못하면 대신 덮어주고, 대신 채워주는 일군이 좋은 일군입니다. 내가 남을 덮어주면 남도 나를 덮어줍니다. 나는 남의 부족을 채워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드러내는 일군입니까?
셋째로,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역자들입니다.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18절)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사도와 고린도교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당면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줬습니다. 이들은 고린도교회의 형편을 바울 사도에게 알렸습니다. 예를 들면, 분파의 문제, 소송 문제, 불륜 문제, 결혼과 이혼 문제, 우상 제물 문제, 성찬 문제, 은사 문제, 부활 논쟁 등등. 그리고 사도로부터 확실한 해답을 얻어서 고린도교회에 전달해 주었습니다. 문제를 만드는 일군이 있고, 문제를 풀어주는 일군이 있습니다. 문제를 풀어주는 일군이 시원한 일군입니다. 요즘 “사이다”란 말이 유행입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소통의 말 한 마디가 큰 격려와 기쁨이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은 사이다 같이 시원한 사람입니다.
좋은 사역자들과의 연합을 위하여
그러면 이런 좋은 사역자들과 어떻게 서로 연합할 수 있을까요? 사역자들이 일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또한 이들과 연합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사역자를 돕고 연합하는 일일까요? 바울은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로, 사역자들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존중하고 따라주면 됩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순종하라.”(15-16)
스데바나는 사도가 아닙니다. 평범한 교회의 사역자입니다. 그와 함께하는 모든 사역자들도 다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 건설의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교회는 앞장서서 섬기는 자를 존중하고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세상 공동체는 아주 다릅니다. 섬기는 자는 낮추어 보고 섬김을 받는 자는 우러러봅니다. 세상 공동체는 섬기는 자가 따로 있고 섬김을 받는 자가 따로 있습니다. 노예는 섬기고 상전은 섬김을 받습니다. 백성들은 엎드리고 황제는 군림합니다. 요즘은 주로 돈 많은 사람은 군림하고 돈 없는 사람이 섬깁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다릅니다. 교회는 사역자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복종합니다. 교회 직분은 높아질수록 더 많이 섬깁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3-14) 교회 직분은 섬기는 직분입니다. 집사보다 장로가 더 많이 섬기고, 장로보다 목사는 더 많이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섬기는 자를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섬김을 받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님을 종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존중하고 따릅니다. 마찬가집니다. 교회는 직책이 더할수록 더 섬기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부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존중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가 작동하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모든 사회생활에 다 적용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남에게 순종하는 것을 굴종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내 뜻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짐짓 남을 따라주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회생활에 성공합니다. 요셉을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요셉은 아무 일도 안하고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바람에 공짜로 출세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요셉은 평생을 섬기고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창39:4)
요셉이 30세에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나 행운이 아닙니다. 그는 13년 동안의 노예생활을 다 꾹 참고 섬겼습니다. 보디발의 집을 섬겼습니다. 심지어는 죄수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을 총리로 뽑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섬길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누구든지 섬기는 사역자를 소중히 여기고 복종하세요. 그것이 좋은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입니다.
둘째로, 사역자들을 알아주라고 합니다. 교회 일을 하는 사역자들에게 가장 큰 선물은 알아주는 겁니다. 알아주는 것보다 더 좋은 대접은 없습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17-18)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브리스가와 아굴라, 모두가 남보다 앞장서서 일하는 일군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그냥 알아주는 겁니다. 알아주라는 말은 “ejpiginwvskete”(에피기노스케테)입니다. 인정하라(recognition -NIV,RSV), acknowledge -KJV))는 뜻입니다. 교회는 사역자들의 노고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일을 잘 했든지 못 했든지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선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인정받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알아줄 때 행복을 느낍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인정받을 때 행복합니다. 결혼하신 여자들만 한 번 따라 해 보세요.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참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매일 남편에게 그렇게 말해보세요. 무척 좋아하고, 행복을 느끼고, 만족할 겁니다. 매일 일찍 집으로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혹시 손에 뭘 사들고 올지도 모릅니다. 아내도 마찬가집니다. 남편에게 인정받는 아내는 가장 행복한 아내입니다. 남자들만 한번 따라 하십시오. “당신은 정말 예쁜 아내입니다! 나 같은 사람 만나서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가끔 이런 말 한 마디씩만 한다면 크게 감격할 겁니다.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인정받는 자녀는 행복합니다. 공부만 강요하지 마세요. 공부만 가지고 판단하면 공부 못하는 사람은 존재 가치도 없는 사람인줄 알아요. 저희 집 애들이 어렸을 적에 아내가 가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희들이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 줄 아니?” “아빠는 너희들 때문에 너무 너무 행복해 하신단다.”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말로 해 주세요. 대개의 부모들, 특히 아버지들은 자녀들이 강하게 자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웬만큼 잘하지 않으면 칭찬에 인색합니다. 평균 90점을 맞아 와도 좋은 기색이 없습니다. “야, 95점 이상 맞을 수 있는데 왜 95점이냐?” 이런 부모들에게 자녀들은 오해합니다. “우리 부모는 나를 사랑하지 않나 보다. 혹시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는 아닐까?” 사람은 인정받을 때 행복합니다. 남녀노소 마찬가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세요. 말로 해도 좋고 이벤트를 벌여도 좋습니다. “펄떡이는 물고기처럼”이란 책이 있습니다. 아주 얇은 책인데 경영자들이나 중견급 간부들에게 많이 읽히는 좋은 책입니다. 주인공은 메리 제인이라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갑자기 남편을 잃고 두 아이와 함께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금융회사의 중견 간부로 승진을 했지만 그가 맡은 부서는 형편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우연히 로니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로니는 제인에게 시애틀의 파이크 플레이스 어시장에 가보라고 합니다. 평범한 어시장인데 거기에는 모든 일이 활기 넘치게 벌어집니다. 고기를 운반하는 사람들은 마치 농구 선수가 공을 던지듯이 멋진 동작으로 고기를 던지고 받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재미있어 하도록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칩니다. 그 어시장의 하이라이트는 그 날의 주인공을 뽑는 이벤트입니다. 평범한 손님들 중에 그 날의 주인공을 뽑습니다. 예를 들면 그 날이 생일인 사람이라든지, 노란색 모자를 쓴 사람이라든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주인공으로 선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높이 치켜세우고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축하해줍니다. 만일 그 사람이 평생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다면 그 날 만큼은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교회는 드러난 봉사자보다 숨은 봉사자들이 많습니다. 진실한 봉사자들은 대개 주님의 뜻을 따라서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정받지 않아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는 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먼저 마음에서 인정하세요. 그 다음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십시오. 저는 저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 숨어서 봉사하고, 서로 인정하고 알아주는 데서 강하게 뭉쳐집니다.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또 한 가지 비결입니다.
서로 문안하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서로 문안하라고 합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19-21)
바울의 편지를 보면 전후에 항상 문안의 말씀들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에도 여러 사람들을 향한 문안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란 에베소,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등에 있는 교회들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로마에서 난 유대인 부부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41-54)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에 와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에 함께 했고, 바울의 전도 여행에 함께 했습니다.(행18:18,26) 고린도서를 쓸 당시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있었고,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은 후에 로마에 가서 전도했고(롬16:3), 목회 서신 기록 당시에는 다시 에베소에 있었습니다.(딤후4:19) 그의 집에는 작은 가정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인들이 지금 고린도 교인들에게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의 모든 형제들과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도 친필로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 문안하는 공동체입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당시 중동 지방에서는 서로 입 맞추면서 문안하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습니다. 그 관습이 초대 교회의 관습이 되었습니다.(롬16:16,고전16:20,고후13:12,살전5:26,벧전5:14) 13세기에 이르러 서방교회에서는 이 관습이 폐지되었습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모르는 남녀가 서로 붙잡고 입맞추면 이상하게 여기잖아요?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지금도 이 풍속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무튼지 교회원들은 항상 서로에게 문안해야 합니다.
문안이란 관심을 의미합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관심을 가지세요. 현대인에게 가장 큰 불행은 바로 무관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요. 옆에서 사람이 굶든지 죽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독한 고독감을 느낍니다. 이런 고독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미국에서는 멘토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멘토링(mentoring)이란 다른 사람에게 멘토(mentor)가 되어주는 일입니다. 멘토란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우스가 원정을 떠나면서 자기 아들의 맡겼던 친구의 이름입니다. 그는 10년이 넘게 오디세우스 집안과 아들을 지혜롭게 잘 보살폈습니다. 거기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조언해 주는 사람에게 멘토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우리 평생에 가장 큰 멘토는 물론 부모나 가족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멘토가 되어줄 부모가 가족이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신앙 지도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을 키워주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다양한 멘토들입니다. 구역장, 교사, 성가대원, 전도회 임원들, 각종 그룹 모임, 같은 구역원 등등. 모든 교인들은 서로에게 멘토 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픈 사람은 없는지? 고생하는 사람은 없는지? 고민이나 걱정에 빠진 사람은 없는지? 신앙이 거꾸로 가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서로 관심을 갖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주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문안을 해야 합니다. 다 함께 해 봅시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How are you?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 성도들끼리 이런 인사를 한다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이 인사 한 마디만으로도 교회에 속한 보람을 느낄 겁니다. 항상 서로 문안하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상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공동체 속에 임하여 계십니다. 우리는 교회공동체 속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립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1)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좋은 사역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그 사역자들과 어떻게 연합할 것인지 말씀드렸습니다.
좋은 사역자는 섬기기로 작정한 사역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을 채워주는 사역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역자입니다.
이런 사역자들과 연합하기 위해, 첫째로 사역자들에게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둘째로, 사역자들의 노고를 알아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서로 문안해야 합니다. 좋은 일군들과 함께 행복한 교회 공동체 생활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 - 큰 별을 만든 작은 별들(4)
고전16장 15~18절 / 김명혁목사
오늘은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19번 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삼 주 동안 큰 별 사도 바울을 만든 작은 별들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 대해서 말씀 드렸고 바울의 형제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말씀 드렸고 바울의 아들 디모데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저들은 모두 사도 바울에게 큰 위로와 큰 기쁨이 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들의 격려와 도움 때문에, 저들의 수고와 희생 때문에 사도 바울은 기쁨을 가지고 생명을 다 바쳐 주님을 힘있게 증거할 수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들 때문에 바울 별이 하늘에서 더욱 찬란하게 더욱 기쁘게 빛날 수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자식들이 착하면 부모의 얼굴이 환해지듯이 동역자와 형제와 아들이 착했기 때문에 바울의 얼굴이 환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큰 별 사도 바울을 빛나게 만든 작은 별들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 드릴 작은 별들은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 별들입니다. 이름이 좀 어렵지만 이들 세 사람은 사도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고 큰 기쁨이 되었고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제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스데바나는 아가야의 첫 열매였습니다.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의 첫 열매요.” 아가야는 희랍의 남부 지역입니다. 희랍은 북부 마게도냐와 남부 아가야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가야는 희랍의 남부 지역이었습니다. 고린도가 아가야의 수도였습니다. 바울이 북부 마게도냐 지역의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전도하다가 남부 아가야 지역의 아덴과 고린도에 와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덴과 고린도에서는 전도의 열매가 별로 없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반응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속이 좀 상했습니다. 그런데 첫 열매가 생겼습니다. 아가야 지역에서 첫 열매가 맺혔습니다. 믿음의 첫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 첫 열매가 스데바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스데바나와 그 집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치 마게도냐의 첫 열매였던 루디아와 그 집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처럼 아가야의 첫 열매인 스데바나와 그 집에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내가 또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고전1:16). 제가 영안교회와 강변교회를 시작할 때 영안교회에서는 김선희씨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강변교회에서는 조춘국씨와 조원자씨와 몇몇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조원자씨는 강변교회가 현대아파트에서 첫 예배를 드릴 때 개업을 축하하기 위해서 남편과 함께 예배에 참석했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입니다. 스데바나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처음으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아가야 사람들 중에 첫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스데바나를 가리켜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지칭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매는 성숙을 의미하고 결실을 의미하고 완성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열심이 대단한데 곧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꽃은 화려하게 피는데 조만간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쭉정이로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음의 열매도 사랑의 열매도 소망의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도와 예배의 열매도 구제와 봉사의 열매도 교제와 화평의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일 저녁 예배나 수요일 저녁 예배도 참석하지 않다가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은혜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꽃은 화려한 것 같은 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바나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열매를 맺었고 기도와 예배의 열매, 사랑과 봉사의 열매, 그리고 교제와 화평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아마 스데바나가 루디아처럼 또는 브리스길라처럼 자기의 집을 교회로 내 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스데바나는 봉헌의 열매까지 맺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기쁨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고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데바나와 그의 집은 아가야 지역에서 맺힌 첫 ‘열매’라고 기뻐하며 언급했습니다.
둘째, 스데바나는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도가 성숙하는 목적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성도가 열매를 맺는 목적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한 가지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교사로 목사로 세움을 받는 목적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섬기는 일입니다. 그것은 봉사입니다. 엡4:11,12을 읽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세우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존 스토트 박사는 ‘온전케 하여’라고 읽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봉사의 일, 섬기는 일이 성도의 삶의 목적이고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고 우리들의 삶의 목적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여기 섬기는 자란 본래 식탁에서 시중드는 웨이터를 말합니다. 여기 섬기는 자란 예수님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자를 말합니다. 입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손과 발로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하며 수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데바나와 몇몇 사람들은 일하며 수고했다고 했습니다.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라고 했습니다. 봉사는 눈으로 구경하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일하며 수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손으로 전도 편지를 쓰고 손으로 종일 음식을 만들어 바자회를 준비하고 발로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찾아가서 돌보는 것을 말합니다. 수고가 없는 봉사는 봉사가 아닙니다.
한경직 목사님과 영락교회가 가장 힘써 한 일은 봉사입니다. 영락교회의 권사님들이 가장 힘써 한 일은 봉사하는 일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슬픔을 당한 자들을 발로 찾아가서 손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건네 주며 가슴으로 위로하는 일을 신의주 제2교회와 영락교회가 가장 힘써 했습니다. 그런데 아가야의 첫 열매인 스데바나가 섬기는 일을 힘써 했습니다. “성도 섬기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일하며 수고”했다고 했습니다. 섬김이 성도들에게 국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성도 섬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권사님들이 우선적으로 교회의 성도들을 돌보며 섬기는 일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웃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섬겨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강변교회는 강변교회의 이름으로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장애인도 섬기고 노숙자도 섬기고 외국인 노동자도 섬기고 조선족도 섬기고 고려인도 섬기고 북한 사람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봉사를 하되 한경직 목사님과 영락교회처럼 자기는 숨고 교회 중심적으로 예수님만을 나타내며 봉사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를 나타내며 봉사하다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바나는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바나는 일하며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바나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것을 바라볼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은 한 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셋째,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는 바울의 마음을 시원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가야의 첫 열매인 스데바나가 에베소에 머물고 있던 사도 바울을 찾아 왔습니다. 스데바나는 믿음의 형제들인 브두나도와 아가이고를 데리고 사도 바울에게로 갔습니다. 사도 바울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인색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하지 못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사랑도 부족했고 교제도 부족했고 구제도 부족했고 봉사도 부족했고 헌신도 부족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세 사람이 사도 바울을 찾아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필요했던 옷을 가지고 왔는지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왔는지 책을 가지고 왔는지 무슨 선물을 가지고 왔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사도 바울이 궁금해 할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식도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저들을 만난 사도 바울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내가 저희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의 온 것 자체가 사도 바울에게 기쁨이었습니다. 지난 주일 저녁 성도들이 모두 예배 드리러 오기를 기다렸지만 특별히 한 부부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오지 않았습니다. 수요일 저녁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는 성도들이 찾아오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너는 어서 속이 내게로 오라”고 편지하기도 했습니다. 바울도 기다리고 하나님도 기다리고 담임 목사도 기다립니다.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가 사도 바울을 찾아왔을 때 바울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저희는 고린도 교회의 부족한 것을 보충했습니다.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아마 사도 바울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함께 기도도 하고 함께 전도도 하고 함께 봉사도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시중 들며 섬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시원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을 즐겁게 했고 힘이 솟아나게 했다는 말입니다. 베다니의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가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기쁘게 했듯이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가 바울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기쁘게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괴롭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는 사도 바울의 마음 뿐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도 시원케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바울은 이기적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알아주라고 분부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까지 분부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자들에게 복종하라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 우리 교회 구역장들 중에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와 이웃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 그리고 교역자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권면했고 이런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와 결론은 이기적이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를 본 받고 알아주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방관자와 비난자가 되지 말고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를 본 받고 저들처럼 되고 그리고 저들을 알아주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사도 바울을 기쁘게 하고 시원케 한 세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 저들은 열매를 맺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저들은 봉사하기로 장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 저들은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시원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는 큰 별 바울을 보다 밝고 찬란하게 빛나게 만든 작은 별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열매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강변의 첫 열매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강변의 봉사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교역자들과 농어촌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스데바나와 브두나도와 아가이고 같은 작은 별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도곡동의 밤 하늘을 밝게 빛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가야의 첫 열매
고전16장 15절 ~ 18절 / 지용수목사
기독교는 금식만 하는 종교, 고난만 감수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과 기쁨과 즐거움과 축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기쁨의 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절에 말씀하십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Finally, my brothers, rejoice in the Lord!)』
빌립보서 4장 4절에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요한일서 1장 4절에도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시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18절에도 『항상 기뻐하라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19,20,21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기쁨이 넘쳐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도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쁨이 넘쳐흐르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가슴에 기쁨이 충만할 때 먼저 행복합니다. 마음에 즐거움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즐거움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몸도 건강합니다. 또 얼굴이 빛나고 얼굴에 빛이 나니 전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은 감사할 때 솟아나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뚜껑을 여는 것은 감사입니다. 감사와 기쁨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제 그림자는 1초도 저를 떠나 있지 않습니다. 제 평생 제 그림자는 저와 동행합니다. 이처럼 즐거움과 감사, 기쁨과 감사는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불평불만이 있는데, 기쁘겠습니까? 기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억울한 마음이 있는데, 기쁘겠습니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감사하다. 감사하다.’ 할 때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신비롭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은 아예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연도 신비롭습니다. 사과나무는 아담 때도 사과를 맺었고, 아브라함 때나 솔로몬 때도 사과를 맺었고, 지금도 오직 사과만 맺습니다. 사과나무는 아르헨티나에, 영국에, 북한에, 덴마크에, 일본에, 어디에 심어도 사과만 맺습니다.
이같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한국에 살든 미국에 살든 스위스에 살든 어디에 살든 우리 입의 말도 감사, 우리 생활도 감사이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사노라면 실제로 좋은 일이 많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많습니다.
지난 주일 낮에 한 점잖은 어르신이 처음으로 교회에 오셔서 등록을 하셨는데, 밤에도 오셨습니다. 오늘도 오셨습니다. 오늘 낮에 예배를 드리고 나가시면서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목사님, 밤에 또 오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밤 예배에 나오지 않는 헌(舊) 신자보다 그 새(新) 신자가 낫다는 생각이 들고, 늦게 나온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루를 믿어도 좋은 일이 많습니다. 아이들에게나 가족에게 좋은 일이 많습니다.
며칠 전에는 한 구역장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구역에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이 있었는데, 그 남편이 얼마나 심한 골초인지 간과 폐가 거의 다 상했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남편이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더니 담배를 딱 끊었답니다. 갑자기 혈색이 좋아져 병원에 가서 체크를 하니 폐가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면 이렇게 좋은 일이 많은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해야 됩니다.
그리고 감사절기 같은 때는 특별히 계획해서 정성을 쏟아 감사를 크게 해야 됩니다.
레위기 23장 39, 4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너희가 토지 소산을 거두기를 마치거든 ……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 할 것이라』
Rejoice before the Lord your God for seven days. 칠 일간 하나님 앞에서 막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감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그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을 드리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바로 감사절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항상 좋은 일만 옵니까? 아닙니다. 때로는 좋지 않은 일이 옵니다. 항상 칭찬만 듣습니까? 아닙니다. 억울한 욕도 듣습니다. 항상 성공만 합니까? 아닙니다. 실패도 합니다. 언제나 큰 집으로만 이사를 갑니까? 아닙니다. 큰 집에서 셋방으로 이사갈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건강합니까? 아닙니다. 병원에도 가고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 모든 문제에서 구원해 주시고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3장 17절, 18절에 말씀하십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할렐루야!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풍성한 것보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가득한 것보다, 감람나무에 열매가 가득한 것보다, 밭에 식물이 가득한 것보다, 우리에 양이 가득한 것보다, 외양간에 소가 가득한 것보다 하나님이 더 귀한 복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계시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합당한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수고했는데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텅 빈 그물, 텅 빈 배, 피곤한 몸뿐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계시니 얼마 뒤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배가 물에 잠길 것 같은 만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먹기를 원하는 사람이 빈들에 오천 명이나 있는데, 떡은 다섯 개뿐입니다. 한 사람밖에 먹을 수 없는 양인데, 예수님께서 계시니 결국은 오천 명이 배 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장군이었던 다윗이 먹을 것도 없는 거지 신세가 된 적이 있습니다. 배가 고파도 먹을 빵이 없어 교회의 제사장에게 가서 “떡 좀 주세요. 먹을 것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 거지 생활을 10년이 넘도록 했습니다. 10년간 집 없이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피난을 가다가 동굴이 없으면 그냥 나무 밑에서 비가 오면 비를 맞고, 찬바람이 불면 찬바람을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옆에 계시니 굶어 죽지 않고 살고, 낙심하지도 자살하지도 않았습니다.
독일의 한 교수는 “인생이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남기고 자살했습니다. 최고의 지성인인데도, 박사이고 인텔리이며 똑똑한 사람인데도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해 자살한 것입니다. 연구실에서, 대학에서, 국회 의사당에서, 회사에서 인생의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답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이 답을 모르니 교수도 자살하고, 회사 사장도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답을 갖고 계심을 아니 10년간 집 없이 도망자로 살아도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끈질기게 버티어 나갔습니다. 결국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보통 왕이 아닌 위대한, 빛나는 왕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 그가 고백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편 16:1) 할렐루야!
사실 다윗이 10년간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살았지만 살았습니다. 더구나 그가 보좌에 턱 앉아 있으니 웬 축복입니까? 그래서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everything I need.)』할렐루야!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가난해도 예수님께서 계시면, 병들어도 예수님께서 계시면, 풍랑을 만나도 예수님께서 계시면 승리는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아주 의롭고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정적들에게 큰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래서 사자 굴에 들어갑니다. 그가 정적들의 덫에 걸리게 된 것은 기도하는 일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기도한 것 때문에 사자 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억울하게 몰아 부친 그 정적들에게 저주를 퍼붓지도 않습니다. 왕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또 의롭고 정직하고 바르게 살며 기도하고 산 자신을 사자 굴에 집어넣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있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다니엘서 6장 10절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할렐루야!
감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실하고 의롭게 살았지만 얻어진 것이 사자 굴인데 무엇이 감사합니까? 만일 제가 그랬다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따졌을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감사만 했습니다.
결국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사자들이 그를 잡아먹지 않습니다. 영화에 보면 사자들이 외로운 다니엘의 친구가 되어 주고, 추위에 떠는 다니엘을 사자 털로 감싸줍니다. 그래서 다음 날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올라오고 본색이 드러난 그의 정적들이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들이 공중에서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사자들이 그들을 찢어서 먹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동안 다니엘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했던 정적들이 다 없어져 다니엘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감사하면 사자 굴에서도 사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승리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성공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잘 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모든 것이 자기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신비롭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가면서도 감사하는데,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사자 굴보다 더 어렵습니까? 그리고 설령 죽는다 해도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영혼은 바로 천국으로 가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탈무드에 보면, “한 다리가 부러졌거든 두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것으로 감사해라. 두 다리가 부러졌거든 목이 무사한 것으로 감사해라. 목이 부러졌거든 천국가게 되었으니 더 크게 감사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잘 되어도 저렇게 잘 되어도, 이리 넘어져도 저리 넘어져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할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께도 또 감사할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어머니 복이 있습니다. 귀하신 어머니, 고마우신 어머니를 모시고 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거짓말을 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고, 양심에 어긋난 일을 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고, 기도 쉬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께 욕이 될까 봐 물건을 살 때 돈을 달라는 대로 다 주고 사시며, 길 가다가 어렵게 장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별 소용이 없는 물건이라도 안타까우셔서 그냥 사오십니다. 그리고 이야기 보따리가 어찌나 큰지, 어디에서 그렇게 많이 입력하셨는지, 구수한 이야기를 끝없이 해 주셔서 제가 이렇게 설교하며 삽니다. 지난 금요일에도 깜짝 놀랄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육이오 직후 제가 갓난아기였을 때, 저를 업고 외가로 가는 도중 산길을 가시던 어머니께서 다리가 아프고 허리도 아프셔서 저를 내려놓고 좀 쉬고 싶으셨답니다. 마침 길 가장자리에 쇠로 된 둥근 것이 있어서 저를 거기에 내려놓으려고 포대기를 푸는데 뒤따라 오시던 아주머니께서 “아기 엄마, 큰일 납니다. 그건 지룁니다. 지뢰!”라고 고함을 지르시더랍니다. 어머니께서는 그것이 지뢰인 줄을 모르고 저를 거기에 내려놓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거기에 저를 내려놓으셨다면 지뢰가 ‘펑’하고 터졌을 것이고 저도 어머니도 끝났을 것입니다. 뒤따라 오시던 아주머니 덕분에 저도 어머니도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셨을 그 아주머니를 찾을 수만 있다면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숨쉬며 사는 것이 다 은혜입니다. 그리고 죽어도 천국에 가니 우리는 감사할 이유밖에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언제 어디에서나 무슨 일을 당해도 감사로 승리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내가 열심히 살아서 내 식구를 잘 먹이고 잘 입히고 교육을 잘 시키는 것도 중합니다. 남의 신세를 지지 않고 내 식구를 내가 책임지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촌, 육촌, 팔촌도 돕고, 친구와 이웃도 돕는 더 힘있는 자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나 혼자 감사하는 것도 중합니다. 그러나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감사하게 된다면, 나를 접한 모든 사람이 감사한다면 이 얼마나 감사의 능력이 있는 자이겠습니까?
수준 높은 감사, 능력 있는 감사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감사의 능력이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바나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스데바나는 사람들에게 정말 큰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를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바나가 그의 동료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에베소에 들렀을 때 바울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삼십 권의 성경 중 어떤 성경에는 ‘그것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It was great pleasure to me).’ 또 어떤 성경에는 ‘내게 행복이었다(I am happy).’ 또 어떤 성경에는 ‘나는 너무 기뻤다(I am rejoice).'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데바나가 온 것이 너무 기뻐서 그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스데바나를 생각하면 기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스데바나는 누구이기에, 어떤 인물이기에 그렇게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감사의 능력이 있는 자가 되었습니까?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아가야는 큰 주(州)입니다. 그 안에 고린도를 비롯한 도시들이 많은데, 그 큰 아가야 주에서 제일 먼저 예수를 믿은 사람이 스데바나였습니다. 그가 바로 아가야 주에서 하나님 앞에 첫 열매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믿자마자 그의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윤치영씨가 미국 유학 중에 말로만 듣고 귓등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을 알고는 감격하여 그의 온 집안에 복음을 전해서 윤보선 대통령 집안이 몽땅 예수님을 믿게 되었듯이, 스데바나도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에 가족들을 다 믿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이 왜 다 예수님을 믿었을까요? 그가 가족들에게 신뢰받고 존경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먼저 자기 가정에서부터 존경을 받아야 됩니다. 자기 가족에게 신뢰를 받아야 됩니다. 아내에게 존경받고, 남편에게 신뢰받고, 아이들에게 존경받고, 형제에게 인정받는 크리스천이 참 아름다운 크리스천인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우리 구역에서 수고하시는 구역 지도자님들을 모시고 한 성에 다녀왔습니다. 우리나라에 그런 큰 성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두꺼운 돌로 쌓아놓은 성인데, 높이가 6~7m, 폭이 5m 정도 되었습니다. 망대가 있는 곳은 폭이 15m 가까이 되었습니다. 기생 라합이 성벽에 집을 지어놓고 살았다는 말이 얼마든지 이해되는 큰 성이었습니다. 장로님들과 운동 삼아 그 성 위를 돌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 성을 이리저리 살피다 귀한 떡을 파는 한 아주머니를 보았습니다. 그냥 떡이 아니라 찰밥을 절구통에 찧어서 만든 떡을 콩고물에 만 인절미였습니다. 제가 그 귀한 떡을 먹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5천 원어치를 샀습니다. 아주머니가 그 떡을 먹기 좋게 써시는 것을 보고 있으니 얼마나 보암직하고 먹음직했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 교회 전도대장인 배목사님이 그 아주머니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접근하여 “아주머니, 수고가 많으십니다.”라고 인사를 하시니, 아주머니가 “썩을 놈의 신랑을 잘못 만나 가지고 이 고생이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남편이 썩을 놈의 신랑이면 자기는 썩을 놈의 아내인 것입니다. 그분에게 우리 목사님이 끝까지 전도를 하셨습니다.
만일 스데바나가 자기 아내에게 썩을 놈의 신랑 같은 대접을 받았으면 그가 믿는 예수님을 그의 아내가 믿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가정에서 귀히 여김 받는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스데바나는 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할 때도 작정을 하고 했습니다.
무슨 작정을 했습니까? 본문 15절에 보면,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교회 안에서 섬기는 자가 귀족입니다. 잘 섬기는 사람, 겸손한 사람이 장로님이 되고 안수집사님이 되고 권사님이 됩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는 사람, 난 체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세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는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은 종, 하인(servant)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바나는 큰 부자이고 귀족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부족함을 다 채워주는 재벌이었습니다. 본문 17절에 『너희의 부족함을 보충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꼭 물질적인 것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채워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나는 섬기며 살겠다.”라고 작정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코흘리개든, 무식한 사람이든 다 섬겼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 사람을 싫어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을 닮은 생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천국에서 이 땅에 오실 때 “여봐라! 하늘의 왕이 왔다.”하시며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나는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러 간다. 내가 그들의 발을 씻겨 준다. 내가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진다.”라고 작정하고 오셨습니다.
본문의 스데바나가 바로 주님을 닮은 것입니다.
지금 서울 시장인 이명박 장로님도 교회에서 차량안내를 한 지 십 년이 넘었습니다. 국회의원이 되고 서울 시장이 되어도 안내를 하는 것입니다. 모 부대의 사령관님은 교회에서 교인들의 신발을 정리하기로 작정하고 신발 정리를 한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도 오늘이 다시 한 번 섬기는 자가 되도록 작정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고 많은 사람에게 감사를 일으키는 일인 것입니다. 섬기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스데바나는 바울의 마음과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습니다.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예수의 사람은 상대방에게 스트레스를 주면 안 됩니다.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시원하게,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시원하게, 여러분은 제 마음을, 저는 여러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바나를 생각하면 교인들의 마음이 시원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골치 아픈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고,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불안합니다. 그런데 스데바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스데바나가 그들을 시원하게 했다는 말의 원어는 ‘힘이 나게 했다(Refreshment)’입니다. 스데바나는 바울에게 힘이 나게, 교인들에게 힘이 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힘을 뽑아가고 용기를 빼앗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을 잘 하다가도 그 사람을 보면 힘이 빠져서 일하기가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보면 힘이 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기업주들이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일자리가 부족하여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지 못합니다. 근로자들이 데모하고 경영까지 하겠다고 하니, 어떻게 투자하겠습니까? 외국 기업들도 떠나가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라가 계속해서 어지러우면 외국 기업들이 떠나가고, 우리 기업주들이 투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라가 망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회사원이라면 경영주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 경영주가 사업을 잘 하도록 힘을 돋우어 주는 성실하고 희생적인 밀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회사를 키워야 되는 것입니다.
처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직업이 너를 돋보이게 못하거든 네가 그 직업을 돋보이게 하라.”
회사가 여러분을 영광스럽게 못하면 여러분이 회사를 위해 일하여 회사를 영광스럽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경영주는 경영주대로 사원들이 시원하게 일하도록 해 주어야 하지만, 그러나 근로자는 근로자대로 경영주가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오늘 기도하신 분을 생각하면 항상 기쁩니다. 그리고 참 고맙습니다. 사년 전쯤, 집사님이 다리를 다치셨습니다. 그때 제가 집사님의 어린 아들에게 “얘야, 아빠가 다쳤는데 아빠를 위해 기도해야지.”라고 했더니, 그 아이가 “아빠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목사님을 위해서도 매일 기도하는데…….”라고 했습니다.
“너, 나를 위해 매일 기도해?”
“예, 매일 기도해요.”
지금도 그 아이를 만나면 제가 때때로 묻습니다.
“너 지금도 나를 위해 매일 기도하니?”
“예, 매일 해요.”
저는 그 아이를 보면 아주 기쁩니다. 집사님을 보아도 기쁩니다. 그 가족들을 보면 기쁩니다. 그 집사님 부부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서너 살 먹은 코흘리개 아이들이 저를 위해 그렇게 기도를 하겠습니까?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목사님을 위해 매일 기도하라고 교육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기쁨을 주는 귀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기름 부음을 받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누구든지 주님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술은 우리를 아주 어렵게 합니다.
제가 어떤 글을 읽다가 한참 웃었습니다.
한 영감님이 자기가 기르는 암소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암소를 팔아 가지고 황소를 사려고 시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영감님의 사돈은 자기 집 황소를 팔고 송아지를 잘 낳는 암소를 사려고 시장에 갔습니다. 그래서 두 사돈이 시장에서 만났습니다.
“어, 사돈. 웬 일이세요?”
“암소를 팔고 황소를 사려고 나왔습니다.”
“그래요? 저는 황소를 팔고 암소를 사려고 나왔는데, 그러면 우리 팔고 살 것 없이 우리끼리 바꿉시다.”
그래서 사돈끼리 암소와 황소를 바꾸었습니다. 사돈끼리 만나서 쉽게 흥정했지, 중매인에게 줄 돈도 나가지 않았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술이나 한 잔 하기로 하고 술집으로 갔습니다. 술을 마시다 보니 술독에 빠질 만큼 마셨습니다. 마시고 나와 보니 해가 졌습니다.
“어, 큰일 났네. 사돈, 어서 갑시다.”
술이 취해 비틀거려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어서 두 영감님이 각자의 소를 타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소가 서로 바뀌었으니 어디로 갔겠습니까? 서로 자기 사돈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날은 달도 없어 너무 캄캄했고, 기름이 떨어져 등도 켜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약주 냄새! 술독에 빠지셨구먼.”
부인이 술에 취한 영감님을 부축하여 방에 들이고 옷을 벗긴 후 함께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세상에! 사돈 영감이 누워 있는 것입니다. 사돈 영감과 함께 잔 것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합니까?
“사돈 어른, 이 일을 어떻게 합니까?”
사돈 영감이 눈을 떴습니다. 세상에! 안사돈과 함께 잠을 잤습니다.
“아이고, 내 집에도 이런 변이 일어났을 텐데, 큰일 났구먼. 이 일을 어떻게 하나?”
세상의 술은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령의 술, 하나님의 술은 마실수록 점잖아지고, 귀해지고, 아름다워지고, 매력있게 됩니다. 할렐루야!
에베소서 5장 18절에 말씀하십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별 사람 없습니다. 스데바나나 우리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도 스데바나처럼 하나님의 고귀한 사람이 되고, 가정에서도 귀한 가족이 되고, 교회에서도 귀한 일원이 되고, 회사에서도 귀한 사람이 되고, 누구에게나 기쁨과 즐거움과 시원함을 주고,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매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알아주어야 할 사람
고전16장 15~18절 / 김광일목사
1920년도 평양에 백선행(白善行)이라는 여인이 아들을 낳고 16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측은히 여겨주었으며 교회에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그녀는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고 평생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선한 일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녀는 바느질을 하는 동안 성경을 외우고 즐겁게 찬송을 부르며 일을 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가내공장을 차릴 수 있을 만큼 남부럽지 않게 돈도 모았습니다. 어느 날, 남의 산자락에 묻혀있던 시어머니와 남편의 묘를 이장할 생각에 2백냥 주고 야산 하나를 사게 되었습니다. 막상 이장을 하려고 땅을 파보니 돌투성이었습니다. 겨우 묘를 이장하고 난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내가 손해 보길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 샀다면 어쩔뻔했노. 나 하나 마음 상했으니 그것으로 됐구먼” 하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 후 동네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백 과부네 망했네! 돈 2백냥으로 돌산을 샀으니 이제 망했네!” 그러나 백집사는 묵묵히 일만 했습니다. 어느 날 일본인들이 도청 직원을 앞세워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시멘트 공장을 차리려는 사람들과 함께 왔는데 지질조사를 하던 중 백집사 산이 온통 석회석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천냥을 줄 테니 산을 팔라는 것입니다. 백집사는 깜짝 놀라며 2백냥 주고 산 것도 잘못된 거래였는데 천 냥을 주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거절하였습니다. 얼마 후 백집사를 찾아온 그들은 산의 돌이 석회석이며 석회석으로 시멘트를 만들면 조선 경제를 위해서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때서야 백집사는 이해하고 2만냥에 산을 팔았습니다. 그 돈으로 대동강에 백선교를 세우고, 평양에 3층 규모의 공공회관을 건립했습니다. 백 집사는 1925년 전 재산을 빈민구제 단체에 기부하여 당시 조선총독부가 표창을 수여하려 했지만 거절하였습니다. 후에 그녀의 장례를 조선의 첫 사회장으로 지냈으며 평양에는 백선행 기념관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북한 조선영화수출입사가 뉴질랜드 현지 한 단체의 지원을 받아 기독교 영화 ‘백선행’ 을 제작키로 확정했다고 합니다. 백선행 집사는 북한체제도 알아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알아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알아주는 사람이 됨은 더욱 더 귀한 일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에베소 전도 때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대부분 바울을 근심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분쟁하였습니다. 우상주의와 극단적 신비주의, 부활신앙을 부인하는 세속주의로 복잡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하였습니다. 교회로 인해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중에 세 사람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왔습니다. 이들이 바울과 성도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행하였기에 알아주라고 하였습니까?
첫째로 함께 일하며 수고하니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각 지방의 청년들이 영장을 받은 후 도시로 집결하여 기차를 타고 훈련소로 갔습니다. 국민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장정들을 태운 기차는 주로 밤늦게 떠났습니다. 워싱턴에도 밤마다 유니온 기차 정거장에 수백 명의 장정들이 몰려들었고 시민들이 그들의 편의를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시민들 가운데 밤늦게까지 다리를 절면서 뜨거운 코코아 잔을 들고 장정들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임시로 마련된 주방에서 친히 코코아를 끓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장정이 자세히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루즈벨트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었습니다. “각하. 루즈벨트 대통령이 아니십니까.” 루즈벨트는 소아마비로 자유스런 몸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육체의 불편을 무릅쓰고 밤마다 정거장에 나와 떠나는 장정들에게 코코아를 들고 다니며 봉사하였던 것입니다. 대통령이 친히 정거장에 나와 따라주는 코코아를 마신 젊은이들의 사기는 대단했습니다. 함께 수고함은 사람들의 마음에 힘과 용기를 불어 넣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스데바나가 회심한 후 아가야에 돌아와 가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스데바나 가족들은 병든 자나 가난한 자를 도왔습니다. 집을 예배 장소로 내어놓았습니다. 또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일에 헌금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스데바나의 가족들은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습니다. 명령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격하여 온 가족과 함께 수고하며 일한 것입니다. 기쁨과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자란 소유의 크기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크기에 의해 평가됩니다. 나눔의 질에 따라 평가되는 것입니다. 스데바나와 같이 신앙으로 살고 함께 일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누구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함께 수고하는 신실한 일꾼들이 되어 하나님이 알아주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부족한 것을 채우니
마더 테레사(Madre Teresa) 수녀는 평생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시기와 질투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유명합니다. 우리 주변에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 병자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누군가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보다 잘사는 사람도 많고, 당신보다 높은 사람도 많고, 당신보다 칭찬받는 사람들이 많은데 혹 그들을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자 테레사는 어린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사는 사람은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으니까요.” 허리를 굽히고 사는 사람은 위를 쳐다보지 않으니까 남이 어떻고, 저가 어떻고 시기 질투할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럴 마음조차 없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니라”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었습니다. 성도들의 물질적 궁핍을 채웠습니다. 믿음의 교훈과 사랑을 채웠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충고와 애정을 대신 전해주었고 바울에게도 고린도 교인들의 애정을 전해줌으로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를 이어주었던 것입니다. 물질과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귀한 것을 드림으로 보충한 것입니다. 교회의 것이나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내 것을 쓰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연약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이런 실수를 범합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열심을 경계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생각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패 이유를 연약한 사람들에게 돌립니다. 그러면서 쉽게 다른 사람을 비난합니다. 정작 자신은 어떤 충고에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이웃을 정죄하고 결국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본회퍼는 진단합니다. 그들은 본래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요구하는 자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사귐의 기초는 열심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쁨을 잃지 않는 사람은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초에 두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나의 부족을 채우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 명예, 힘, 인기, 사회적인 것을 하나님이나 성도들을 이용하여 이루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것을 버리고 다른 이의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합니다. 성도나 이웃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마음을 시원케 하니
미국의 시골학교 선생님이 음악교육을 위해 피아노 한 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갑부였던 포드 자동차 회사의 포드(Ford) 회장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회장님, 학교에 피아노 한 대가 필요합니다.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후 답장이 왔는데 열어보니 단 돈 10센트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실망치 않고 10센트로 땅콩을 사왔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갑부가 피아노를 살 수 있는 돈을 주어야지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야 라며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생님은 사온 땅콩을 학교부지에 심었습니다. 그 해 땅콩을 수확하여 팔았습니다. 이익금 중 얼마를 포드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저축했습니다. 몇 년을 그렇게 했더니 피아노를 살 수 있는 돈이 모아졌습니다. 선생님은 포드 회장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습니다. “회장님의 도움으로 피아노 살돈이 모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답장과 함께 만달러가 송금되어 온 것입니다. 답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미국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기부금을 주면 작다고 투덜대거나 모르는 척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작은 동전의 기부금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이익까지 돌려주시니 제가 감격하였습니다. 여기 만 달러를 드리니 피아노를 사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도움을 청하시면 액수와 상관없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스데바나와 함께 온 형제들이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에게 시원함을 주었습니다. 마음과 정신과 몸과 영혼까지 시원케 하였습니다. 물질과 사랑과 믿음과 정성으로 시원케 하였습니다. 목마르고 답답한 사람들에게 얼음냉수와 같이 시원하게 하였습니다.
남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기보다, 못과 가시처럼 살을 찢고 피를 흘리게 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시원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숨 막히고 답답한 세상을 시원케 만들어야 합니다. 기도와 물질과 사랑과 격려로 남을 시원케 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을 찾아왔던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 세 사람은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 준 사람들이었습니다. 분위기를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신앙적 분위기로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고 계십니다.
교회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자가 아닙니다. 많이 배운 지식인도 아닙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교회가 알아주어야 할 사람들은 바로 교회와 성도들을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부디 임명받은 교회학교 교사들은 함께 수고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것을 채우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누구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하나님에게도 인정받는 복된 교사들과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고전16장 18~18절 / 김우영목사
요절 :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고전16:18)
'알아 주라'는 헬라어 ‘에피기노스케테'는 ‘진가를 충분히 인정하라' ‘정확히 이해하고 도아 주라'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교회가 알아주어야 할 사람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는 사람들'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해 주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가 알아 주어야할 사람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
‘스데바나의 집', 곧 스데바나 가족들은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할 당시 아가야에서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주님을 영접후 성도들을 섬기기로 작정한 사실이며(15절), 바울이 스데바나 가정을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교인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에는 그들이 성도들을 섬기기로 작정한 삶의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성서학자들의 주된 견해는 ‘교회안에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 자기 집을 성도들의 공식 모임을 위한 집회 장소로 내어 놓고 접대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자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병든 자를 돌보며, 자신의 가정과 자기의 것들을 내어놓고 성도들을 섬기는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하십니다. 나눔과 섬김은 하나님 나라의 경제 원리요 동시에 신앙생활의 지침입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12:33)"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간혹 자선 단체라는 이름을 걸고 자기를 살찌우려는 못된자가 있는가 하면, 타인의 소유나 부유한 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선 사업을 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의식이요 발상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선사업이란 내가 부지런히 벌고 절약하여 모은 것,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섬기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참으로 알아주어야 할 인물이 또 있습니다. 로마군대 백부장 고넬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항상 기도했으며, 피정복 민족인 유대인들을 많이 구제했고,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제를 기억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미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부자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부(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중에 하나입니다. 다만 풍요로우면서 이웃과 형제가 궁핍하고 어려움에도 무관심한 것, 다시 말하면 나누지 아니하고 섬기지 않음이 잘못된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책임추궁을 받을 삶입니다. 이의 실예가 바로 부자와 거지 나사로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의 증명은 가난한 자와 병든자를 구제하고 돌보는 실제적인 삶에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요20:28)" “...겉 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요13:4,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섬기는 자의 본이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 성도를 섬기는 사람들을 섬겨야 하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 목사님이 설교만 했다하면 “여러분!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아니한 그런 미지근한 믿음은 지옥행이요"라고 야단을 쳤답니다. 얼마후, 목사님은 교인들의 냉대에 교회를 떠났고, 다른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헌데 이상하게 새로오신 목사님도 전임 목사님과 똑 같은 설교를 계속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그 교회에 새 목사님을 파송한 감독이 궁금하여 방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똑같은 설교에 전임 목사님은 배척을 했으면서 후임 목사님은 존경하더랍니다. 까닭은 전의 목사님은 성도만 그런 것 같이, 그래서 지옥감이 당연한 것처럼 설교하셨는데 지금의 목사님은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함을 괴로워하며 성도들과 같이 고통을 나누는 설교를 하셨고, 강단 밖에선 늘 성도들을 섬기는 생활에 있었습니다.
둘째 :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는 사람들
‘부족한 것(17절)',이는 외적으로는 적은 재산이나 물질적 궁핍, 내적으로는 믿음의 교훈이나 사랑의 나눔을 뜻하며, 본절에서는 후자를 의미합니다.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이들은 살아있는 믿음의 활동과 실제적 모범을 보여준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알아주어야 할 그리스도인은 형제의 부족한 부분을 자기의 부족으로 동일시 하고, 그 부족을 보충해 주고자 힘쓰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의 부족, 모름에서 오는 신앙 생활의 모자람은 지탄이나 비난의 대상이 아닌 채워 주고 가르쳐 주어야 할부분입니다. 성도의 부족함을 보태어 채워 주는 그리스도인들은 영향력 있는 영적 생활의 참 교사요 교회가 인정해야 할 귀한 보배들입니다. 교회는 영육의 부족을 안고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도는 이들의 모자람을 보충해 주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부족을 나의 부족으로 알고 돌보며 보충해 주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합니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 복종하라(16절)" ‘복종하라'는 ‘휘포탓세스데'는 ‘밑에 두다'라는 의미로 ‘순종하다' ‘섬기다'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자를 섬김은 종속이나 굴종, 낮아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돕는 도구가 되어 주는 겸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서로가 서로 하나님의 일을 더 기쁨으로 일 할 수 있도록 알아주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영국에 로버트라는 화학전문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알코올 중독자여서 매일 술에 취해 귀가, 아내와 늘 싸웠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위층에는 목사님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싸우는 소동에 목사님 가족이 밤마다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도가 지나치게 싸우는 소리에 목사님은 불길하여 그의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헌데 로버트가 엽총으로 아내를 겨누고 있었고, 부인 에밀리는 살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남편에게 “죽이라"고 악을 쓰며 달려들고 있었지요 목사님은 급히 로버트와 에밀리 사이에 뛰어 들며 말했습니다. “로버트씨 에밀리는 당신과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또한 에밀리는 주안에서 나의 자매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선 당신의 아내가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하시길 원하십니다. 두분의 이러한 생활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내를 쏘려면 나를 쏘십시오" 잠시 후, 로버트는 엽총을 내려놓고 흐느꼈고, 아내 에밀리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날 밤, 그들은 새로운 사람들로 태어났답니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선 교회는 다른 사람의 부족을 채워 주기 위하여 자신과 자신의 것들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양육하고, 타인의 부족을 보충해 주는 사람을 알아주고 인정함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요주의! 부족함을 보충해 줌은 성도들뿐만 아니라 이웃, 형제, 부부... 모두에게 다 해당됨.
셋째 : 나와 너를 시원케 해 주는 사람들
당시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는 깊은 반목의 골이 패여있었습니다. 까닭은 거짓된 자들이 고린도 교회와 바울을 이간질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에 들어가 사도 바울이 정통 사도급 인물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바울에 속았다고 생각 했고, 바울은 바울대로 그런 고린도 교인들에게 서운함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즉 양쪽이 다 배신감을 가졌습니다. 이 때에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가 중재를 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사도 바울의 참 사도권과 입장을 대변해 주었고, 바울에게는 고린도 교인들이 왜 그랬는지를 이해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이유를 전달 했습니다. 우리네 속담에 ‘불 난데 부채질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요즈음은 ‘불 난데 기름을 붓는다'로 바꾸어야 될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서 어쩌자고 한쪽 말만 듣고 뒤틀린 것을 더 얽히고 설키게 하고, 어찌그리 헐뜯고 긁어대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을 받으려는 것인지 복을 발로 차는 것인지... 요주의! 한 편 말만 듣고 행하지 말라. 성경은 이간질하고 헐뜯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쪽 저쪽을 화해케 하여 양쪽 모두에게 새로운 평안의 만남을 이루어 주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주님의 말씀이 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기 위해 주님의 몸을 찢으신 중재자셨습니다. “중재 역할을 맡은 사람은 사지가 갈기갈기 찢긴다" 터키 속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난 곳의 불을 꺼주어야하고,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주기 위한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제물 되어도 죽지 아니합니다. 에스더는 당시의 규례를 어기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아하수에로 왕앞에 나갔으나(에14:16) 죽지 않고 더 영화롭게 되었답니다.
화해케 하는 자는 복음의 실천자이며 성취자입니다. ‘복음'은 시원케 하는 화해의 복음, 화평의 복음, 사랑의 복음입니다. 시원케 하는 자들은 단절을 연결로, 불신을 신뢰로,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주님의 참사람입니다. 화목의 중재자는 빛의 밝음을 가져다주고, 고통스럽고 답답함에서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알아 줌을 받아야하고, 인정해 줌이 마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화목제물이 되고자 녹아지고, 묻혀지고, 썩어져야 합니다. 참된 중재의 사랑은 너와 너에게, 나와 너에게 화해의 평안을 주며, 행복에 행복을 더해 줍니다. 교회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빛을 발하는 이들을 알아 주고, 인정해야 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
정근두목사 / 고전 16:19-20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읽은 본문 19절에서 20절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 문안하는 부분입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첫 편지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기 바울의 문안에 동참하는 교회들은 어떤 교회입니까?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 - 지금 우리가 소아시아라고 부르는 터키 지역에 산재한 교회들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문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상당히 알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그 가운데 일곱 교회 이름이 나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가 거기에 있는 교회들입니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에 머물면서 우리가 읽은 고린도 전서를 썼습니다(고전16:8). 그래서 에베소를 포함한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 바울과 함께 아가야 지방에 위치한 고린도 교회에 문안하고 있습니다.
왜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 아가야에 있는 고린도 교회에 문안을 할까요? 지리적으로는 큰 바다를 가운데 두고 서로 멀리 덜어져 있는 교회입니다. 둘 다 항구 도시니까 배편의 왕래가 있다손 해도 양 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이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처지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안하는 모습은 서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고린도전서 끝 부분만 아니라 거의 보든 신약 서신서 끝 부분을 보면 상호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깊은 관심을 갖고 서로 문안하는 모습은 초대 교회의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 떨어져 있고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교회들이지만 서로 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상호 관심을 갖고 문안하고 있을까요? 바울이란 동일 사역자를 서로 알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상호간의 문안을 통해 드러나는 깊은 관심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일까요? 교회는 머리된 주님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님을 공유했기에 중요한 관심을 서로 나눕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초대교회 전통에 따라 살펴봅시다. 예배를 시작하며 오늘 우리는 고백했습니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the saints)를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초대교회 상호간의 일상적 문안으로만 볼 수 없는 표현이 나옵니다. 개역개정성경은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고린도교회)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새번역으로 읽어봅시다: “아시아의 교회가 여러분-고린도교회-에게 문안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 성도들과 함께 주 안에서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문안하고 이 에베소에 있는 모든 형제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와 고린도교회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특별한 문안을 설명하는 열쇠가 사도행전 18장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18장 1-4절을 읽어봅시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 18:1~4)
여기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제 2차 전도여행 중에 있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부부를 만납니다. 이 부부는 성경에 항상 함께 등장하기로 유명합니다.
브리스길라는 브리스가라는 애칭으로 통하기도 하지만 남편과 함께 꼭 나오는 환상의 커플입니다. 부인의 출신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기에 여러 가지 추측이 무성합니다만 남편에 대해서는 소아시아 본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부부되어 만나 어쩌면 살던 곳은 당시 세계의 가장 큰 도시 로마였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사건이 있은 지 20년이 채 안되어 복음이 로마에까지 전달되어 대도시 로마를 뒤흔들었습니다.
복음의 위력이 큰 도시 로마의 기존 질서를 위협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 파들을 싫어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나사렛 예수 파를 어디서든 테러를 하는 일로 인해 로마 시민 생활이 불안하게 되자 황제는 사연을 불문하고(양비론)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글라우디오 황제의 이 명령으로 인해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도 로마를 떠나 아굴라의 고향 아시아로 향하다가 고린도에 도착했고 비슷한 시기에 제 2차 전도 여행 중의 바울도 아덴에서부터 고린도에 도착하므로 서로 만납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본문은 짧게 기술되어 있지만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몇 가지 흥미 있는 발견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어떤 교회는 구역별로 앉듯이 당시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직업이 같은 사람끼리 같은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당시는 직업이 같은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 살았기에 함께 앉았다는 것은 바로 같은 직업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직업교육은 철저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 아들에게 직업 교육을 하지 않는 이는 그에게 도둑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바울 모두 천막 만드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는 세상에서 제일 믿음만한 텐트 메이커를 소개하기를 바울표 텐트라고 했는 기실은 브리스가-아굴라-바울표(AP&P) 텐트입니다.
다소 성 특산 양털로 짠 그들의 텐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품을 생산했으리라고 말합니다. 적당히 부가가치만 올려서 팔아치우는 장사를 이들이 했을 리 없습니다.
다소 産 양털로 만든 텐트는 태양열 아래서도 시원하고 습한 일기에도 따뜻하며 보송보송한 촉감을 주는 환상의 텐트였습니다. 요즈음도 나오기만 한다면 꼭 사서 이번 여름에 선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하여간 이들은 생업이 같은 동업자들입니다. 그러나 아굴라-브리스가 부부와는 달리 바울은 노총각입니다. 그 때 나이가 얼마쯤이었는지 모릅니다만 장가가지 않았으니 노총각임에 틀림없습니다.
땀 흘려 함께 일했을 뿐 아니라 바울은 브리스가 신세를 톡톡히 지고 사는 처지입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빈대 붙어 산 것이 아닙니다. 살기만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일도 함께 했다고 하니 적당히 얹혀사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며 일을 하니” 정당한 하숙비를 지불했는지 모릅니다. 하긴 복음으로 함께 만난 후부터는 하숙비 전면 면제의 특혜를 누렸을 지도 모릅니다.
이들 부부가 로마에서부터 신자였는데 고린도로 추방되어 처음부터 신앙 안에서 만났는지, 아니면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 함께 일하는 틈틈이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되었는지 성경은 밝히지 않습니다.
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즉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에서 두 유대인이 만나고 바울의 강론을 통해 주 안에서 형제가 된 듯도 싶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을 향한 그의 권면이 아굴라-브리스가 부부를 주님의 도(道)로 인도 한 듯도 싶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등장하는 다음 구절로 가 봅시다(행 18:18-23). 주연은 바울이고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는 조연으로 기록된 부분입니다. 어떤 사연인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사업상 이유인지, 복음 때문인지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사역 후에 에베소로 옮겨 오면서 부부도 함께 에베소로 이주를 합니다.
바울은 잠깐 에베소에 머문 후에 곧 떠납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에베소에 머물게 되는데 거기서 저 유명한 전도자 아볼로를 만납니다(행 18:24-28). 알렉산드리아 출신 부흥사 아볼로는 그 명성이 이미 자자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를 들은 브리스길라-아굴라 부부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집회가 끝난 다음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주후 52년 여름의 일입니다. 여름철 과일 포도나 수박을 가져와 대접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신앙의 교제를 나눕니다.
여기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해 줍니다. 어쩌면 그 이름이 먼저 등장한 브리스길라 쪽이 열심히 설명하면 간간히 남편 아볼로가 가들기도 하고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했을 듯도 합니다.
그 후 아가야 지방 - 즉 고린도 교회가 있는 지역으로 아볼로가 가고자 할 때 천거의 편지를 써서 그를 고린도 교회에 파송합니다. 아볼로의 고린도 집회는 큰 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쳤습니다. 그의 회당에서의 변론은 당할 자가 없었고 반대하는 유대인의 말은 여지없이 깨뜨려졌습니다.
그해 가을 바울이 다시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52년 가을 경부터 55년 봄까지 두란노 서원을 중심한 사역이 펼쳐집니다. 보통 사람들이 가게 문을 닫고 쉬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에 두란노 서원을 빌려서 복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3년 여 사역을 통해서 아시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복음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8장 기록 다음에 오는 기록이 오늘 본문입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린도전서 16:19-20)
사도행전 18장의 배경을 기억하면 지금 에베소에 머물고 있는 왜 이들이 고린도 교회에 “간절히” 문안하는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지금 아볼로 브리스가 부부는 에베소에 바울과 함께 머물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 보내는 편지에 그들의 특별한 문안을 함께 보냅니다.
황제의 추방령으로 나그네 되어 지내면서 만난 고린도에서의 성도의 교제는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에 와서 바울의 권면을 통해 처음 복음을 접했다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고 첫 사랑을 나눈 고린도 교회, 그 아름다운 성도간의 교제를 이 부부는 비록 몸은 떠나 있지만 마음은 쉽게 잊을 수 없었습니다.
“주 믿는 형제자매들, 그 몸은 떠나 있으나
주 앞에 기도드릴 곳 다 함께 모일 시은소
내 손과 혀가 굳어도 내 몸에 피가 식어도
나 영영 잊지 못할 곳 은혜의 보좌 시은소 아멘” (209장)라고 노래한 성도의 심정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첫 사랑을 나눈 고린도 교회, 그 교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유대를 갖게 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교회를 갖고 있다면 복된 성도들입니다. 마치 고향을 가진 사람처럼 행복한 사람입니다. 소위 모 교회 - 신앙이 배태되고 성숙한 교회는 어디를 가나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처음에는 바울과 함께 전에는 장막 만드는 업 때문에 함께 했으나 이제는 복음 전파하는 업 때문에 함께 다니며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염려해서 편지 쓸 때 그 애타는 심정이 “간절한” 문안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린도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서 기도했는데 그냥 “문안한다.”고만 하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고전 16장 19절을 보면 아굴라, 브리스가만 바울의 문안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가 또한 그 간절한 문안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아굴라, 브리스가 부부를 통해 거듭거듭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복음이 처음 전해진 상황하며 성도들의 형편이며 지금 봉착한 어려움을 함께 나눈 그 집에 모이는 교회가 이들의 간절한 문안에 함께합니다.
시기적으로 오늘 본문 다음에 이들 부부가 등장하는 본문으로 가 봅시다. 로마서 16장 3-5 상반 절을 읽어봅시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롬16:3-5상)
여기서는 바울의 동역자들로 소개됩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천막 만드는 “생업이 같으므로” 동업자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삶은 새로운 목표와 사명으로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천막 만드는 생업서 사는 이유를 찾는 부부들이 아닙니다. 천막 만드는 생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이들 부부는 바울과 같은 사명을 갖고 사는, 그의 동역자 - 복음을 위해 온 삶을 바치는 부부입니다. 바울을 향한 주 안에서 그들의 사랑은 매우 지극했습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그들의 목까지도 내어 놓았나니” 이런 만남은 참으로 복되고 귀합니다.
복음의 사역을 진전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까지 기꺼이 대신 희생시키려고 드는 사랑의 관계를 가진 바울은 복된 사람입니다.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 역시 목숨까지 대신해도 아까울 것 없는 목회자를 가진 복된 성도들이요 동시에 동역자들로서 그들의 관계는 복된 관계입니다.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마음에 드는 목회자라고 배타적으로 죽고 못 사는 유치한 관계가 아니라 복음 때문에 내놓는 목숨이며, 교회 때문에 그 몸에 채우는 희생이었기에 바울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교회 치고 이들 부부의 사랑과 관심, 보살핌과 후원을 받지 않은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 교회마다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를 부모 사모하듯 사모하며 감사했다고 기록합니다.
로마서 16장 5절 초두를 보면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보낸 편지에도 이들의 집은 교회가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로마서를 보면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다시 돌아와 있습니다. “유대인 추방”이란 황제의 서슬 시퍼런 칙령은 세월과 함께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이제 폐지되어서 유대인들이 하나 둘 로마로 몰려들 때 그들도 처음 살았던 로마로 이주해 갔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살던 곳이 그리워 로마로 옮겨간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6장 5절의 “그의 집에 모이는 교회”의 존재가 무엇 때문에 이들 부부가 로마로 귀환했는지 설명해 줍니다.
바울의 동역자로서 에베소에서 바울의 장기 사역을 위한 터전을 닦은 적이 있지만, 이제는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라면 수천리 길 머다 하지 않고 이주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 세우는 사역(Church planting ministry)을 전문업으로 삼은 바울의 동역자로서 위치가 확고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들 부부의 아름다운 이름이 나오는 성경으로 가 봅시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딤후4:19) 바울의 만년에 임종을 앞두고 쓴 편지입니다.
인생이란 한 순간의 파노라마입니다. 일순간에 지나가는 단막극입니다. 처음 고린도에서 바울과 이들 부부는 젊고 아름다웠을 때 서로 만나 복음을 배우고 복음 안에 교제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에 이들이 등장할 때 그들의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더 이상 젊고 아름다운 부부가 아니고 그냥 아름답기만 한 부부입니다. 젊음의 아름다움 대신 신앙의 아름다움으로 얼굴 모습이 변화한 부부입니다. 브리스길라 보다는 브리스가라는 이름 뜻처럼 노부인이 되었고 작은 노부인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딤후 4:9-19절을 읽어보시면 노년의 바울의 외로운 모습이 배어 있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브리스가와 아굴라 이들 부부는 끝까지 바울의 좋은 친구, 동역자로 남아있음을 보여줍니다. 노년이 될 수록 그리워지는 동역자로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바울의 심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절, 한절이 한마디 한마디가 살아있는 의미로 여러분의 심정에 다가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여러분, 복음 안에서 복음 때문에 갖는 교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젊은 날부터 복음에 함께 서고 복음 때문에 함께 여행하고 이주하며 한평생 복음 때문에 생과 사를 함께 하고 고와 낙을 같이한 이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집에 문안하라.”
어찌 지나가는 말이겠습니까? 눈을 감기 전에 한 번 더 보고 싶은 평생의 친구의 이름입니다. 복음 때문에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사랑을 나눈 사이입니다. 복음 때문에 먼 여정을 함께 달려온 전우입니다. 비록 디모데를 향해 너는 속히 오라고 했지만 심정 같아서는 . . . .
이런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복되고 아름답습니다. 오늘 서 교회 재 개척을 위해 함께 파송 받는 여러분은 비록 아직 젊은 처지이지만 먼 후일 사모하는 이름으로 서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갈길 다 달린 후에 면류관 바라보며 가슴 속에 떠오르는 형제자매의 이름에 마지막 축복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여러분의 만남 역시 복될 것입니다. 때로는 이런 저런 오해도 있을 것이지만 먼 후일 여러분을 사랑하며 아끼는 마음이 주님 앞에서 나타날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교제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을 믿습니다. 여기까지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의 생의 여정을 함께 살폈습니다. ① 제자로서의 삶의 여정 ② 영적 성숙 과정 ③ 은사 활용 실태를 되짚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들의 영적 성숙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① 행전 18:2 손님 접대의 은사 - 공동생활 시작
② 행전 18:18 개척 전도의 은사 (가정교회 시작)
③ 행전 18:18 사역자 훈련-가르침의 은사, 격려의 은사
④ 고전 16:19 집에 있는 교회 - 본격적 참여
⑤ 롬 16:3-4 나의 동역자, 목양의 은사
⑥ 딤후 4:19 다시 에베소로 격려의 은사
신앙 안에서 상호간의 은사를 인정하십시오. 개발하십시오. 섬기는 일에 활용하십시오. 받은 은사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남은 날들에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처럼 부디 교회 세우는 사역(Church planting ministry)에 헌신하는 분들이 많이 나아오기를 바랍니다.
연초에는 북구의 매곡교회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 나왔고, 이제 봄의 한 가운데 신정예배당을 위해서 헌신하는 분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봄날은 지나갑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날들도 지나갑니다. 한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의 교회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대답할 말을 준비하기를 바랍니다.
서로 문안하라
고전16장 19~20절 / 지용수목사
욕심 많은 한 사람이 하루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나 혼자 차지하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을까? 나 혼자 이 세상을 가지고 누려 보았으면…….’
그 해답은 모든 사람이 다 죽고 자기만 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이 다 자기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죽어라. 다 죽어라. 나만 두고 다 죽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참 좋았습니다.
‘나 혼자 사니 이 세상은 다 내 것이다.’
그런데 아찔하게 한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만일 내가 내일 급성 맹장염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누가 나를 수술해 주나?’
그래서 “의사는 살아라.”라고 했습니다.
또 ‘만일 자동차가 고장 나면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이 나서 “자동차를 수리할 사람은 살아 있어라.”라고 했습니다.
‘만일 내 머리를 깎아야 할 때가 되면 어떻게 하지? 그래, 이발사는 살아 있어라.’
‘전기가 고장 나서 냉장고나 TV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전기 수리공은 살아 있어라.’
‘수도가 막히면 어떻게 하나? 수도국의 사람은 살아 있어라.’
‘전화가 고장 나면 어떻게 하나? 전화국의 사람은 살아 있어라.’
그러다 보니 결국에는 ‘다 살아 있어라. 다 살아라.’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혼자서는 살지 못합니다. 가족과 가족이, 교우들이 어울려서, 또 시민이 함께, 또 겨레가 함께, 또 세계 만민이 어울려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 교단 총회에서 은퇴하신 목사님들을 위하여 아주 한적한 산지에 빌딩을 지어드리려고 하니 목사님들이 다 반대를 하셨습니다. 외로운 곳에서 여생을 보내기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딩을 지어 주려면 복잡한 도시 한복판에 세워 달라고 하셨습니다.
1995년에 제가 스위스의 한 지방에 있었는데, 시간마다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낮에는 종소리가 들려도 괜찮지만 밤 11시, 12시, 새벽 한 두 시에도 계속 종이 울리면 잠이 깨지 않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선진국에서, 문명국에서 왜 밤새도록 종을 울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목사님께 여쭈었습니다.
“목사님, 도대체 밤에도 왜 그렇게 종을 울리지요? 수면에 방해가 되는데 말입니다.”
“스위스에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큰 목장에 집이 한 채씩 달랑 있으니 대부분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소떼와 양떼 속에서 사람 구경을 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고독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어서 계속 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깊은 밤에도 종이 울리면 ‘아, 누군가가 있구나.’하며 외로움과 고독을 이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종소리가 정신병 예방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잠에 방해가 되어도 종을 치는 것입니다.”
고독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지난 번 여수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제가 묵었던 숙소가 오동도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운동 겸 오동도의 한 산에 올라가 찬송을 부르고 내려왔는데, 그곳에 어떤 사랑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옛날 오동도에 아주 아리따운 한 여인과 어부 남편이 살았답니다. 그런데 남편이 고기를 잡으러 간 사이에 그 여인을 욕심 내던 악한 사람이 그 집에 쳐들어갔답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여인은 정조를 지키기 위해 도망을 치다가 그만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답니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아내의 시신을 붙잡고 통곡한 후 하얗게 눈으로 덮인 바다 가장자리의 땅을 파고 아내를 묻었답니다. 얼마 후 하얀 눈덩이 속에서 동백꽃이 피어나고,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도 자라났다고 합니다. 가슴 찡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 무덤을 볼 때마다 남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길이길이 대화하고 교제하면서 사랑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며칠 전 제가 고향에 갔다가 저의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서른 두 살 먹은새 신랑이, 이제 막첫아기를 낳은 새 신랑이 자다가 죽었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입니까?
부부가 함께 사는 것, 가족과 더불어 사는 것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지만 사람의 사랑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형제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교회끼리 사랑으로 문안하고, 성도끼리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교제, fellowship, 사랑의 관계를 키워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의 가장 큰 두 계명을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39절에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This is the first and greatest commandment.)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The second is like i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가장 큰 계명이 두개인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사랑해도 이웃에게 냉정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비롭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성령의 사람이 되면, 먼저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학대하고 자살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비록 죄인이고 부족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쓰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은 누구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교회 안의 성도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술집에서, 나이트클럽에서 별짓을 다하며 사는 사람도 언제 예수님을 믿어서 귀한 사람이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이 도시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이 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 자신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꽃도, 나비도 하늘의 뭉게구름도, 별도 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저는 매일 밤하늘의 별을 봅니다. 밤마다 운동장에서 7킬로미터 정도를 달린 후 자리에 누워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다 사랑하게 되고 아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 급하게 택시를 타야 할 일이 생겨 택시를 타고 교회에 왔는데, 운전 기사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 일하세요?”
“24시간 일합니다.”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어도 이렇게 해야 돈이 됩니다.”
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건강이 망가져도 돈 때문에 24시간 계속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날 하루는 쉬지만 말입니다.
제가 내릴 때 요금을 보니 오천 육백 원이었는데 만 원짜리를 드리면서 “거스름돈은 그냥 가지세요. 그리고 운전 조심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교회 앞에서 내렸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구두를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닦는데, 제가 닦으면 아무리 힘들여 닦아도 잘 닦이지 않아서 구두 닦는 아저씨에게 닦습니다. 구두를 다 닦고 난 후 오천 원짜리를 드리고 “과일 하나 사드세요.”하며 거스름돈을 받지 않습니다. 아마 그 아저씨가 ‘저 사람, 과일이 얼마나 비싼지 모르는구먼.’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제가 많은 돈을 드릴 수도 없고 하니 그렇게 하고 나오면서 ‘주님, 저분을 축복해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제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 보면 버스 정류소에서 어두운 얼굴로 버스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의 모습이 가끔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제 가슴이 찡하고 아픕니다.
‘저 분에게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있나? 혹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셨나?’
제가 성자라서 그런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안에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고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먼저는 교회끼리 사랑으로 문안하고 교제해야 됩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시아에 에베소 교회, 사데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서머나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 교인들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문안하고 사랑을 보내니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좋습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을 당하니 유럽의 교회와 고린도 교회가 헌금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서울의 몇 교회가 울산에 있는 아주 약한 교회에 3억을 보내 주어서 교회를 짓게 했습니다. 그런데 건축을 하는 사람이 사기를 치고 그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니 그 교회들이 3억을 다시 보내 주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 교회도 20년이 넘도록 농어촌 교회를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총회 때 공로패를 받았지만, 저는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교회 정도 되면 농어촌 교회를 오백여 개 정도는 도와주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우리 교회가 천여 개의 교회를 돕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시에 있는 큰 교회라고 작은 농촌 교회를 멸시하면 그 교회는 나쁜 교회입니다. 농촌 교회는 도시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도시 교회는 농촌 교회를 사랑하며 재정으로 협력하는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 감사하게도, 러시아에 계신 우리 목사님께서 연세도 드셨는데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지, 지금 러시아에 우리 교회가 백 열 개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또 미국에도 멕시코에도 우리 교회가 있어서 우리가 함께 기도하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장 12절 말씀입니다.
한 줄로 된 실은 끊어지기 쉬워도 세 줄로 꼬아 놓은 실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도 연합하면 더 강해집니다.
성도끼리도 서로 문안해야 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로마 출신 유대인입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바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바울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있을 때 자기 목을 내놓고 바울을 구원했습니다.
구역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한 시간 동안 집을 준비하는 것도 얼마나 마음이 쓰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았습니다. 새벽마다, 저녁마다 매일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자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불편함을 이기면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귀한 그분들이, 고린도 교회가 성도들에게 문안하고, 또 많은 성도들이 서로 문안하고 사랑을 보내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저도 때때로 편지를 받는데, 기도 방석에서 그 귀한 사랑의 편지를 읽으며 감격해 하고 행복해 합니다. 전화를 받을 때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또 제 전화를 받고 기뻐서 시를 써서 보내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교제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축복이고 행복이지만, 성도끼리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는 교제도 행복인 것입니다.
가족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교인들과는 잘 사귀고 직장에서 동료들과는 잘 사귀면서 아내에게 무관심하고 남편에게 무뚝뚝하고 아이들에게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내 남편, 내 아내를 귀히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전화도 하고 때때로 사랑의 편지도 보내야 합니다. 아들딸과의 관계도 잘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가족끼리의 교제를 잘 가꾸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인간 관계는 그냥 두면 불이 타다가도 꺼져버리게 됩니다. 모닥불도 그냥 두면 꺼지고 불쏘시개로 때때로 일으켜 주어야 불이 살아나듯이 부부 관계도 마음을 써야 사랑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제가 비행기에서 잡지를 펴보니, 어떤 남편이 가정을 떠나면서 자기 아내에게 남긴 글이 나와 있었습니다.
‘여보, 미안하오. 내가 당신을 귀히 여기고 사랑해 왔지만, 지금은 아니오. 우리 관계의 사랑은 불은 꺼졌소.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떠나가니 이해하시오.’
요즘에는 세상이 바뀌어서 아내가 집을 지키고 남편이 가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니, 그 남자도 편지를 남기고 가출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아내와의 사랑의 불이, 여러분 남편과의 사랑의 불이 항상 타고 있습니까? 사랑의 불이 꺼져가고 있어서 연기가 나고 있습니까? 여러분 가정의 사랑의 불이 항상 활활 타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노력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아이들은 건강합니까? 등의 때를 밀어주는 아빠가 있는 아이는 잘못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매일 아이를 품에 안아 주면 그 아이는 빗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끼리의 수평적인 관계도 잘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 관계를 잘 이루어 나가려면, 때를 알아야 합니다.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문안은 인사인데, 인사도 때에 맞게 해야 합니다. 제가 길을 가다 장로님을 만나서 “장로님,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다면 장로님도 “목사님, 안녕하세요”하고 바로 인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한참 있다가 “예, 목사님. 저는 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내의 생일이 오늘이라면 오늘 생일 축하를 해 주어야지, 일주일 후에 “당신, 생일을 축하해요.”라고 한다면 아내가 기뻐하겠습니까?
교제를 잘 하는 데는 때가 중요합니다. 쇠도 달았을 때 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쁘게 살고 있지만, 교제에 대한 계획이 있어야 됩니다. 매주일에 한 번 전화할 사람, 한 달에 한 번 전화할 사람, 성탄절에 카드를 보내면 되는 사람을 구분해 놓고 교제하면 좋습니다. 매일 전화해야 될 사람에게는 매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께는 하루에 세 번 이상 전화합니다. 지금 어머니께서 저희 집에 혼자 계십니다. 그래서 어제도 “어머니, 점심 혼자 드시게 해서 죄송해요. 주님과 함께 드세요.”라고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께서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잘해라.”라고 하셨습니다. 저녁 때 또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저녁도 혼자 드셔야겠네요.” 저녁 10시에 또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오늘 늦을 것 같아요. 일찍 주무세요. 죄송해요.”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내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잘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가 전화를 해야 어머니께서 주무시지, 전화를 하지 않으면 제가 아무리 늦게 들어가도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어머니와 저는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지 모릅니다. 어머니께서 제 속을 다 아십니다. 그래도 자식은 부모님께 전화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안을 할 때는 예의를 지켜야 됩니다.
예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제가 어느 지역에 계시는 선배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미리 연락을 드리고 가면 선배님께서 마음을 쓰실까 봐 그냥 갔는데, 그 곳에 가보니 선배님께서 다른 교회로 가시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새로 오신 목사님께서 아주 당황해 하시는 것을 보고 얼마나 죄송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하루나 이틀 전에 미리 전화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은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심방을 하셨다가 한 가정을 잃어버렸답니다. 목사님께서 아주 잘 알고 믿는 집사님이라 그 집 근처에 갔다가 그냥 그 집으로 들어가셨답니다.
“집사님, 계세요?”
그런데 마침 그 집에 손님이 오셔서 맥주판이 벌어져 있는 상황이었답니다. 여 집사님은 신앙이 좋지만 남 집사님은 왔다갔다 하는 신앙인이었는데, 그 주부터 그 집사님 부부가 교회에 나오지 않았답니다.
목사님께서 그 집 앞에서 “집사님, 집사님 집 앞을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리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라고 전화를 했으면, 그 집사님이 “목사님, 지금 손님이 와 계셔서 어렵습니다. 다음에 와 주세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갑자기 그 집을 찾아가면 그 집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그냥 가지 말고 미리 전화를 하는 것이 예의를 지키는 것이 됩니다.
미국의 우리 교민 한 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는데 경찰이 왔답니다. 그곳이 낚시 금지 터였던 것입니다.
“여보시오, 이곳이 낚시 금지 터라는 것을 모르오? 왜 여기에서 낚시를 하고 있소?”
“지금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지렁이 목욕을 시켜 주고 있는 것이오.”
“그러면 그 지렁이를 한 번 보여 주시오.”
“아무리 지렁이라도 예의를 지켜 주어야 하지 않겠소? 지렁이가 옷을 벗고 목욕을 하고 있는데 보여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경찰이 예의를 지키기 위해 그냥 갔다고 합니다.
예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교제가 됩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 사이라도 ‘아무개 집사’ ‘아무개 권사’라고 하면 안 됩니다. ‘아무개 집사’ ‘아무개 권사’라고 하다 보면 나중에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나이가 많고 상대방은 아무리 나이가 적어도 ‘아무개 선생님’이라고 해야지, ‘아무개 선생’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우리 직원들에게도 절대로 반말하지 않습니다. 제 딸 같은 직원에게도 반말하지 않고 예의를 지킵니다. 제 동생에게도 ‘목사’라고 부르지 않고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제 동생이지만 목사님이기 때문에 ‘목사’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때는 ‘동생’이라고 합니다.
부부간에도 예의를 지켜야 됩니다.
예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문안을 할 때는 상황에 맞게 해야 됩니다.
아무리 축복된 말이라도 새벽 3시에 쳐들어가서 “이 집이 잘될지어다. 복 받을지어다.”라고 하면, 그 집의 사람들에게 그 말은 저주 같이 들리는 것입니다.
상황에 맞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떡을 해서 이웃과 나누어 먹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새벽 한 시에 문을 두드리고 떡 접시를 내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황에 맞아야 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프리카의 한 곳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번역해서 가르치는 줄 아십니까? 그 곳에는 양이 없어서 주민들이 양을 모른답니다. 그리고 그 곳주민들이 제일 아끼고 사랑하며 제사를 지낼 때 바치는 동물이 돼지랍니다. 그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돼지 새끼를 보라’라고 번역했답니다. 그래야 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평안도 출신의 부목사님이 수척해진 장로님을 보고 “장로님, 많이 까지셨네요.”라고 했답니다. 그러니 장로님이 ‘아니, 젊은 부목사님이 나보고 까졌다고 하다니.’하며 한동안 기분 나빠했답니다.
그런데 ‘야위었다, 수척하다’라는 말의 평안도 사투리가 ‘까졌다’랍니다.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상황에 맞게 조심해서 문안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안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관계를 가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아내와 남편, 자녀도 사랑하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도 제 아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많이 생각하고 기도했습니다. 저희 막내아들 성찬이가 어릴 때부터 목사님이 되려고 준비해 왔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나의 3대 목표 - 첫째, 목사 아들의 도리를 다하자. 둘째, 전교 1등을 목표로 논다는 생각을 일체 버리자. 셋째, 훌륭한 목사가 되려면 하루에 성경 다섯 장 이상은 읽어야 되지 않겠는가?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대로 실천한다.’라고 써놓고 자기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한 번은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성찬아, 너 목표대로 살고 있니?”
“아빠, 사람이 어떻게 목표대로 다 살 수 있습니까?”
그래도 언제나 목사님이 되겠다던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서 변했습니다.
“아빠, 꼭 목회를 해야 됩니까? PD가 되면 안 됩니까?”
“야, PD가 되었다가 피 볼라. 목회해야지.”
그 아이가 군에 갔다 와서도 PD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많은 분들과 의논을 해 보았습니다. 모든 목사님들께서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세요. 하나님께서는 기쁘신 뜻을 위하여 그 마음에 소원을 주셔서 행하게 하시니, PD가 되고 싶은 마음은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주신 소원일 수 있습니다. PD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한 분도 목회를 하게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지금 우리 나라에 목사님은 많은데 PD는 모자라고 더구나 목사님보다 PD가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는데 더 크게 쓰임 받아 더 큰 일을 할 수 있으니 PD가 되게 적극 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아들이 목회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아들이 목회하기를 원하는데 아들은 PD를 하겠답니다.’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야, 네 아들이기 전에 내 아들이다.’
그래서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했더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 목회하기를 원하시는데 그 아들이 딴 길로 가면 매를 맞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게 두려움도 있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나니, 제 마음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들아, 너는 내 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과 의논해서 결정해라.”
제가 아들에게 예의를 지키며 그렇게 말했더니, 아들이 씩 웃으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그 때도 아들에게 목회를 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가족회의를 한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금년에 PD 시험에 합격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인 줄 알고 PD의 길을 가고, 금년에 떨어지면 다시는 PD 시험을 보는 일 없이 바로 신학교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며 공부했겠습니까? 다섯 명을 뽑는 시험에 명문대생 천 사백 명이 응시했으니 제 아들이 얼마나 긴장했겠습니까? 그런데 제 아들이 일등으로 합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구나.’라고 생각되지만, 저는 지금도 ‘하나님, PD를 몇 년만 하다가 목회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끝까지 예의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 아이가 그 길을 얼마나 걸어갈지 모르지만 그 길을 가는 동안 보람있게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제가 끝까지 “너, PD하면 안 된다.“라고 했으면 그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에베소서 6장 4절에 말씀하십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골로새서 3장 21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자녀에게도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의를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인간관계를 잘 형성해 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필요해서 어떤 사람을 사귀고 필요 없으면 그 사람을 버리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상대방을 세워주고 도와주기 위해서 만나야 합니다.
‘고기는 물을 보고 알고 사람은 친구를 보고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깎아 내릴 사람은 만나지 않고 자신을 돋보여 주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돋보이시기 위해 우리를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만나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돋보여본들 무엇하겠습니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고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우리의 일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다를 항해할 때는 나침반을 보고 갑니다. 그런데 어떤 지역에서는 나침반이 흔들리고 자꾸만 엉뚱하게 돌아갑니다. 그 아래에 큰 자성을 가진 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역에 있으면 혼돈이 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2~3마일만 빠져나가면 정상이 됩니다. 그러니 그런 곳을 지나가는 배는 빨리 그 곳을 떠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배라도 그런 곳에 있으면 혼돈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귀가 집요하게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예배가 무너지고 경건이 무너지고 다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선악과를 먹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사귀면 안 됩니다. 분별력이 있어서 복 있는 사귐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족끼리 화목하고 교회끼리 화목하고, 어디에서든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는 잘 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5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우리 한국이 어려운 것은 서로 너무 많이 다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당과 야당이 그렇게 서로 부끄러운 수치를 드러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경영주와 근로자가 서로 다투면 회사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어느 정도는 덮어주면서 근로자는 경영주가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주고 경영주는 근로자가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어야 회사도 되고 나라도 되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덮어주며 화목할 때 교회가 흥왕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죽마고우가 있었습니다. 한 마을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가 이제 노인이 되었습니다. 한 친구는 큰 부자가 되어 호의호식하며 대접을 받고 삽니다. 그런데 한 친구는 아주 가난하게 삽니다. 하루는 가난한 친구가 부자 친구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이 사람, 이상하지 않나? 나도 술을 마시지 않고 도박도 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하게 살고 자네는 그렇게 부자로 사나?”
“사실대로 말하기가 미안하지만, 바로 말하겠네. 우리 집이 부자가 된 이유는 간단하네. 내 아내와 며느리가 서로 사랑하고 우리 부부와 우리 아이들이 서로 사랑하니 일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르네. 그러니 더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된 걸세. 그러나 자네 집은 어떤가? 자네 부인은 자네 며느리를 싫어하고 자네 며느리는 자네 부인을 싫어하지 않나? 또 자네는 늘 자네 아이들을 욕하고 아이들은 자네를 싫어하니 사는 재미가 있겠나? 그러니 일을 해도 부자가 될 리 없지.”
가화만사성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될 때 가정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목하면 건강합니다.
여러분에게 원수가 한 사람이라도 있어 보십시오. 밥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잠도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수가 있으면 자기가 먼저 죽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과 화목하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지금 세계에서 장수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이 히말라야 티베트의 한 촌이랍니다. 142세 되신 분도 계시고, 130세 이상이 188명이랍니다. 그 마을에서는 100세가 되어도 청년인 셈이고 130세가 되어야 노인 대접을 받는답니다.
어떻게 해서 그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건강합니까?
그 마을에서는 문화적인 생활도 하지 않는답니다. 그렇게 장수하는 이유 중에 과학적인 것, 의학적인 것은 하나도 없답니다. 그저 맑은 물과 맑은 공기와 신선한 야채를 많이 먹으며 온 마을 사람들이 화목하게 지낸답니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며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랍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우리가 사랑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는 행복하고 번영하고 건강하게 되고 만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도 바로 섬기고 귀히 섬기고, 형제 섬김에도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가문과 이웃에 복을 확산시키는 가정이 되라!
고전 16장 19~20절 / 오정호목사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신앙의 가문을 이야기할 때 고전적으로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선구자로 쓰임 받았던 조나단 에드워드(프리스턴대학 총장역임)의 가정과 불신가정인 맥스 쥬크의 가정을 비교합니다. 미국 뉴욕주의 조사 결과입니다. 불신자인 맥스 쥬크의 자손 1200명 이상의 사람중에는 310명이 직업적 부랑자였고, 440명이 방탕한 삶을 살다 병으로 쇠약해졌습니다. 130명이 평균 13살 때부터 교도소를 출입했으며, 그중 7명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100명이 넘은 알콜중독자, 60명의 상습적인 절도범, 190명이 윤락녀였습니다. 기술을 배운 자손들도 있었지만 그중 20명은 교도소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 거한 조나단 에드워드의 자손은 300명의 목사, 선교사, 신학교수가 배출되었고 100명이 넘는 대학 교수, 100명이상의 법률가, 30명의 판사, 60명의 의사, 60명 이상의 훌륭한 작가, 14명의 대학총장, 3명의 의원, 1명의 부통령을 배출한 영향력 있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어둠과 빛이 대조되듯 두 가문은 동시대에 살았지만 완전히 대조되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요나단 에드워드의 가문처럼 한 평생 예수 믿을 때에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길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손들을 복되게 하는 훌륭한 신앙의 가문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자녀와 가문을 올바로 세워 한국교회와 사회에 복을 끼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문이 자손 대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고 이웃에게 복을 확산시키는 가문이 될 수 있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원리는 어느 시대나, 어디에서나 통합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입니다.
모든 축복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교회는 저수지와 모판같이 이 시대에 속해있는 지역사회에 영적, 정신적 영향을 미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가정이 먼저 하나님의 복을 확대재생산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축복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본문의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자신의 가정을 예배와 교제의 처소로 기쁘게 내어놓았습니다(19절). 지금으로 말하면 처소교회 혹은 가정 교회(Home church)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부부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눔바라는 여성도도 주님을 경외함으로 자신의 가정을 예배의 처소로 내어놓았습니다(골4:15). 빌레몬도 자신의 가정을 예배와 교제의 장소로 형제들에게 활짝 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머리되시고 부모와 자녀 모두가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가정에서부터 주님을 경외한다면 우리의 가정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16장에 다시한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와 그의 가정교회에 대해 문안합니다(롬16:3-5).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은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초지일관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많은 이웃을 복되게 하는 가정교회였습니다.
어느 부부의 자녀양육의 원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부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이 감격하는 사건을 만들도록 합니다. 교회건축헌금을 드릴 때에는 수년동안 짠돌이 엄마로부터 받은 용돈을 저축한 돈을 송두리째 드리게 합니다. 피아노 반주를 할 수 있는 자녀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교회봉사에 자신을 투자하게 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복을 저축하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감격하게 하는 경험이 있을 때 이 경험이 자녀들의 생애에 아름다운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시128:1). 여러분이 자녀들의 지능지수, 감성지수에 관심을 가지는 그 이상으로 신앙지수, 예배지수를 높이는데 더 관심을 갖는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2. 가족구성원이 애정으로 결속되어있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가문이 되는 또 하나의 원리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남다른 애정과 사랑의 관계로 결속되는 것입니다. LA 타임즈는 로드아일랜드 대학의 연구결과를 이렇게 다루었습니다. "현재 미국의 가정은 폭동과 전쟁 다음으로 가장 위험한 곳이다. 미국의 가정은 분노와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 부부의 30%이상은 어떤 형태로든 가정폭력을 경험하고 있고, 200만의 부부들이 총, 칼과 같은 흉기로 위협과 상해를 입는다. 미국경찰 순직자 중 20%가 가정폭력문제를 저지하다 순직했다. 가정폭력은 국가에 보고되지 않은 가장 높은 범죄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울시 가정상담소가 지난 30년 동안 21만 6천5백83건의 가정불화문제를 분석한 결과 그 원인이 첫째, 배우자의 부정, 둘째 성격차, 셋째 고부간의 갈등, 넷째 가정폭력 그리고 도박이었습니다. 서울시 가정상담소는 가정불화는 곧 사회불안으로 이어진다고 보고합니다.
본문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들을 다루는 다른 곳에서는 아내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편인 아굴라가 그의 아내 브리스가의 은사와 역할을 이해하고 아내의 사역을 용납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이해로 강하게 결속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은 초대교회의 많은 가정을 섬기고 복되게 하는 가정으로 쓰임받았습니다.
하버드대학의 고든 알포드교수는 건강한 부부의 자아상을 위해서는 첫째, 자신을 용납할 수 있는 능력 둘째, 삶의 분명한 목표 셋째, 삶의 의욕 넷째, 원만한 인간관계 다섯째, 유우머를 즐기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가정은 부부가 서로의 부족함을 용납하고 이해함으로 상대방의 자존감을 세워주어 사역의 담대함과 용기를 얻고 어려움과 고난이 있더라도 함께 극복하고 일어서는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3. 성실한 직업인으로서 땀을 흘리는 가정입니다.
우리는 정신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공짜를 좋아해서는 안됩니다. 땀흘려 일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직업윤리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에 자기 삶의 현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은 땀흘리는 삶의 현장의 고귀함을 이해합니다. 자신의 직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직업도 존중합니다. 생계유지차원이 아니라 소명의 차원에서 여러분의 직업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자녀들이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자라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직장에서 땀의 대가를 인정받고 더 나아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땀 흘리는 성실한 직장인일 때 자녀들도 그 정신을 계승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인 직장인으로서 어떤 모습을 물려주고 있습니까?
4. 이웃과의 나눔이 풍성한 가정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께 쓰임 받는 가정들은 교회봉사와 사회봉사에 앞장선 가정이었습니다. 봉사는 내 것을 나누어주는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정은 이웃에 대하여 닫혀있는 가정이 아니라 열려있는 가정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가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보면서 배웁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가르친 대로가 아니라 보여주는 대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나눔과 봉사의 모습을 보며 자라는 자녀들이 장성하여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고 동기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성실히 섬기는 성도들의 대부분은 교회봉사를 성실하고 헌신적으로 한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번 설 명절에 섬김의 주도권을 가지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십시오. 우리의 가정에 신앙의 가풍을 세웁시다. 이웃을 풍성하게 섬김으로 하나님의 복을 확대 재생산하는 믿음의 가문을 세웁시다. 흔들리는 우리 사회의 가정을 치유하는 사명을 기쁘게 감당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회나 국가에 복 주시기를 원하실 때 먼저 그 사회에 속한 건강한 가정을 일으키신다. 가정은 하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지상의 파견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