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마지막 토요일 낮 12시, 서울 광화문역 4번 출구 앞에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 ‘매마토’(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라 불리는 이 시위를 이끄는 건, 친족성폭력 생존자와 연대자들의 모임 ‘공폐단단’(친족성폭력을 말하고 공소시효 폐지를 외치는 단단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들이 모여 “친족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라”고 외친 지 3년이 넘어가고 있다.
▲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매달 마지막 토요일 정오, 서울 광화문역 4번 출구 앞에서 ‘공폐단단’(친족성폭력을 말하고 공소시효 폐지를 외치는 단단한 사람들의 모임)이 ‘매마토’(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시위를 연다. 2021년 한 친족성폭력 생존자가 ‘공소시효 폐지’를 요구하며 1인시위를 벌인 것에서 출발한 시위가 3년 넘게 이어지는 중이다. (출처-한국성폭력상담소) |
이들의 외침이 이번엔 국회에서 들려왔다. 지난 18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토론회〉가 조국혁신당 정춘생 의원실, 가족구성권연구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공동 주최로 열렸다. 참여자들은 모두 친족성폭력에 대한 공소시효의 문제점을 짚으며, 범죄의 특성상 반드시 폐지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친족성폭력 피해상담 시점에 이미 공소시효 지난 경우 많아
현재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의하면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어떤 범죄에 대하여 일정기간이 경과한 때에는 공소의 제기를 허용하지 않는 제도)는 10년으로, 피해를 당한 미성년자가 성년에 달한 날부터 시작하며, 13세 미만의 사람 및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2021년~2023년, 3년 간 진행한 전체 상담건수는 총 4,151건이고, 1회 이상 상담을 받은 상담명수는 총 1,840명이다. 그 중 친족성폭력으로 피해상담을 받은 이들은 242명, 전체의 13.15%”라고 밝혔다. 이중 공소시효가 지난 친족성폭력 피해상담은 30.58%에 달했으며, 전체 상담 중에서 공소시효가 지난 성폭력 피해상담 기준으로 보면, 친족성폭력의 비율이 57.36%나 됐다.
▲ 2024년 11월 18일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조국혁신당 정춘생 의원실, 가족구성권연구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공동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가 “상담현장에 본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의 필요성”을 주제로 발제를 진행했다. ©일다 |
피해 당시 연령으로 봤을 땐, “공소시효가 없는 연령인 13세 이하의 비율이 74.33%이긴 했지만, 최소 23%는 14세 이상”이었다. 피해 이후 상담을 받기까지 걸린 시간을 분석해봤을 땐, “10.74%가 17년~19년, 11.57%가 20~29년, 6.2%가 30~39년, 7.02%가 40년 이상”으로 나타났다. 친족성폭력 피해자가 상담을 받기까지는 공소시효인 10년을 넘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 박아름 활동가는 “미상으로 확인된 경우도 40.91%나 되기 때문에, 피해자가 상담을 받기까지 걸린 기간의 실제 비율은 더 높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아름 활동가는 상담 사례 분석을 이어가며 “친족성폭력 가해자의 가장 높은 비율이 24.38%가 친형제·의형제였고 그 다음이 친부모 22.31%, 사촌이 21.49%였다”고 밝혔다. 세간의 흔한 오해나 편견과 달리 “의부모 5.79%보다 친부모에 의한 경우가 훨씬 높다”는 점과, “친형제·의형제 24.38% 중에서도 사실 친형제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설명했다.
친족성폭력은 왜 그토록 ‘말하기’ 어려울까?
그렇다면 친족성폭력 피해는 왜 이렇게 ‘늦게’ 발화되는 걸까?
박아름 활동가는 “친형제·의형제에 의한 피해의 경우를 보면, 집안 내 성차별 문화가 자리하고 있어서 오빠의 위치가 굉장히 견고한 경우가 많았다.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오히려 가해자인 오빠 편을 든다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경우 등. 사촌에 의한 피해에서는 집안 간 권력 관계가 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가해자의 집안이 경제적으로 더 부유하거나 어떤 힘이 있는 경우, 집안 내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미치는 영향”도 강조했다. “가족이 있는 게 정상적인 것이고, 사회복지가 다 가족에게 전가되어 있는 상황에서, 가족을 잃어버린다는 건 내가 정말 기댈 곳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해자가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 가족을 떠나는 게 너무 힘든 일”이라는 것.
▲ 토론회 입구엔 ‘공폐단단’(친족성폭력을 말하고 공소시효 폐지를 외치는 단단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만든 여러 피켓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 속 피켓엔 “그런 가족 필요없다. #친족성폭력공소시효폐지”가 쓰여져 있다. ©일다 |
김홍미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가해자의 (피해자에 대한) 높은 접근성과 통제력”을 원인으로 꼽았다. “친족성폭력 발생 장소는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옥내/거주지 비율이 높다. 옥내 발생 비율은 지난 9년간 95% 이상을 유지 중(비친족의 경우 61.9%)이고, ‘주거지’에서의 피해가 90%를 초과한다(비친족의 경우 13.9%)”는 것이다. 또한 친족성폭력의 경우, 피해자를 ‘그루밍’할 필요가 별로 없다고 했다. “(피해자) 유인방법 결과값을 살펴보면, 친족은 ‘해당없음’(유인없음)이 93.8%였다. 비친족은 38.9%였다.”
김홍 부연구위원은 “신뢰와 친밀성에 기반한다고 믿어지는 이 관계는, 가해자에게는 범행의 수월성의 조건이 되지만, 피해자에게 있어서는 그 상황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어렵게 하는 모순적 환경으로 주어진다”고 분석했다. “나이/성별/가족 내 지위나 신뢰도 등에서 우위에 있는 가해자의 기획에 의해 ‘둘만의 비밀’로 연출되며, 이러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피해자의 언어는 생성의 기회를 잃거나/사라지고 만다”는 것. 친족성폭력 피해자는 피해 경험을 발화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건 물론, 그 피해를 설명하는 언어를 갖기까지도 어려움을 겪는다.
나영정 가족구성권연구소 정책팀장은 “친족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은 상당 부분 가족제도와 가족규범이 발생시키는 억압과, 아동청소년에 대한 차별이 함께 겹쳐있다”고 짚었다. “친권자가 자녀를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인식, 가족구성원들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가족밖에 없다고 믿게 하고, 그게 ‘정상가족’이라고 규정하는 것, 정상가족을 갖지 못하면 여타의 사회적 관계에서도 차별과 낙인의 대상이 되는 상황, 법적 보호자를 스스로 떠나면 위험하고 문제 있는 아동청소년으로 규정하는 제도, 아동청소년이 스스로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할 수 없는 구조, 보호의 대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생존을 위한 노동과 주거가 취약해지는 상황… 이 모든 것들이 친족성폭력을 유지시켰다.”라고 비판했다.
▲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토론회〉 참여자들이 모여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일다 |
‘공소시효’ 제도는 친족성폭력 특성과는 들어맞지 않아
박인숙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변호사는 먼저 공소시효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1995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르면, 공소시효 제도의 존재 이유는 “①오랜 동안 형사상의 소추권이 행사되지 않았다는 건, 결국 국가가 소추권의 행사를 게을리 한 것에 다름 아닌데도, 그 불이익을 오로지 범인만이 감수하여야 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 ②유죄의 증거이든 무죄의 증거이든, 오랜 기간의 경과로 증거가 산일(흩어져 일부가 빠져 없어짐)됨으로써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 ③범죄의 사회적 영향력이 미약해진다는 점, ④범인의 범행에 대한 후회나 처벌에 대한 불안 등으로 오랜 기간 동안 범인이 처벌받은 것과 비슷한 상태가 계속되어, 처벌한다고 하더라도 형벌이 기대하는 범인에 대한 ‘형벌의 감화력’(인격의 변화 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 ⑤오래 전의 범죄에 대한 수사나 재판의 필요를 면제함으로써 국가 부담의 경감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박 변호사는 이런 공소시효 존재 이유가 친족성폭력의 특성과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네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친족성폭력은 ①가해자나 가해자를 옹호하는 주변의 가족, 친족으로 인해 피해자가 신고를 하지 못해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것으로, 국가가 소추권의 행사를 게을리 한 것이 아니고, ②가장 중요한 증거인 피해자의 진술이 존재하고, 피해자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변인들에게 피해사실을 알려 객관적 증거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고, ③시간이 경과하더라도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갈등은 해소될 수 없고, 가해자는 반성하기보다는 처벌받지 않으려고 공소시효가 만료되기까지 피해자를 주변 가족과 함께 압박하는 등 2차피해를 가할 가능성이 크기에, 언제든 처벌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스스로 반성하고 피해자의 피해회복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있으며, ④국가가 (친족성폭력) 피해를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하여 아동청소년을 보호하고, 아동청소년의 생존권을 지켜줘야 한다”는 점에서, 공소시효 폐지가 적절하다는 것이다.
부러진 마음의 뼈가 다시 붙을 때까지 오랜 시간 걸렸는데…
친족성폭력 피해자들, ‘법이 가해자 위해 공소시효를 주는가?’
상담심리사이자 친족성폭력 경험자라고 본인을 소개한 김영서 씨는 “내 인생에 친족성폭력이 뛰쳐들어왔던 날부터 세면 40년 가까이 흘렀다”고 했다. 친족성폭력 피해 이후 굉장히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지금은 심리상담사로 활동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여전히 트라우마를 안고 있음을 털어놨다.
“괜찮아지기 위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 남들보다 더한 노력을 쏟아 부어 공부든, 주변 사람들이나 나 자신과의 관계를 간신히 ‘평범’에 가깝게 해낼 수 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내가 가진 에너지의 80~90%는 ‘평범’한 일상의 회복에 써야 했고, 나머지를 겨우 해야 하는 공부, 일, 타인과의 관계에 쪼개어 쓰다 보니 늘 너무 느리고, 부족했고, 성에 차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평범하게 또래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곳에서는 한참 벗어난 듯 살았다. 이 모든 애씀의 시간은 친족성폭력 이후 일평생에 걸쳐 진행 중이다.”
▲ 토론회 입구에 있던 피켓 “친족 성폭력 일상 속 어디에나 일어난다” ©일다 |
피해자의 삶은 이런데, 친족성폭력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터무니 없다는 것이다. 김영서 씨는 “내 삶에 쳐들어온 아빠의 성폭력은 나라는 사람을 내가 아닌 사람으로 만들었다. 내가 느끼는 감각, 나에 대한 인식, 내 감정, 내 생각, 내 행동, 내 말까지 정상인지, 회복된 상태에서 하는 것인지,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의 것인지 분별하려고 과각성(신경계통이 감각 정보를 정확하게 여과하지 못하고 감각 예민도가 높아진 상태)의 시간을 살아야 했다. 그 시간이 멈추지 않았는데, 범죄자를 위한 공소시효의 시간은 멈춰주고 싶어하는 법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생활 안정은커녕 일상에서 자기 몸과 마음의 안정을 위해 약해진 심리적 골격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 안정부터 보장하기 위해 공소시효 폐지를 바랍니다. (피해자가) 언제고 가해자를 고소할 수 있는 마음을 먹을 수 있도록, 단단한 심리적 골격을 갖출 때까지, 부러진 마음의 뼈가 다시 붙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친족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이 매달 거리에서 외치고 있다. 현재 22대 국회에 발의된 3개의 관련 법안(그 중에서 정춘생 의원 대표발의안만 공소시효 연장이 아닌 폐지를 담고 있다)이 시급히 논의되고 개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사회적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다.
출처: ‘공소시효 없애라’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이 외치고 있어 - 일다 - https://www.ildaro.com/10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