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 맛집 한 군데를 알아놓고 왔어요. 반죽이 얇고 쫀득 해서 식감이 있고 해물과 함께 명태 말랭이를 넣어서 그런지 국물이 담백하고 구수하더이다. 혼자 왔다고 구박하지 않고 막걸리도 잔(2.000)으로 팔아요. 버스를 2번 이나 타고 광릉 네 편편집에 매어놓은 토네이도를 데리려 다녀왔어요. 동원 사단-광릉 수목원-버스 종점-택시 부-봉선사가 있는 광릉 네가 늦게 정이 갑니다. 포천-장현-진접에 끼어 있으면서 오랜 시간 사라지지 않고 '존재'감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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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진리'는 이웃 사촌입니다. 둘은 진접과 광릉 네처럼 아주 가깝지만 존재감에 있어 하이데거(존재와 시간)와 바디우(존재와 사건)처럼 차이가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문과적 존재이고 바디우의 '존재'는 이과(수학) 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존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인식하기가 쉽지 않아요. 어쩌면 접근 불가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파악(인식) 하기 위해 철인들의 수없는 시도가 있어 왔고 바디우가 기존의 '존재'론의 틀을 완전히 뒤집는 시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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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현시(실제)인데 1차 현시는 언어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언어는 권력으로 종속(오염) 되어 있어서 언어를 해체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언어 권력을 해체하기 위해서 주체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파고 들다보면 언어의 매력 발산에 빠질 개연성이 있어요. 그리하여 언어의 권력에 잠식 당하면 의미가 구멍 뚫리기 일쑤입니다. 타자의 언어를 비워 내고 내 의미를 집어 넣어야 하는데 낭만주의적 접근(시, 사랑, 예술)을 하면 공수처가 공수처의 비리를 수사하는 한계에 직면한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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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라고? 바디우는 진리 문제는 하이데거와 동일하지만 '존재' 문제 만큼은 독자 노선을 지향합니다. 바디우는 도도한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수학적 접근(뺄셈)이 유일하다고 말합니다. '존재'란 없음(공백)이기 때문에 '정성화'는 안 되고 감각 no, 실제 객관 단절'양화적'(탈정성화) 이해 방식으로만 접근한다는 것 같아요.
무시기!
2024.10.6.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