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은 지금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의 추모열기에 바쁘다.다음카페에 개설된 그의 추모 커뮤니티에는 연일 조문하는 네티즌으로 들썩이고 하루 200글 이상의 추모의 글이 올려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를 "민족화해와 공존의 남북사업"을 추진하다.반 통일세력인 한나라당과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야합으로 희생된 통일열사로 그의 죽음을 애도 한다.
씁쓸하다.정씨 일가들이 저질러온 수많는 노동탄압과 그들이 자행한 백색테레들로 쓰러져간 동지들의 죽음이 아직도 구천을 헤매며 울부 짖는데 한낮 자본의 이윤을 쫓는 자본가의 행위가 어떻게 열사로 추모되어 지며 우리 노동자 계급과 진보진영는 그의 죽음에 왜 그저 침묵하는가?죽음에도 자본의 계급장이 존재하는가?
여기 정씨일가의 악행속에서 노동해방의 염원으로 쓰러져간 노동열사들의 죽음을 보라!
이상남(당시 나이31)
1959 전남 신안군 비금면에서 출생.
1984 현대 엔진 공업에 입사.
1987 9 12 구사대 차량에 깔려 중상.
1989 5 16 612일간의 사투끝에 운명.
이상남 열사는 84년 현대엔진공업에 입사하여 철구공장 기능직 사원으로 근무하였다.
87년은 전국적으로 노조민주화와 노동자 권익실현을 위한 투쟁이 활발하던 때였다. 그동안 겉으로만 평화적 교섭을 가장했던 현대중공업 회사측은 현대엔진 노조사무실에 불법 난입하여 납치 및 폭행을 자행하였다.
87년 9월 12일 현대중공업 노조임원 개선명령 움직임에 대하여 그룹노조 협의회의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을때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총무부장 김형권씨가 노동자들에게 발표한 성명서를 복사하기 위해 현대엔진 노조사무실에 왔다. 이때 백색 승용차 3대와 12인승 봉고차를 타고 온 정체 불명의 괴한 30여명이 엔진 노조사무실에 무력으로 집단 난입하여 김형권씨를 무차별 폭행하며 봉고차에 밀어 넣고 집단 폭행을 가하고 있었다. 노조 사무실에 있던 임원들이 봉고차를 막고 저지시키자 휴식시간을 갖고 있던 이상남 열사와 다수가 합세하였다. 여러 사람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봉고차는 그냥 전진했으며 이 와중에 열사가 앞 바퀴에 머리와 대퇴부가 끼어 5m를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6주 진단만이 내려져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하여 탈장 수술, 코, 눈수술, 귀수술, 허리교정 수술과 물리치료를 받았다. 이후 울산 제일병원에서 요양하며 가슴, 배의 통증을 호소하였으나 병원측은 계속 이상없다고 하며 진통제로 버티게 했다. 1989년 5월 16일, 열사는 물리치료 후 화장실에서 실신하였고 심장마비로 끝내 숨지게 되었다.
이상남 열사는 회사측의 악랄한 노조와해 책동과정에서 사고를 당하여 1년 8개월의 투병기간동안 소생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회사측의 반인륜적인 행각으로 인해 마침내 사망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양봉수(당시 나이29)
1967 4 전남 무안출생(2남 1녀중 장남)
1986 2 목포 덕인고 졸업
1990 10 현대 자동차 입사(의장 2부)
1991 소위원활동, 저시급 동지회 2공장 대표
1992 2 성과분배투쟁관련으로 해고
1993 1 원직 복직
1994 의장2부 소위원회 부의장, 8대 대의원 당선
1995 2 의장2부 마르샤 투입관련 회사측의 합의사항 불
이행에 맞서 라인정지건으로 두번 째 해고.
5 12 공동소위원연합 2기 출범식 참석을 위해 정문 진
입시 경비들의 폭력적인 저지에 항거하며 본관정
문에서 앞에서 분신
1995 6 13 대구 동산병원에서 31일간 사투끝에 병상에서 운명한 양봉수 열사는 강직한 품성을 지니며 동료와 노동조합에 대해 헌신적으로 활동해왔다. 91년 말 노조의 성과분배 요구투쟁에 회사측은 노조없애기 작전으로 맞섰고 이 과정에서 그는 1차 부당해고되었다가 93년에 복직되었다. 복직후 노동조합 대의원에 당선된 그는 작업강도 조정을 위해 같은 사업부 대의원들과 함께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회사측은 신차를 생산현장에 투입하면서 작업강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기에 반대하는 대의원 사이에 협상이 계속되어 '신차 투입은 대의원들과 합의한 후 실시한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생산현장에 신차를 투입하였고 열사는 담당 대의원으로서 회사측의 노사합의파기 부분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신차를 투입한 생산 라인을 잠시 중단시켰다. 이를 이유로 그는 해고당하였고 경남지부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였다. 회사측은 법적인 소송에 계류중일 때는 조합원이 아니라 볼 수 없다는 단체협약에도 불구하고 대의원 자격으로 노사협상장에 들어와 있는 그를 경비 20여명을 동원하여 정문 밖에 내던지는 폭력을 행사하고 정문출입을 저지하였다. 95년 5월 15일, 열사는 그날도 공동소위원회 연합 발대식에 참여하기 위해 동료 해고자 4명과 함께 회사앞에 갔으나 출입을 저지당하였다. 법과 단체협약마저 무시하고 계속되는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하기 위해 온몸에 신나를 붓고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외치며 정문으로 들어가려했으나 경비들은 이를 무시하고 집단으로 저지하였다. 이런 극한적인 상황에서 열사의 몸에 불이 붙게 되었다. 병상에서도 열사는 " 나는 죽으려고 하지 않았다. 살고 싶다. 현자조합원을 사랑한다. 노동조합을 사랑한다. 동지들을 믿습니다....다시 돌아가 함께 하겠습니다.."며 투쟁의 의지로 살고자 했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스물 아홉의 삶을 마감하였다.
서영호 열사는 91년 3대 집행부 정책연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91년 12월 말 성과분배 정의실현 상여금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현대노동자를 정권과 현대재벌은 공권력으로 짓누르려 하였고 여기에 맞추어 여론에서는 경찰투입이 임박했음을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었다.
12월의 매서운 추위속에서 투쟁의 파고는 다소 경직되었으나 사용5공장 조합원들은 최후의 한사람까지 작업장을 사수한다는 결의로 뭉쳐있었다. 서영호 열사도 정문을 사수하는 책임자로서 조합원들과 함께 경계근무를 하며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92년 1월 19일 공권력 투입설이 여론을 통하여 선전되면서 긴장감이 가중되기 시작했고 당시 현장에는 500여명의 사수대만 남아있었으나 1만 2천의 경찰병력을 동원해 회사의 담벽을 둘러싸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서영호 열사는 즉각 바리케이트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현장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차량바리케이트를 치기 위해 소속조합원이 운전하던 브레이크와 전조등이 작동하지 않는 불량차량이 열사와 충돌하게 되었다. 칠흑같은 밤에 전방을 확인할 수 없는 문제의 차량을 이동운전하다 생긴 사고였다. 열사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불명인 상태로 520여일을 투병하다 끝내 1993년 7월 1일 운명하였다.
2.세 노동자의 네번째 죽음
이 세노동자의 죽음은 이제 거의 잊혀졌다.추모카페도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의 글도 없다. 그저 사람들의 망각속에 자신들의 이루고자 했던 노동해방의 염원을 안고 망월동 민족열사 묘지를 원혼이 되어 떠돌 뿐이다.
철저한 우리의 망각속에 그들의 처절하고 빛났던 삶의 가치는 녹슬어 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한 번 죽은 그들을 무덤에서 끄집어 내어 네번째 죽음을 자행하고 있다.
두번째 죽음의 자행은 정씨일가의 왕회장인 정주영 회장의 죽음이었다.
치떨리는2.12 식칼테레의 배후 수 많은 노동 형제들을 해고 와 수배의 나락으로 떨어 뜨리고 끝내는 세열사의 죽음을 자행케한 간접 살인마, 이 파렴치한 인간의 죽음앞에 온 나라는 애통한 추모의 광기에 빠져들었다.
노동자로 빼앗은 돈으로 독재자 김일성에게 소떼를 갖다 바친 댓가로 얻어 낸 남북공동 사업의 약속은 그를 단숨에 위대한 남북통일의 견인차가 되게 하였으며 그의 죽음 앞에 한총련과 민족해방파는 그를 통일열사를 격상시키며 그의 무덤에 헌화했다.
자본가와 정치인들은 한평생 노동자 때려잡기로 일관한 그의 삶을 조국 근대화에 바친 희생적 삶으로 숭배 했으며 일세의 영웅으로 그를 기렸다.
연일 방송과 신문에선 그의 죽음을 애도 했다.일반 시민들조차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아마도 세 노동열사는 자신들의 두번째 죽음을 구천에서 호곡 했으리라.
세번째 죽음의 자행은 월드컵 광풍속에 정몽준 후보의 대선 출마를 현대중공업 노조 찬성하고 지지한것이었다.
현중의 128일 투쟁과 2.12 식칼테레,통한의 골리앗 투쟁을 벌써 잊어 버렸단 말인가?이상남 열사의 죽음이 아직도 시퍼렇게 태화강 주변을 맴돌며 살아 있는데 그 배후에서 모든 이들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 넣었던 이 범죄자를 이상남 열사가 목숨을 내 놓아 지킨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일국의 대통령으로 어찌 찬성하고 지지할수가 있는가?
-------87년 9월 2일 현대 중공업 노조 임원 개선 명령움직임에 대하여 그룹 노조 협의회의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현대 중공업 민주노조 총무부장 김형권씨가 노동자들에게 발표한 성명서를 복사하기 위해 엔진 노조사무실에 왔다.
이때 백색 승용차 3대와 12인승 봉고차를 타고 온 정체불명의 괴한 30여명이 현대중공업 경비대장 조남길을 선두로 엔진 노조 사무실에 무력으로 집단 난입하여 김형권씨를 무차별로 폭행하며 봉고차에 밀어 넣자 노조 사무실에 있던 임원들이 봉고차를 막고 저지시키려 했다. 휴식시간을 갖고있던 이상남 동지와 다수가 이에 합세하였다 여러 사람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봉고차는 그냥 전진하였고 이 와중에 동지는 차 앞바퀴에 머리와 대퇴부가 5M를 질질 끌려가는 중상을 입었다. 이후 1년 8개월의 긴 투병기간 중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이상남 열사와 두분 열사의 세번째 죽음 앞에 나는 끝내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나는 지금 이들 열사의 네번째 죽음을 묵도하고 있다.
마치 악몽과도 같던 정주영씨의 추모의 광기가 되살아 난듯 온 나라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득실애 의해 평생 자본의 이윤 추구와 노동자 때려잡기로 일관한 한 자본가의 삶을 미화하고 광기어린 추모의 행진을 벌이고 있다.
죽음에도 계급의 서열은 존재하는가?
나는 분노속에서 신문의 접는다. 그리고 TV을 끈다.
서글픔속에서 누군가는 이분 세분열사에 죽음과 정씨일가의 패덕에 대해 알려야 할텐데 하는 초조감으로 이글을 쓴다.
그리고 사뭇 가슴속 저려오는 비장함으로 그동안 보여 왔던 나자신의 비겁과 진보진영의 침묵에 대해 끝없는 반성을 해본다.
**{불온 이스크라}에서 KI 님의 글, 퍼올립니다. 격한 감정 속에서 쓰셨는지 오타가 좀 보이네요. ^^;
정몽헌 회장의 큼지막한 영정과 그 주변을 둘러싼 하얀 국화 속에서 씁쓸함을 느낍니다. 게다가 영화에서 죽음을 예언했다느니 하며 번잡을 떠는 모습들에 환멸을 느낍니다. 어떻게 해서든 엮어서 한 몫 하려는 것에 맘이 다소 아립니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