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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깊어지는 만추의 계절 한 해를 보내며 지나온 뒤안길을 회상하고 싶은 그런 시간이다
체육교사로서 개교 26주년 기념 행사에서 10년 근속상을 받았다. 강산이 10년에 한번 변한다고 하면 나는 교사로서 한번 거듭난 사람이 된다. 지난 달에 그 상을 받고 나는 업무수행 능력이 없을 만큼 몹시 아팠다. 얼마나 아팠던지 운동장에서 간신히 수업을 하고 걸을 힘이 없어 지팡이를 집고 다녔으니 말이다.
교직생활 10년을 돌이켜 보면 몸이 아픈 것은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팠다. 방학이 되면 긴장이 풀려서 인지 심하게 아파 며칠간 두러 눕곤 하였다. 원래 내 몸은 그러려니 하였지 걸을 힘 조차 없이 아프리라고는 꿈 속에서라도 생각한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 아픈 것은 무엇보다 내 자신의 불찰이 컸다고 본다. 체육대회 준비로 하여 피로가 겹쳤던 것이다. 그 지친 몸을 이끌고 늦은 밤까지 길거리를 헤매었으니 안 아플 리 만무하지 않은가!
지난 10월 29일은 내가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온 지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몇 달 전부터 20년이 다가온다는 안타까움으로 이렇다 하게 해 놓은 것 하나 없는 나로서는 심하게 가슴을 치고 자책 할 수밖에 없었다.
추수의 계절 10월을 보낼 때마다 여름내 풀숲에 숨어서 열심히 결실을 맺고 있는 호박을 대하기가 민망해 얼굴을 돌린 적이 몇 번 있었다. 의미 없이 20 여년을 흘려 보낸 덧없는 세월에 나는 자책의 가슴앓이를 앓아야 했다.
1973년 10월 29일 고등학교 3학년 때 정처없는 길을 떠나 자아실현을 해 보겠노라 몸부림쳤던 기나긴 세월의 흔적들. 중학생 때부터 육상 선수였기에 특기 장학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해 74년 3월 명지대학 체육과에 진학을 했다. 학교의 명예와 나 자신의 이름을 신문 지면에 실릴 즈음 시합 도중 다리를 스파이크에 찍혀 근육에 파열이 와 운동을 그만 두어야 했다. 대학 3학년 76년 3월 ROTC 장학금을 받고 입단을 하였다. 그 후 78년 2월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4년 4개월의 군 생활에 들어 갔다.
전방에서 소대장 근무를 마치고 학군단 교관 시절에 나는 결혼을 했다. 82년 6월 대위로 제대 할 때는 이미 딸과 아들이 내 곁에 있었다. 제대를 한 달 남겨 두고 나는 취직 걱정을 해야 했다. 지난 날 전방에서 군 생활 할 때 사단 체육대회가 있다 하기에 연대에서 차출된 육상 선수들을 데리고 운동을 했던 학교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즉시 학교장께 편지를 썼다. 그때 그곳에서 사병들과 연습하여 사단 체육대회에서 나는 마라톤 1등을 하여 사단장 표창을 받았다. 그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저를 선처해 주신다면 분골쇄신 열심히 노력하겠노라고 했다. 아울러 나의 대한 제반서류 일체를 학교장께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제대 할 때가 되어도 학교에서 소식은 없었다. 나는 처와 자식의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겠기에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입사를 했다. 그곳에서 나는 정말 몸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일을 했다. 힘겨울 때는 시스포스의 신화를 떠 올리며 스스로 운명에 순응하며 헌신했다. 입사하여 한 달 간 연수를 받을 때 나는 학생장으로서 솔선수범 하였고, 그 회사의 이미지를 개선하느라 애를 쓰고 다녔다.
고향을 떠나와 그렇게 같이 살고 싶었던 병환 중에 계신 어머니를 제대와 동시에 모셨다. 가녀린 딸과 백일도 안된 아들 연약한 아내를 거닐은 가장이었으니 혼신의 몸짓으로 최선을 다하지 아니 할 수 없었다. 회사를 가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구두끈을 맬 때 코피가 떨어져도 외면해야 했다. 진종일 약국을 뛰어 다녀 발가락에 물집이 생겨도 오직 살아야 하겠다는 집념에 아픔도 잊었다.
나에게 몹시 시려 왔던 그해 겨울 아내를 뒤로하고 문을 나설 때 나 한사람의 고생으로 인하여 중풍으로 쓰러진 어머니와 아내 딸 아들이 따뜻한 방 안에서 편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죽음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각오를 하였다. 그리고 거래처 약사들에게 얼마나 면박과 조롱을 당하였는가. 어떤 때는 회사가 야속하기도 했다. 그당시 나의 생각은 약을 판매하는 약장사가 아니라 고통속에 신음하는 환자를 살려야 하겠다는 구원의 전달자로서의 사명 의식을 갖고 뛰었다.
그 고통의 긴 터널을 헤매고 망연자실하기 직전 제대 할 때 편지를 했던 학교에서 부대로 연락을 했다. 부대에서 조교들이 나에게 알려와 1983년 3월 벼랑에서 천신만고 끝에 교사가 된다. 처음 이 학교 교문에 들어 서서 솔밭을 스칠 때 왜 그리 마음이 평온한 지 그 상큼한 바람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만큼 군 생활의 어려움과 제대 한 후 회사에서의 고통으로부터 피안의 세계로 이끌려 온 듯한 환상에 사로 잡혀 행복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고생 할 운명의 사람은 어디에 가도 고통을 면하기 어려웠다. 여상으로 첫 발령을 받아 근무를 하는데 체육교사가 나 혼자인데다 왜 그리 할 일이 많은지 체력장이나 체육대회를 한번 치르고 나면 입술이 부르터서 말도 하기 싫었다. 그리고 육상선수들을 지도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시합에 나가서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날에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른 교사들은 방학을 즐기고 있는데 나에게는 쉴 수 있는 방학도 될 수 없었다. 그 혹한의 겨울 몇 시간씩 의지할 곳 없는 벌판같은 운동장에 홀로 서서 선수를 지도하였다. 매서운 추위에 발은 시렵고 얼굴이 터서 귀에 동상이 걸린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 교외지도와 행사를 담당하였기에 정말이지 힘들고 어려웠던 나날이었다. 오로지 살아야 하겠다는 집념으로 허우적거리던 시절 오랜 나날 중풍으로 일어 서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안타까움에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가. 그 가엾은 어머니를 여읜 아픔에 방황을 하다가 지쳐 버린 나의 영혼을 더 처절히 흐느끼고 있었다. 효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죄스러움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앙금으로 남아있어 뼈마디 206개의 관절을 몹시 쑤시게 한다.
어느 날 학생들을 지도하고 운동장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문득 돌아 가신 어머니가 하늘에서 수척한 나를 보고 계신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그럼 나는 이대로 살수 없지 않은가. 비록 어머니가 내 곁에 안 계신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지난 날 나를 위해 기도 하듯 나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신체적인 운동만 가르치지 말고 그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 가는데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도록 기도를 해 주기로 하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체육교사로서 수업시간 끝나기 1분 전에는 학생들을 위해 기도 할 것을 다짐하였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웃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장래와 건강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교사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이 졸업을 해서 고해의 바다라고 하는 이 세상 어느 하늘 아래에서 보금자리를 꾸미고 살 것이다. 내가 그들의 가슴에 심어 준 밀알 같은 기도는 싹이 돋고 성장하여 어려운 세상을 헤쳐 나가리라는 믿음 하나로 수업시간 마다 간절하게 기도를 해 오고 있다. 아무리 무딘 감정을 소유한 학생이라도 이젠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조금씩 깨닫고 있다.
1988년 3월 그 힘겹고 어려웠던 여상에서 중학교로 발령을 받는다. 우리 학교는 중고등학교가 5개 학교가 있었다. 학교 제도상 몇 년에 한번씩 교체하는 경우가 있어 여상에서 5년을 끝으로 모범교사 표창을 받고 남학생이 있는 중학교로 오게되었던 것이다. 정 들었던 여상을 떠난다는 서운함 보다 나에게는 홀가분하고 오히려 기쁨이 앞섰다. 5년 동안 그곳에서 혼자서 체육을 가르치느라 어찌나 고생을 하였던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시간이었다. 중학교에 오니까 체육교사가 4명이나 되어 업무도 상당히 줄었고 남학생은 가르치기가 여학생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였다. 축구시간에 공을 차는 것이 무엇 보다 즐거웠고 만족 할 수 있었다.
여상에 있을 때는 체육교사가 나 혼자였으므로 웬지 모르게 소외도 당했다. 더불어 외로울 때가 있었지만 이곳에 오니까 교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 무엇 보다 좋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 어머니를 여읜 아픔과 고향을 찾아 가야 하겠다는 집념이 무너 졌을 때 초라한 나를 더욱 허망하게 하여 길거리를 헤매게 하였다. 아울러 마음이 아파 몸부림 칠 때가 많았다. 나는 남중에 와서 체육을 할 수 없는 고정환자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한동안 고민을 하였다. 고심하던 중 운동장 옆 산 아래에 조그마하게 꽃밭을 일구어 꽃과 상추 호박 등 그 외의 곡식을 심어놓았다. 운동을 할 수 없는 신체 허약자들에게 체육시간에 풀도 뽑고 물도 주며 정성껏 가꾸라고 하였다.
얼마 뒤 상추나 호박이 무럭무럭 자랐을 때 그걸 따서 어머니께 체육시간에 네가 심고 가꾼 것이니 갖다 드리라고 했다 그 다음 날에는 상추나 호박을 어떻게 먹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생각보다 건강을 빨리 회복시켜 정상적으로 운동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환자들 가운데 특히 자폐증으로 말 한마디 안 하는 학생이 있었다. 나는 그와 같이 꽃과 채소를 가꾸면서 대화를 시작하였다. 그날 이후 그의 우울한 표정을 조금은 밝게 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간혹 웃음을 선물하기도 한다. 나는 그에게 이 다음에 너는 꽃이나 채소를 가꾸며 살라고 했다. 체구도 작고 힘도 없고 말이 없는 그가 어른이 되어 해야할 일은 꽃이나 채소를 키우고 가꾸는 일이 적합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교직생활 10년을 하는 동안 문제아들을 많이 보았다. 그 애들을 볼 때마다 지난 날 내 모습을 보는 듯하여 그들 편에 서서 옹호하려 애를 쓰고 있다. 체육교사이지만, 어느 경우에라도 학생들을 굳이 때리려 하지 않은 이유는 매는 지속적인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아들을 살펴보면 결손 가정의 학생이 대부분이고 말썽을 피울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 학생들은 외롭기에 어느 누군가에라도 자신을 위로 받으려하나 아껴주고 달래 줄 이가 없을 때 욕구불만이 쌓여 사고를 내는 것이다. 나는 혹시 그들이 그릇된 행동을 할까 마음을 조리며 불만족의 욕구를 운동으로 발산시키려 애를 쓴다.
만의 하나 학생이 어긋난 행동을 했다면 교사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실수한 그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는 부모의 심정으로 학생을 지도해야 진정한 스승이라 말할 수 있다. 가끔 졸업한 학생들이 나를 찾아 오는 경우를 살펴보면 우등생이 아니라 그가 문제아였을 때 그래도 관심을 가져주고 타일렀던 학생들이었다. 그들이 내가 보고싶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를 그만둔 제자들이 여러 명 찾아와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상담하려는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교사로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며칠 전 학부모님이 나를 찾아왔다. 작년 졸업생의 어머니라고 밝히며 아들의 장래를 위해 조언을 부탁하시는 거였다. 그 학생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어찌나 순진하고 천진했는지 그를 길에서 만나면 오히려 내가 얘기하고 싶어 불러서 앉혀놓고 이야기를 하고는 하였다.
그는 내가 담당하는 보이스카웃트 회원으로 솔선수범 교통지도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누구보다 충실하게 실행하였다. 내 자신이 교사이지만 교사를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다. 공부 잘하고 순종하는 학생은 모범학생이고 말썽이나 피우고 공부 못하는 학생은 꼴도 보기 싫은 문제아로 보고 있다. 그것이 우리 교사의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과오는 아닐는지 한번쯤은 냉정히 집고 넘어 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내가 그 학생을 3년간 솔선수범한 공로를 인정해 졸업식에서 반장과 함께 그에게도 표창을 주기로 하였다. 그 표창은 하달되었고 시상을 해야할 즈음 웬지 이상함을 느꼈다. 그가 몇 번인가 교무실에 불려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선생님께 야단을 맞는 것을 보았지만 담임까지도 그의 상을 취하하기를 원했다는데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담임이라면 애를 써서라도 그 학생에게 상을 받게 하여야 하는데 내가 들고 있던 상장과 상품이 나를 무색하게 하였다.
그때 나는 이렇게 변론을 했다. 설사 그 학생이 다른 분야에서 뒤지고 잘못했다 하더라도 하나의 중요 부서인 보이스카웃트에서 충실했다고 하면 상을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담당교사는 시상는 할 수 없고 나보고 슬며시 건네주라는 것이었다. 나는 교사로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간신히 설득해 교무실에서 교장 선생님이 수여하게 하였다. 그 학생은 계면적은 눈빛으로 표창을 받고 졸업을 하였던 것이다.
나의 뇌리에서 그는 서서히 잊혀졌고 그가 졸업한지 일 년이 다가오는데 그의 어머니가 찾아와 늦게 나마 인사를 드린다는 거였다. 정말 고마웠노라고 하면서 아들의 장래를 위해 한마디 조언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나는 서슴없이 말하였다. 아들만큼 착한 아이는 없습니다. 그 애가 문제아로 선생님들 눈밖에 난 것은 그가 못된 마음으로 어긋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학생보다 몸에 힘이 있어 자신은 장난을 하는 건데 상대방 아이는 그게 귀찮고 싫어 담임 선생님께 일렀습니다. 그런 일로 교무실에 몇 번 불려오다 보니까 몇 분의 교사들이 선입견을 좋지 않게 본 것밖에는 더 이상도 이하도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힘없이 공부만 하는 아이보다 어머님의 아들이 조국을 위해 필요한 아들이며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아들이라고 믿어 봅니다. 어머니께서 어느 종교를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한가지 부탁을 드리면 그 생명보다 소중한 아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희생의 기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는 아들을 훌륭하게 만드는 초석이며 결정체니까요. 만의 하나 아들에게 문제가 있으시면 언제든 지 도와드리겠노라 하고 어머니를 돌려보냈다.
나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 셨는가.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러 나갈 때면 벌써 일어나셔서 단정히 하시고 진심으로 기도를 하신 분 아니셨던가. 나는 그 어머니께 반찬 투정을 하였고 불효만 거듭해 속을 상하게 해드리지 않았던가. 내가 철이 들어 효도해야 하겠다고 생각할 때는 기력이 다하여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기나긴 날 병고에 시달리었다. 내가 군대에서 제대한날만을 손꼽아 애태우시던 어머니 아니셨던가 힘겨운 군 생활에서 눈치보며 주일날 외출 나와 다리 저는 어머니를 부축하고 교회로 향할 때 내 가슴은 얼마나 찢어지고 아파했던가. 제대 후 삭막한 세상 어느 곳에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노환으로 고목 같은 어머니와 어린 딸과 아들을 데리고 처가 집에 들어가 장인어른의 신세를 져야 했다. 그 어려웠던 시절의 회환으로 내가 나를 얼마나 처절히 방황케 하였는가.
간혹 학생들이 체육시간에 다쳤을 때 얼마나 가슴아파 하였는가. 다친 학생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끝내 병원으로 후송 할 때 나는 내가 지은 죄가 많아 제자가 이런 일을 당했지 하면서 내 자신을 얼마나 나무라고 탓했던가. 학생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들에서 양치는 목자처럼 한눈 팔지 않고 불꽃같은 눈으로 얼마나 살폈던가. 그들이 혹시 잘못된 길로 갈까봐 시간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던가. 이 만추에 계절 고향을 떠나온 지 20년은 지나갔다. 그 긴 여로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인지 정리를 해야 했다.
대학생활과 군 생활에서 10년 그리고 교사로서 10년 해서 20년이 흘렀다. 그 가운데 특히 가엾은 어머니를 여읜 아픔에 나의 영혼 끝없이 허공을 헤매이다가 어머니의 7주년 추도식 91년 10월에 어머니의 영혼의 음성을 들었다. 그 때 영감을 얻어 느낀 그대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시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92년 1월말 「어머니,나의어머니」라는 제목의 첫 시집을 어렵사리 내어서 어머니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드렸다. 그 뒤에서도 시를 쓰는 작업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떠나온 고향과 돌아가신 어머니를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93년 6월 「잊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입니까」의 2집을 발간하였다. 3개월 뒤인 9월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시로 승화 제3집 「그래도 그때가 아름다웠어라」를 발간하여 주변 사람들을 조금은 놀라게 하였다.
체육교사로서 시를 쓴 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무언가 이 세상에 남겨야 한다는 의지가 시 쓰는 작업을 계속하게 하였다. 가을날 곡식마다 제 모습을 자랑할 때 살아생전 나의 어머니는 농사를 지은 것 중 가장 좋은 것으로 선별하여 이 가을 추수감사 예배에 겸손히 바쳤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해가 거듭 될 수록 인간도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지혜를 통해 알았다. 한해를 보내며 내 자신이 이렇다하게 열매맺은 것이 없으면 몹시 가슴아파 하고 괴로워 몸부림 쳤던 것이다.
20 년 전 고향을 떠나올 때 확고부동한 위치를 설정하여 떳떳이 찾아오겠노라고 다짐했던 기억을 잠시도 잊을 수 없어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비록 올해도 고향을 찾지 못했지만 아니 영원히 찾아 갈 수 없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아울러 교직은 성직다음에 천직이기에 수도승과 같이 자신에게 냉정한 규율로 수업하지 아니하면 후회하고 만다. 자기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속에 묻혀야 수많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 듯 제자들에게 신명을 받쳐야 한다. 이 조국의 영원한 발전을 위해 기꺼이 한목숨 희생해야 한다. 이 해를 보내며 그래도 책의 해에 시집 2권을 세상에 내었다. 결실의 계절에 제 모습을 한껏 자랑하는 곡식들에게 죄스럽지 않았다. 아울러 내가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시 한 수를 읽어주므로 조금이나마 존경받는 교사가 되어서 참으로 기쁘고 즐겁다.
교직생활 10 년 동안 내가 내 자신에게 고마운 것은 결근이나 지각, 조퇴를 한번도 하지 않고 충실히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직생활 10년을 보내고 며칠 전 심하게 아팠던 3박4일은 왜 그리 아프던지 고막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으로 잠을 못 이루었다. 아무리 의지와 신념이 강하다 하더라도 결근을 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내 자신이 교사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안 된다는 책임의 자책으로 간신히 출근을 하여 임무수행을 감당하였다.
지금까지 신앙인으로써 자신을 위해서는 좀처럼 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얼마나 아팠으면 교회 십자가를 보며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였겠는가. 그리고 앞으로의 삶은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다짐을 하였다.
이번 아픔의 고통으로 인하여 술․담배와 그 외에 좋지 않은 모든 것들을 멀리 하겠노라 다짐하였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듯 나는 이번의 질고로 인하여 엄청나게 뉘우쳤고 깨달았다. 죄사함의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이제 글을 마무리 해야 하는 시점에서 나의 시 하나를 지면에 실으려 한다.
잊을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쓴 시다.
고 향
감꽃 위에 여린 이슬 맺히고
앵두열매 산들바람에 익어
옥잠화 향기 눈을 스치던
그곳을 어찌 날 보고 잊으라십니까.
눈부신 햇살 머리에 이고
쉼 없이 밭을 매는 어머니
땀방울 흘러 옷깃을 적시던
그곳을 어찌 날 보고 잊으라십니까.
해지는 들녘 황혼이 지면
어두움에 겁먹은 송아지
목을 늘여 울음 우짓던
그곳을 어찌 날 보고 잊으라십니까.
새벽기도 아버지의 종소리
게으른 영혼 일으키고
생각마다 울컥 가슴 저미는
그곳을 어찌 날 보고 잊으라십니까.
꿈속에서도 차마 잊을 수 없어
베갯잇을 흠뻑 적시고
뒤척이다 한 걸음에 달려가고픈
그곳을 어찌 날 보고 잊으라십니까.
끝으로 10년 전 군 생활 할 때 편지 한 통으로 이 학교에 불러 주신 선생님과 나를 지금까지 도와주신 고마운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아울러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 글을 쓸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글을 마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