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 문법적인 해석으로는
I saw Cathy feed a dog.
난 Cathy가 개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봤다.
에서 to feed를 안 쓰는 이유는 Cathy라는 개체와 Cathy가 feed하는 동작이 동시에 감각되기 때문이다. 즉, to를 쓰면 Cathy가 feed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져서 Cathy라는 분리된 개체가 feed라는 동작 쪽으로 다가가는 느낌이 강해진다. 하지만 눈을 통해 바로 아는 작용[see, 안식(眼識)]에서 Cathy와 Cathy의 feed함은 동시에 포착되는 한 덩어리의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feed를 쓴 것은 동영상적이다. 즉 개에게 먹이를 주는 과정[feed]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동영상을 찍듯이 추적하여 다 봤다는 뉘앙스가 강해진다. 이에 비해
I saw Cathy feeding a dog.
난 Cathy가 개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것을 봤다.
은 전체 과정이 아니라 개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중인 한 장면을 사진처럼 포착한 것이다. 개에게 먹이를 주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feed] 보았다는 동영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먹이를 주고 있는 과정 중의 한 순간[feeding]을 스틸 사진으로 포착한 것이다.
saw에 딸린 동영상적인 포착[feed]이든, 스틸 사진과 같은 순간 포착[feeding]이든, 목적어[Cathy]와 목적보어[feed/ feeding]가 분리없이 바로 한 덩어리로 시간 간격 없이 바로 포착되고 있다는, 즉각적인 감각의 뉘앙스가 이 to 없는 원형동사/현재분사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감각을 나타내는 동사 뒤에 that S V-[that 주어 동사]구조가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that S V-에서 that은 동사를 받아서 ‘그(that) 주어가 동사하다(는 것),’‘주어가 동사하다는 그것’이란 뜻이 되고, 정식 주어[S, subject]와 정식 동사[V, verb]가 들어가서, ‘주어가 동사하는 것을 개념적 파악을 거쳐 주어와 동사가 들어간 문장으로 상황을 생각해서 이해하다’는 뜻이 된다. 즉 감각은 아니라 ‘주어-동사 단위체로 생각을 굴려 파악하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중세영어 때 광범위하게 등장하여 주어 동사 단위체를 ‘주어가 동사하다는 그것’이란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한때 천하통일한 that S V-는 예컨대 다음과 같이 쓰였다. 구약에서 모세는 엄청난 깨어 있음 속에서 주위가 환해져 떨기나무가 엄청난 빛을 뿜지만 타지 않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는데 야훼가 나타난다. 출애급기 3장 14절에서 야훼는 모세에게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물론 히브리어의 King James Version 영어 번역이다.
I AM THAT I AM.
‘I am that I am.’을 어떻게 해석할까? that은 I am을 명사로 만들어 준다. 즉 that I am은 명사 역할을 하는 것, 명사에 준한 것이므로 준명사라고 해보자. be 동사 뒤에 준명사가 오면 명사가 올 때처럼 ‘준명사이다’의 뜻이므로 이 문장의 해석은 ‘나는 that I am이다’가 된다.
그러면 that I am은 무슨 뜻인가? I am은 ‘내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있다’를 명사로 만들면 무엇이 될까. 장현철의 ‘걸어서 하늘까지’를 들으면 45초쯤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하루를 살 수 있었던 건
네가 있다는 그것
‘네가 있다는 그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네가 있다’(you are)는 ‘그것’(that), 즉 that you are다. 그러면 that I am은? ‘내가 있다(I am)는 그것(that)’이다. ‘야훼’란 이름 자체가 am[내가 있다]를 뜻하는 ‘하야[היה]’에서 왔음을 주목하라. ‘야’는 ‘that’정도가 아닐까? 있음의 하느님 야훼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I AM THAT I AM.
나는 내가 있다는 그거니라.
나는 (바로) 그 ‘내가 있노라’이니라.
나는 나 있음이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내가 있노라’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고 하라.
‘나는 내가 있다는 바로 그거니라,’ ‘나는 “내가 있노라”라는 바로 그거니라’가 좀 더 와닿는 실감 나는 번역이라고 본다.
그러면 감각 동사로 쓰이던 것이 ‘that 주어 동사’를 만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see’를 에센스 영한사전(2002년 판)에서 찾아보자.
He didn’t see (that) she was foolish.
그는 그 여자가 바보라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어리석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센스 영한사전 번역>
‘그 여자가 바보라는 그것’은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어 동사> 단위로 머리를 굴리고[생각하고] 숙고하거나 추론해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that 주어 동사’를 아는 것은 더 이상 시간 간격 없이 바로 알아차리는 감각이 아니게 된다. 감각동사로 쓰이던 동사가 that S V-와 연결되어 쓰이게 되면, ‘감각한다’뜻이 아니라 스토리의 기본 단위인 문장 단위의 내용을 '이해한다/안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 좀 더 지적이고 머리로 주어 동사 개념을 굴리고 시간이 걸리는 인식, 즉 생각을 거쳐서 아는 작용이 되는 것이다. hear의 경우도 hear that S V-를 쓰면 ‘S V-하다는 것을 들어서 알다/ 소문으로 듣다’의 뜻이 된다.
I hear (that) he was married.
나는 그가 결혼했다는 그것을 소문으로 들어서 안다.
그는 결혼했다고 한다. <에센스 영한 사전의 ‘hear’ 항목 예문 번역>
‘그가 결혼했다’는 문장 단위의 소문[所聞, 들은 바]을 귀로 듣고 머리로 파악하는 시간을 거쳐서 문장이 된 소문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귀를 통해 바로 아는 것[hear, 이식(耳識)]이 아니다.
그래서
눈을 통해 바로 아는 것[see, 안식(眼識)], 귀를 통해 바로 아는 것[hear, 이식(耳識)] 등 오감을 통해 감각대상과 감각 대상의 동작이나 상태를 거의 시간 간격[to]이나 주어-동사 단위체[that S V-]의 파악 없이 바로 아는 것[전오식(前五識)] = 오감을 통해 바로 느낌 = 감각
주어가 동사한다는 그것(that S V-)을 아는 것 = 지적(知的) 파악 = 주어 동사 단위체를 생각해서 아는 것
영어에서는 이 두 가지, 즉 ‘개체와 개체의 동작/상태를 한 덩어리로 바로 알아차리는 감각’과 ‘주어 동사 단위체로 생각해서 앎’을 구별하게 되었다.
첫댓글 여기서 주의할 것은 that I am으로 명사처럼 쓰는 용법은 현대 영어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루를 살 수 있었던 건/ 네가 있다는 그것”에서 “That you are” 단독으로는 현대 영어에서는 부족해 보인다. “That you are around me”정도가 현대 영어에서도 시적(詩的)으로 받아들일만하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시적으로 “That you are around me helped me to live day by day.”라고 하면 분위기에 따라서 아직도 괜찮게 받아들여지는 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That you are around me”가 문법적으로는 아직도 완벽함에도, 여전히 17세기적 표현의 냄새가 진하다. 우리로 치면 “나랏말ᄊᆞ미 듕귁에 달아”로 들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일상에서는 “being around”정도가 보통이다. “Your being around made me live day by day.”나 “Your being around helped me to live.”, “Being as you were helped me to live.” 정도가 현대 영어에서 일상적인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