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6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마르 10,28-31)
복음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충실한 영성 생활의 결과는 기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그리고 제가 사목하고 있는 피정 센터에서 추구하는 사목 방침이랄까 방향성이 있다면 그것은 기쁨에 찬 충만한 신앙생활입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 가급적 기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기도도 기쁘게, 봉사도 기쁘게, 사목활동도 기쁘게,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 매일의 삶이 흥미진진하고 은혜롭습니다.
저희 피정 센터 프로그램 중에 깔깔쇼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피정 센터 모든 수도자들이 총동원해서 한 시간 내내 피정 오신 분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시간입니다. 나이 지긋한 수도자들이 자신을 망가트리면서 온몸과 마음을 다 바치니, 그 모습이 그렇게 신선한가 봅니다.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영성생활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내 신심생활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가? 내 신앙생활이 주님의 제자로서 바람직한 것인가?’ 많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이라는 단어입니다.
지금 심연의 고통 속에서도 기쁨에 찬 기도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영성생활 잘 하고 계십니다. 갖은 시련 속에서도 기뻐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신심생활 잘 하고 계십니다. 끝도없는 역경 속에서도 기쁨으로 충만한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신앙생활 잘 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신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돈보스코와 더불어 ‘기쁨’을 삶의 모토로 삼은 성인이 한분 계시는 데, 바로 성(聖) 필립보 네리 사제(1515~1595)입니다.
돈보스코(1815~1888) 보다 꼭 300년 앞서 태어나셨고 사셨지만, 모토, 영성, 생애의 싱크로율이 거의 99.9 퍼센트입니다. 두 분 다 평생토록 염두에 두셨던 모토는 “기쁨 속에 주님을 섬기십시오!”였습니다.
두 분 다 선택하신 성경 구절은 이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필립비 4장 4절) 두분 다 그렇게 아이들을 좋아하셨고, 아이들을 위해 생애 전체를 바치셨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36세 되던 해에 사제로 서품되셨는데, 당시로서는 꽤나 늦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사목자로서의 탁월한 그의 덕행은 사제가 되기 위한 꿈을 꾸기 훨씬 전부터 잘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성품, 호탕하고 쾌활한 성격, 탁월한 매력과 호감의 소유자였던 젊은 시절 필립보 네리는 발길 닿는 곳마다 폭풍 인기를 누렸습니다. 틈만 나면 아이들은 그를 뺑 둘러쌌습니다.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그와 함께 있기를 즐겼습니다.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그의 이야기에 쫑긋 귀를 기울였습니다. 깊이있는 그의 영적 말씀에 큰 감동을 받고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1551년 사제가 된 이후에도 필립보 네리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웃들을 향한 강렬한 사랑, 한결같은 겸손, 탁월한 유머감각, 검소한 생활이 똑같았습니다. 사제가 된 그에게 착한 목자로서의 여러가지 덕행들이 추가되니,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떴다 하면 즉시 수많은 사람들로 삥 둘러쌓였으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영과 존경을 받았으며, 잠깐이라도 더 함께 있기를 원했던 필립보 네리 신부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 우리들의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사목자로서 대상자들로부터 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딘가 나타나면 양들의 얼굴이 환해지고, 기뻐합니까? 양들은 우리가 너무 좋아 조금이라도 더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합니까?
유머감각은 덕중에서 아주 큰 덕입니다. 기쁨 역시 성덕의 여정에 아주 중요한 덕입니다. 기쁨은 여러 그리스도교 덕행 가운데 아주 향기로운 덕행입니다. 기쁨은 가장 두드러진 성성(聖性)의 한 표현입니다. 울적한 성인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충실한 영성 생활의 결과는 기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상의 기쁨을 주님 안에서의 기쁨, 영적인 기쁨으로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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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현세에서 무엇이든 100배로 불리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과 복음 때문에 집과 부모, 형제와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그 모든 것의 100배를 받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이런 것들의 100배를 누리는 사람이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사람이란 뜻입니다.
저는 분명 돈 걱정도 없고 가족도 수천, 수만 명이 된 것 같고 잘 집도 많아서 이 말대로라면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처럼 기뻐 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그렇냐는 게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보면 악한 사람들이 더 부유하게 살고 선한 사람들은 더 가난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대로라면 부자들만 구원받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오히려 부자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주님과 복음을 위해 내어놓은 만큼 복을 받는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냥 상징적인 의미일까요?
저는 현세에서도 분명 그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가난해도 부유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위 친구와 가족들이 많아도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고 혼자 살더라도 진짜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땅이 아무리 많아도 가시방석에서 자는 것과 같은 사람이 있고 아무 곳에서도 집처럼 잘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본인만이 알 수 있는 구원받은 표징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약속을 지키십니다. 가난해도 부족함 없이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구원받은 표징이고 부유하더라도 외롭고 불만족하게 살면 구원받지 못한 표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성경의 룻기에서 발견됩니다. 룻은 모압 땅에서 온 타국인 여인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룻의 남편, 처남, 시아버지가 모두 죽고 룻과 동서와 시어머니 나오미도 과부가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했을 때 처음에는 며느리들에게 새 남편을 찾고 안락한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더 높은 모압에 머물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와 함께 살기 위해 고국에서 재혼할 기회를 포기했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룻은 나오미의 죽은 남편의 부유한 친척인 보아스의 밭에서 보리를 줍기 시작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친족 구속자, 즉 곤경에 처하거나 위험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친척을 대신하여 행동할 특권이나 책임이 있는 친척임을 인식했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인도하여 보아스에게 접근하여 그녀와 결혼하고 가계를 이어감으로써 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위험했습니다. 룻은 그녀의 미래를 보아스의 손에 맡기고 있었고, 그는 그녀를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거부할 권리가 있는 더 가까운 친척과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당시의 법률 내에서 그렇게 했음을 먼저 확인하면서 영광스럽고 동의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오벳은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되어 룻을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에 두었습니다(마태복음 1:5).
사랑은 신기하게도 받으면 주어야 한다는 양심을 발동시킵니다. 나오미는 잠시 자기 가족이 되었던 이방 며느리가 자신에게 그렇게 충실한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은 보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보다 훨씬 부유한 집안에 시집을 보낼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을 도로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은 받은 것은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양심 안에 넣어진 정의의 저울입니다.
사랑은 이 양심을 작동하는데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사랑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랑은 반드시 보답받습니다. 사랑의 본성이 보답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복음말씀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