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먹어가면서 음식도 코다리 찜이나 수제비, 우렁이 쌈밥, 낙지 요리 등등 담백한 것을 찾는 것 같아요. 소싯적에는 돼지 국밥을 최고의 음식으로 먹었고 언제부턴가 꽃등심-민어회-육 사시미를 좋아하고 있더이다. 요새는 주 1회 이상 소 곱장이 땡기는 것 같아요. 내장장은 소의 내장(천엽-곱창)을 주 재료로 한 레시피인데 고춧가루를 넣어 빨갛게 나오는 양평 해장국과 화이트로 나오는 이남장 내장탕 두 종류를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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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양념이 많이 들어간 양평 해장국보다 담백한 이남장 내장탕이 더 맛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디우와 하이데거의 '존재론'처럼 주체-존재-진리가 왔다 갔다 할 만큼 가깝고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고, 바디우의 존재론(이과-뺄셈)과 하이데거의 존재론(문과-뎃셈)은 양평 vs 이남장의 차이가 난다는 것 아닙니까?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비움'이며 '자기부정'이야 말로 크리스천의 숙원사업입니다. 바디우의 뺄셈 '존재론' 역시 담백한 내장탕 철학의 진수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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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란 곧 존재다' 살다가 '공백'(사건)을 만나거든 존재의 공백을 바로 봉합하려고 애쓰지 말고 사건을 처절하게 파악-해석해서 새 창조로 나아가라. 이때 기 '존재'는 유한성의 구조에 얽매에 있는 상태로, 주체가 '무한성'의 구조로 뚫고 나가려고 하지 않으면(공백을 봉합 하면) 의미가 없고, 사건과 부닥쳤을 때 기 '존재'에 저항하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진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쾅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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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사건과 맞부닥치면서 주체가 '진리'를 포착하고 '진리'는 주체와 연동하게 됩니다(진리는 주체 없이 혼자 존재 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진리'를 페어로 다루는 반면, 바디우는 주체와 '진리'를 연관시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오늘은 '진리'가 주제입니다. 바디우에게 '진리'란 무엇인가? 현실의 질서를 깨뜨리는 공백을 통해 출현하는 사건이 바로 '진리'입니다. 공백 자체가 아니라 공백 사이로 나타나는 사건이 '진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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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라캉주의적 '유령학'과 바디우의 철학은 서로 갈라집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텅 비어있는 공백이고, 바디우에게 '진리'는 '진리'-사건으로서 도래합니다. 한마디로 텅 비어 있지만 내용이 있다는 겁니다. 플라톤이 그랬듯이 철학자는 공백 속에서 '진리'를 창조하는,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개념을 창조하는 창조적 주체입니다. 텅 빔, 즉 공백을 고수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공백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라 공백 안에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존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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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존재이기는 예술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디우의 '진리'이론을 보면 '진리'를 산출하는 영역은 네 가지로 나뉘는데 과학, 예술, 정치, 사랑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이 네 가지 영역들에서 창조적 주체들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공백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진리'-사건으로서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철학은 공백 안에서 새로운 질서인 새 창조를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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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텅 빈 공백에 집착하여, 텅 빈 공백 자체를 '진리'화하는 라캉은 반-철학자로 보는 것입니다. 라캉이 보기에 철학은 환상들을 만들어내는 존재이기 때문에. 라캉에게 현실, 즉 모든 질서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한 것 같아요. 이것은 불교를 닮아있고 혹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떠오릅니다. 죽음 충동이란 텅 빈 실재로 곧바로 직진하려는 충동입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욕망 혹은 충동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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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은 철학과는 상관이 없는 심리적 현상일 뿐입니다. 철학은 그런 것과는 다릅니다. 철학의 진리에는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지금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철학적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텅 빈 실재를 봉합하고 기존의 질서로 은폐하는 것 역시 철학적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전자가 죽음 충동이라면 후자는 키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 충동(파괴)과 키치(은폐) 외에 제 3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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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파괴하는 것도 아닌,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 오직 이것만이 철학이고 또한 철학의 '진리'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인 것입니다. 바디우의 '진리'-사건은 당연히 철학적 '진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파괴도 아니고, 단순한 은폐도 아닌, 새로운 질서의 창조로서의 '진리'입니다. 철학자는 다들 이런 개념의 창조를 하는 창조적 주체들입니다. 라캉이 보기엔 환상을 직조하는 사람들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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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철학자는 단지 자의적으로 창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철학은 시대와, 세계를 떼어놓을 수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자신의 시대에 맞는 '진리'를 창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이나 다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점에서 철학적 '진리'는 구성주의적이지만 동시에 실체가 있습니다. 주관적인 주체의 창조물이지만 동시에 객관적인 필연성이 있다 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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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예공! 예술가 역시 텅 빈 공백을 폭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고 거기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인 것이다. 철학은 그것을 개념들로 하는 것이고 예술은 감각들로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야. 과거의 철학과 예술이 만들어낸 (또는 과학과 정치가 만들어낸) 질서가 현실이 되지. 그리고 그 현실은 시효가 만료되고 새로운 '진리'-사건이 공백을 통해서 출현한다. 거기서 철학자들은 개념의 창조를 시작하고 예술가들은 감각의 창조를 시작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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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푸코가 말한 에피스테메의 전환이야말로 공백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시대가 변해야 공백의 공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점에서 철학의 창조가 결코 자의적이 아니라는 말이 설명 돼. 공백의 공간은, 같은 맥락에서 '진리'-사건은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선 시대의 변화, 에피스테메의 지각 변동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 같구나. 때로는 그 지각 변동이 창조를 통해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말이야. 공백 안에서의 창조와 에피스테메의 지각 변동은 서로 꼬리를 무는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이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2024.10.7.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