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형을 잘 알고 있다.
나보다 2살 위다.
아주 오래 전에 이혼하여 혼자 살고 있다.
이혼한지 20년도 넘었으니 시간이 흘러도 많이 흘렀다.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두 청년들이 이젠 삼십대 초,중반이 되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며 따로 살고 있다.
K형의 형제는 2남1녀였다.
부모님은 K형이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셨다.
같이 가자고 했으나 본인은 극구 남겠다고 해서 4명만 미국으로 갔고 막내였던 K형은 홀로 한국에 남게 되었다.
물론, 조부모님이 곁에 계셨으니 '사고무친'은 아니었다.
훗날 내가 K형에게 "왜 가족들과 함께 떠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 당시엔 까닭 없이 미국이 싫었다"고 했다.
7080 시대에 각 대학에서는 엄청난 '반정부', '반독재' 시위가 줄을 이었다.
1년 365일 중 거의 5할 이상이나 최루탄 가스가 캠퍼스에 자욱했던 시절이었다.
매번 치열했고 눈물났다.
그때마다 학생들이 외쳤던 구호는 "정치군인 쿠데타 주역 전두환은 물러가라"였고 "양키 고 홈"이었다.
"양키 고 홈"을 목이 터져라 외쳤던 자신이었기에 그 당시엔 왠지 모르게 미국이 싫었다고 했다.
'전두환'과 '하나회'가 지들 마음대로 세상을 주물렀던, 암울하고 참담했던 시절이었다.
미국으로 이민간 가족들은 먹고 살기 위해 거의 안 해본 일이 없었단다.
수많은 눈물과 땀을 쏟았으며 치열하게 살았다고 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렀고 부모님은 조금씩 자리를 잡으셨다고 했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이 구축된 뒤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비교적 편안하고 안락한 노후를 보내셨단다.
그 말을 듣는 나도 다행이다 싶었다.
세상만물이 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세월을 비켜갈 순 없었다.
아버지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셨고 몇 년 후에 어머니까지 멀고 먼 세계로 여행을 떠나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문제였다.
오랜 세월 동안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부모님을 보살펴 드린 K형의 누나에게 부동산을 제외한 현금과 보석 등 상당한 규모의
'동산'을 전부 몰아주었다고 했다.
다만, 부모님 명의의 미국 '부동산'은 3남매가 각각 3분의 1씩 분할 상속할 것을 당부하고 눈을 감으셨다고 했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뜻에 동의했고 관련 서류에 싸인까지 해둔 상태였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동일했다.
서류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약속은 깨지기 일쑤였다.
한 때 굳셌던 언약은 대개 허망한 메아리로 전락할 뿐이었다.
그놈의 '욕심'이 문제였다.
장례를 치르고 형제들은 헤어졌다.
맨 막내인 K형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중간인 누님은 자신의 동네에 남았으며 장남은 수천 킬로 떨어진 동부로 날아 갔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부모님의 유언에 대한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고 원만한 재산 분할도 물건너가고 말았다.
K형의 누나가 부모님의 유언에 반해 부동산까지 독식하려고 법적인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한 형제는 크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상속법과 법 집행의 현실을 잘 알았던 장남은 간단한 절차와 서류 준비로 직접 소송을 걸어 자신의 '유류분'을 금방 찾아갔는데 이역만리 한국에 떨어져 있던 K형이 문제였다.
미국의 현실도, 법도, 절차도, 방법도 몰랐다.
장남으로부터 여러가지 도움과 조언을 듣기는 했으나 40여 년을 떨어져 살았던 형제였다.
한마디로 타인 같은 형제일 뿐이었다.
둘의 사이가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아닐진대 형제간에 얼마나 정과 신뢰가 남아있겠는가.
할 수 없었다.
'국제 변호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긴 법적 싸움에 돌입했다.
3년 간의 쟁송 끝에 승소했지만 부모님의 유류분 7-8억 중 그의 손에 들어온 건 겨우 4억뿐이었다.
나머지 유산은 이미 변호사 비용으로 들어간 뒤였다.
며칠 전에 K형으로부터 "얼굴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그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소주 3병을 나눠 마셨고, 식후엔 카페로 이동해 또 길고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허탈하고 마음 아프다"는 말을 몇 번이나 내뱉었다.
힘이 쭉 빠진, 드라이하고 지친 음색이 역력했다.
120%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형의 어깨에 내 팔을 감고 "그래도 우리는 아직 건강하니 힘내서 의미 있고 재미 있게 살자"고 했다.
K형도 힘없이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거렸다.
언젠가 그의 원룸에 갔었다.
형은 좀처럼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에게 전달해 줄 물품이 있었다.
'김장김치'와 내 고향에서 생산한 '햅쌀'이었다.
형을 알고 지낸 건 오래 되었지만 그의 원룸에 가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홀애비 냄새'는 나지 않았다.
청소를 신경써서 한 듯했다.
작은 참대 하나에 작은 책상 하나, 그 위에 데스크탑 컴퓨터 하나, 작은 씽크대와 2구짜리 작은 가스 레인지, 작은 냉장고, 작은 세탁기, 작은 옷장, 작은 청소기, 신발 몇 켤레, 등산용 빨간 배낭이 한눈에 확 들어왔다.
모든 것이 작고 단출했다.
"그럴 테지, 이순을 넘긴 사내, 게다가 '독고다이'니까"
나는 속으로 서글픈 정감을 씹어가며 읊조렸다.
그냥 짠했다.
말 못할 뭔가가 내 가슴팍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날 형에게 물품을 전달한 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서둘러 나왔다.
그 후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내가 직접 담은 담금주, 과일, 여행지에서 구입한 각 지방 특산물, 홍삼과 캔디 등등을 형에게 건넸다.
K형은 매번 미안해 했고 또한 고마워 했다.
우리 둘 사이엔 어떤 조건이나 거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무슨 복선이 깔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형이 좋았다.
그의 남다른 '휴매니즘' 때문이었다.
돈이 많은 것도, 어떤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비단이었고, 배려심이 깊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형은 언제나 자신의 회사에 제일 먼저 출근했다.
그리고 1층부터 3층까지 모든 공간을 자신의 방처럼 깨끗하게 청소했다.
한 달에 몇 번만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지금까지 거의 10년 이상, 그의 모습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누가 알아달라는 무언의 몸짓도 아니었다.
"그냥 감사한 마음에 그리 하고 싶다"고 했다.
사장도 아닌데 사장보다 더 사장 같은 만년 부장이었다.
이번에 미국에서 입금된 돈이 K형에겐 매우 중요한 '노후준비 자금'이었다.
그동안 주식으로 까먹었던 빈 곳간이 비로소 조금은 채워진 듯했다.
5월 하순에 과천의 '쓰리룸'으로 이사할 예정이다.
얼마만에 '원룸'을 벗어나는 것일까.
진정으로 기뻤다.
형에게 심심한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밤이 깊도록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대화 말미에 형이 그랬다.
"얼마간의 돈을 받아 솔직히 기쁘지만, 부모님이 하늘나라로 떠나신 뒤에 그놈의 욕심 때문에 형제들끼리 영영 타인이 된 듯하여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고 내 영혼이 황폐해 진 것 같다"고 했다.
그의 쓸쓸함과 안타까운 소회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헤어지려 할 때 형이 안쪽 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하나 꺼냈다.
"자기가 뜯어 보지 말고 집에 가서 꼭 제수씨에게 건네주소"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형과 다정하게 포옹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봉투를 건넸다.
아내가 개봉해 보더니 무척이나 놀라는 눈치였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하게 앉아 있었다.
거기엔 손글씨가 몇 줄 적혀 있었다.
"그동안 크게 표시나지 않게, 크게 부담스럽지 않게 보내주셨던 온갖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저의 작은 마음을 보내드리니 아무 말씀 마시고 잘 받아주세요. 늘 고맙습니다."
큰 봉투 안에 편지지가 있었고 그 밑에 또 작은 봉투가 들어 있었다.
그 안을 열어 보았다.
이마트 상품권 10만원 짜리 3장이 들어 있었다.
"아이고 K형.....이렇게 까지 안 해도 되는데요...."
나는 유구무언이었다.
5월 하순에 과천으로 이사가면 형 집안에 꼭 필요한 선물을 사들고 다시 찾아가려 한다.
빽이 없고 돈이 없어도 착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잘 살 수 있는, 그런 멋진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공정'과 '상식'을 들고 나온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은 이후론 자신의 말과는 정반대로 가는 참 기이하고 서글픈 세상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가 사는 날 동안 너무 욕심 부리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우리가 꼭 성직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짧은 인생, 서로를 돕고 섬기며 욕심은 내려놓은 채 예쁘고 투명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말이다.
본디 인생 자체가 웃으며 살고, 감사하며 살기에도 너무 짧은 여정 아니던가.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