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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지성사 - 2014년 6월, 이달의 소설에
『문학들』 2014년 봄호에 발표된 신인 작가 김덕희의 단편 「급소」
선정의 말과 인터뷰,
서프라이즈. 신예작가 김덕희는 아마도 서프라이즈의 새로운 ‘급소’를 찾은 듯하다. 전혀 예기치 않은 놀라운 전개, 전복과 재전복으로 탄력적인 서프라이즈 등 여러 면에서 소설 「급소」는 빛난다. 그런 서프라이즈를 작가는 매우 천연덕스럽게, 건조하다 못해 쿨하기까지 한 문장으로 빚어낸다. 그 결과 놀라운 사건들이 주밀하게 얽히고설키면서 각별한 인지의 충격을 준다. 아울러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서늘한 운명의 풍경에 대하여 오래도록 숙고하게 한다.
“자기네끼리 무슨 신호를 주고받는 게 아닌가 싶다”(「급소」, 『문학들』 2014년 봄호, p.172). 어쩌면 이 한 문장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이 환기하는 산문정신을 탐구하고자 김덕희가 그토록 서사적 궁리를 한 것이 아닐까. 열여섯 살 일인칭 서술자(장민호)는 이제껏 타자성의 영역으로 밀려난 삶을 살아왔다. “동물들에 대한 내 독창적인 묘사에 친구들은 늘 어딘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p.170).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는 늘 그 만큼의 거리에서 몸을 떨어야 했던 처지다. 태어날 때부터 아비 없이 지냈고,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늘 밀려나야 했다. 열여섯에 어머니로부터 밀려나 아버지에게로 온 그는 아버지로부터 밀려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아버지가 휘두른 골프채에 급소를 맞고, 존속(어머니) 살해 혐의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사람들끼리의 신호에서 배제된 채 밀려나 살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비극적 운명을 작가는 매우 서늘한 방식으로 탐문한다.
이런 운명에 대한 탐구의 의미론도 문제적이려니와 그 형상화 방식이 참으로 어지간하다. 거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이런 줄거리를 헤아리기 어렵다. 시종 서술자에 의해 ‘장’으로 불리는 인물(장정근)과 서술자 ‘나’가 부자관계라는 것도, ‘나’가 미필적 고의에 의해 어머니를 숨지게 한 다음 아버지를 찾아온 아들이라는 점도, 경찰이 찾아온 것이 아버지의 살인 사건이 아니라 아들의 살인 사건 때문이라는 점도 모두 결말부에서 서프라이즈처럼 밝혀지고 봉합된다. 그렇게 된 연후에야 독자는 앞부분에서 작가가 미시적인 실마리들을 아주 정교하게 매설해 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사태를 재해석하게 된다. “이건 진짜 짜릿하다”(p.178)는 느낌과 더불어 타자성의 변두리로 밀려난 비루한 운명들의 초상에 대해 역동적인 반성을 수행하게 된다. _우찬제(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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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적으로 모든 소설이 다 그렇겠지만, 김덕희의 「급소」 역시 우선은 ‘가족 로망스’의 변형으로 읽힌다. 편모슬하를 떠나 친부를 찾아나서는 문제적 주인공으로서의 아들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를 라캉 식으로 ‘상징계 진입’ 서사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어머니와의 이자적 관계를 끝장냈으므로(부친 살해가 아니라 모친 살해라니!), 소년은 늪돼지 사냥꾼 아비에게서(아비들의 세계란 항상 사냥꾼들의 세계가 아닐는지!) 이 냉혹한 세계를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소년이 진입 중인 상징계를 작가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주로 늪돼지 사냥 장면에 할애(소년이 진입해야 할 세계는 이처럼 잔혹하다)된 문장들이 지시하는 풍경이나 행위는 지극히 폭력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반면 그것들을 묘사하는 작가의 언어는 흥분하거나 과장하는 법이 없다. 목표물의 급소를 찾아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순식간에 내리치는 숙달된 사냥꾼의 망치질이 그와 같을까. ‘하드보일드’란 말의 전범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짧고 정확한 문장들이 텍스트를 마치 무슨 금속 재질로 이루어진 서판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만들어놓는다. 매 장면은 보기 드문 박진감으로 넘쳐나지만, ‘문장들의 감정 경제’는 끝까지 유지된다. 그 숙고된 차가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다스려야 했을지 헤아리다 보면, 신예작가 김덕희를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_김형중(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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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제목을 ‘늪돼지’로 착각하고 있었다. ‘급소’라는 제목을 다시 확인하고선 착각의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늪돼지’를 마치 내 손 안에 내장이 물컹하게 잡히고, 소름 돋는 피비린내가 금방 코끝에 끼친 것처럼 생생하게 감각화한 강렬함이 이 소설의 인상을 결정짓고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동물을 구체화한 실감보다 그것을 둘러싼 폭력의 즉물성이, 폭력을 가하는 주체의 무정함, 건조한 실행과 기계적 정확성이 실은 더 충격적이다. 이 때문에 ‘늪돼지’를 둘러싼 섬뜩함은 더더욱 배가된다. 살기(殺氣) 없는 폭력이야말로 가장 사악하다. 그것은 온갖 부정적 감정이 분출되는 폭력보다 주체를 진짜 괴물로 지목한다. 각종 사이코패스의 영화적 구현에서부터 홀로코스트의 재현 불가능한 무차별성까지, 살기 없는 폭력의 현실성이 우리를 충격과 혼란에 빠뜨리는 까닭은 예외성―범사의 일탈이라 할 수 있는 폭력 자체의 특수성―이 완전히 표백된 상태가 실제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력은 비(非)-인간의 존재 여부를 부인하지 못하게 만든다. 「급소」가 건드리는 문제적 지점은 죽여 마땅한 동물이 죽여도 좋다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 잔인하게 도살되는가라는 도덕적 질문이 아니라 그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폭력이 인간에 의해, 인간을 향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형태로 만연되어 상호간에 밀접한 연쇄성의 구조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예외 없이 모두 폭력의 주체다. 장, 장의 아들, 아들의 엄마, 그리고 늪돼지 포획에 연루된 커넥션의 일당과 아들을 검거하러 나선 경찰들은 피해와 가해의 구분이 무용한 세계를 만드는 중이다. 누가 죽든 살든 이들은 비(非)-인간으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인간’으로 살지도 죽지도 않으며, 연민도 없고 애도도 없다. 있는 것은 마땅히 실행되는 폭력뿐이다. 그러니 급소가 없는 ‘늪돼지’든, 급소투성이인 사람이든 이런 세계에서 급소의 존재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더 맞든 덜 맞든, 폭력의 양(量)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는 다만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을까? ‘늪돼지’가 수사적 은유이듯, 「급소」의 세계도 언어화된 알레고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몇 가지 허점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세계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급소’를 하드 보일드한 문체와 감각과 시선으로 둔중하게 가격하는 소설의 사실성과 진지함은 여러 근작 중 확실히 손꼽을 만하다. _강계숙(문학평론가)
이수형 이달의 소설 지면에서 김덕희 작가를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친분이 있긴 하지만, 인터뷰니까 서로 모르는 척할까요? 작년에 등단한, 그야말로 신인 작가인데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지금 출판 편집자로 일하고 계시죠?
김덕희 ‘친분’이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여러 ‘친분’들 가운데 저 끄트머리 어딘가가 저의 자리일 테니 저는 ‘경외’로 돌려드리지요. 말씀하신 대로 저는 데뷔 훨씬 전부터 출판 편집자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편집자 겸 소설가라고 소개를 올려야겠습니다. 이곳 한국 문학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근무한 지는 2년 반쯤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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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우문이지만, 편집자로서의 김덕희와 작가로서의 김덕희는 어떤 관계일까요?
김덕희 편집자로서는 읽고 싶고 읽히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쓸 수도 있다는 점이 좋고요, 작가로서는 초고를 읽어줄 사람이 0.5명 정도 더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구하는 중입니다. 0.5명이라고 한 이유는 직업상 글 앞에서 객관적이고자 해온 노력이 의미 있다손 치더라도 제 작품을 대할 때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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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이제 이번에 선정된 「급소」로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늪돼지 사냥이라는 독특한 소재가 먼저 눈에 띕니다. 일종의 유해조수 퇴치인데 흔히 떠올리는 황소개구리 포획 따위와는 달리, 진짜 사냥이라는 말이 걸맞은 긴장감과 폭력성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상상한 건가요?
김덕희 괴물쥐라고 불리는 뉴트리아가 늪돼지의 모델입니다. 뉴스에도 한동안 나왔고 퇴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짤막한 르포들도 있었어요. 거기서 소설의 뼈대가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괴물’로 낙인찍혀 사냥당하고 있는 뉴트리아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소설을 뒤덮고 있는 폭력성은 변명의 필요를 설득하는 장치 정도로 기능했으면 합니다. 아, 멧돼지에서 착안해 늪돼지라는 이름을 만들고 뒤져보니 늪너구리가 있더군요. 공교롭게도 늪너구리는 뉴트리아의 우리말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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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그 사냥은 인간 사냥이기도 하죠?
김덕희 물론입니다. 우리는 늪돼지가 박멸되더라도 분명히 제2의 늪돼지가 나타난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아무리 둘러봐도 늪돼지나 늪돼지스러운 게 보이지 않으면 본인이 늪돼지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하는 사회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무슨무슨 총량의 법칙’이라며 근래 유행하는 우스갯소리에 빗댄 얘기인데요, 그나마 이런 자조에서라도 건강한 공동체의 가능성을 엿보아야 할까요. 저로선 아직 버거운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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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급소」는 아버지와 아들의 플롯을 취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를 찾아온 아들에 관한 이야기죠. 가족 로망스에 대한 논의들에도 자주 나오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어른이 되고 또 사회 속에서 자신의 정당한 위치를 찾게 됩니다. 물론, 신화나 옛날이야기와는 달리 아버지가 왕이나 영웅이 아니라 늪돼지 사냥꾼이라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등단작이었던 「전복」에도 언뜻 스쳐지나간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관심이 많은 편인가요?
김덕희 아무래도 사랑하고 존경하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제 삶에 어떤 형태로든 계속해서 간섭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고1때 돌아가셨지요. 지금은 아버지의 삶을 복원해보는 방식으로 애도를 계속하고 있는데요, 제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기억은 자꾸 이상한 곳에서 머뭅니다.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바둑을 연속으로 지던 모습, 대중탕 샤워기 앞에서 등짝이 엄청 크고 넓은 아저씨와 비교되던 작은 체구, 왜 아들 이름을 여자애처럼 지어놓으셨냐고 따지자 어느 대통령의 이름을 참조하셨다는 무뚝뚝한 고백 같은 것들이 떠오른단 말이죠. 자가진단을 해보자면 제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나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보이는 인물들에 저의 이런 심적 상황이 투영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수형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나만 빼고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한 번쯤 써먹어 보고 싶은 어른들의 말이었다”와 같은 아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무튼 아들은 아버지를 일종의 롤 모델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반대로 아버지 역시 아들에 대한 애정이 없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아버지와 아들의 고전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 인물들 각각이 어딘지 묘하게 뒤틀려 있다는 데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나는 벌을 받을 거다. 그러니 넌 끼어들지 마라”라고 말하는 아버지는 모범 시민과 거리가 멀고,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보다 더 큰 죄를 지은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이런 것들이 제목인 ‘급소’가 뜻하는 바이기도 할까요?
김덕희 회복할 수 없는 과오의 대가를 아직 치르지 않았다면 급소를 안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한 급소를 누군가와 공유한다면 매우 견고한 결탁이 이뤄집니다. 상대방의 급소를 몸을 던져서라도 보호해야 내 급소도 보호되니까요. 그 지경까지 이르렀을 땐 서로가 서로에게 급소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아직 급소가 파악되지 않은 사람은 어떨까요? 외톨이가 되고 아주 큰 위험에 처합니다. 급소 투성이인 우리는 그 깨끗함 앞에서 불안에 떨기 마련이죠. 그는 이곳에 어우러질 수 없으며 영웅이 되거나 악마가 되어야만 합니다. 참담하게도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악마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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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연장선상에서 하나 더 질문하자면, 아직 많지는 않지만 김덕희 작가의 단편들을 읽으면 뭔가 고전적인 느낌을 받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덕희 제 별명 중에 ‘덕희 옹’이란 게 있습니다. 이십대 중반부터 거의 10년 가까이 듣고 있는 별명이에요. 하지만 아직도 전 정확히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짐작만 할 뿐이죠. 그게, 어쩌면 일종의, 굉장히 우회해서 표현하는 욕 같기도 한데 만약 그렇더라도 저는 그다지 싫지가 않네요. ‘옹’이 크림파스타를 고집하거나 빨간 바지를 입고 나타면 재밌지 않을까요? 그저 그런 추태일까요? 천천히 확인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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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쓴 작품보다 쓸 작품이 훨씬 많을 신인 작가에게는 이 질문이 더욱 중요할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인지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덕희 저는 여러 계기로 인해 신념을 최소화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당분간 제 작업은 이 우스꽝스런 신념을 확인하는 데 집중될 듯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지만 ‘뭘 하려고 애쓰는 게 가장 잘못하고 있는 짓’이라는 걸 체험한 자는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걸 얘기하려고 하면 부담을 느낍니다. 이해를 도와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등단작을 쓸 때 당장 소설가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스스로에게 아주 강한 최면을 걸어댔습니다. 정성스런 질문에 지루하고 모호한 대답만 늘어놓은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그래도 이번 선정에는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독자들을 더 많이 만날 기회가 생긴 것도 기쁘고요. 다시 뵙겠습니다.
무지막지한 공사 소음 속에서 살고 있다. 비싸고 성능 좋다는 방음창도 이 소음에는 한심한 물건이 되고 만다. 그라인더가 쇠를 끊고 드릴이 땅을 깨는 굉음이 잠시도 쉬지 않고 뇌를 뒤흔든다. 도무지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소리도 끼어든다.
사람들이 지구의 통점을 함부로 건드린 건 아닐까.
「급소」를 쓰는 내내 늪돼지에게 미안했다. 아무도 급소를 모르기 때문에 위험한 존재였다. 그래서 매질은 늘 몸의 모든 통점을 가격하고서야 멈췄다.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 늪돼지가 가느다랗게 눈 겨우 뜨고 물어왔다. 이제 끝났냐?
급소를 하나 더 만든 기분이다. 이제 던져주신 한 겹으로 부끄러움만 얼른 가린다.
김덕희 소설가,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