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7일 째입니다. 시간도 많아졌고 로드 맵도 다 정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마냥 좋지만은 않을까요? 여행을 다녀 온 후 흐트러진 주체를 다 잡는 나만의 방법은 글쓰기-운동-먹방같은 루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트래킹을 나갔다가 힘센 돌문어 하나를 사들고 들어와 알려준 대로 끓는 물에 15분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삶았어요. '다니엘과 세 친구' 생각이 났고, 잠깐 문어가 불쌍했어요. 죽고 다시 태어난 문어는 오징어-주꾸미-낙지-문어 중에 존재감으로 단연 대장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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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디우 형님의 '존재와 사건'의 대장정을 끝내려고 합니다. 라캉의 '실재', 바디우의 '공백', 들뢰즈의 '혼돈', 니체의 '심연', 하이데거의 '허무', 헤겔의 '밤', 카뮈의 '부조리', 사르트르의 '구토', 이것들은 이 세계의 진리일까? 알랭 바디우는 플라톤을 모범으로 삼아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구축한, 우리 시대의 거의 마지막을 이루는 고전적 철학자입니다. 독특한 것은 통상의 철학자들과 달리 바디우가 수학을 토대로 삼아 자신의 존재론을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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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의 대표작 ‘존재와 사건’(1988)이 수학, 그중에서도 ‘집합론’에 바탕을 두고 축조된 철학적 구조물입니다. 바디우에게 수학은 자신의 철학을 구성하는 골조이자 과학 영역을 떠받치는 기반입니다. 바디우는 자신이 출생도 하기 전부터 수학과 인연을 맺었다고 이야기해요. 아버지가 수학을 사랑하는 수학교사여서 태중에서부터 수학에 관한 대화를 무수히 듣고 자랐고 중학생 시절에 벌써 수학적 증명을 스스로 해낸 뒤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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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수학이 주는 희열을 잊지 않았어요. 흥미로운 것은 바디우의 수학에 대한 사랑이 젊은 시절 사르트르 철학에 대한 사랑과 함께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르트르의 ‘철학적 낭만주의’는 수학을 전적으로 무시했지만, 바디우에게 사르트르는 ‘철학의 스승’이었어요. ‘확신에 찬 사르트르주의자’로서 바디우는 철학이 ‘사회에 참여하는 주체’를 창출해야 한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수학의 사도로서 철학과 수학이 통합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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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과 ‘주체’라는 이 분열된 두 힘을 하나로 결합하려는 시도는 노벨문학상 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체적으로 오늘날 철학은 수학과 거의 무관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노 노, 바디우는 그런 통념을 단호히 부정해요. 서양 사상사를 돌아보면, 수학과 철학이 한 몸에서 태어나 친밀한 관계 속에 자랐음을 알 수 있어요.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 해석기하학을 창시했고, 라이프니츠는 미분방정식을 발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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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의 동시대인 스피노자는 주저 ‘에티카 윤리학’을 유클리드 기하학의 증명 방식을 모델로 삼아 구성했어요. 한 세기 뒤 칸트도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비판철학’에 수학이 필수적이라고 확언합니다. 철학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철학과 수학의 밀접한 관계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학교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면 누구도 여기 들어올 수 없다’라고 써 붙였어요. 이때의 기하학, 곧 수학은 인간의 ‘합리적-이성적 추론 능력’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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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증명은 어떤 종교적·정치적 권위로도 무효화 할 수 없고 오직 이성에 합당한 반증을 통해서만 논박될 수 있어요. 신의 계시도 왕의 명령도 수학에서는 통하지 않아요. “수학자는 신화나 종교의 전제에서 풀려나, 증명의 형식을 취하는 보편성을 처음 도입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이성의 힘을 믿는 수학은 모든 인간은 본디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정신과 병행합니다. 그렇다면 수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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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는 수학이 무엇인지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크게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한다고 말해요. 하나가 실재론적 관점입니다. 수학은 우리의 인식 바깥에 실재하는 것들과 관련을 맺고 있어요, 수학은 실재하는 모든 것의 보편적 구조에 대한 연구에요. 요컨대, 수학에서 말하는 수리 나 법칙은 실재합니다. 모르긴 해도 플라톤이 바로 실재론의 대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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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본질에 관한 두 번째 관점은 형식론적 관점이에요. 수학의 대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논리적으로 고안한 허구적 형식이라는 겁니다. 수학을 일종의 ‘언어 게임’으로 본 비트겐슈타인이 형식론의 대표자입니다. 바디우는 대다수 수학자들과 함께 단호하게 실재론을 옹호하는 쪽에 섭니다. 수학은 실재의 보편적 구조를 드러내는 학문입니다. 우주를 탐구하는 물리학이 수학을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것도 수학적 진리가 실재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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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실재하는 것들의 존재 구조를 설명하는 학문이기에 존재론의 바탕이 되는 것이 아닐까? 바디우는 이 수학 가운데 특히 19세기 말에 게오르크 칸토어가 창안하고 20세기에 큰 발전을 이룬 ‘집합론’에 입각해 자신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구축합니다. 이 집합론에서 주목할 것이 ‘칸토어의 정리’입니다. 칸토어의 정리는 ‘멱 집합의 크기가 원래의 집합의 크기 보다 크다’는 명제로 요약됩니다. 멱 집합이란 ‘어떤 집합(S)의 모든 부분집합을 원소로 하는 집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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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 부분집합에는 개별 원소들의 집합도 포함될 뿐만 아니라 ‘공집합’(∅)과 ‘원래의 집합’(S)도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멱 집합은 원래의 집합보다 큽니다. 이 사실에서 바디우는 정치적인 함의를 읽어냅니다. 어떤 집합 안의 ‘원소 개수’보다 ‘부분집합의 개수’가 더 많다는 것은 개체보다 집단이 더 풍부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칸토어의 정리는 추상적인 층위에서 개인주의의 지배를 논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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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를 단순히 합산한 것보다 전체가 더 크다는 것, 그러므로 개인주의로는 전체 집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정리에서 도출되는 것 같아요. 이런 논리 위에 바디우는 자신이 신봉하는 코뮌주의(공산주의)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합니다. 바디우의 존재론은 과학·예술·정치·사랑이라는 네 영역에서 일어나는 ‘진리 사건’을 조건으로 삼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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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란 곧 존재다' 살다가 '공백'(사건)을 만나거든 존재의 공백을 바로 봉합하려고 애쓰지 말고 사건을 처절하게 파악-해석해서 새 창조로 나아가라. 이때 기 '존재'는 유한성의 구조에 얽매에 있는 상태로, 주체가 '무한성'의 구조로 뚫고 나가려고 하지 않으면(공백을 봉합 하면) 의미가 없고, 사건과 부닥쳤을 때 기 '존재'에 저항하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진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쾅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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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어떤 돌발적 우연으로 출현해 지속성을 지니는 것을 뜻합니다. 난제의 해법은 어느 한순간에 계시처럼 들이닥칩니다. 예술 작품도 번득이는 영감 속에 빚어지지요. 사랑이라는 열정도 두 사람의 우발적인 만남에서 비롯하며, 정치적 진리도 ‘바스티유 함락’처럼 돌연한 사건으로 시작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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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진리 과정에 인간들이 참여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주체가 되고 그 진리를 향유 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하여 바디우에게 분열된 힘으로 다가왔던 '수학과 주체'가 여기서 마침내 그 이원성을 극복합니다. 수학은 진리 존재론의 바탕이 되며, 주체는 그 진리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참된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에예공! 우리는 왜 그동안 수포자로 살았을까?
2024.10.8.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