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 라고는 할 수 없다."
아, 얼마나 오랜 세월을 거슬러 이제사 과거를 돌아보는 쾌적함을 느껴보는가!
여고시절 강신재님의 '젊은 느티나무' 속의 그 귀절을 떠 올릴 때 마다
나는 꿈을 꾸듯 그 비누냄새를 상상해보곤 했다.
테니스를 치고 돌아와 샤워를 하고 그녀의 방을 찾을 때 비누냄새를 풍기던 그 남자,
친남매도 아니고, 남도 아닌 애매한 설정속의 그 사랑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긴 했지만
내 유년의 아름다운 이야기 '알프스의 소녀' 처럼
젊은 느티나무는 동화 속의 이야기 같은 결 고운 추억으로 내게 남아있다.
사랑을 한다는 감정을 오래 잊고 살았다.
사랑을 느끼는 순간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고동소리 같은 울림을 오래 잊고 살았다.
습관처럼 사랑하고, 사랑처럼 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며
자식을 키우고, 가끔은 소설속의 한 귀절을 떠 올리며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늘 내생각은 거기까지 였다.
나의 사랑은 그렇게 초원의 빛처럼 희미하게 바래어졌다.
영원히 첫여름의 싱그러운 푸른 풋사과같은 느낌으로만 살아갈 듯 보였던 나의 연인은
이제 반백의 세월을 맞아 얼굴 구석구석 잔잔한 주름으로 웃고 있다.
그런 그의 아내가 된 나는 우리가 함께 해 온 세월만큼 불어난 체중과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점점 줄어가는 뻔뻔함,
그리고 적당한 귀챠니즘이 몸에 베인 중년의 여자가 되어
나의 부족한 모서리는 본 척도 하지않고
괜시리 죄 없는 가족들에게 바가지를 긁기도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아침,
여린 새순들이 축복처럼 피어나는 느티나무 잎새에 눈이 머물고,
뭔가 잊고 있었던 소중한 물건을 찾아낸 것 처럼 내 생각을 스치는 것 하나,
'이건 아니야!'
내가 바라고 꿈 꾸던 삶이 모습이 결코 이런 모습은 아니었음을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아침 저녁 출퇴근을 하면서 날마다 만나는 아름다운 느티나무......
내 사무실의 뜨락만큼 가까이 있는 소공동 조선호텔 곁마당의 느티나무는 그 자태가 참 아름답다.
그 젊은 느티나무 (나는 늘 이렇게 부른다) 는 한여름의 싱그러움과 봄날의 연두빛 소망,
가을날의 단풍과 겨울날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단정히 한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변함없는 연인처럼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가 곁에 있음의 행복을 나는 누리고 살아간다.
우전찻잎 같은 느티나무 새순을 보며 또 한해의 봄이 내게 다가옴을 느낀다.
내 맘 속의 고요한 공간에 동그란 나이테를 그리며 젊은 느티나무는 나를 보며 웃는 듯 하다.
갑자기
오월 어느 날 아카시아 향이 흩날리는 거리를 걸을 때처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
누군가를 뜨겁게 싸안고 가슴 벅차게 사랑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70을 넘긴 나이에도 열 아홉살의 울리케를 격정적으로 사랑한 괴테처럼
나도 내 곁에 머무르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스무살의 마음이었던 그 시절처럼 예쁜 카페를 찾아 뜨거운 커피 한 잔을 함께 마시며
앞으로의 삶을 그와 함께 설계하기도 하고,
그의 손을 잡고 영화관을 찾아 함께 늦은 밤의 영화 한 편을 즐기고 싶기도 하다.
새소리 들리는 오솔길을 그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며,
아무도 없는 그 길에서 가벼운 입맞춤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처럼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새옷을 입고, 새구두를 신고
나풀나풀 봄거리를 걸어보고 싶다.
어느 봄날 그가 가벼이 손을 흔들며 환한 웃음으로 내게 다가오던 그 날처럼
나도 반가운 사람을 만난듯이 그에게 손 흔들며 어느 거리에선가 만나보고 싶다.
봄날의 종다리 노랫소리처럼 문학 이야기도 하고,
쇼팽의 삶과 사랑도 이야기하며,
우리들의 아이들의 삶에 대한 축복과 지혜를 나누어 줄 것도 이야기하고,
우리들의 가슴을 뛰게 할 주제를 꼼꼼히 찾아내리라.
그리고,
우리들의 삶은 앞으로도 오래 오래 핑크빛 봄날처럼 환하게 채색되어질 것을 믿고 싶다.
오늘,
나는 그에게 작은 고백을 수줍게 하고 싶다.
거의 30년의 세월을 함께 살아왔지만 이제부터 새로운 사랑을 하고 싶다고...
날이 갈수록 더욱 사랑하며 그동안 꼭꼭 싸서 숨겨 두었던 내 사랑을 더 보여주고 싶다고....
그 사람이 있어 늘 고마웠고,
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음이 고맙다고.........
소설 속의 마지막 귀절 '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처럼
나는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날마다 그렇게 내 마음속의 비누냄새와
내 삶 속에서 피어나는 푸른 꿈같은 삶의 향기를 함께 나누어가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 시절이 엮어주는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갈 것이다.
첫댓글 좋다..참 좋네요..가슴 속에 사랑이 모락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