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병 (Nostalgiae)
글 : 수수꽃
햇살 부서지는 들녘을 따라 가도 가도
끝간데 없는 먼길을 누비바지 입은 코 흘리게
소녀의 맘과 함께 오늘 저 수수꽃은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산을 에워싸고 따라 난 길은 길이었으되 이미
저에겐 그냥 길이 아니었고 또한 눈에 보이는
몇채의 가옥이 마을 이었으되
그 또한 저에게 그냥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집 마당에서 꼬리를 흔들면서
놀고 있는 강아지들을 보고 있노라니
내 어린 날의 친구 삽살개와 검둥개가
방울 소리를 쩔랑거리며
달려오는 듯 했습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눈앞을 아른거리는
내 어릴 적 뛰어 놀던 그 때 그 시절의
수많은 기억들의 편린들을 모으기 위해 오늘
수리산행이 나의 상념들을 현재와 과거로
해체하는 작업을 그리도 서둘렀나 봅니다.
그 때 그 시절 속에 시간을 잠시나마
정지시켜보고자 하는 엄숙함으로,
때론 전사들의 투지로.......
댕글댕글 하게 잘 익은 대추와
홍시 팔아 돈사서 오겠다며
미숙이 아부지를 태우고 매캐한 검은
연기만을 남기고 ..
5일 시장을 향해 신작로를 달리던 고산행
금남여객 버스와 콩과 들깨 판 쌈지 돈으로
금순이 월사금 마련을 위해 금순 아비를 태운
누렁이가 운전하는 덜거덕거리던
구루마가 오늘 따라 문득 눈 시리게 그리워져서...
그만 70년대 그 추억 속의 길에서 내 맘은
혼절한 듯이 정지되어 버렸고 현실로 오는
길을 잃고 시간 속의 미아가 되어버렸습니다.. .
맘이 이끄는 대로 간 곳은 시골길 옆에
나지막하게 안착해 있는 낮은 흙담 너머로
키질하던 시골 아낙의 모습이었고
내 몸을 이탈한 맘은 한동안 그 모습에
넋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늘 따뜻한 정이 함께여서 고된
노역이 있었지만...
그래도 평화롭고 훈훈했던 그때
그시절로 다시 되돌아가서
뵐 수 없는 분들이기에 이리도 가슴
절절하게 사무치는 그리움이 맘 아프게
헤집으며 다가오는 걸까요?
뜰 안쪽으로 시선을 두자 내 사랑하던
동무 순덕이가 검정 고무신을 끌면서
내게 달려왔습니다.
어떤 놀이에서든 이제는 백 번도
더 져 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서로의 힘겨룸을 위해 순덕이를 업고
토방에 오르다 뾰족이 돌출돼있던
차돌박이에 넘어져 찢겨진 정수리에
석유지름 묻혀서 불로 태운 목화솜 뭉치로
하얀 이마를 따라 놀란 가슴 쓸어 내리며
흐르던 피 멈추려 파르르한 떨림으로
상처를 싸매 주던 할머니의 따스한 손과
사랑이 오늘따라 눈물겹도록 그립습니다.
할머니의 지혜의 주머니에서 나오던
그 민간요법의 처방으로 다시 한번
세상에 시달려 새까맣게 타버린
상처 다 치료받아보고 싶은데..
쉼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리고 늘 농사일을
돌보노라 굳어진 투박하지만 그 어떤
섬섬옥수보다도 따스했던 할머니의 손이
내 상처 위에 놓아지면 내 아픈 상흔들
갈 낙엽 속에 다 묻혀질 듯 한데 ...
그래서 대나무 속처럼 텅텅 비어 버린
허허로움이 다시 채워질 듯도 한데....
할머니! 어디 계시나요?
이젠 저도 철이 든 불혹의 나이가 되어 가슴속에
붉게 각인 되어 엷어질 줄을 모르는 늘 불러봐도
허공속에서 맴돌아 그리움에 목이 메어와
잠시나마 심연 속으로 내려놓았던
그 그리움의 이름들을 오늘은 목놓아서
다시 한번 불러보고 싶습니다.
할머니! 기다릴께요.
오늘 밤은 제 꿈속에 꼭 와주셔야 해요..
꼭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