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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경: 나는 피안으로 간다
You Hyeonkyeong: I retreat to the realm in a timeless horizon
2025. 02. 28 (금) - 04. 11 (금)
Opening: 02. 28 (금) 5-7pm
갤러리JJ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로30길 63)
관람시간: 화-토 11am-7pm (일, 월요일 휴관) www.galleryjj.org
“나는 시간을 잘 보내고 있나, 나의 깊이는 획득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한다. ··· 피안으로 가는 것이 이루지 못한 꿈이 될지 아니면 실현이 될지.” —작가노트 2025
무한한 시간 앞에서 짧은 인생은 무에 지나지 않는다.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몇 가지 지속적인 것이 있다는.’ 프리드리히 휠덜린의 시구절은 우리가 보내는 시간에 관하여 시사점을 던진다. 갤러리JJ는 2025년 새해 첫 전시로 회화 작가 유현경의 전시를 개최한다.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유현경(Hyeonkyeong You)은 ‘그리기’, 곧 회화적 속성에 충실한 작가로, 주로 사람과 집, 풍경 등을 매개로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추상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그림으로 풀어낸다. 이번 전시 ≪유현경: 나는 피안으로 간다≫는 풍경을 소재로 하며, 그간 그의 작업을 종종 대변해왔던 인물 작업보다 장소에 대한 정취나 기억과 함께 태곳적 시간을 품은 대자연의 풍광을 통해 보다 확장된 세계를 보여준다. 전시는 여행에서 마주한 광활한 자연환경을 체험하고 그린 <Wilderness> 시리즈를 중심으로 베를린을 비롯하여 동서양의 도시와 자연, 문화유적에서의 느낌을 반영한 작품, 자화상 등 15점의 유화 작품으로 구성된다. 시간이 멈춘 듯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은 작가가 욕망하는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을 품고, 우리는 시선 너머 또 다른 낯선 세계를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른다.
전시장의 화면 속 망망한 대지, 화면을 가로 지르는 지평선은 마치 프레임 바깥으로 내달리듯 공간을 연장한다. 그것은 넓은 여백, 몇 안 되는 서너 가지의 색, 붓질과 안료 질감의 미세한 차이 만으로도 척박한 광야 어딘가를 소환한다. 화면은 평론가 정영목이 말했듯이(2020년), 시원하고 간결한 붓질의 추상성이 그림으로 만들어 하나의 조합으로 읽힌다. 여백을 포함하여 전체와 부분이 서로 침투하고 진동하며 유기적으로 얽힌 듯 표현된 화면은 상념을 불러일으키며 오랫동안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유현경의 예술세계는 세계와 나를 관계 맺는 또 하나의 태도를 제시한다. 작업은 작가 자신으로 환원된다. 대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다루는 작가는 보이는 대상을 이미지로 차용하기보다 실질적으로 대상에 다가가고 접촉하여 내밀한 변화를 포착한다. 그것은 형태를 구축하기보다 해체하며, 단순한 시선을 넘어서 구체성을 생략해버린 채 표현적이면서 추상적인 화면으로 나타난다. 작업은 솔직하고 거침없으며 견고한 구성력을 보인다.
작가는 표정 없는 초기 인물화를 비롯한 거침없이 빠른 붓놀림과 최소한의 형태를 가진 인물화로 그 독창성이 가장 먼저 알려졌고, 그것은 작업에서 꾸준히 많은 비중을 차지해왔다. 대학을 막 졸업하던 작가 초기인 2009년 전시 ≪화가와 모델≫(서울대학교 우석홀)부터 OCI미술관(2011년), 학고재갤러리(2012년)로 이어지면서, <일반인 남성모델>연작을 시작으로 누드화를 포함하여 주변의 평범한 사람을 그린 인물화는 단번에 화단의 비평적 주목을 끌면서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인물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작업은 집과 자신이 지나다니는 길 같은 장소의 정취에 관한 기억으로 확장된다. 뉴욕의 두산갤러리(2016년), 스페이스몸미술관(2018년) 전시를 비롯하여, 2020년에 베를린으로 이주 후 최근까지 여주미술관(2024년) 전시에서 거대한 스케일의 추상회화와 텍스트를 사용한 회화를 선보이는 등 활발한 전시 행보와 진전된 작업을 보이고 있다. 방대한 작업량과 더불어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입증하듯, 현재 그의 포트폴리오에는 무려 1,000점을 훌쩍 넘기는 작품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작가가 베를린으로 옮긴 지 약 5년이 흘렀고, 그간 낯선 타국의 환경은 자연스럽게 작업의 변화로 이어져 왔다. 화면에는 자연이 많이 들어오고, 예전에 보여주었던 거친 감정은 어느덧 조금은 부드럽고 심지어 강렬한 붓질 가운데 섬세한 선으로 때로는 정제된 느낌마저 주기도 한다. 그는 낯선 이방인으로서 그리고 일상의 산책길에서 만나게 되는 숲과 호수와 같은 자연 속에서, 그동안의 삶에서의 분주함이나 사회적 구조와 관계의 무거움에서 벗어나 한결 한가하고 자유롭게 작업에 몰두한다고 말한다. 곧 자신이 속한 환경에 눈을 돌리고 새로운 세계에 반응하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이러한 베를린에서의 자유로운 느낌을 자신이 지향하는 삶에의 의지로 좀더 심화하여 드러내며, 이는 곧 자신이 체험한 척박한 땅, 인적 드문 황무지로 투사된다. 전시의 중심이 되는 <Wilderness> 시리즈는 단순한 풍광이기보다 시간으로 달리는 광야와 대지, 시간과 결합한 풍경이다. 문명이 닿지 않은 원초적 풍광은 시간을 느끼게 한다. 문자 그대로 ‘저쪽 언덕’이란 뜻의 피안은 각자 다르겠지만 우리가 마음 한 켠에 품고 있는 언젠가 도달해야 할 미래의 장소일지 모른다. 작가에게 그것은 자신이 처한 현실의 제도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깊이를 가지는 시간과 공간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것은 혹여 작가로서의 창조적 정신의 자유와 고단한 현실 삶 사이의 모순과 갈등일까?
I.
‘다시 만나는 길’, ‘어느 날’… 작품 제목은 어느 특정 지역을 지칭하지 않는다. 때로는 다른 장소가 겹쳐지면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그는 제목을 정하는데 있어서 신중히 오랜 시간 고민하며, 대부분 그것은 마치 자신에게 향하는 독백처럼 내러티브를 부여한다. <다시 만나는 길> 시리즈는 분위기에 매료되어 여러 번 그려진 시안의 대안탑, 한가한 회빛의 성벽길로 이어진 공간을 걸으며 옛것과 현재가 함께 어우러짐이 좋았던 시안의 어느 공간에서의 정취와 기억을 떠올린 이미지다. 작품<샹그릴라로>는 자신이 방문했던 중국 윈난성의 샹그릴라 지역명을 그대로 붙였다. 샹그릴라는 ‘유토피아’적인 의미망을 가진다.
작가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 머물기를 좋아한다. 충주와 고양, 속초를 비롯하여 취리히, 뉴욕, 아르헨티나, 독일 등 여러 지역의 레지던시 및 작업실을 이동하고 크로아티아, 시칠리아, 중국 등 수많은 장소를 체험해왔다. 이처럼 체험했던 장소와 풍경의 구체적인 정보보다 작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떠오르는 생각과 기억을 포착하여 작업한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보이는 거칠고 빠른 붓놀림과 얼룩, 자신감이 가득한 러프한 제스처의 느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화면을 가로지르는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힘은 또 어떠한가? 내면의 감정들, 그것이 표출되는 방식, 이들은 작가 개인의 감추어진 욕망, 무의식의 발로인가? 같은 제목, 여러 점의 대안탑 그림처럼 비슷한 듯한 그림을 매번 반복하여 그리는 일은 무엇 때문일까?
회화의 본질이란 불빛에 생긴 연인의 그림자를 벽에 그려놓듯이(대플리니우스), 무언가를 그린다는 것은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데리다는 재현은 시각이 아닌 기억에 의존하며 존재가 아닌 부재를 조건으로 한다고 했다. 기억은 곧 시간성의 맥락에 있고 이는 유현경의 작업에서 잘 읽혀진다. 유현경은 ‘눈을 떠 바라보는 풍광도 좋지만, 눈을 감아 그려지는 풍광도 그에 못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에게 인물이나 풍광과 같은 대상은 회화적 사건의 단초로써 작용한다. 인물을 둘러싼 추상적인 분위기를 그린 것처럼 풍경 그림 역시 구체적인 장소나 풍경 예찬이 아니라 그것은 온 몸으로 직접 느낀, 시간 속에서 떠오르는 마음 속의 풍광이다. 작가는 ‘천천히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 생각하지 못한 내밀한 감정들이 그림으로’ 나오기를 기다린다. 따라서 그것은 장소의 표면 아래 스며 있는 역사와 같은 시간성의 맥락과도 무관하지 않은 감각적 확장이며, 곧 그림은 자신의 무의식이자 반영이다. 마치 자화상을 보듯 자신과 대면하고 응시하며, 대상에의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의미를 빠져나오게 한다. 그는 붓질하는 순간에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빠른 붓질은 오히려 대상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보다 이처럼 오랜 내면의 관찰과 응시를 거쳐 나온 것으로, 무의식과 의식이 교차하는 숙련된 조형 감각으로 이루어진다. 형상을 빌어서 대부분은 붓질과 색이 응축된 감정선을 따라 머리로 인식하기 전에 더 빨리 손이 움직인다.
“당장 눈에 잡히지 않으니 기다려 본다. ··· 시간을 기다려 모으는 일 ··· 그 속으로 침잠하여 고요해지는 것, 그 안에서 보이는 것들, 침잠할수록 보이는 것은 넓어지기에 나의 세계가 모두 가라앉아 버리는 그 어둠, 밀려오는 그 쓸쓸함 ···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일,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작업이 되었다.” —작가노트 2024
응시는 시선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열어 보이며, 현실의 균열 속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은 이처럼 어둠이나 쓸쓸함,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것은 그의 실존을 증명하는 동시에 자연계의 힘이나 충동이 실제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로서 그림에 어른거린다. 유현경은 회의하고 의심하며 그래서 세계는 끊임없이 부정되고 해체된다. ‘같은 과거를 계속 다르게 반복하고 번복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지난 것은 늘 현재와 관련하여 다르게 나타나므로, 그는 차이가 나는 반복적 작업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알아가고 있다. 이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으로 계속하여 연기될 뿐이다. 그것은 종종 시리즈로, 비슷한 그림으로 전개된다. 작가에게 그림은 스스로가 의식할 수 없고 규제할 수 없는 자신의 내면을 계속 발견하고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다.
유현경의 작업에는 여백이 많다. 그림은 이미 작가 자신의 신체, 삶 전반을 통해 세계를 경험한 것, 그래서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수많은 것들을, 들뢰즈의 표현에 의하면, 채우기보다 비워내는 것에 가깝다. 그는 그리기보다 지우기, 남겨두기에 주력하는 듯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의 언어적 질서와 제도로부터 공백과 결여를 탐닉한다.
II.
돌이켜보면, 이러한 유현경 특유의 작업은 2008년 공모로 모집한 100인의 <초상화 모델> 작업과, 역시 공모로 모집한 낯선 남성 모델과의 여행프로젝트인 <여성화가와 일반인 남성 모델> 작업에서 첫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당시에 발상 그 자체로 촉발되는 모델과 화가의 관계 만으로도 오랜 미술사에서의 여성과 남성, 재현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습적 구도를 거스르는 용기 있는 도전으로, 그는 상황 자체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감이나 미묘한 긴장감을 회화 행위로 나타나게 두었다. ‘모델을 보았을 때 즉발적으로 일어나는 감정과 그에 따르는 제스처’, ‘그리는 과정에서 생기는 긴장까지 그대로 노출하여 붓질에 옮기면서’, 그에게 초상화란 인물을 그리는 것보다 붓질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충동을 기록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유현경의 회화를 견지하고 있다. 뻔한 것이 아닌 고통스럽고 위험해 보이고 예측 불가능한 일에 관한 한, 그것은 무언가를 넘어서려는 혹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곧 예술이기에 가능하다.
잠재된 내면 감정의 변화는 곧 붓질과 행위, 물질의 흔적으로 화면에 고스란히 남아 관객의 또다른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 모종의 관계보다는 대상과 대면하는 만남 그 자체가 중요한 테마이며, 그대로의 재현이 아닌 행위가 강조되는 그림이다. 예민함과 긴장, 결핍과 금기된 것들의 욕망으로서의 에너지 발산은 차츰 자기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견디고 기다리는 태도로 자아의 인식과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작품 속에 표현된 것은 변해가고 흐르는 시간의 형상에 다름아니다.
이제 그의 초점은 삶과 예술, 시간의 깊이와 세계의 근원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확장하고 있다. 작가는 어느덧 다시 현재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또다른 시간과 공간을 꿈꾼다. 그가 누리고 싶은 자유와 깊이를 가진 시간은 철학자의 ‘들길’을 걷듯, 길고 느린 것의 시간, 머무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간일까? 그 옛날 ‘스콜레’의 삶, 곧 강제나 필요, 수고나 근심이 없는 자유의 상태일까? 생각해 보면, 피안에의 꿈은 이미 그의 삶 속에서, 베를린으로 오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모든 삶이 그러하듯 다가서면 저만큼 물러서기를 거듭하여 희망으로, 욕망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그의 ‘창조’적 삶과 예술을 지속적으로 추동하는 요인임은 분명해 보인다. 전시는 ‘시간을 담은 풍경’을 통해 초상화 이후 베를린으로의 이주를 전후하여 현재까지 유현경 작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또다른 장을 열어 보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아무 기대도 없는 곳 ··· 기대에 부응해서 살아가는 삶 말고 좀 더 자유로운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지냈다.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제도를 충족하지 않는 생각들을 하며 살고 싶었는데,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광야, 척박한 땅들, 풍광, 자연 그런 요소로 등장하게 된 것 같다.” —작가노트 2025
글│강주연 Gallery JJ Director
◎ 문의 02-322-3979 / galleryjjinfo@gmail.com / @galleryjj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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