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계절
3
흘러간 시간들을 서러워 말자
기어코 떠나버린 것들을
애써 붙잡으려 하지도 말자
아쉬워 가슴 저리고
멀어진 것들로 멍울져도
어차피
오고가는 것이 순리라면
보낼 것은 보내고 남을 것은 남도록 하자.
언 가지마다 윙윙 울음소리 높아도
지나간 시간에 한숨 토하자 말자
기쁨. 슬픔. 희망. 꿈......
세상은 이 모두를 공존하고 있기에
섬에 살고 싶다
사람 없는 섬에도 해가지면
초승달 조등처럼 밝혀놓고
깊이를 알수 없는 사랑과 함께
먼 그리움 같은 섬에 살고 싶다
2
타는 노을 피를 받아
섬은 철새를 낳고
섬 문밖에 떠도는 물안개
해안에 서성이는
푸른 바람 손짓하는 섬으로 가서
내가 타고 온 쪽 배 돌려보내고
거울같이 조용한 바다와 속삭이며
잠든 철새의 그윽한 숨소리 들리는 섬에
멀리 할수 없는 고독과
세상은 온통
네온 불빛 무수히 쏟아지고
바람에 몸을 섞는 파도가
짙푸른 피멍이 갯바람에 철썩이는
때 묻지 않은 그 섬에 살고 싶다. 최춘자(가람문학 동인)
아, 오월 김영무
파란불이 켜졌다
꽃무늬 실크 미니스커트에 선글라스 끼고
횡단보도 흑백 건반 탕탕 퉁기며
오월이 종종걸음으로 건너오면
아, 천지사방 출렁이는
금빛 노래 초록 물결
누에들 뽕잎 먹는 소낙비 소리
또 다른 고향 강변에 잉어가 뛴다.
어머니의 빨래
사랑이라는 이름의 비누로 빨래를 합니다.
아픔이 씻기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햇살로 옷을 말립니다.
눈물이 마르고 기쁨이 살아납니다.
어머니는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옷을 더 깨끗하게 빨고 그것을 더 꼬들꼬들하게 말릴 뿐입니다.
가족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처마 밑에 가득한 늦가을 오후입니다. ( 정용철)
열병
순간 순간 저려오는 가슴
문득 문득 떠오르는 그대의 환영
그리고,
1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사랑치 않은 그대
아픔의 깊이는 있으나
치유할수 있는 처방전은 없다.
앓다 앓다 정히 힘들면 방구석 술병을 찾는다
한모금
두모금
그러나,
마실수록 커져만 가는 허전함
이제는 말술로도 메울수 없는 이 지독한 그리움.
외딴집에 살고 싶다 / 자은 김 종 기
구부러진 뒷산 길, 노루길목에서
저녁 부엉이 어스름한 목소리로 잦아들면
하얀 턱수염의 주인이 늙은 기침으로 대답하는 골 깊은 동네
뿌리 깊은 사색나무로 울타리치고
때때로 축담에 쪼그리고 앉아 외로움과 권태를 토해내며
뻔한 일을 뒤로 미루거나 일이 없어 할 일을 만들기도 하는
게으름뱅이가 되고 싶다
집은 늙어 전설이 되고
기둥마다 외로움이 희끗희끗 피어나면
선친들의 고단했던 삶, 질긴 장마 같은 얘기들을 기억하며
긴긴 일기로 밤을 새워도 좋겠다
촘촘한 별이 꿈으로 들어오는 밤
문득 풀벌레 소리가 구슬프다 싶으면
달빛 내려오는 툇마루에 나가
초가의 굽은 등에 잠든 박처럼
나도 덩달아 모로 누워 미운 일 고운 일 뒤적이겠다
천진한 장난질, 어설픈 사랑
그 간지러웠던 이름들을 불러보고
머리도 꼬리도 없는 이야기
새벽이슬 낙수소리에 다 쓰러질 꿈들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며
나,
외딴 집에 살고 싶다
이름은 돌이 되어 소상보(전 강서 구청장)
이제 돌이 되었다
전선을 누비던 젊은 몸 먼지로 날려 보내고
열일곱 나라 사만 팔백 구십 다섯 사람
대리석 벽속에 각인된 암호마냥
아직도 전선ㅢ 함성은 제막식 밤 선율이 되어 아득히 흐르고
티 없이 웃음 짓던 얼굴은 꺼지지 않은 불길로 떠오른다
아세아 대륙 동쪽 끝 불타는 반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온 그대들
돌 위에 이름 새겨
평화를 부르다가 간 그대를 기억 할진저!
이제 그대들은 이 땅위의 별이 되었느니
목마르게 찾던 어머니 아버지 사랑하던 사람들
멀리 우러러 기억해 줄 으들과 함께 평화의 별이 되리니
이역 하늘이 그대 꿈꾸는 하늘이 되지 않았느냐
그대 이름 돌 속에서 찾을지니
영원하여라 꺼지지 않는 불길로 훨훨 자유로워라
유엔 그 이름으로 이 땅에 오래오래 빛날진져
인생 찬가 /핸리 워즈워스 롱펠로
구슬픈 가락으로 내게 말하지 마라
인생은 한낱 허망한 꿈이라고1..
삶은 환상이 아니다! 삶은 엄숙한 것이다!
무덤이 삶의 목표는 아니다..
아무리 즐겁게 보인들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과거>는 죽는 이들이나 파묻게 하라
행동하라- 살아있는 현재 속에서 행동하라..
그러니 이제 우리 일어나 무엇이든 하자.
어떤 운명과도 맞설 용기를 가지고
언재나 성취하고 언제나 추구하며
일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자.
작은 이름 하나라도/이기철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 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이기철 시인)
1943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 영남대 국문과를 졸업,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음.
1972년 『현대문학』으로 데뷔. 1976년부터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 시집『낱말 추적』 『청산행』 『전쟁과 평화』외 다수 김수영문학상(1993), 후광문학상(1991), 대구문학상(1986) 등을 수상. 현재 영남대 교수와 영남어문학회 회장으로 재직중.
장 식 론 (홍윤숙)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씻은 무우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
진부한 말이지만 8
그렇게 젊은 날은
빛나는 장식이 아니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보면
쇼우윈도우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들을
잃고 왔을까
이 삐에로 같은 생활의 의상들은
무엇일까
안개 같은 피곤으로
문을 연다
피하듯 숨어 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만발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 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 장의 낙엽처럼 쓸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