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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모와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
서왕모가 황제를 도와 치우와의 전쟁을 승리로
여와(女媧)하느님의 둘째 아들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중원을 놓고 치열한 전투를 할 때, 치우가 비바람을 부르고 연기와 안개를 피워 황제의 군대에게 방향을 잃게 하고 대오를 어지럽혔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물려 태산지방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여와(女媧)하느님의 딸 서왕모(宓妃)는 몸에 검은 여우 갑옷을 입은 사자를 파견하여, 길이 한 자, 넓이 세 치 옥으로 된 단혈(丹血)무늬를 한 푸른 옥돌 신부(神符)를 황제에게 주어 난국을 타개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머리에 까마귀 몸을 한 구천현녀(九天玄女)를 파견하여 황제에게 각종 음양술(陰陽術)과 기관조종술(機關之學)을 가르쳤다고 한다. 서왕모의 이러한 도움으로 황제는 마침내 치우와 싸움에서 승리하고 중원을 차지하고 제사장이 되었다고 한다.
낙신부도(洛神賻圖)의 여호와 하느님과 그의 딸 복비
조식이 서기 192년∼232년에 하느님과 그의 딸 복비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여와(女媧)하느님의 딸 서왕모(복비)는 요임금 때에 이어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도 지지를 표명하고, 사자를 파견하여 순임금에게 백옥환(白玉環)과 백옥피리를 내렸다. 또한 지도를 내렸는데, 지도를 기초로 구주(九州)로 하여 국가의 영역을 12주로 넓히게 되었다. 우임금 때 홍수가 나서 온 천하가 물로 뒤 덮였을 때 서왕모는 운화부인(雲華夫人), 요희를 파견해서 돕게 하여 홍수를 다스리는 데 성공하였다 한다.
서왕모는 또한 신선들 모임인 군선대회(群仙大會, 곤륜산 요지에서 선불성진(仙佛聖眞)들의 모임)을 개최했는데 이때 서왕모가 3천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선도복숭아 일명 반도(蟠桃)를 친히 참석자들에게 대접하여 치하를 하였다고 한다.
서왕모가 비구름으로 산불을 진압
나아가 서왕모는 국가나 민간에서 각종 재난이나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기복(祈福)을 비는 주요한 신들 중 하나가 되었다. 여러 기록에 이러한 사실들이 나온다. 수나라 때 방화로 정형현 전체가 산불에 휩싸여 백성들은 두려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형현 관리들은 서왕모 사당에 가서 예를 올리고 울면서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백성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지금 이러한 큰 재난을 만났습니다! 신(神)이 있어 만약 신령하다면 비를 내려 구해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자, 곧바로 구름이 몰려들면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큰 산불이 꺼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유행하면서 사람들은 붉은 종이 위에 “서왕모의 신위(西王母之神位)”를 쓰거나 혹은 서왕모를 귀부인상으로 그려서 받들어 제사를 지내고 복과 수명을 빌거나 각종 재앙을 없애도록 기도를 하곤 했는데 이것이 널리 유행하여 민간에서는 하나의 풍속이 되었다고 한다.
서왕모에게는 많은 자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인이 운화(雲華)부인(요희, 瑤姬) 그리고 태진(太眞)부인(완, 婉)이다. “집선록(集仙綠)”에 운화부인은 서왕모의 23번째 딸이며 태진부인의 동생이라고 한다. “명통일지(明統一志)”에는 서왕모의 아홉번째 아들이 현수(玄秀)이며 진인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것으로 보건대 서왕모는 적어도 23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서왕모와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의 전설
서왕모를 만나러 나온 주나라 목왕
서왕모가 주나라 목왕과 만난 후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였다. 그러나 목왕이 늙고 병들어 죽게 되자 요지(瑤池)에서 다시 만난다는 기약도 물거품이 되었다고 한다. 전국(戰國)시대가 지나고 한나라 때가 되자, 신선가의 방사(方士)들의 활약이 커지게 되면서 불사약을 장악한 서왕모는 도교에서 모시는 주요인물이 되었다. 후에 장도릉(張道陵) 등 도교의 조사들은 모두 “서왕모가 친히 가르침을 내려 비로소 득도하여 신선(진인)이 되었다.”고 한다.
한 무제 유철(劉徹)은 일심으로 신선의 도를 구했던 사람이다. 동쪽의 어느 군에서 한 무제에게 아주 작은 신체의 소왜인(小矮人)을 조공으로 보내 왔는데 키가 불과 칠촌(20센티)이었으나 의관은 정갈하였다 한다. 한 무제는 소인에게 매우 흥미를 느끼고 소인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장난을 하면서 즐기곤 하였다.
어느 하루 동방삭이 궁궐에 들어왔다가 이 소인을 만났다. 소인을 부르면서 “거령(巨靈)아? 너는 어떻게 이곳까지 미끄러져 떨어져 왔느냐? 아모(阿母 즉 서왕모)는 잘 계시냐?”라고 묻는다. 소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동방삭은 한 무제에게 “이 아이는 품행이 좋지 않아, 일찍이 세 번이나 서왕모의 선도복숭아(蟠桃)를 훔쳐 먹어 서왕모의 눈밖에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인간 세상으로 귀양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 무제가 크게 놀랐고, 동방삭이 세상의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소인이 한 무제에게 “서왕모가 저를 파견하여 당신에게 도를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청정하고 마땅히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오년이 지나면 서왕모가 몸소 와서 당신을 만나겠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한 후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한 무제, 서왕모를 만나다
오년이 지나자 서왕모는 과연 사자를 파견하여 한 무제에게 7월 7일 서왕모가 친히 강림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한 무제는 향을 사르고 물을 뿌려 청소를 깨끗이 하고 몸소 장막을 쳤다. 약속한 7일 날 밤 공중에서 뇌성이 은은한 가운데 온 하늘이 갑자기 자주색 구름으로 덮이면서 서왕모가 자주색 구름수레(紫雲車)를 타고 궁전으로 내려 왔다. 이때 서왕모의 신태는 방정하였고, 얼굴은 절세가인으로 30여세 여인이었다 한다. 서왕모는 한 무제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도복숭아를 내려 맛보게 하였다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에 대하여
유학자들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군주였던 한무제는 유학자들에게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초기에는 동중서(董仲舒)를 기용하고 유교를 국교화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만년에는 진시황처럼 무리한 정복 사업과 건축 사업, 사치스러운 생활, 불로장생에의 헛된 욕망 등으로 정치를 그르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무제의 손에 의해 비로소 중국은 동북아시아의 한 국가를 넘어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했다는 것이 현대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중국 제7대 황제, 한무제 유철(기원전, 156년∼87년)은 기원전 141년에 16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나 실제로 그의 즉위까지는 곡절이 많았다. 그는 부황 경제(景帝)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으며 그나마 후궁의 소생이었다. 적장자 승계 제도를 원칙으로 했던 한나라에서 그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나 그녀의 어머니 왕씨(효경황후)는 야심이 크고 모략에 뛰어난 여인이었다.
효경황후는 먼저 권세가 대단했던 경제와 매우 친하여 그의 누이 장공주의 딸과 유철을 혼인시킨 뒤, 장공주와 힘을 합쳐 황태자와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은 본래 서민 기질에다 무인 기질이 두드러져 유학자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진나라의 혹독한 정치와 초-한 대전의 후유증에 시달려 기진맥진해 있는 백성들을 달래려면 도교의 자유분방함이 좋다고 여겼다. 그래서 한나라는 원래 도교(정확히 말하면 전설상 인물인 황제 신앙과 결부된 황로학(黃老學)를 존중하는 왕조로 출발해서 줄곧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무제는 즉위 당시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소년이었지만 즉위 직후 널리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대책을 묻고, 여기에 응한 동중서의 대책을 채택함으로써 유교를 중국의 국교로 만드는 길을 열었다.
유독 한무제는 유교를 대신 내세우려는 의지가 강했는데, 이는 천하에 두루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고 통치권력을 체계화하려면 유교가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을 본받아 사상 통제를 할 필요성도 느꼈는데, 다만 지나치게 엄격한 법가보다는 더 온건하고 반면에 지나치게 느슨한 황로학보다는 더 질서정연한 유교가 알맞아 보였다.
이는 단순히 사상의 문제만도 아니어서, 어린 황제가 유교를 진흥하려 한다는 말이 퍼지자 황로학을 받드는 무리가 무장을 한 채 대궐 문 앞에 새까맣게 모여 소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 황로학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한무제의 할머니, 두태후가 손자의 ‘철없는’ 행동을 바로 잡겠다고 나섰다.
한무제는 할 수 없이 유교의 국교화를 늦출 수밖에 없었으나 그런 반발은 유교를 기필코 진흥하겠다는 그의 결심을 굳혀 주었다. 신하들이 감히 황제의 명령을 정면으로 치받는다거나, 아무리 태후라도 여자가 정치에 대해 간섭 하는 일은 유교의 가르침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기원전, 135년에 두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한무제는 지체없이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최초의 유교식 학교인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건립하는 등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두태후의 일족을 숙청하고, 황로학을 따르는 나이든 대신들도 새롭게 갈아치우며 조정을 본격적으로 장악해갔다. “하나로 통일된 대제국”으로서의 중국은 진시황이 처음 틀을 잡았지만, 그 대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유교를 받드는 전통은 한무제가 시작한 것이었다.
한무제는 고비사막에서 대동강까지
한 무제(武帝)라 불리는 이유는 그가 외치(外治) 쪽에서 거둔 눈부신 업적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중국의 북방에는 흉노라는 막강한 위협 세력이 있었다. 통일 제국인 한나라도 이를 감당하지 못해 한고조 시절에 정벌하려다 그만 거꾸로 포위를 당한 끝에 겨우 풀려난 이후로는 매년 거액의 뇌물을 바치거나 황실의 여자를 보내는 일로 그들의 침입을 달래 오는 처지였다.
장건을 파견하는 한무제
한무제는 ‘천자(天子)’ 체면을 형편없이 구기고 있는 이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군사조련에 힘쓰고 유능한 장군을 물색하여 발탁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 뒤, 기원전 129년부터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을 비롯한 명장들을 앞세워 흉노를 맹공격했다. 이는 큰 성공을 거두어 흉노는 고비사막 저편으로 쫓겨간다.
그런데 흉노 공략에 앞서 마음을 놓을 수 없던 한무제는 고비사막 저편에 있다는 서역(西域)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자 장건(張騫)을 파견한다. 장건은 기원전, 139년에 수도 장안을 출발해 흉노의 포로가 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13년 만에 귀국한다.
장건에게서 대완(大宛), 대월지, 대하(大夏), 강거(康居), 누란(樓蘭), 오손(烏孫), 신독(身毒) 등 무려 60개에 달하는 서쪽 나라의 존재를 전해들은 무제는 “만 리에 걸쳐 국토를 넓힐 기회다” 하며 먼저 장건에게 서역 나라들을 설득해서 한나라에 조공하게 하도록 임무를 주었다. 이는 실패했으나 다시 오손과 동맹을 맺는 일로 장건을 파견했고 이는 성공했다.
한무제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서역 국가들을 세력권에 포함시키려 했는데, 특히 기원전 104년에는 이광리에게 6만 명의 군사를 주어 대완을 정복하게 했다. 이는 중국의 판도 확대에 그치지 않고, 동서간 교류의 젖줄인 비단길(실크로드)이 본격적으로 열림을 의미했다. 한무제 시대에 한제국은 서역만이 아니라 동서남북으로 두루 뻗어나갔다. 동쪽에서는 민월(閩越)과 동월(東越)을 정복하고, 남쪽에는 남월(南越)을 무너트렸다.
이처럼 문과 무 양쪽에서 빛나는 업적을 이룩한 한무제(漢武帝)였으나, 말년에는 근심과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거대해진 제국을 유지하고 계속되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한무제는 새로운 농업생산량 증대 기술을 도입하고, 소금과 철을 전매했으며, 물가 조절을 빌미로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해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긁었다.
그래도 재정은 지속적으로 모자랐는데, 무제가 대규모 건설에 취미를 붙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열여덟에 불과하던 즉위 2년째부터 자신의 능을 건설하게 했는데, 그 규모는 진시황의 여산릉에 버금갔다.
말년에는 미앙궁과 장락궁을 놔둔 채 새로 크고 화려한 건장궁을 건축하고 또 별궁을 이곳저곳에 지었으며, 거액의 비용을 들여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했는데 천자의 위엄을 보이는 목적 외에도 그것이 불로장생과 연결된다는 속설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렇게 낭비를 거듭하다 보니 백성들에게 부담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30년쯤 뒤 하후승은 그런 피해를 “온 백성이 유랑민이 되고 그 절반은 죽었으며, 풍년이 들어도 기아를 면치 못해 서로 아이를 바꾸어 잡아먹었다”고 묘사했다. 이는 과장이 지나친 표현인 듯하지만, 당시에 벌써 지나친 사치와 낭비가 한무제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스스로가 후궁에서의 음모의 결과 옥좌에 앉았기 때문인지, 옥좌를 둘러싼 음모와 유혈사태가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부터 종실인 회남왕, 형산왕, 강도왕의 반역 음모가 차례로 발각되어 처형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한 자리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기원전, 91년에는 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자 처벌되기 전에 선수를 치고자 정말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살했다. 무제는 태자의 모후인 위황후(흉노 토벌의 영웅 위청의 누나)를 폐위시키고 처형했으며 위씨 일족과 태자의 친지들도 숱하게 처형했다.
창읍애왕이 새 후계자로 낙점되었으나 그는 병사했다. 결국 마지막에 새로운 태자로 책봉되어 한무제 사후에 제위에 오른 사람(한소제)은 유불릉(劉弗陵)이었는데, 무제는 그를 태자로 정하자마자 모후 구익부인을 죽였다. 과거 한고조 사후에 여후가 어린 왕을 끼고 권력을 농단한 일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제는 즉위 후 곧 병사하고 창읍왕이 뒤를 이었으나 곽광(곽거병의 동생)이 그를 폐위시키고 한무제 때 반란을 일으켜서 죽은 태자의 손자를 대신 황제로 세우고는 한동안 권력을 농단했다.
유교를 높이 받들었지만 정작 유교가 강조하는 근검절약과 애민 정신, 그리고 한 핏줄끼리의 우애와 신뢰는 거의 실천하지 않았던 한무제의 말년은 쓸쓸했으며,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제왕이 닮지 말아야 할 군주 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한무제(漢武帝)의 금옥장교(金屋藏嬌)
금옥장교(金屋藏嬌)의 뜻은 중국에서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금옥장교(金屋藏嬌)의 이야기를 아는 경우는 많지 않다. 주로 중국문인들 특히 풍류(風流)를 좋아하는 문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왔다. 이러한 유(類)의 사랑이야기에 대하여 말하기를 즐겨했고 이를 제목으로 시를 짓고 사를 지었다. 그리하여 평범한 이야기가 화려하게 치장(治粧)하고 기복이 있는 이야기로 바뀌어 버렸다. 당나라 때의 시인인 이백은 “원정”이라는 시에서 청간진후황금옥, 적적주렴생망사(請看陳后黃金屋, 寂寂珠簾生網絲)라고 하였고, 백거이(白居易)는 “속고시(續古詩)”에서 세모망한궁, 수재황금옥(歲暮望漢宮, 誰在黃金屋)이라고 하였다. 당연히 적지 않은 다른 시인들도 이러한 유의 시(詩)를 썼다.
그렇다면 금옥장교(金屋藏嬌)는 도대체 어떤 이야기인가? 왜 천백년이래로 수많은 문인학사(文人學士)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는가? 사실 금옥장교(金屋藏嬌)의 이야기는 한무제(漢武帝)에게서 유래하고 지금으로부터 이미 이천년이 되었다.
금옥장교(金屋藏嬌)의 “교(嬌)”는 원래 한무제 유철의 첫 번째 황후인 진아교(陳阿嬌)를 가리킨다. 아교의 모친은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인데 바로 한문제(漢文帝) 유항의 딸인 유표(劉嫖)이다. 유표는 나중에 당읍 후 진오(陳午)에게 시집가는데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했다. 그리고 장상명주(掌狀明珠)이며 총명하고 교만하며 성격이 제 맘대로인 이 딸 진아교(陳阿嬌)를 낳게 된다.
유표와 한경제(漢景帝) 유계(劉啓)는 오누이간이다. 유철(劉徹; 한무제)는 한경제 유계의 아홉째 아들이므로 유표는 한무제(漢武帝)의 친고모가 된다. 그러므로 유철과 진아교(陳阿嬌)는 고종사촌관계이다.
어렸을 때 유철(劉徹)은 잘 생기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했다. 유년기의 유철은 자주 고모인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의 집에 가서 놀았다. 사촌누나인 아교(阿嬌)를 좋아했고, 두 사람은 자주 같이 놀았다. 아교는 아주 예뻤다. 유철(劉徹)은 7살이 되기도 전에 교동왕에 봉해지는데 왕에 봉(封)해진 후에는 더 많이 고모집에 가서 사촌인 아교와 어울렸다.
한번은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 유표(劉嫖)가 소년 교동왕 유철을 안고 그를 자신의 무릎에 앉힌 후 유철에게 물었다: “너는 부인을 갖고 싶으냐?” 그러자 유철(劉徹)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부인을 갖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웃으면서 좌우의 시녀 100여명을 유철에게 가리키면서 골라보라고 말하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유철은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를 손북처럼 흔들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마음속으로 그를 더욱 좋아하게 된다. 100여명의 시녀가 다 필요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자기의 딸 아교인 것이다. 관도장공주는 아교를 가리키며 유철에게 물었다: “아교는 어떠냐?” 그러자 유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 아이가 이렇게 마음씀씀이가 깊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벌써 아교를 점찍었다니.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흥미를 느끼고 다시 유철에게 물었다: “아교가 좋으냐?” 그러자 유철은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유철은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만일 아교를 부인으로 맞이할 수 있으면 나는 반드시 황금으로 집을 지어서 아교를 거기에 살게 할 거예요.”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그 말을 듣고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웃었다. 기뻐진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바로 유철의 모친 왕부인을 찾았고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달리 총명한 왕부인은 그 자리에서 이 혼사(婚事)를 성사시킨다. 양가는 이렇게 정혼을 하게 된다. 자녀들이 결혼하게 되자 자연히 한집안사람이 된다. 한경제 유계와 관계가 좋았던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당연히 미래의 사위인 유철을 위하여 좋은 말들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오라비인 유계와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바로 유철을 언급하며 총명(聰明)하다고 칭찬했다. 이렇게 하여 유철은 유계의 관심을 끌게 되고 여러 번 관찰(觀察)을 받게 된다. 유계는 이 아홉째 아들이 확실히 용봉(龍鳳)의 자질을 갖추고 있고 키울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한경제는 여러 아들 중 유철을 특히 마음에 둔다. 그리고 유철이 7살 때 태자로 세우게 된다. 유철은 14살 때 태자의 신분으로 14살인 아교를 처로 맞이하니 아교는 태자비(太子妃)가 된다. 유철은 16살에 황제에 등극(登極)하고 아교는 황후가 된다.
그러나 아교는 어려서부터 걱정 없이 자라고 유복(裕福)하게 생활해왔었다. 집안에서는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응석을 부리는 게 습관화 되었다. 무슨 걱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讓步)한다는 것도 몰랐다. 황후가 된 후에 아교는 여전히 한무제(漢武帝) 유철의 총애(寵愛)를 받는다. 아교는 아름답기 그지없고 애교(愛嬌)가 뛰어났다. 한무제(漢武帝)는 아교에게 푹 빠져 있었는데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두려워했다.
제멋대로 하는 성격의 아교는 인생을 즐겼고, 매일 한무제(漢武帝)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함께 후궁에서 놀았다. 즐거운 생활은 빠르게 흘러갔다. 10년이 흘렀다. 이 10년간 온갖 향락(享樂)은 다 누렸다. 그런데 이 10년간 아교는 임신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도 시간은 많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한무제(漢武帝)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모친(母親)이 잘 말해서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무제 유철은 큰 뜻을 품은 사람이었다. 금방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싫어했고, 그는 아교는 여전히 좋아했지만 그의 감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그는 이전에 그의 마음을 빼앗았던 진아교(陳阿嬌)도 그저 성격이 제멋대로인 귀족여자(貴族女子)에 불과했다. 어떤 때에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편하지가 않았고 심지어 어떤 때는 싫증이 나기도 했다. 정력이 왕성(旺盛)했던 한무제는 적막(寂寞)함을 느꼈고 다른 여인을 찾으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이 끝난 후 발걸음이 배회(徘徊)하기 시작하고 점차 아교의 침궁(寢宮)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때 침어낙안(浸魚落雁)의 위자부(衛子夫)가 나타난다. 한무제는 마치 음침한 생활에 찬란한 햇살이 비친 것 같았다. 유철의 적막한 심리는 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충만했다. 고독한 마음이 마침내 의지할 곳을 찾은 것이다. 그리하여 유철은 하루하루 아교를 떠나고, 하루하루 위자부(衛子夫)에 가까워졌다. 아교가 이런 변화를 느꼈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어버렸다.
아교가 사태의 심각성(深刻性)을 깨달았다, 자신이 임신(妊娠)을 하지 못한 것은 국가사직이 걸린 큰 문제였고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아교는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회임(懷妊)하고자 했다. 의사도 찾고, 약도 먹고, 점도 치고, 신에게 기도도 했다. 모든 방법은 다 써보았지만 그래도 배는 불러오지 않았다. 아교는 절망하기 시작했다. 특히 위자부(衛子夫)는 연속으로 세 번이나 임신을 했다. 그러나 위자부가 아무리 예쁘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가녀(歌女)에 불과했다. 이런 미천한 가녀가 황후의 총애(寵愛)를 빼앗아가다니. 황후인 아교로서는 용서가 되지 않았다. 아교의 모친인 관도장공주와 한무제의 모친인 왕태후도 모두 그녀를 위해서 불평을 했고 공동으로 위자부(衛子夫)에 대응했다.
그러나 위자부(衛子夫)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무제도 사랑에 미쳤다. 한무제는 위자부가 절색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그녀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위자부(衛子夫)가 3명의 공주를 낳은 후에 아들을 하나 낳았다. 한무제는 더욱 기뻤다. 아들에게 유거(劉據)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오래지 않아 태자로 봉한다.
유철은 위자부(衛子夫)를 사랑하면서 다른 미녀에게 사랑이 옮아가자 다른 미녀에게는 더욱 열정적이며 더욱 아끼고 더욱 신경 쓰고 더욱 사랑했다. 그러나 황후 아교는 더욱 고통스럽고 더욱 상처받고 더욱 적막했으며, 더욱 씁쓸했다. 아교는 다른 총애를 얻었다가 잃은 여인들보다 마음이 아팠다. 왜냐하면 한무제(漢武帝)는 그녀가 어려서부터 같이 놀았고 그녀가 계속하여 믿고 신뢰(信賴)하던 친구였기 때문이다. 유철이 그녀를 떠난 것은 그녀의 동년기의 순진함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아름답고 천진난만했던 감정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아교는 유철을 가진 적이 있었고, 다른 여인들이 갖지 못한 즐거움을 누렸었다. 마치 순식간에 십년간 쌓아왔던 오색찬란(五色燦爛)한 황금집이 무너진 것 같았다. 아교의 마음은 칼에 꽂힌 것처럼 소리 없이 핏방울을 흘렸다.
입맛이 없는 아교는 다른 궁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더더욱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언제부터인지 마지막이 어느 날이었는지도 기억이 희미(稀微)하게 유철의 모습이 그녀의 궁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내다보면서 궁문의 동정을 살폈고 유철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교는 기나긴 밤을 홀로 지내면서 눈을 붉어지고 눈가는 검어졌고 얼굴색은 창백해졌고 용안은 초췌(憔悴)해졌다. 이때, 초복(楚服)이라고 부르는 무당이 황후의 침궁(寢宮)으로 찾아온다. 제정신이 아닌 황후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초복이 가르쳐준 방법을 그대로 시행한다. 작은 포인(布人)을 만들고 작은 포인을 위자부(衛子夫)라 칭하며 매일 바늘로 위자부(衛子夫)를 찔렀다.
한나라궁중에서는 절대로 무고비술(巫蠱秘術)을 금지했다. 황후 아교(阿嬌)의 이러한 행동은 궁녀들에 발각되어 고발당한다. 한무제(漢武帝)는 대노하여 당시의 형률대로라면 참해야 하지만, 한무제(漢武帝)는 옛정을 생각하여, 황후의 인새(印璽)를 거두고 황후를 폐위시킨다. 아교(阿嬌)는 이렇게 고통스럽게 장문궁(長門宮)으로 들어간다. 장문궁은 아주 구석진 곳에 있고, 곳곳에 황폐한 풀이 가득했다. 황궁에서 떨어진 장문궁은 색칠도 벗겨지고 낡고 썩은 냄새가 났다. 아교는 이곳으로 들어갔다. 눈물이 흐르는 적막한 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아교(阿嬌)는 이렇게 유철에게서 멀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철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했고, 옛정을 되살리고자 했다. 그녀는 한무제(漢武帝)가 부(賦)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서 당시의 유명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초청하여 부를 짓게 한다. 사마상여(司馬相如)는 눈앞의 이 여인에게 감동(感動)하여 붓을 들어 천고에 유명한 “장문부(長門賦)”를 쓴다.
눈물에 뒤범벅이 된 여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글을 읽고 한무제는 크게 칭찬(稱讚)한다. 그러나 부에 나오는 여인의 감정도 한무제(漢武帝)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한무제(漢武帝)는 여전히 장문궁을 내팽개쳐두었고 아교를 기억해내지 않았고 마음을 되돌리지도 않았다. 아교는 마음이 재처럼 사그라들었다.
장문원부(長門怨婦)의 치정(痴情)은 한무제의 영웅심을 움직이지 못했지만 이후의 문인들의 마음은 움직였다. 문인들은 붓을 들어 글을 쓰면서 장문사(長門事), 장문읍(長門泣), 장문폐(長門閉)등을 읊었는데 이는 모두 총애를 잃고 사랑을 잃은 것의 대명사(代名詞)였다.
기원전 139년 상사절(上巳節), 유철은 평양공주의 집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평양후부의 한 가녀인 위자부(衛子夫)를 만나서 아주 좋아하게 된다. 당시에 바로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녀를 궁안으로 데려온다. 위자부(衛子夫)는 이때부터 유철의 후궁이 되고, 부인(황후의 바로 다음 가는 자리임)에 봉해진다. 나중에는 황후에 오른다. 위씨 집안은 이로 인하여 고귀하게 된다. 기원전 91년, 간사(奸詐)한 강충, 환관 소문 등이 고의로 무고사건(誣告事件)을 조작하여 태자 유거(劉據)를 모함한다. 유거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거병(擧兵)하여 반항하나 패배하여 자살한다. 위자부(衛子夫)는 태자를 지지해서 한무제(漢武帝)의 진노를 사고, 목을 매어 자살(自殺)로 생을 마감한다.
이앙앙(李央央)의 이야기는 더욱 전설적이다. 그녀의 오빠인 이연년(李延年)은 유철에게 악부를 하나 바치는다. “북방유가인(北方有佳人), 절세이독립(絶世而獨立), 일고경인성(一顧傾人城), 재고경인국(再顧傾人國). 영부지경성여경국(寧不知傾城與傾國), 가인난재득(佳人難再得)” 이앙앙은 ‘경성경국(京城傾國)’의 ‘가인’의 대명사가 된다. 이때부터 삼천궁녀(三天宮女)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 아쉽게도 이앙앙(李央央)은 홍안박명(紅顔薄命)의 여인이었다. 젊은 나이로 불치병(不治病)을 얻는다. 유철이 여러 번 그녀를 찾아갔지만 만나기를 거절(拒絶)한다. 사후에도 유언(遺言)을 남겨 유철이 그녀의 죽은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녀의 목적은 실현되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그녀는 영원히 유철의 마음속에 남는다. 그리고 유철이 가장 그리워하는 여인이 된다. 유철은 추풍부에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바 있다.
진아교(陳阿嬌)의 만년은 여지(勵志)했다. 고대의 동양식(童養媳)의 처참한 여러 가지 이야기는 모두 먹고 살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유행하는 가완족(嫁碗族), 비혼녀(比婚女) 같은 유형, 노처녀가 급하게 남편감을 찾아서 결혼(結婚)하는 것은 결국 밥솥을 위한 것이다. 밥솥에 밥이 있어야, 밥그릇에도 밥이 담기는 법이다.
그러나 진아교(陳阿嬌)는 달랐다. 그녀는 혁혁한 가문출신으로, 죽은 효문제와 효경제는 각각 그녀의 외할아버지, 외숙부였다. 태황태후 두씨는 그녀의 외할머니이다. 부친은 세습 당읍후인 진오(陳午)이다. 그는 개국공신의 후손이고, 모친은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 유표로 유철은 그녀 모친의 사촌동생이 된다. 그리고 그녀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의 총애(寵愛)를 많이 얻었다. 즉, 진아교(陳阿嬌)는 근본적으로 돈이 모자라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할 수 있었다. 설사 혼인을 자신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시집가면 가는 것이고, 폐위되면 폐위(廢位)되는 것이다. 비바람이 지난 후에는 분명 무지개가 뜬다.
여인은 경제적으로 독립(獨立)하면, 남자에 대한 요구조건이 평면적인 심미에서 입체적으로 승격(昇格)된다. 이것은 점진적(漸進的)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느 한 남자를 떠나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물질적(物質的)인 여유는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 해준다. 그리하여 혼인과 애정에 대한 추구는 조금 약해진다.
진아교(陳阿嬌)와 유철의 혼인은 아마도 애정을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두태후가 사망하기 전의 기간 동안 유철은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다. ‘한서(漢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급제즉위(及帝卽位), 입위황후(立爲皇后), 천총교귀(擅寵驕貴)”. ‘천총교귀’의 네 글자는 분명히 말해준다. 그러나 사랑이 다른 여인에게 옮겨간 후에도 유철은 그녀에게 잘 대해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폐위시켰지만, 대우는 예전과 같았고, 장문궁은 상궁과 다름이 없었다.” 당연히 유철이 그녀를 본체만체 하더라도, 진아교(陳阿嬌)는 그냥 있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의 모친인 유표가 아직 살아 있었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진아교(陳阿嬌)의 여생은 여지의 특징이 있다. 그녀는 더 이상 유철이라는 이 ‘밥솥’을 필요로 하지 않은 것 같다. 폐위 때 그녀는 개략 37살이다. 이 나이에 이르면 더 이상 청춘도 아니고, 무엇을 더 억지로 구하겠는가. 이백(李白)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락불상천(雨落不上天), 수복난재수(水覆難再收) 비는 한번 내리면 다시 올라갈 수 없고, 물을 한번 쏟아지면 주워 담을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녀는 담담하게 살아간다. 원망하지도 질투(嫉妬)하지도 않고 자기 할 일을 자신이 한다.
혼인 애정(愛情)이라는 것은 있으면 즐기면 되고, 없으면 굳이 얻으려 할 필요는 없다. 억지로 딴 참외는 달지 않는 법이다. 진아교(陳阿嬌)가 사망할 때, 개략 57세 내지 60세이다. ‘한서(漢書)-외척(外戚)전권(傳券)67’을 보면, “황후는 20여년 만에 사망하고 패릉 낭관정의 동쪽에 묻히다.” 그녀는 수종정침(壽終正寢)했다고 할 수 있다.
금옥(禁獄)은 아교 일생의 청춘세월(靑春歲月)을 가두어 두었고, 그녀 일생의 쾌락과 고통을 가두어 두었다. 금옥(禁獄) 안에는 일찍이 남편의 사랑과 아내의 애교가 넘쳤지만, 나중에 장문궁 안에는 “등참월암무부반(燈慘月暗無復盼)”으로 고독하게 늙어갔다.
후인들은 잘 잊어버린다. 항상 ‘금옥(金玉)’과 ‘교(交)’에 대하여 무한히 아름다운 상상을 한다. 그러나, “사창일락점황홍(紗窓日落漸黃昏), 금옥무인견루흔(金屋無人見淚痕), 적막공정춘욕만(寂寞空庭春欲晩), 이화만지불개문(梨花滿地不開門)”
비단 창에 해는 저물어 황혼이 스미는데
궁궐 화려한 방에는 눈물 흔적 보아줄 이 없구나.
쓸쓸하고 빈 뜰엔 봄이 저물려 하는데
배꽃 땅에 가득 떨어져도 문 열지 않네. 금옥장교(金屋藏嬌)는 언뜻 듣기에 아름답지만, 기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의 금옥장교(金屋藏嬌)는 축첩(蓄妾)의 대명사로 뜻이 바뀌었다. 그러나 결말(結末)은 비슷하다. 결말은 모두 비참(悲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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