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와 승희는 크리스마스 때 만들 음식 재료를 고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과자와 빵을 굽기로 한 승희는 수많은 종류의 머핀믹스와 쿠키믹스들 앞에서 갈등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승희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그래?"
연희가 물었다. 승희가 초코쿠키 믹스를 쇼핑카트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결국 준호랑 아라랑, 밖에 나간 모양이야."
'아..'
많이 약해진 능력이지만 승희는 아직도 투시와 독심이 가능했다. 아마도 아라가 걱정되어 투시를 해 본 것이리라.
"선물을 잔뜩 사가지고 들어오는 구나. 아이구, 기특해라."
승희가 키득키득 웃고는 쇼핑카트를 쭉 밀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연희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준호는 현암의 집에 가지 않고 자신의 집에 들렀다. 열쇠가 어디있는지 알수가 없어 담을 타넘어 들어간 뒤 집 문고리를 조금 망가뜨리고(?) 문을 열었다.
'고치는데 또 돈이 들어가겠구만.'
준호는 바람같이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채화 물감이 든 상자와 와트만지(표면이 울퉁불퉁하고 두꺼운 종이. 수채화에 자주 쓰이며 번지기 효과를 내기 좋다)스케치북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었다. 그리고 서랍을 뒤져 4B연필과 미술용 지우개, 그리고 고무줄로 묶인 붓 한 뭉치를 손에 쥐었다.
'가만 있자...'
준호는 서랍을 닫고는 일어섰다.
'캔버스에..한번 수채화를 그려볼까? 좀 까다롭긴 한데..아니야. 와트만지가 더 좋은 질감을 낼 수가 있을거야....'
그랬다. 사실 캔버스에 수채화를 그리려면 약간 번거로움이 따른다. 특수한 스프레이도 필요하고 투명한 질감을 잘 내기 위한 테크닉도 필요했다.
'흠...'
준호는 작은 16절사이즈 정도 되는 캔버스 하나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현암의 집으로 가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갑자기 문고리를 잡으려는 준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또 만나네?"
"코..코제트?"
아스타로트에 의해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코제트가 준호의 앞에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준호는 미소를 띄며 제자리에 섰다.
"고마워."
"그런말 할 필요까지는 없는데...훗."
코제트가 한번 웃었다.
"내일은 크리스마스네. 사람들은 다 행복하지?"
"응. 코제트. 미리 인사할께. 메리크리스마스."
준호가 빙긋이 웃으며 인사했다. 코제트가 행복한 미소를 띄었다.
"나도...블랙서클에 들어가기 전까진 이맘때 쯤이면 참 행복했었어."
준호는 갑자기 기분이 숙연해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코제트도 한때는 사람이었으니 그런 추억에 잠겨있을 때면 만감이 교차하리라.
"...너도 메리크리스마스."
"고마워."
코제트가 답변을 하고는 숨을 짧게 몰아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가지 일러둘 게 있어서 말야. 아직 넌 상황이 정리가 안된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말이지? 나는 다 알아. 당신이 블랙엔젤로 속여 날 도와준 거와 예상치 못한 아스타로트와 아녜스의 음모, 그리고 아라와 나의 감정까지도 알려줬잖아."
"으으응."
코제트가 고개를 한번 저었다.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건 선물이야, 준호."
"선물?"
"그래. 지금 네가 언제부터 아라를 좋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미 넌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네가 눈치채지 못하고 앓는 걸 내가 안타깝게 여겨 너를 도와주려 했었던 거지."
"내가..눈치채지 못한거?"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잘 알지 못해. 특히 사랑의 감정, 분노의 감정은 감정의 주축을 심하게 흔들어 놓고는 하지."
"...."
"근데 이건 내가 자율적으로 하려 했던 게 아니야."
"..뭐라고?"
준호는 몸에 힘이 풀려 겨드랑이에 낀 스케치북과 손에 든 붓 뭉치와 캔버스를 와당탕 떨어뜨렸다.
"놀라지 마. 전혀 퇴마나 악귀의 짓은 아니니까. 단지....넌 행복한 아이라는 것을 알아둬."
"누가 널 시켰다는 말이야?"
코제트가 허공에 턱을 괴고 앉아 준호를 내려다 보았다.
"그래. 참, 너 아라한테 그림을 선물해줄거지? 열심히 해봐.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
코제트가 황급히 사라지려 하자 준호는 백마법의 문양이 그려진 손으로 코제트의 팔을 붙잡았다. 마력은 영에 통하는지, 마치 사람의 손을 잡은 듯 그녀의 팔이 만져졌다.
"왜 이러는 거지?"
"알려줘."
"무엇을?"
"내게 이런 선물을 전해준 사람이 누군지..."
"훗."
코제트는 한번 웃더니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지금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코제트의 목소리만 한번 준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준호는 떨어진 화구를 집어들고 한숨을 한번 쉬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현암의 집을 향해 걸었다.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인지, 지금까지 알지 못했어. 말세의 끔찍한 기억들을 지우고 싶어 그림을 그리는 것도 시작했었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참혹한 일들을 다 외면하고만 싶어했어. 난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코제트의 말 대로, 난 행복한 사람인가 봐.'
현암의 집에 도착하자 승희와 연희가 와 있었다. 그런데 아라가 보이지 않았다.
"아, 오셨네요."
"응. 방금 왔어. 어디갔다 오니?"
"집에 좀 다녀왔어요. 아라는 어디갔어요?"
승희가 재료가 담긴 봉투를 열어 젖히며 말했다.
"친구만나러 간다던데? 같은 동아리 부원이라는데 누구였더라..."
준호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2층 다락방을 향한 층계에 발을 얹었다.
"저 유화물감 좀 써도 되요?"
승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응. 화실 뒤 켠에 물감하고 팔레트 있으니까 쓰렴."
"예에."
준호는 계단을 한칸한칸 올라가기 시작했고 이내 승희와 연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연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첫댓글 흐음...준후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