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글라스 탓이 아니라 실제로 하늘이 그레이 컬러 입니다. 공휴일이어서 도로 사정이 좋았고 30분 빨리 '의릉'에 도착 할 수 있었어요. 이동 시간 동안 듣는 에공의 쉐어링은 아비에게 힐링 타임이었고 진리를 붙잡고 혁명의 투사처럼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여식을 보면서 부성애 가 동지애를 업었는지 울컥울컥 하더이다. "진득하게 걷는 법을 언제, 누구한테 배웠다냐?(나)" 적토마를 그 자리에 매어 두고 화장실에 들렸다가 '의릉 역사 관'에 빨려 들어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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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표 앞에서 '숙-경-영'을 집개질 했고 '의릉'의 주인이 20대 경종, 장옥정(희빈)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19대 숙종 재위 동안 (인현왕후 vs 장희빈)을 앞세워 권력의 구조 안에 파고 들기 위해 서인- 남인-노론-소론의 세력 다툼이 치열했어요. 명종 때 송강 정철, 중종 시절 송순 등이 유배를 당해 필자의 고향 담양에 내려왔고 면앙정-소쇄원 같은 문화유산 덕분에 '가사 문학'의 고장이 됐다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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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여인들이 숙종을 지아비로 모셨는데 본처를 끌어내리고 경종을 왕위에 올린 장옥정은 비록 사약을 받긴 했어도 나름대로 괜찮은 인생이라고 봅니다만, 본처인 인현왕후는 착하기만 하고 대가 없다 보니 서방 뺏기고 대마저 끊겨버렸습니다. 중전의 무술이었던 최숙빈은 숙종에게 픽업되어 하루아침에 성은을 입었고 경종이 요절하자 숙빈의 아들이 영조가 됩니다. 에예공! 장옥정-인현왕후-숙빈 중 누구의 생을 선택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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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마다 사건사고는 늘 있어왔습니다. 역사(History)가 그(Jesus)의 이야기(Story)이듯 사건 사고의 연결(연속동작)이 역사입니다. '존재와 수학'을 끝으로 끝났는가 싶었는데 '예수와 바울 vs 마르크스와 레닌'을 '혁명의 투사'로 대입시키는 것이 과연 맞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졌어요. 바디우 형님의 '존재와 사건'은 사건-진리-개입-탐구-실행의 패턴을 거친다는 데 ,정말 그런지 한 번 따라가 봅시다. 팔로우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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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란 곧 존재다' 살다가 '공백'(사건)을 만나거든 존재의 공백을 바로 봉합하려고 애쓰지 말고 사건을 처절하게 파악-해석해서 새 창조로 나아가라. 이때 기 '존재'는 유한성의 구조에 얽매에 있는 상태로, 주체가 '무한성'의 구조로 뚫고 나가려고 하지 않으면(공백을 봉합 하면) 의미가 없고, 사건과 부닥쳤을 때 기 '존재'에 저항하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진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쾅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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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사건'을 만나 혁명적 주체로서 상황과 부닥치면 1. 진리 개입-2. 충성-3. 탐구가 일어납니다.
1. 주체-사도 바울(비일관적 다수)
2. 사건-다메섹 체험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2.(진리)-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죽은 예수가 부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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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거의 동시 패션으로 일어납니다. 계시를 붙잡은 바울이 이 사건을 통해 예수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일생을 건 복음의 경주에 목숨을 겁니다( 충성- 탐구). 마르크스와 레닌이 코민을 위해 당을 조직하듯, 주체가 사건에(진리) 충성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조사 탐구를 통해 진리를 세워갑니다.예수처럼 바울처럼.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진리가 제도화(도그마)되면 죽는다는 것 아닙니까?
2024.10.10.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