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늦게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누구 소개로 알게 됐다며 전화번호를 받아 적으라면서 연락을 하라 하신다.
맞선을 보라는 이야기다. 난 이런 경우는 처음 접했다. 주선자가 약속장소를 정해서 만나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전화번호만 달랑 주면서 만나라고 하는 건 처음이다.
사실 소개팅은 태어나서 딱 한번 해봤다. 고등학교 때 미팅 2번 나간 거 말고는. 대학교 때는 국어국문학과라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더 많았고, 딱히 미팅이나 소개팅을 할 필요성을 못느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좀 쑥스럽기도 하다. 군대 제대하고 복학해서 후배가 하도 졸라서 소개팅에 나간 적은 딱 한번 있다. 그게 다다.
어쨌든 이래저래 물어보니 요즘은 전화번호만 주는 겨우도 많다고 해 3일이 지나서야 간신히 전화를 했다. 다짜고짜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다. 상대방 여성도 크게 망설이지 않고 좋다고 흔쾌히 대답해 날짜를 정했다. 주중이 편하다고 해서 수요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약속장소는 수요일날 다시 전화해 정하기로 하고서는.
수요일이 돼 전화를 했더니 날이 춥다고, 사실 그날 올들어 최고로 추웠던 날이었다. 다음에 만나자고 하기에 아에 날짜를 못박았다. 바로 어제 금요일. 직장이 양재동이라고 해서 그 쪽으로 간다고 하니 화곡동이 편하다고 해서 화곡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뿔싸. 화곡역이 어떤 곳인가. 그 유명한 일단조져님이 사시는 동네 아닌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단조져님이 브라질에 계시다는 것. 약속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화곡역 부근의 맛집과 분위기 좋은 카페를 검색했다. 화곡역을 가 본적이 한번도 없다.
이럴 때 일단조져님이 있었으면 맛집과 분위기 좋은 카페를 편하기 알 수 있기는 개뿔, 그양반이 화곡역 부근 싼 술집은 알아도 분위기 좋은 카페르 어찌 알겠는가.....
여하튼 새롭게 만나다는 것은 설레이는 일. 지난해부터 사겠다고 벼르던 하프코트도 멋들어진 체크무늬로 한벌 사고, 남방과 티도 하나 샀다. 좀 댄디해 보이는 것들로. 하지만 옷을 본 사람들의 평은 좋다는 사람 반, 별로라는 사람 반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 나가자님의 한마디 "나이 많이 들어보인다" ㅜㅜ
그렇게 기다리던 금요일이 왔고, 머리도 단정하게 자르고. 목욕재개하고 정성들여 면도도 하고, 지난달에 새로 구입한 헤어드라이기로 헤어스타일도 다듬고.... 온갖 준비를 하고 소개팅 장소인 화곡역으로 출발했다. 8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10분전에 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게 악수였다. 데이트 준비를 위해서는 한 시간 정도 먼저 가서 사전답사를 했어야 하는 것인데... 긴장했나 보다. 7시 10분쯤 줄발하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7시에 갑자기 배가 아픈 것이 아닌가... 급하게 화장실을 갔다오니 10분을 조금 넘겼다. 허겁지겁 출발을 해서 지하철을 타고 화곡역으로 향하는데 영등포구청 지날 때 쯤 전화가 왔다.
시간은 7시 41분. 아직 여유있는 시간인데 그녀는 먼저 도착한 것이다. 회사 끝나고 바로 왔나 보다. 자기는 역곡에 도착했다고 어디쯤이냐고 묻는다. 당황한 나는 두손으로 아이폰을 받들고 이제 영등포구청 지나고 있다고 말하니, 지하철타고 오냐고 묻는다. 눈치가 차를 가져오지 않느냐는 느낌이다.
흠... 아고라에 보면 소개팅가서 된장녀를 만난 사연들이 가끔 올라온다. 소개팅 나가서 연봉, 집, 차의 유무를 물어보는 여자들이 차없다고 딱지 놓는 이야기들.... 아... 내차를 왜 폐차시켰을까... 맞선보기로 한 여성분은 화곡역 도착하면 다시 전화하라고 해 정말 죄송하다며 말하고 끊었다. 이놈의 전철, 왜이리 더디갈까.... 역시 지하철은 민영화를 해야 된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머리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화곡역에 도착해 전화를 하니 XX커피숍으로 오라고 일러준다. 흠. 내가 검색해서 뽑아논 자료에 있던 카페이다. 부리나케 카페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바로 도착했지만 시간은 7시 59분. ㅜㅜ
먼저 도착한 그녀는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인사를 하고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차를 주문했다. 메뉴판을 보니 술이 없다. 녹차를 한잔 시켜놓고 무슨 이야기를 시작할까...하다가 커피를 끊은 이야기를 먼저했다. 커피를 많이 마시는 직업이라 믹스커피로 인해 살이 찌는 것 같아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시작햇지만 바로 끊어졌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머리 속은 복잡했다. 소개팅 경험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해도 될까 안될까.... 그래서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이런 자리에서는 호구조사부터 하는 것 아니냐며. 사는 곳과 가족관계를 물었고 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1남1녀. 나는 1남 2녀. 어머니는 광명사시고 나는 오류동에 산다고 하자 그녀는 오류동을 모른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끊어지다를 반복했다. 그녀의 취미는 스노우보드와 웨이크보드. 그래서 난 바보같이 운동을 못한다고 솔직히 말했다. ㅜㅜ(악수였다. 과도한 솔직함은 좋지 않다. 외향적이고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앞에서 운동을 못한다고 하다니...)
영화이야기도 하고, 여기서 공통점이 있었다. 그녀와 나는 서스펜스, 스릴러 등의 반전영화를 좋아한다. (음.. 같이 영화를 볼수 있겠군). 그리고 나의 취미인 건프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관심을 보였다. 요즘 엔가가 올라 비싸다는 이야기에 동감한다. 또 음식만드는 걸 좋아한다고 하니 거기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녹차를 마시다가 흘려서 낭패를 봤다. 이런 덤벙대기는...
저녁을 먹자고 하니, 다이어트 핑계를 대면서 저녁은 싫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카페에 사람이 많이 온다고 그녀가 말한다. 그래서 나는 검색을 해봤다고 화곡역 부근 카페와 맛집에 대해. 이 카페가 PC를 같이 할 수 있는 카페라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그러면서 은연 중에 게임이야기가 나왔다. 오타쿠의 한 부류인 내가 또 게임이야기를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게임이야기가 시작됐다.
왠걸.. 그녀도 한 때 게임을 했었다고 한다. 블리자드의 WOW(World Of Warcraft)를 열심히 했다며 게임이야기를 또 한참을 했다. 여기서 또 실수를 했다. 나도 한때는 온라인 겜을 하면서 피시방에서 1박2일을 보낸 적이 있다고...(사실 2박3일이었다). 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본다.. 아뿔싸.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술에 대해서 물어봤다. 술을 좋아하냐고. 그녀는 술을 잘마시지는 못한다고 한다. 소주는 알콜냄새가 싫어 못마시고 백세주 같은 술을 마신다고. 흠 나는 주종을 안가리고 마신다고 했다. 술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래서 필살기를 던졌다. 나가서 술 한잔 하자고.
조금 고민을 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그러나 이내 부담스러운지 다음에 마시자고 한다. 다음을 기약하자는 건가.(무척 헷갈렸다)
그녀의 직업은 위탁급식업체에 다닌다고 했다. 건설현장에서 급식을 하는 것을 관리하는 일이다.
종교이야기가 나왔다. 그녀는 기독교 신자이다. 교회이름을 묻지는 않았지만 엄청 큰 교회인것 같다. 크리스마스에 교회에 가냐고 물었더니 성가대라서 가야한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산다고 하네. 쩝.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교회에 안간다고 한다. 빈틈이 생겼다. 이브에 영화보자고 해야지....
또 침묵이 흐르고... 어느덧 1시간이 지났다. 사실 정신이 없었다. 경험도 없었꼬..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고 커피값을 계산하고 나왔다. 계산을 하면서 짱구를 돌렸다. 집까지 바래다 줘야 하나.. 그녀의 집은 화곡역에서 가깝다고 했다. 일단 커피숍을 나와서 그녀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그러자 그녀가 자기는 혼자가도 된다며 나보고 가라고한다.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오늘 즐거웠따고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말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왔다.
연봉도 묻지 않고 회사에 대해서도 그다지 묻지 않는다. 차와 집이 있는지도 묻지 않아 편했다. 사실 내가 내세울 게 뭐가 있나... 그리고 키도 크고 늘씬하고 얼굴도 예쁜편이다. 프로파일링 하려고 했지만 머리 속이 멍했고 복잡했다. 그녀는 스웨이드털조끼를 입었고 카만 바지에 조금 높은 힐의 앵클부츠를 신었다. 까만 색을 좋아 하는 듯.
버스를 타고 오면서 몇몇 사람에게 끝났다고 문자를 날리자 답신이 온다. 일단 집에 가서 잘들어갔냐고 문자보내라고.. 이게 악수일 줄이야.. 집에 와서 집에 잘들어가셨냐. 오늘 즐거웠다. 날이 추우니 따뜻하게 밤을 보내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문자를 씹혔다. ㅜㅜ
오늘 점심때 진보신당 사무국장에게 전화가 왔길래 문자씹혔다고 상담을 했더니, 문자를 보내는 것보다 통화를 하는 것이 더좋다고 한다. 문자를 보내면 이사람이 문자로만 하려고 하네 하며 좋게 생각을 안한다며... 역시 젊은 아해들이 센스가 있어. 괜히40대들 충고를 들었다가.....ㅜㅜ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한 번 더 전화해서 만나서 이야기 해보고... 안 되면 술먹어야지. 머. 내 팔자에 여자는 무슨....
첫댓글 글이 아주 진솔하고 사실적이라 매우 좋군,,,,,,,,,,
역쉬 국문과 출신다워`````````````````````````````````````
다시 만나서 좋은관계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런데 왜? 잘나가다 지하철 민영화야~~~
짜식~ 사람 관계가 문자, 술. 가족관계로만 되면 얼마나 좋겠냐..인생은 알 수 없는거...아//외롭다~
긍게 왜 40대한테 조언을 구하고 그러셔요. 40대에게 문자는낭만이나 30대에게 문자란 좀 그렇죠. 하하하. 걍 편한만남을 한번 더 가져보면 좋을 듯.
차이셨군요...
잔인하군
미안해요 뭐 다른건아니구 상대 여성분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는 겁니다.
차인건 차인거 아닌가?
여자운이 없으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