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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스튜디오는 18개월의 입주기간을 정리하고 작업을 위한 고뇌와 노력, 휴식을 함께 한 스튜디오와 작가들이 그간의 활동을 보고하는 행사입니다. 한시적인 기간이지만 몽인아트스페이스를 함께 했던 작가들과 앞으로 함께 할 작가들, 그리고 입주와 관계 없이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모든 분들에게 창작의 보금자리로 기억되고자 합니다. 입주기간 동안 창작에 전념하며 창작의 고민과 열정을 나누었던 작가들에게 감사드리며, 몽인아트스페이스 곳곳에 스며든 그들의 정신과 추억이 다음 작가들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 홍미경_양찬제
지금까지 미디어가 생산하는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수용해 세계를 봤다면, 이제는 이미지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한다. 전쟁, 테러, 자살, 사고 등 죽임 이미지를 수집한 권경환은 모형 자 형태를 지닌 「Standard of death」(2009)를 통해 단순한 선의 형태로 죽음 이미지를 규격화한다. 다양한 사건과 사연을 가지고 죽음에 이르지만, 정작 우리에게 다가온 죽음 이미지는 그 내부와 상관없이 작가가 규격화한 몇 가지 범주 안에서 변형할 뿐이다. 권경환은 이렇게 규격화된 이미지 형태를 반복하거나 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이것은 미디어가 우리에게 스펙타클한 죽음의 이미지를 제시했던 방식과 같은 방법이다. ■ 이대범
박진아가 일상의 장면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리는 것은 만년의 마네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조금씩 다른 표정의 루엥 성당을 수 십 차례에 걸쳐 그리거나,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늦둥이 모리츠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여러 번 화면에 담는 것과 같은 주제나 대상에 대한 집착(파라노이아)의 누적에서 오는 고전적 의도보다는 오히려 정 반대의 확산과 증식을 지향하는 분열증적이고 발산적인 동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여러 장의 화면을 메워가는 무심한 그리기의 반복을 통해 작가는 동일 인물을 여러 번 그리는 행위에 익숙해져 갔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의 관심은 화면 내의 사건들에서 격리되어 점차로 외부로 향한 결과 회화와 외부의 경계로서의 틀에 의문을 던지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 틀에서 저 틀, 이 그림과 저 그림의 경계는 어떻게 설정되는 것이며 그 주체는 누가 되는 것인가. 실제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 찍혀진 사진, 그려진 화면, 또는 작품의 편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과 범위가 교차한다. ■ 정신영
박지현 작가는 짧은 시간 일정한 효력을 발산하고 사라지는 향이 '약하면서도 강한 목소리를 내는 재료'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한다. 향을 태우는 행위는 늘 어떤 '염원'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러한 '염원'들이 대부분 어떤 '욕망'에서 기인한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 작가에게 향이라는 재료가 스스로 동경을 품어 왔고 실존적 삶을 살아내고 있던 '뉴욕'이라는 곳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는 향을 질료로 하여 오브제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작품이 품고 있는 개념적 측면과 연결시키는 독특한 설치 형식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러한 형식과 함께 타고 있는 향으로 한지 위에 이미지를 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평면 작업들이 그가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중략) ● 그의 평면 작업들은 데칼코마니 기법과 같이 반전된 형식의 두 개의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형상을 가진 두 개의 면이 만나서 처음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이러한 조형 질서는 그의 평면 작품들을 읽어 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Tunnel'은 조밀하게 들어선 뭉게구름 같은 형상이 양면으로 배치되면서 화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화면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은 환시적 느낌을 준다. 형상의 평면적 속성이 운동 에너지의 방향성과 입체성으로 전환되었다. ■ 고원석 평문 중 발췌
이윤진의 사진은 독일사진의 고전적인 어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그를 가르친 베른트 베혀(Bernd Becher)나 토마스 루프(Thomas Ruff)의 사진전통은 그의 사진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건축물을 짓듯이 사진을 구축한다는 점이다. 그녀의 사진이 매우 튼튼해 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사진을 건축물의 형태로 만든다는 것은 자칫 권위적이고 권력적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실제로 많은 사진가들이 자신의 사진에 건축적인 구성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사진을 만든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그들은 위대한 사진가로 성공했지만 그들의 사진은 보는 이에게 위압감을 주고 숨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반면 이윤진은 그런 위험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마치 렘 쿨하스(Rem Koolhaas)의 건축물처럼 자신의 사진적 구축물에 묘하게 비틀린 면들을 집어넣는다. 때로는 그 면이란 사진 속에 등장하는 건축적 요소들―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은 실제의 건축물이 아니라 방 안에 있는 탁자나 선반 등을 건축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을 독특한 앵글로 짜 맞춘 것이기도 하고, 아니면 다소 은유적으로, 일반적인 생활공간을 자신만의 앵글로 본 것이기도 하다. ■ 이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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