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대표하는 단 한명의 디자이너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 는 사람이 랄프 로렌(Ralph Lauren)이다.
그만큼 폴로의 랄프 로렌 은 전 세계인 패션계에서 확고한 명성을 얻고 있다는 의미다. 세계 주요 도시에서 아침에 출근을 하는 사람들은 옷장을 열어 폴로 (Polo)셔츠에 꺼내 입고 폴로 타이를 맨다.폴로 향수를 뿌리고 출근 하며,밤에는 폴로 이불속에서 잠이 든다. 친구나 가족 생일 때면 폴로 매장을 찾아 무엇이 적당할 까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폴로의 인기로 랄프 로렌은 전세계에 4500여개의 매장과 73개의 할 인매장,43개의 플래그쉽 샵(Flag_ship Shop)을 운영하면서 연간 수 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취급 품목은 정장 셔츠 넥타이 같은 남성 의류에서 여성복 안경 향 수 침대시트 자기류 가죽소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폴로가 피부 색 갈이나 연령,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 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랄프 로렌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생활양식을 제시한 디자이너였다. 직장에서 입는 옷부터 넥타이는 물론 잠자리에서 입는 파자마와 침대 의 시트까지 같은 이미지를 연출한 첫번째 디자이너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생각지도 못했던 시도로 신선한 충격이었고 사람들 은 로렌의 통일화된 상품을 살 때면 어떤 계층과 지위에 속한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품격을 파는 것' 이라는 그의 의도는 적중했다.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폴로의 이미 지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국 브롱스(Bronx)태생인 랄프 로렌은 화가였던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4명의 아이중 막내로 태어났다. 야구를 좋아하고 데 이트도 하는 평범한 소년이었으나 색채 감각만은 남달랐다.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색에 대해 천성적인 감성을 물려받았다. 학 교에 다닐 때 내가 무엇을 입든지 아이들은 어디서 샀는지 묻곤 했 다." 맨해튼의 사립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그는 2년후 중퇴하고 장갑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그 후 넥타이 제조회사로 옮겨 폭 이 넓은 넥타이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는데 로렌의 재능을 알아본 노먼 힐튼 사장이 그에게 5만달러를 지원해 로렌은 폴로패션이란 회사를 차 리게 된다.
67년 그가 직접 디자인한 넓은 폭의 넥타이를 가지고 유명 백화점인 블루밍 데일스에 찾아갔으나 백화점측은 폭이 좁고 랄프로렌이란 라벨 을 없애기를 원했다. 그러나 로렌은 그의 고집을 꺽지 않았다. 블루밍 데일스는 경쟁 상 점에서 그의 넥타이가 불티나게 팔리자 다시 찾아올 수 밖에 없었다.
넥타이의 성공에 자신을 얻은 랄프는 이어 남성 셔츠와 넓은 옷깃의 남성복 그리고 여성복까지 영역을 넓혔다. 드디어 71년에 베버리힐스의 로데오가에 랄프 로렌의 첫번째 폴로 매장을 열었고 그 후 여러 매장들이 잇다라 문을 열었다.
어떤 사람들 은 랄프 로렌을 가르켜 진정한 전통성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 에게는 그의 상품이 너무 새롭고 깔끔하게만 여겨지는 것 같다. 이에 대해 로렌의 답변은 간단하다. "나의 감각속에는 전통주의가 바탕을 깔고 있다. 그 세계속에서 생 활하고 즐기고 또한 나는 그러한 것을 존중한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 서 이것 저것을 집어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찰스 황태자도 내 옷을 구입한다"고 덧붙인다.
30년간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랄프 로렌은 덧없이 지나가고 마는 디자이너가 아닌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한 장본인이다. 국내에서도 폴로의 인기는 두말할 나위 없다. 아메리칸 캐주얼이란 새로운 패션영역을 대중에게 전파한데 이어 폴로스포츠,폴로골프와 여 성복 랄프로렌,아동복 폴로베이비 등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데 성 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