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이 나라 산을 푸르게 하고 영원한 적멸(寂滅)에 들다 !!!
이글은 맨 아래 “2024.09.06. 신문기사”를 보고 감회(感懷)를 쓴다.
필자는 이 글의 제목을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스스로의 몸을 불살라 부처님께 공양(供養)하는 것.
※양(供養)-부처님께 바치는 음식 및 모든 것, 넓은 의미로
귀의(歸依)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소신공양(燒身供養)”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김동리 소설 “등신불(等身佛)”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조까지 과히 불교의 나라라 할 수 있는 한반도에서
호국불교(護國佛敎)니 하여도 “소신공양(燒身供養)”은 듣지 못했다.
오직 김동리의 “등신불(等身佛)”에서다.
아래는【】에 있는 내용은
김동리 소설 “등신불(等身佛)”에 있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의 간단한 줄거리다.
【만적(萬寂)은 법명(法名)이요, 속명(俗名)은 기(耆), 성은 조씨(曹氏)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자랐다.
어머니 장(張)씨는 사구(謝仇)라는 사람에게 개가(改嫁)를 했다.
사구(謝仇)에게는 전처(前妻)에서 난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을 신(信)이라 했다.
나이는 장(張)여인 아들 기(耆)와 같은 또래로 모두가 여나믄 살씩 되었다.
하루는 어미(장씨)가 두 아이에게 밥을 주는데 가만히 독약(毒藥)을 신(信)의 밥에
넣었다.
기(耆)가 우연히 이것을 엿보게 되었다.
기(耆)가 혼자 생각하기를 이는 어머니가 나를 위하여 사(謝)씨 집의 재산을
탐내어 전처(前妻) 자식인 신(信)을 없애려고 하는 짓이라 생각했다.
기(耆)가 슬픈 마음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신(信)의 밥을 자신이 먹으려 할 때
어머니가 보고 크게 놀라 그 밥을 빼앗고 말하기를,
이것은 너의 밥이 아니다.
어째서 신(信)의 밥을 네가 먹느냐 했다.
신(信)과 기(耆)는 아무 대답도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 신(信)이 자기 집을 떠나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기(耆)가 결심하기를 집을 나간 신(信)을 내가 반드시 찾아 돌아오리라 하고
집을 나셨다.
기(耆)는 몸을 감추기 위해 중(僧)이 되었다.
이름은 만적(萬寂)이라 고쳤다.
세월이 흘러 만적(萬寂)이 스물 네 살 되었다.
만적이 스물 세 살 나던 해 겨울에 금릉 방면으로 나갔다가
우연히 집을 나갔던 “신(信)”을 만났다.
열세 살 때 자기 어머니의 모해(謀害)를 피하여 집을 나간 “신(信)”이었다.
그리고 자기는 이 신(信)을 찾아 역시 집을 나왔다가 그를 찾지 못하고 중이 된 채
어느덧 꼭 삼십 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난 것이다.
둘 다 성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 다시 만난 “신(信)”을 보고는 비록 속세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중이된
만적으로서도 눈물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착하고 어질던 “신(信)”이 어쩌면 하늘의 형벌을 받았단 말인가!
“신(信)”은 문등병이 들어 있었다.
만적은 자기 목에 걸렸던 염주를 벗겨서 “신(信)”의 목에 걸어 주고 그 길로 곧장
절(정원사)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만적은 음식을 끊고 말을 잃었다.
만적(萬寂)이 결심하기를 이 업보(業報)를 갚기 위해
몸을 태워 부처님 앞에 소신공양을 한 것이다】
김동리의 등신불(等身佛)은 이렇게 쓰여졌다
(글을 간단히 하기 위해 요점(要點)만 쓴 것임)
▶필자는 기회있는대로 말했지만 대략 1970년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일상에 필요한
연료(燃料)는 산에 있는 나무와 풀이였다.
특히 시골에서는 산에 나무를 벌목(伐木)해서 장작을 만들어 연료(燃料)로 사용하였다.
또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런 면에서 필자도 우리나라 산에 산림(山林)을 망친 죄인 중 한사람이다.
가정에 연료나 살기위한 수입을 위해 산에 나무를 많이 베었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나무뿌리 진달래뿌리등 온 산을 파헤쳤다
그 나무로 음식을 끓이고 방을 따뜻하게 하였다.
이런 벌목(伐木)이 강제로 중지된 것이 박정희의 5.16 군사혁명이었다.
벌목(伐木)을 법으로 단속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황폐된 산을 복원하기 위해
사방공사(沙防工事)와 산에 나무심기를 강제 동원하였다.
매년 4월5일 식목일은 공휴일로 정하여 대대적인 산에 나무심기를 하였다.
또 “유휴지(遊休地) 활용”이라하여 모든 땅에는 곡식심기를 권장하였다
심지어 논두룩에도 콩을 심었다.
나무가 없는 야산에는 호박을 심었다.
그때 국민들은 박정희 욕을 많이 했다.
사람 못살게 하는 군사독재라고--
그 박정희 때문에 오늘날 GDP 35000달러 대한민국이 있다 !
▶한국에 연탄이 보급된 때는 일제강점기였다.
대부분 권력가나 부잣집에서 사용하였고 서민은 연탄 이름도 몰랐다
연탄은 1945년 해방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서민들을 위한 연료로 자리 잡았다.
우리사회에 연탄이 보급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도 많았다
연탄에 중독되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
필자도 연탄중독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다.
▶2014.12.18. 조선일보 기사에
이정록 시인의 시집 “아버지 학교”에 “연탄”시가 있다.
아비란 연탄 같은 거지
숨구멍이 불구멍이지
달동네든 지하 단칸방이든
그 집,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한숨을 불길로 뿜어 올리지
헉헉대던 불구멍 탓에
아비는 쉬이 부서지지
갈 때 되면 그제야
낮달처럼 창백해지지
이정록 시인은 쉰여섯에 세상을 뜬 아버지의 삶을 한겨울 연탄에 비유했다.
▶연탄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연탄은 희생과 겸양과 자기 몸을 불사르는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우리를 지켜왔다.
그렇게 소중한 운명으로 태어나서 대한민국 국민을 따뜻하게 살렸다.
이렇게 적선(積善)을 하지만 연탄은 그 누구한테도 어깨를 으쓱하거나
비싸게 굴지 않았다.
빽없고 가난한 집은 물론 집 없는 사람의 동전 몇 개에도 제 몸을 내주었다.
필자의 일기장에 1970년의 어느 연탄 광고내용이 보인다.
“연탄은 해마다 서울 백만 가정의 겨울을 지킵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후 이 시간까지
1년 365일 연탄 스스로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우리 국민을 지켜왔다
그리고 “박정희와 연탄의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산(山)은
푸르게 바뀌었다.
▶2024.09.06 신문기사에
서울에 남아있던 마지막 연탄 공장이 곧 문을 닫는다고 한다.
지난 7월 연탄 생산을 중단했고 지금은 철거 중이다.
한때 서울에만 공장 18곳에서 하루 1000만 장을 찍었다.
긴 세월 서민의 따뜻한 겨울을 책임졌지만 국민 삶이 윤택해지면서 설 땅을 잃었다.
아직도 연탄을 사용하는 서민 빈곤층이 있다.
연탄이 없어지면 연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가정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이렇게 우리 국민과 애환(哀歡)을 같이 했던 연탄도 태어났다 사라지고
필자도 늙었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