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은 수요일이었다.
또한 그날은 '부처님오신날'이자 '스승의날'이었다.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오월에, 그것도 주 중에 공휴일이라니.
이보다 더 큰 선물이 또 있을까 싶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겐 완전한 축복일 터였다.
연초에 '대학로'에서 연극 '행오버'를 관람하고 나오면서 형제들과 멋진 봄날의 이벤트를 약속했었다.
아름답고 조용한 자연 속에서.
내가 형제들을 안내하고 싶었던 곳은 '경기도'와 '강원도'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양동면'이었다.
서울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고요하고 울창한 숲이 있는 천혜의 고을이었다.
게다가 국립이나 도립공원도 아니었고, 유명 관광지나 명승지도 아니어서 그 지역 사람들을 빼고는 주목하는 이도 별로 없는 완벽한 자연 생태지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약 15K 정도 트레킹을 하면서 깊은 대화도 나누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추억도 엮어 싶었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그놈의 날씨가 문제였다.
비가 온다고 했다.
"허허"
'AI 슈퍼 컴퓨터'의 분석이라 과히 틀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 전야에 우리들 단톡방이 띵동거리기 시작했다.
"비가 온다는데 굳이 먼 양동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요?"
이심전심이었다.
가까운 곳으로 변경하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우천으로 인한 긴급한 수정이었다.
그렇게 미팅 포인트가 '양동면'에서 '양재 시민의 숲'으로 변경되었다.
'양재 시민의 숲'에서 '사당역'까지는 '우면산'을 넘어가면 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약 8K 정도 였다.
정상 부근의 능선을 따라 가는 코스가 아니라 '서울 둘레길'을 걷는 경쾌한 트레일이었다.
한 형제는 삼성생명의 급한 발주 때문에 동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 명만 '우면산' 트레일로 접어들었다.
울창한 숲 속을 걸으며, 얼마 전에 아빠와 딸 단 둘이서 여행을 하고 돌아온 한 형제의 '부녀 여행기'를 들었다.
대단했다.
'부자여행'도, '모녀여행'도, '모자여행'도 아닌 '부녀여행'이라니.
정말로 범상치 않는 케이스였다.
준비된 가장으로서 지금까지 멋진 인생을 살아온 그 형제니까 가능한 여행이었다.
나도 가족여행은 숱하게 진행했지만 부녀 단 둘만의 여행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겐 다소 생경했다.
그랬던 만큼 솔직히 그가 부러웠다.
또한 그의 사랑이 더 깊고 커보였다.
그 형제는 원칙과 낭만, 유머와 따뜻함이 묻어나는 가장이었다.
'우면산'은 '예술의 전당' 뒷편에 있다.
그래서인지 시민들도 많았고 산자락을 굽이 돌 때마다 펼쳐지는 풍경의 변주도 완전 예술이었다.
자신의 건강증진을 위해 힘쓰는 시민들의 모습이 힘차고 활력있어 보였다.
과연 '시와 음악'이 흐르는 숲이었다.
트레커들과 자연의 조화도 완벽했다.
내가 트레킹을 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읊조리는 기도문이 하나 있는데, 아주 오래된 사유 한 조각이었다.
"내가 두 발로 걸을 때까지만 내 인생이다"
걷지 못하면 병원이나 간병인의 손길이 내 삶에 덧칠되기 십상이었다.
아니면 타인의 조력에 의해서만 삶의 작품을 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건 필시 나락이란 단어가 명찰처럼 가슴 위에 새겨지는 서글픈 인생일 터였다.
그러니 우리가 건강할 때 자연을 더 접하고, 멋진 장소에 가보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향기로운 추억을 많이 엮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수록 채움으로 빽빽한 가슴이 아니라 비우고 덜어내 여백이 살아 숨쉬는 넉넉한 가슴이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런 작은 소망과 원칙으로 살고 있다.
커피를 내린 직후엔 매우 뜨겁다.
처음엔 뜨거워 못 마시겠더니 마실만 하면 금방 식는다.
커피란 게 본디 그렇다.
또한 식은 커피를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건강과 열정이 있을 때 뜨겁게 살아야지 막연한 미래를 기다리며 선물같은 오늘을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일 톤의 생각'보다 '일 그램의 행동'이 더 요긴한 법이다.
내가 생각하는 삶의 지혜다.
트레킹은 금세 끝났다.
사당역 부근의 맛집에 자리를 잡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트레킹이 일찍 끝나 다행이다 싶었다.
중년의 세 사내들은 서로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며 막걸리잔을 힘차게 부딪혔다.
서로의 눈빛만 봐도 미소가 벙글어지는 가슴 따뜻한 형제들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늘 비호처럼 빨랐다.
흐르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대화 후반부에 한 형제의 속 깊은 고백을 들었다.
아버지의 폭력, 중 1짜리 어린 학생과 엄마가 함께 운영했었던 포장마차,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던 가슴 속 깊은 상처들, 그리고 형제간의 관계, 삶의 무게에 대한 회한, 그런 속에서도 현재의 성공적인 사업체 경영에 이르기까지 눈물겨운 '시놉시스'였다.
지천명을 넘기면 남자들도 눈물이 헤퍼진다고 했던가.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너 나 할 것 없이 세 사내가 다 그랬다.
너무 절절한 스토리라 오히려 듣고 있던 나의 영혼이 아릴 정도였다.
한바탕 진하게 눈물을 쏟고 일어섰다.
알고 지낸 세월이 길다고 사람이 가까워 지는 건 아니었다.
서로의 가슴 속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가까워지려는 수고와 열정이 있어야 가능했다.
다양한 층위의 공감과 성찰 그리고 신뢰와 추억이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하게 교차해야만 비로소 깊은 우정과 사랑이 커지고 깊어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오랜만에 그것도 대낮에 사내들의 진한 눈물을 보았다.
나도 벌컥 쏟았다.
그래서 일까.
깊은 숲 속에 한 떨기 산들 바람이 지나간 뒤의 느낌처럼 상큼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
예상치 못한 힐링이었다.
행복했고 감사했다.
우리가 더 늙은 후, 깊은 산 속 나의 작은 오두막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맥이 급속도로 작아지고 좁아 질 터였다.
지금 내 휴대폰엔 전호번호가 약 5천 5백 개 정도 저장되어 있는데 앞으로 10년 내로 3-4백 개 정도로 줄이려 한다.
격하게 줄이고 싶다.
노후엔 그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사람들, 사랑하는 형제들, 감사를 전하고 픈 사람들만 간직하고 있으면 되리라.
이런 만남과 부대낌 그리고 이런 공감과 추억들이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자 축복이 아니던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감사였다.
'아름다운 형제들' 때문이었다.
오늘 새벽 큐티 시간에도 '울보 삼총사'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기도했다.
소중하고 멋진 형제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이 형제들이야말로 하늘이 내게 허락하신 가장 값진 은총임을 고백한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막걸리 잔에 담긴 눈물인가요? ㅎㅎ
행복한 시간, 멋진 경험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