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심작가의글
커피와 차의 오글오글한 이야기 85
이 원칙은 내각에도 변화를 가져 왔는데 양당 정치가 아니고서 는 국정의 일탈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832년에 선거법 이 개정되었고 자본가와 지주계급의 보수당이 토리당입니다.
민주당인 휘그당은, 소시민과 산업에 종사한 시민들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휘그당은 노동 계급이 발전하자 생성된 노동당
으로 흡수되어,영국은 보수당과동당의 양당 체제를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토리당은 휘그당의 출정 계획을 반대했으 나 휘그당의, 자본을 앞세운 국익 창출의 명분을 이길 수는 없었 습니다. 영국은 20척의 함선과 4000명의 원정군을 급파하기 로 결정, 조지 엘리어트를 전권대사로 임명했습니다. 1840년 6월, 영국을 떠난 엘리어트의 함대는 광동 앞 바다에 그 모습을 드러 내었습니다. 20척 밖에 안 되는 함대였으나,청나라는 상상할 수 없는 화력과 위력을 갖춘 원정군이었지요.
최신식의 대포를 장착하고 해전에 오랜 경험을 쌓은 영국 해군 들의 공격에 청나라의 수군은 속수무책 이었습니다.
임칙서가 그토록 애써 준비한 군함들도 결국은 급조 된, 만든지 오래 된 낡은 배에 지나지 않았고 수군들은 해전의 경험이 전무
하다시피 했습니다. 영국 원정군은 주산 군도를 가볍게 점령하 고 양자강 하구도 봉쇄한 뒤, 천진 입구까지 단숨에 진격해 갔습 니다. 그 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청나라와의 교섭을 시도했 습니다. 그 때까지 임칙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임칙서는 그를 모략하는 세력들에 의해 파직되고 기선이라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임칙서는 임진왜란 때의 우리의 충무공의 처지와 그렇게도 닮았을까요? 만약 그 때 임칙서만 자리를 지키고 임무를 수행했더라면 사태 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항구를 불태울지라도 결사항쟁하 리라는 임칙서의 결심은 어떤 사태에서도 변하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기선은 맞서 싸워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일단 영국군들을 다독여서 광동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일단 광동으로 군력을 돌린 영국 해군들이 얌전히 있었을까요? 아마 대단한 무력을 과시했겠지요. 광동에서 본 영국 해군들의 위용에 놀란 기선은 참으로 엉뚱하고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질 러 버립니다. 영국 해군들이 한 번 공격을 개시하자 마자 항복! 황제의 허락이나 그 누구와도 의논 한 번 하지않고 엘리어트와 단 둘이 만나서 배상금으로 육 백 만냥을 주고, 홍콩도 주고, 자국에서 영국인들에게 자국민과 꼭 같은 신분과 이득을 주는, 기가 막힌 광동협약을 맺어버린 겁니다. 원래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관료는 어느 나라나 할 것 없이 이와 유사한 짓들을 저지릅니다. 기선과 같은, 나라의 안위를 내팽개치는 좀벌레들 말입니다. 이 소식을 접한 도광제는 대노해서 기선을 파직시키 고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었으나 이미 일은 벌어 졌습니다. 뒤늦게 이런 일들을 알게 된 중국인들이 중구난방으로 영국군 에게 저항했으나, 영국 함대는 더욱 강력해진 함대로 영파를 접수했습니다.
그 때에 이르러 영국군들은 일만의 정병으로 불어나 있었고, 증기선들이 14척이나 중국 해안을 빈틈 없이 에워싸고 있었습 니다. 중국군들과 일반 백성들이 자위대까지 조직하여 영국군 들에게 저항했으나 속수무책, 영국인 사상자가 생겼다는 이유로 영국 군대의 더욱 잔인한 보복을 당했습니다. 영국군들의 공세 는 거침없고 더욱 기승해져서 1842년 6월, 상해까지 점령당하 고 말았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영국군은 남경으로 진격했으니 청나라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 1842년 8월 , 청나라는 자국의 땅에서도 하지 못하고 영국의 군함 갑판에서 치욕스런 조약을 맺게 되었으니 이른바 남경 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중국 근대사의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며,장닝조약이 라고도 합니다. 1842년 8월 29일, 청나라의 전권대사 기영,
이리포와 영국의 전권대사 포틴저가 조약을 맺음으로 아편전쟁 은 일단 끝이 났습니다. 일단 끝이 났다는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말이 되겠지요. 난징 조약은 말 그대로 불평등조약이 고 청나라의 치욕이었습니다. 조약의 내 용을 간단히 요약하자 면 홍콩을 할양할 것. 광저우,푸저우,샤먼,닝보,샹하이의 5개 항구를 통상항으로 개항할 것,개항장마다 영국 영사관을 설치할 것 . 전비배상금 천 이백만 달러를 지급할 것. 아편 보상금으로 육 백만 달러를 지급하고 수출입 화물 관세율을 영국과 협의하 여 결정할 것. 양국간의 문서 교환의 형식은 동등할 것. 영국인들이 자유롭게 거주할 것. 등입니다. 이렇게 한 쪽의 일방적인 요구만 가득한 조약은 일찌기 없었습니다. 중국의 처절한 치욕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