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ddanzi.com/ddanziNews/17440698
1949년 6월 28일
호림부대(서북청년단 367명을 주축으로 한 육군본부 정보부 산하의 특수부대. 주요시설 파괴, 기관 습격, 살인, 방화, 군사기밀탐지가 주요임무였다) 2개 중대가 북한 지역을 침투했고, 일주일이 안 돼 모두 북한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1백 명이 넘는 유격대원들이 사망했고, 4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들은 9월 26일 모란봉 극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호림부대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2개 대대가 7월 4일 양양 지역을 공격했으나, 250명이 사망하고 31명이 포로가 되었다.
모란봉 극장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호림부대 대원들
(출처- MBC)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런 사실을 호도하기 위해, 대통령의 명령만 떨어지면 양양이나 원산을 하루 안에 점령할 자신이 있다고 헛소리를 했다.
7월 말
남한 측 1개 대대가 북침했다.
8월 4일, 8월 6일
8월에 있었던 남북의 충돌은 대부분 소규모의 남한 군이 북침했기 때문에 일어났으나, 38선에서의 충돌은 양측 군대가 서로를 도발해서 생겼다. 당시 군사 고문단장이었던 로버츠에 따르면, 북한의 공격은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남한 측이 끊임없이 북진을 외쳤다고 한다.
9월 30일, 10월 7일, 12월 30일
최소한의 방어 체계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신생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는 북진 통일론은 끊임없이 외쳤으며, 정부의 허풍과 거짓말로 인해 ‘공갈 때리다!’란 신조어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들의 허풍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출처- 정부기록사진집)
이승만은 미국을 믿었을까?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이 기댈 언덕이 되지 못했다.
‘미국이 남한 군사력에 대한 충분한 보강없이 철군할 경우엔 우방국들로부터 배신으로 보일 수 있으니, 경제적인 지원과 함께 철군 전에 남한 군의 훈련, 무장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라고 공식 문서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금으로 잡은 예산 규모는 겨우 1,097만 달러였다. 그 와중에도 집행된 것은 1,000달러에, 남한에 반입된 물품까지 다 합쳐도 겨우 35만 달러였다. 2차 대전에서 쓰고 남았던 무기가 쌓여서, 폐기처분 해야 할 정도로 양이 많았지만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게 무기원조를 하지 않았다.
1950년 1월 5일
트루먼은 ‘남한과 대만이 북한이나 중국군(중공군)에 의해 공격을 받아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1월 12일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극동방위선 밖으로 밀어내면서, 다시 한 번 간접적으로 ‘불개입’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등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던 북한을 끊임없이 도발하고, 북진통일 실지회복을 외쳤던 대통령과 낙루장관 신성모는 환상의 조였다.
6.25의 단초가 된 애치슨 라인
이 때 북한은,
1950년 2월~4월
북한에서 38선 3~4km내에 거주하는 모든 민간인들을 대대적으로 소개(疎開.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하는 것)했으며, 이 움직임을 남한 정찰군이 포착했다.
4월 28일
북한군 조종사가 남한으로 귀순을 했고, 북한 상황을 대중매체를 통해서 증언하며, 5월에 남침할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6월 셋째 주
90,000 병력을 38선에 연한 진지에 투입했다.
다시 남한으로 돌아가,
4월 11일
비상경계령을 내렸다가 해제했다.
5월 8일
경계령을 내렸다가 해제했다.
6월 11일
육본에서 비상경계령 발동했다. 당시 군사고문단 단장인 브라운 준장에게 이승만과 신성모도 남침의 징조를 말했으나, 그 때마다 번번이 브라운은 남침은 있을 수가 없다고 묵살했다.
6월 24일 0시
어느 때보다 더 남침의 조짐이 확연한 시기에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 헨리 대령의 강권으로, 채병덕 총장이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앞에서부터 살펴보면 왜 미국의 전쟁 유도설이 나왔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6월 25일 오전 4시
24일에 있었던 육군 참모학교 구내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파티가 끝나고, 다음날인 6월 25일 새벽 2시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모든 군의 고위 간부들이 곯아떨어진 지 2시간 후인 오전 4시, 북한이 남침을 단행했다.
6월 25일 오전 6시 30분
(출처- 정부기록사진집)
창덕궁의 비원 반도지에서 평화롭게 낚시를 하던 우리의 국부는 그 곳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가장 먼저 무초 미 대사에게 연락을 한 대한민국 대통령은 그 다음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신성모에게 전투명령을 내렸다.
6월 25일 오전 11시
대통령의 비상소집에 따라 국무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끝난 후 내무부 치안국장은 전보를 통해 전국경찰국에 ‘전국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형무소 경비’를 지시했다.
6월 25일 오후 2시
채병덕 총참모장은 이승만이 친히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후방 사단을 이동해 반격하면 능히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딱히 결론이 없는 회의가 끝난 후, 이승만은 <대통령령 제377호>를 공포했다. 기존의 ‘각 조의 공문을 공포 또는 공고함에는 관보로써 한다’를 ‘신문 또는 라디오 기타 적당한 방법으로써 한다’란 것이었다. 다시 말해, 비상사태하의 법령 공포를 신문이나 라디오, 기타 적당한 방법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당한 방법으로 법령을 남발할 수 있게 된 이승만은 먼저 긴급명령 제 1호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한다. 전쟁 발발 사흘째인 28일부터 국민보도연맹사건을 발생케 하고, 수복 후 많은 시민을 부역혐의로 몰아붙여 학살하는 근거가 된, 바로 그 법령이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
6월 25일 밤 9시
무초를 만난 이승만은 ‘내가 공산군의 손에 들어가면 나라가 곤란하니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다’란 뜻을 전한다. 그에 무초는 서울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고, 국부는 피난 갈 것을 고집했다.
6월 26일
전쟁 발발 이틀째, 오전 6시에 미 대사가 성명을 발표했다.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미국대사가 먼저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오전 8시에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생방송으로 성명을 냈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통령은 7시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채병덕은 서울사수를 공언하며 4일 내로 평양을 점령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러면서 17연대가 해주로 진격 중이니 곧 반격 전환을 해서 북진을 하겠노라고 했는데, 사실 17연대는 인천으로 철수하는 중이었다.
이미 피난을 결정한 이승만은 늦은 밤 경무대에서 비상 국무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정부의 수원 이전이 결정되자 이승만은 교통장관에게 고급공무원과 국회의원을 피난시킬 열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서울사수냐 철수냐의 의제로 시작된 국회토론은 새벽까지 이어졌고, 결국 찬반투표에 의해 서울사수가 결정이 되었다. 이 결정을 알리려고 국회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 이승만은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6월 27일 새벽
이승만은 26일 밤, 맥아더에게 전화해 ‘미국이 빨리 참전하지 않으면 국내에 있는 미국인들 2,500명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리고 전화한지 4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27일 새벽 2시 경무대를 떠났고, 4시경에 대구행 특별열차를 탔다. 이승만 내외와 황규면 비서관,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홍 총경이 함께였다.
그는 미 대사와 국회에도 알리지 않고 피난길에 나섰으며, 낮 12시 30분에 대구역에 도착했다. 경북 지사와 3사단장을 만난 뒤 ‘너무 멀리 튀셨다’는 조언을 듣고 열차를 되돌려 대전으로 갔다.
반면 미국은 자국민뿐만 아니라 당시 남한에 거주하고 있던 타국인까지 일본으로 철수시켰다. 그들은 본국 국민들의 철수를 위해 거의 1년 전부터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고 한다.
6월 27일 새벽 4시
비상 국무회의에서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으며, 이 자리에 참석한 국방장관이란 자는 국무위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황을 잘 모르겠는데요”
애초에 국방부장관이란 옷이 몸에 맞지 않았던 신성모가 잘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라며 손바닥을 비비는 것, 이승만을 대하거나 이승만만 생각하면 감격에 겨워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 그리고 영어. 신성모는 영국 상선 선원 출신인 만큼 영어를 잘했다.
6월 27일 오후
국부는 대전에 도착해서 유엔 안보리 참전 결정을 들었다. 한숨을 돌린 국부는,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도 방송하는 것이 좋겠어.”
자식이 없어서 대한민국 청년 모두가 자신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입버릇처럼 지껄이시던 국부의 사랑이 눈물겹다. 비서관에게 연설문을 받아 적게 한 국부는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이를 읽어 나갔다.
6월 27일 밤 10시~11시
피난민 1호 이승만의 육성이 3차례 방송을 탄다. 방송이 3회로 그친 이유는 방송국에 와 있던 저명인사들이 거짓 생방송을 참지 못하고 중단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방송을 들은 서울시민들 대부분이 짐을 풀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그리고 6.25가 일어난 지 65년이 지난 오늘, <KBS>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6.25 당시 일본에 망명을 요청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한국 정부의 공식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어 소문으로만 돌던 이야기가 진짜로 밝혀진 것이다. 가족을 버리고 도망가려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야하는 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국부라고 불리고 있다.
(출처- KBS)
참고문헌
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 비평사, 1996
김삼웅, <해방후 양민 학살사>, 가람기획, 1996
하리마오, <38선도 6.25전쟁도 미국의 작품이었다>, 새로운 사람들, 1998
이희진 오일환, <한국 전쟁의 수수께끼>, 가람기획, 2000
김덕중 외,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다할미디어, 2000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 국민위원회, <다 죽여라 다 쓸어버려라>, 2003
존 메릴, <새롭게 밝혀낸 한국전쟁의 기원과 진실>, 두산동아, 2004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1,2>, 인물과 사상사, 2004
가미야 후지, <한국전쟁>, 프로젝트 한반도, 2004
신기철, <국민은 적이 아니다>, 헤르츠나인, 2014
첫댓글 조선시대에 왕 같지도 않는 개자슥들은 실질적으로 왕을 했어도 종(혹은 조)라 붙이지 않고, 군이라했지요.
대표적인 게 연산군인데.... 또 다른 개자슥을 대라고 하면 당연히 선조인데... 어쩌다 그 개자슥은 선조가 되고 그 다음에 정치를 잘한 왕은 광해군이 되었었고...
어쨌거나... 저는 이 제도를 오늘날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이승만 같은 개쉑.... 쿠데타로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짓밟은 역적시키들.... 그리고 법을 위반해서 대통령직을 강탈한 씨발뇬들은...
대통령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친이르 매국노들과 이런 역적 시키들은 국립 묘지에서 파 내어야 하고...
임금호칭처럼, 대통령의 호칭도 차별화 시켜야 한다....
음. 좋은 생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