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의 추억 / 김문억
소리는 울림이고 울림은 파장이다.
단순히 귓전을 깨우는 알림의 소리가 있는가 하면 가슴깊이 파고드는 울림의 소리가 있다.
소리 중에서도 종소리는 전달의 차원을 넘어 가슴을 흔들어 놓는 감동으로 울려올 때가 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소리를 듣고 살아가는 중에서도 기억에 남아 있는 소리가 종소리인가 한다.
추억의 종소리 중에는 뭐니 뭐니 해도 초등학교 시절 공부시간 끝을 알리면서
땡 땡 땡 울려오던 맑고 청명한소리가 있다.
현관 교무실 앞 추녀 끝에 매달려 있는 종을 소사 아저씨가 때 맞춰서
몇 차례 울려주면 쉬는 시간이 돌아오는 탓에
화들짝 반가운 소리였다.
수업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는 반가울 때도 있고 미울 때도 있었다.
그 때는 오직 학교종소리에 따라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그 소리는 전달의 신호이면서 명령이기도 했다.
해맑은 볕살 아래 맨드라미 분꽃 피는 화단 위로 퍼져나가던
금싸라기 같은 종소리는 티 없이 맑고 명명한 소리였다.
동네마다 이장이 치는 종이 있었지만 웬만해서는 소리를 내는 법이 없다.
가끔 동네에 필요한 모임이 있어도 입과 입을 통하여
암암리에 의사소통이 잘 되던 시절이어서 겉으로 표시 내는 일이
없던 때다. 구태여 요란하게 티를 내면서 종까지 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종소리가 꼭 필요한 경우가 있었으니
어쩌다 마을에서 초가집에 불이라도 나는 재앙이 발생하면
다급한 종소리가 온 동네를 마구 뛰어다녔다.
갑자기 난타하는 종소리가 이웃마을까지 흔들어대면
모든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연기 나는 집으로 달려와서 불을 껐다.
서울로 이사를 하여 첫 밤을 자고나서 들은 소리가 딸랑딸랑 두부장사 종소리였다.
종이라고 하기 보다는 손에 들고 흔드는 작은 요령이었는데
아침밥을 먹기 전 게으름뱅이를 깨우는 반가운 소리다.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종소리를 좇아가며 '아저씨이' 하고 불러 세워서
손바닥 위에 받아오는 커다란 두부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끈한 아침 먹거리였다.
요즈음은 도시 뒷골목에서 어쩌다가 맞닥트리는 경우가 있지만
자동으로 종을 치는 장치를 해 놓았기 때문에 똑같은
리듬이 경망스럽고 재미가 없다.
해마다 보신각에서 새해를 맞는 의미로 33번을 치는
제야의 종소리는 많은 의미를 갖고 울려 퍼진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이른 새벽 사대문 개방과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타종,
즉 파루를 33번 친 것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시계가 없으니 정부에서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정해진 각 시간마다 징이나 꽹과리, 북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 소리를 모든 주민이 들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대문이 닫히고
주민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이경과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오경만큼은 종로 보신각에 있는 대종을 쳐서 널리 알렸다고 한다.
이경에는 대종을 28번 쳤는데 이를 인경 소리라 했고,
오경에는 33번 쳐서 파루라 했다.
인경에 종을 28번을 친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 이십팔수(28별자리)에게
밤의 안녕을 기원한 것이고,
파루에 33번을 친 것은 제석천이 이끄는 하늘의 삼십삼천에게
하루의 국태민안을 기원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종소리들은 단순히 알리는 것에 목적이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로 들려오는 종소리도 있었다.
4.19가 일어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와서 학비 마련을 위해 신문을 돌렸는데
새벽에 들려오는 교회당 종소리는 잠자리를 차고 일어나야 하는 괘종시계 이상이었다.
아침신문을 돌리기 위해 신길동에서 영등포역까지 가려면 깜깜한 새벽길을 달려야 했고
여명을 끌어 올리는 교회당 종소리는 매캐한 새벽안개 속에서
은은하게 울려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시원의 종소리 같았다.
문득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영화한 「노틀담의 꼽추」에서
주인공역을 맡은 안소니 퀸의 종지기 모습이 떠오른다.
거대한 종탑 위에 올라가서 허공을 휘저으며 울려대던 종소리는 감동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종소리가 아니다. 외롭고 쓸쓸한 중에
사모하는 감정이 생긴 자신의 마음을 온몸으로 알리는 울부짖음이었다.
그런 종소리가 세월이 가면서 교회가 자꾸 늘어나고
여기저기서 경쟁적으로 종을 쳐대는 바람에 소음으로 전락되어 퇴출되고 말았다.
그렇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많으면 소음이다.
종소리 중에는 산사에서 내려오는 범종 소리를 빼 놓을 수 없다.
교회당 종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라면 절간에서 들려오는
예불의 종소리는 땅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다.
예배당 종소리가 멀리 퍼져 나가는 파문의 소리라면 산사에서 내려오는
범종 소리는 뻑뻑한 먹빛으로 번져오는 깊은 울림의 소리다.
장삼자락이 있고 선녀의 옷자락이 보인다.
그 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둥글둥글하다.
그러면서도 가슴을 후벼 파고 뼛속 깊이 스며오는 뜨거움이 있다.
이제는 산업화 시대를 지나 디지털 시대까지 변모해 가고 있지만
생활의 편리가 마음의 편리까지는 충족해 주지 못하고 있다.
시간을 알리고 위급함을 알리면서 정신세계까지 위무하던
종소리들 대신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가 대신하고 있다.
밭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발치에 떨어지던 예배당 종소리,
타는 놀빛을 덮어 끄면서 어스름을 몰고 오던
먹빛 범종 소리의 축축한 그 파장에 흠뻑 젖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