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 3:1-11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1-11 / [새 계약의 일꾼] 우리가 지금 자기 선전을 늘어놓는 거짓 교사들처럼 긴 편지를 써서 우리 자신을 치켜 세우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우리를 여러분에게 추천할 어느 누구의 추천장도 필요 없고, 또한 여러분들에게 추천장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2) 우리에게 필요한 추천장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착해지면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선한 일을 베풀었다는 것을 누구나 보고 알게 될 것입니다. 3) 여러분이 바로 우리가 쓴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을 누구나 알 것입니다. 이 편지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입니다. 돌판에 새긴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에 새겨 넣은 것입니다. 4)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굳건히 믿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담대하게 할 수 있습니다. 5)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힘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6) 사람들을 구원하는 새 계약에 대한 것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전부 다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령께서 생명을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켜서 생명을 얻으려다가는 결국 죽음밖에 맞을 것이 없지만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십니다. 7) 그러나 죽음을 가져다 주는 이 율법도 그것을 처음 받았을 때의 모세의 얼굴은 사람들이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습니다. 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모세의 얼굴도 잠시 동안이나마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8) 그러니 성령께서 생명을 주시는 오늘날에는 훨씬 더 찬란한 영광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9) 사람에게 죄가 있다 없다 하고 판단하는 율법도 이처럼 영광스러웠다면 사람들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인도하는 일은 훨씬 더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10) 정작 모세의 얼굴에 빛나던 최초의 영광은 새 계약의 영광에 비교하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11) 사라져 버릴 낡은 것에도 하늘의 영광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하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우신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에는 얼마나 더 찬란한 영광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교인들에게 왜곡된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에 답답해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향한 영광스러운 직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바울의 편지인 고린도 교회(1-3) 유대로부터 온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추천서가 없이 성경교사 노릇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성도들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속아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울 한 사람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심각한 거짓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개척하여 설립한 고린도 교회만큼은 자신의 사도직을 입증할 다른 어떤 추천서가 필요 없는 곳이라고 주장합니다(1). 바로 고린도 교회 자체가 바울의 추천장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이라고 천명합니다. 이 추천장은 당시 서류상 통용되던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누구도 지울 수 없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라고 말합니다(3). 게다가 돌판에 쓴 정도가 아니라 마음 판에 새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누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복음을 왜곡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가 거짓 가르침에서 속지 않고, 자신이 전한 바른 복음 안에 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확신(4-11)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사명이 땅에서 즉 당시 거짓 교사들처럼 종교적 부담이나, 직업적 돈벌이나, 학문적 탐구욕구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생긴 확신이라고 천명합니다(4). 바울은 이 확신 덕분에 자신의 사명은 거짓 교사들처럼 ‘스스로 만족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족하시기에 하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5-11). 그렇게 하늘에서 온 확신이 있기에 자신이 하는 일은 거짓 교사들처럼 율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는 영의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에게는 하늘로서 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4). 그것은 영광스러운 새로운 직분이며 하늘로서 온 새 언약의 사명인 것입니다(8-9).
적용: 당신은 바울처럼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는가요?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행하는 당신의 일에는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가요, 아니면 아픔과 다툼의 열매가 맺히는가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방문했다가 한국에 열광한 한 젊은 영국인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매료된 그는 몇 년 후, 영국 <이코노미스트> 기자로 다시 돌아왔고, 그 외에 다양한 활동으로 무척이나 매력적인 나라에 사는 이방인의 시각으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그 제목이 뜨끔합니다.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누구보다도 열심히 달려왔지만, 너무 서둘렀습니다. 물질적인 가치 이상의 무언가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훨씬 잘 살지만, 누구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시간의 향기>에서 ‘머무름의 기술’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 설 교 >
영광의 직분
고후 3장 6~11 / 인명진목사
우리들 모두에게는 부모님에게 받은 이름 석 자가 있습니다. 이 이름 석 자를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갑니 다. 그런데 이 이름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영 광스러운 이름이 되기도 하고 미움과 원망이 되기도 하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내 이름 석 자를 칭찬하기도 하고 때로는 욕을 하기도 합니다.
이름 석 자를 잘 지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이름 석 자 뒤에는 꼬리표가 달려있습니 다. 제 이름 인명진에는 목사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어서 저를 인명진 목사라고 부릅니다. 어떤 이는 선 생, 교수, 박사, 사장, 의원 등의 꼬리표를 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더 좋은 꼬리표를 달기 위 해 애를 씁니다. 과장 보다는 전무, 전무 보다는 사장, 구의원 보다는 시의원, 석사 보다는 박사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은 좋은 꼬리표 달기 시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성공 여부를 그 사람이 어 떤 꼬리표를 달았는가로 평가합니다. 이름 밑에 달려 있는 꼬리표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집사, 권사, 장로, 목사라는 꼬리표가 하나 더 달려 있어서 이 꼬리 표로 부릅니다. 여러분은 이 꼬리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평생에 이런 아름 다운 직책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아니면 참으로 부담스럽다고 생각합니 까?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교회에서 주는 것이니까 달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저도 목사라는 꼬리표 를 38년간 달고 있지만 세월이 갈수록 목사라는 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버겁 게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실 제가 이 목사라는 꼬리표 외에도 많은 꼬리표를 달고 있습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지만 제가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등록된 이사장 꼬리표도 5개나 있습니다. 상임대표, 공동대표도 몇 가 지 있고 대통령 고문, 통일 고문의 꼬리표도 있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희망공부방 원장이라는 꼬리표 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그 수많은 꼬리표 중에 저를 인명진 목사라고 부릅니다. 제 가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에게 세상에서 내노라하는 꼬리표가 많은데 왜 사 람들은 목사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외국 사람들 특별히 기독교 전통을 지닌 서구 사람들은 자기를 소개할 때 아무리 박사학위를 가져도 박 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장이라도 사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실례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목사만 은 "나는 목사(Reverend)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Reverend 는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나는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으레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 것이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습니다. 목사가 박사(Dr.)를 받아도 박사를 먼저 부르지 않고 목사를 앞 에 붙여 목사 박사라고 말합니다.
장례식장에 가보면 영정 사진을 밑에 위패가 있습니다. 거기에 집사, 권사, 장로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런 이름조차 없는 사람은 성도 라고 씁니다. 선생이고 교수고 장관이요 시장이라고 해도 절대고 그 직책 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 현상은 공원묘지나 납골당에서도 다 같습니다. 묘비에 보면 장관, 사장 누구의 지묘란 것은 없습니다. 집사, 권사, 장로의 묘라고 적혀있습니다. 죽어서도 따라다니는 것이 장로요 집사 요 권사인 것입니다. 이 직책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상 더 귀하고 소중한 직 책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호칭 중에 가장 높은 것, 가장 귀중한 것으로 부릅니다. 누군가 죽었을 때 그가 지녔던 가장 소중한 직책을 장로요 집사요 권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영원 히 남을 묘지에 자신의 이름 밑에 장로요 권사요 집사의 직책을 적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사, 장 로, 권사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이름입니다. 세상에서 받는 가장 귀중한 직책입니다. 이 이름과 직책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직책이야말로 영안실까지 묘지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직책이란 것 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원희룡 집사가 안수를 받는 날 아버지 원장로님께서 제주도에서 돼지를 한 마리 잡아오셨습니 다. 안수가 끝난 후에 "목사님 이렇게 기쁜 날이 없습니다." 하시기에 "아들이 전국 수석 할 때보다, 국회 의원이 되었을 때보다 더 기쁘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럼요. 오늘이 더 기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신앙을 가진 아버님이 계시니까 오늘의 원집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직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특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안실에까지 묘지에 까 지 이를 귀한 직분을 주신 것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직책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 니다. 흠이 가지 않도록 늘 다듬어야 합니다. 이름은 자칫 잘못하면 더러워지기 쉽습니다. 자칫 잘못하 면 때가 묻기 쉽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에 때가 묻지 않도록 잘 간수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이름 보다 이 이름을 지키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하고 투자해야 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습니다. 동창회장을 하기 위해서도 수고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직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기도의 눈 물로만 헌신과 봉사의 눈물로만 여러분의 이름에 묻은 때를 닦을 수 있습니다. 기도의 눈물이 없고 봉사 의 땀이 없으면 여러분의 이름은 점점 때가 묻어 흉하게 변하게 될 것입니다.
제 친구 목사 교회에 문제가 많은 권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인들이 목사에게 이 권사님 을 어떻게 좀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이 권사님을 놓고 계속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음성을 들었 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권사를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운 소중한 사람이 니 그냥 두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교회의 교훈이 되는 그 권사님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고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집사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권사도 안수집사도 목 사도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나를 세우셨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 다.
2년 전 뉴스 후라는 방송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언론이 기독교에 대 해서 비판적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는 잘못을 부풀리기도 하고 일반화합니다. 물론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닌데도 그렇습니다. 아무튼 기독교가 언론의 시비거리 가 되고 있습니다. 뉴스 후에서 어느 교회의 임직식에 대해서 취재를 했는데 이 교회는 장로를 세우고 권 사나 안수 집사를 세우는데 돈을 받는다고 합니다. 장로는 일억, 권사와 안수집사는 이천에서 오천 만원 이라고 하는데 그 자료까지 다 나왔습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 습니다. 임직자가 교회에 드리는 선물도 없고 교회가 임직자에게 선물을 하지도 않습니다. 어찌 보면 삭 막하다 할 임직식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때때로 유혹을 받습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돈으로 생각합니 다. 그런데 그냥 받으니까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돈을 내고 장로가 되고 권사나 안수 집사가 되 면 소중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셨으니 우리 교회 에서도 헌금을 걷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급해서 예전에 임직을 받은 분들에게도 걷어볼까 생각 했습니다. 제 친구 목사에게 물어보니 이게 효과가 있어서 직분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장로나 권사나 집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영원한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는 것은 언젠가는 빼앗기게 됩니다. 기한이 있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은 영원합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니고 갈 수 있어서 소중한 것입니다.
물건을 누구에게 받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저희 집에 윤보선 전 대통령이 써주신 경천애인(敬天愛人)이 란 글자를 표구를 해서 걸어두었습니다. 글씨는 잘 못쓰셨지만 대통령이 써주신 것이니까 소중하게 간직 하고 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께서 쓰신 글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대통령 이름이 새 겨진 시계를 차고 다니며 좋아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이 주셨으니 소중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사 람이 준 것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유용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 지 이 직분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안실까지 여러분의 시신 위에도 여러분의 관 을 덮는 관보도 이 직책으로 덮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남길 묘비에도 이 직책으로 남겨질 것입 니다.
이 직분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회사를 잘 경영하는 사장은 스톡옵션을 받고 직장에서 일을 잘하면 승진 을 하고 월급도 오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맡은 직분도 상급이 있는 직분입니다. 성경 고린도 전서 15:58절을 보면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수고한 만큼 거두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수고한 만큼 거두었다면 성공입 니다. 그러나 헛되지 않는 투자는 주님 안에서 하는 수고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에게 상을 받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 상을 받지만 때때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미리 상급과 축복을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 주위에 많은 사 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충성한 종들,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며 땀 흘려 수고한 사람들 그 자손이 잘되고 그 가정이 축복을 누리는 것을 이 세상에서도 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한 가지 가지고 있는 고집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주는 감사패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제 사무실에는 감사패가 없습니다. 어디에서 감사패를 주겠다고 하면 두 손을 내저어 사양합니다. 노회 장 끝나면 으레 감사패를 주는데 저는 극구 사양해서 노회장을 지낸 사람 중에 감사패를 안 받은 사람은 아마도 저 한 사람일 것입니다. 저는 속셈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잘해서 사람한테 받는 상이 무슨 소용 이 있겠습니까? 하나님나라에서 받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감사패도 안 받고 상장도 안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상급 받기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이미 이 귀한 직분을 받은 사람이나 이 귀한 직분을 받게 되는 29명 모두 이 직분을 소중하 게 생각하고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받은 직분을 잘 다듬고 소중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때가 묻지 않 게 흠이 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혹시 때가 묻으면 기도의 눈물로 닦아야 합니다. 수고와 봉사의 땀으로 아름답게 반짝이게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이름이 갈릴리교회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빛나는 전 설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후손들이 그 장로님이 권사님이 집사님이 어떤 삶을 사셨다는 것이 입 으로 입으로 전해져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신앙의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 나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는 귀한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영광스러운 직분
고린도후서 3:6~11 / 박덕기목사
인간의 삼대 욕망으로 식욕과 성욕, 그리고 수면욕 혹은 명예욕을 들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본능적인 욕망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명예욕 또한 그 뿌리가 깊습니다. 사 14:12-5절에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 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는 대단한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가, 그는 사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사탄은 본래 천사장이라는 그의 탁월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겠다는 명예욕 때문에 파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탄의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것”이라는 명예욕의 시험에 빠져 결국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은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에게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칭송하는 노래를 듣고, 자기보다 다윗을 앞세운 것을 시기하여 평생 다윗의 원수가 되었다가, 결국에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게 된 것은, 결국 자신이 다윗보다 더 나은 명예를 얻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아나니와 삽비라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위로의 아들이라고 인정받는 바나바처럼 되고 싶은 명예욕 때문에,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하다가 부부가 동시에 죽게 된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이렇듯 성경을 통해서 볼 때 잘못된 명예욕의 결과는 항상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명예는 항상 어떤 지위와 직분과 관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정치인들이 대권의 꿈을 꾸는 것도,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명예욕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종말을 보면,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독재자의 권좌에서 쫓겨난 후 이역만리 하와이에서 객사하였고,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는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에 의해 축출 당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측근의 총탄에 맞아 생을 마쳤고,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은 감옥살이를 했으며,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대통령들은 아들들이나 형이 감옥에 가고, 현재의 대통령은 가정도 없이 자신은 국민과 결혼했다고도 하지만, 그 지지율은 불과 30%를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볼 때,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라는 직위도 그렇게 명예스럽지만은 않은 것 같고, 명예는커녕 욕을 얼마나 많이 먹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죄스럽지도 않고, 욕되지도 않고, 망하지도 않을 영광스러운 직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가리켜 우리의 편지라,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주장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함께 하신 사역의 결과요, 그 때문에 자신 의 사도 자격에 대한 무슨 천거서, 혹 추천서 같은 것이 필요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자기의 주장이 자화자찬처럼 생각되었는지, 서둘러서 그가 한 모든 일은 자신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강조합니다. 그에게 맡겨진 사명은 모두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5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리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엘 샤타이 곧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을 넉넉한 하나님이란 말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넉넉히 감당하게 하신 분은, 모든 것에 넉넉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한 것입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이라는 소설은 스토우 여사가 썼는데, 이 소설은 미국에서만 1년에 30만 권이 팔리고, 20여국의 외국어로 번역된 책입니다. 톨스토이는 이 책을 인간 정신이 이룩한 위대한 성취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소설이야말로 노예 해방을 위해 크게 공헌한 책으로 알려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우 여사는 이 소설의 작가로서의 영예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의 작가라고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나는 이야기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이야기는 저절로 쓰인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쓰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리어진 비천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것이 차례차례 환상으로 보여 졌고, 나는 단지 그것을 글로 옮겨 놓은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주님께만 돌려야 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스토우 여사의 재능은, 바로 하나님의 재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내가 한 일을 보라고 말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일에 대해서든지, 그 일을 성취할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면서도, 자기에게 맡겨지는 사명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은 결코 혼자 감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동역을 한 것입니다. 모든 직분 자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귀한 일이고, 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인 것입니다.
6절부터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과의 대조적인 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옛 언약이란 구약을 뜻하고, 새 언약이란 물론 신약을 의미합니다. 헬라어에서는 새롭다는 의미의 단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1)네오스(νεος)-이 말은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갓난아이는 ‘네오스’입니다. 갓난아이는 세상에 새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카이노스(καινος)-이 말은 질적으로 신선하고 새로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나 사도 바울이 사용한 새 언약이란 말은, 바로 이 카이노스를 의미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곧 구약과 신약, 혹은 율법과 복음을 고린도후서 3장에서 말한 대로 비교해 보면, 1)율법은-옛 언약, 죽이는 것, 돌비에 새긴 것, 임시적인 것, 정죄하는 것, 덜 영광스러운 것으로 묘사되었고, 2)복음은-새 언약, 성령으로 된 것, 생명을 살리는 것, 심령에 새긴 글과 같은 것, 영원한 것, 의를 주는 것, 극히 영광스러운 것, 명백한 것 등으로 묘사 되었습니다
이 같은 옛 언약과 새 언약 또는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는 이 시간 다 말씀드릴 수 없고, 여기서 잠시 율법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 율법은 1)소극적인 면에서 우리를 정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롬 3:19-20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정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2)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사명이 있습니다. 갈 3:24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율법 시대, 구약 시대의 직분도 얼마나 영광스러웠는지 아십니까? 출 34:29-35을에 보면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 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아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직분이 어떠한 직분입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옛 언약의 직분,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 정죄의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분도 얼마나 영광스러웠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을 감히 주목할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는 것입니다. 여기 ‘하물며’ 라는 말은 비교급 단어입니다. 우리의 직분은 어떠한 직분입니까? 새 언약의 일꾼, 살리는 직분, 의의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 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확신이나 자부심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4-H 구락부 회장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무등산에서 며칠 동안 교육을 받고, 마을 청년들과 함께 무등산을 넘어 화순 이서로 향하게 되었는데, 높은 산봉우리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널따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곳에는 강원도 같은 높은 산악지대에서 생산하는 마령서라는 씨감자를 재배하는 농장이 있었는데, 그 아저씨 보고 저 넓은 초원이 얼마나 아름답고, 여기가 얼마나 좋으냐고 했더니,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그런 말 하지도 마라. 죽지 못해서 하루하루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에게는 깊은 산 속 넓은 초원이 그지없이 아름다웠지만, 그 농부에게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너무 힘들고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일 교회에서 맡겨 준 직분, 아니 주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을 이 농부처럼 마지못해서, 할 수 없어서 감당을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러한 성도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직분을 경홀히 여기고 업신여기는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웬만하면 다 집사가 되고, 교사가 되고, 성가 대원이 되는 거지.....사람이 없으니까 내게 구역장 직분을 맡겼겠지......장로라면 몰라도 안수 집사 정도야, 그 까짓 권사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되었는데...이런 식으로 직분을 하찮게 여기고 경홀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직분이란 것은, 돼지 앞에 던져진 진주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던 에서를 가리켜 어떤 사람이라고 하였습니까? 히 12:17절에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롬 11:13절에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알면 알수록, 사도 바울이 지녔던 심정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1)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 2)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3)모든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4)죄인 중의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이같이 부족한 자신에게 사도의 직분을 맡겨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황송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구역장, 교사, 성가 대원, 이 모두가 천사도 흠모하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직분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토록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나 같은 부족한 죄인에게 맡겨주시니, 그저 황송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직분 자들 하면 우리는 대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느 12장을 보면 1)찬양하고 감사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12:24절에 “레위 족속의 지도자들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라. 그들은 그 형제의 맞은편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령대로 순서를 따라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고” 라고 하였고, 12:27-29에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 웻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자들을 두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는 자들로 쓰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실로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2)파수하는 문지기의 직분이 나옵니다. 12:25절에 “맛다냐와 박부갸와 오바댜와 므술람과 달몬과 악굽은 다 문지기로서, 순서대로 문 안의 곳간을 파수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고 파수하는 문지기의 직분을 가진 자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곳간을 파수하는 자들을 두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는 사단의 공격과, 마귀의 사주를 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공격을 막는 파수꾼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무장된 기도의 용사들이 있어서, 주님의 교회를 해치려고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공중의 권세 자들과, 사단을 대항해서 싸울 용사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3)성과 성문과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직분 자들이 나옵니다. 느 12:30절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성전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성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성문을 깨끗이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비록 은사가 다르고, 재능이 다르더라도, 하나님께서 모두 귀하게 보심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을 보십시오. 느 12:22-23절에 “엘리아십과 요야다와 요하난과 얏두아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이 모두 책에 기록되었고, 바사 왕 다리오 때에 제사장도 책에 기록되었고, 레위 자손의 족장들은 엘리아십의 아들 요하난 때까지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수고하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세상의 신문이나, 책이나, 역사에 기록이 남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영원무궁한 하나님나라의 생명의 책에, 반드시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 그리고 구약 시대의 직분과 복음 시대 직분의 영광의 차이점을 본문을 통하여 분명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옛 언약 곧 율법은 죽이는 것이요, 그 직분은 죽게 하는 직분, 정죄의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죄의 직분의 대표자가 누구입니까? 곧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수한 모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구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수행했던 율법의 직분도 얼마나 영광스러웠던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광채 때문에, 그를 감히 바라보지도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 곧 복음의 직분은 의의 직분, 영의 직분, 살리는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정죄의 직분이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하면, 의의 직분 살리는 직분은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만하면 신약 시대 복음의 직분이 얼마나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인지 아시겠습니까? 복음 시대의 의의 직분, 살리는 직분은 찬송가에 나오는 가사처럼, 하늘의 천사도 흠모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경홀히 여기거나, 또는 마지못해서 부득이함으로 억지로 감당하는 어리석은 성도들이 되지 마시고,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이토록 존귀한 직분을 맡겨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고 황송스러운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장차 우리 주님께로부터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과, 영광의 상급을 받는 송정 중앙 교회 모든 직분 자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복된 확신
고후 3:4~11 / 지용수목사
예수님과 함께 하면 비가 오는 날은 축복의 날, 갠 날은 좋은 날(fine day), 우박이 내리는 날은 승리와 능력의 날, 눈이 내리는 날은 아름다운 날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날이 다 좋은 날인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우리는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우박이 쏟아져도 주님 앞에 나아와 몸으로도 영광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확신을 갖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불안하게 살면 괴롭습니다. 불안하게 공부하고, 불안하게 사업하고, 불안하게 결혼하면 안 됩니다. 결혼식을 하면서 ‘우리가 몇 년이나 함께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살다가 이혼하면 어떻게 할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전쟁하러 가면서 ‘이길까? 질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맞아 싸우러 갈 때 담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저 적장을 쓰러뜨리리라.’
확신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계산이나 자기의 실력, 자기의 상황 판단에서 나온 확신은 위험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사업을 할 때 재력이나 실력, 인간관계 등 자기의 상황과 주변의 모든 정세를 파악하고 조사해서 시작하지만 실패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얼마나 많은 벤처 기업들이 문을 닫는지 모릅니다. 자기 확신은 복된 확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확신이라야 복된 확신입니다. 주님께서 일으켜 주신 믿음, 하나님을 향한 확신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열두 지파에서 두령, 즉 족장 된 한 사람씩을 택하여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은 모세가 바란 광야에서 열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 택하여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그곳 성읍들이 어떠하며 산지에 있는지 평지에 있는지, 또 그곳 주민들은 강한지 약한지, 모든 것을 살펴보고 오게 했습니다.
열두 지파의 족장들이 40일간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왔습니다. 포도송이가 얼마나 큰지, 두 남자가 포도 한 송이를 막대기에 꿰어 메고 와서는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모세여, 그리고 우리 백성들이여, 우리가 본 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틀림없었습니다. 이 포도송이를 보십시오. 그러나 그곳 성읍들은 너무 강하고 그곳 거민들은 거인이라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열두 사람 중에서 열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약해진 백성들이 울며 한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아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확신을 가진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젖과 꿀을 먹지만, 이를 의심한 사람들은 사막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 22절에 보면, 바울이 아브라함에 대해 성령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가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많으리라.”라고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어 남자로서의 기능이 없어지고 아내 사라도 태가 죽은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상황이나 자기 아내의 상황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 붙잡았습니다. 믿을 수 없는 중에서도 확신을 갖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리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 나이 100세에 아들을 주시고 말씀대로 이루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는 확신으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빠지면 우리는 아주 약해지고 힘이 없어지고 피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붙잡으면 우리 나이가 팔십이 되든 백 세가 되든 모세처럼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당신의 몸은 이제 회복될 수 없습니다.”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너는 산다.”라고 하시면 우리는 산다고 확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의사의 말보다, 내 몸보다 하나님 말씀이 더 유효한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디엘 무디는 한 세대에 한 명 정도 나올까 말까한 세계적인 부흥사이고 위대한 설교자입니다. 그분이 한 번은 급히 삼천불이 필요했는데 구하러 갈 시간이 없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지금 삼천불이 필요한데 제가 너무 바빠서 구하러 갈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제게 삼천불을 보내 주세요.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고 집회를 인도하러 강단으로 올라가는데 한 부인이 달려와서 봉투를 주었습니다. 디엘 무디 목사님은 집회를 마친 후 부인이 준 봉투가 생각나 열어보니 편지와 삼천 불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주 부유한 한 부인이 쓴 것이었습니다. 부인이 아침에 기도하는데 갑자기 ‘디엘 목사님이 사역하시느라 늘 바쁘게 다니시다 보면 돈이 많이 필요할 거야.’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돈을 좀 보내려고 천 불짜리 수표를 끊으니 ‘겨우 천 불이야? 적다.’하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찢어버리고 이천 불짜리를 끊었답니다. 그래도 적다 싶은 생각이 들어 다시 삼천 불짜리 수표를 끊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더랍니다. 그래서 하녀를 시켜 급히 디엘 무디 목사님께 갖다 드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디엘 무디 목사님이 구하는 삼천불을 정확하게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디엘 무디 목사님의 확신대로 된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해 왔을 때 많은 분들이 제게 잘못 왔다고 했습니다. 양곡교회는 희망이 없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철거 지역에 있는 무허가 건물이라 언제 철거당할지 모르고, 철거당하면 갈 곳도 없는데 왜 양곡교회로 부임해 왔느냐고 했습니다. 교인이 오백 명인 교회에서 목회하시던 한 목사님께서는 더 큰 교회로 가시면서 제게 그 교회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또 얼마 후에는 사백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하시던 목사님이 이천 명 모이는 교회로 가시면서 “지 목사님, 양곡교회는 싹수가 노래요. 여기로 오세요. 여기는 아파트촌이라 좋아요.”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노회의 목사님들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우리 노회 목사님들이 양곡교회는 희망이 없는 교회라는 말씀을 더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릎을 꿇으면 희망이 없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목회할 곳은 사백 명, 오백 명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 양곡교회라는 믿음이 왔습니다. 제 가슴이 막 뛰고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양곡교회를 위대하게 키워 주시리라.’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했지만 나사렛에서 나오신 예수님께서 세계의 구세주가 되신 것처럼, 창원 한 모퉁이의 양곡교회에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하지만 양곡교회가 세계를 구원하리라.’라는 확신이 왔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조금밖에 없었지만 영락교회보다 더 큰 교회라 생각하고 설교 준비를 하고 흥분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무허가 건물 그대로이고, 옮겨 갈 종교 부지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릎만 꿇으면 확신이 왔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그 확신대로 되고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확신, 하나님께서 주신 확신은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는데, 우리가 이 교회를 지을 때만 해도 그 땅은 남의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건물 2m 앞에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배당 정문을 큰길 쪽으로 내고 남의 땅이 있는 쪽은 벽으로 막아야 하는데, 무릎을 꿇을 때마다 정문을 남의 땅 쪽으로 내야 한다는 확신이 왔습니다. 그래서 설계하시는 분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 드렸더니 “2m 앞이 남의 땅인데 그쪽으로 정문을 내라고요? 정문을 내어 보았자 남의 공장 벽이 정문을 가로막아서 아무 소용이 없는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우겨서 그렇게 설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그 땅이 우리 땅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더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세운 확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세운 확신은 조롱거리가 되는 경우가 더 많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은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게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확신을 갖고 가족에게도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남편이 불안해도 남편에게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 때문에 남편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공부를 못해도 ‘하나님께서 내 아들과 함께 계시니 성공하리라. 대학을 못 가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성공하리라.’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아내를, 자녀를 그냥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음악가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의 어머니는 7남매를 훌륭한 의사, 교수, 목사, 사업가, 그리고 음악가로 길렀습니다. 그러나 7남매가 항상 잘 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명화는 초등학교 때 60명 중에서 55등을 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너는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할 수 있다.”라고 계속해서 희망을 심어주었다고 합니다. 자녀를 믿은 것이 아니라 자녀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1961년, 정경화가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 나갈 때 주변의 모든 음악가들이 나가지 말라고 말렸답니다. 당시 세계 최고 바이올리니스트인 핑커스가 참가하기 때문에 경화는 나가 보았자 안 된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너는 할 수 있다. 해 보아라.” 하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정경화는 그 대회에 나가서 핑커스와 공동 우승을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에게는 ‘내가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딸들을 도와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은 얼마나 복된 확신인지 모릅니다.
학생들이여, 확신을 가지십시오.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대학생 모두 항상 ‘내 안에는 하나님께서 계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리라.’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제가 언제나 붙들고 사는 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래서 부부싸움을 해도 ‘이것도 지나가면 선이 된다.’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지고 죄를 지을 때 더 겸손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확신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쟁이가 주는 것, 마귀가 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호주에서 만났던 한 집사님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집이 팔리지 않아서 점쟁이를 찾아갔답니다. 점쟁이가 그분에게 “걱정하지 말고 냉면 집에 가서 가위를 훔쳐다가 천장에 달아 놓으시오. 그러면 한 달 안에 팔릴 것이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냉면 집에 가서 생땀을 흘리며 가위를 힘들게 훔쳐 와 천장에 달아놓았답니다. 그러나 두 달 석 달이 지나도 집이 팔리지 않았답니다. 다시 그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점쟁이가 “저번에는 어쩌다 그대로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그대로 될 것이니 꼭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바다 게 큰 것 한 마리를 잡아다가 천장에 달아놓으면 반드시 한 달 안에 팔릴 것이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대로 했는데 두 달이 지나서 게 썩는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해도 집이 팔리지 않았답니다.
점쟁이의 말을 확신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점쟁이의 말은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브야, 이 선악과를 먹어 보아라. 그러면 하나님처럼 된다.”
그 말을 믿고 먹었는데 하나님처럼 되기는커녕 존귀와 영광과 낙원을 잃어버리고 쫓겨나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성경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확신은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믿음을 갖고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찬송가 340장)
의심 없는 것이 확신입니다. 우리에게 증거가 많습니다. 앞으로도 많을 것입니다.
언제나 이 확신을 갖고 전진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사람에게는 서러움이 많습니다. 요구하는 것이 많습니다. 사람은 바라는 것, 기대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사람이 채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내게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소원의 잔을 내 노력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내 소원의 잔을 내가 부어서 채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소원의 잔을 만족하게 채워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이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내 노력으로 내가 성공하고 만족한다 해도 그것은 불행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확신은 어떤 확신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잔을 만족하게 채워 주시리라.’
이 확신을 갖고, 우리의 잔을 어떤 권력가에게나 어떤 사람에게 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높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내 목자이시면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만족인 것입니다.
시편 23편 5절에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my cup overflows.)』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잔을 넘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용수의 잔을 넘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양곡교회의 잔을 넘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잔을 넘치게 하실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에게 만족을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기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고 섬기고 존경하지만 여러분을 의식하지 않고 여러분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의 잔을, 제 잔을 여러분이 채워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우리의 잔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실력이 있어도 여러분의 아버지가 여러분의 잔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내 희망의 잔, 내 소원의 잔, 내 모든 필요한 잔을 하나님 앞에 높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실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만족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내가 바라는 것만큼 건강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이렇게 사역할 수 있는 건강에 얼마나 만족하고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한 주간 집회하고 나면 기진맥진하게 되는데, 이렇게 집회를 하고 우리 교회를 섬기면서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건강하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기도 응답인 줄로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제 아내를 생각해도 감사하고, 아이들을 보아도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또 우리 교회와 우리 교우들을 보아도 만족합니다. 제가 이렇게 기쁘고 평안한 마음으로 목회를 하니 참 행복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는구나.’하며 만족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이런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욕심이 많은 사람은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만족함이 넘치는 것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주지사 시절, 친구들이 레이건을 만나러 왔습니다. 친구들이 담소를 나누고 떠나갈 때 한 친구가 예언을 했습니다.
“레이건, 자네가 지금처럼 계속 경건하면 하나님께서 미국을 자네에게 맡겨 주실 거야.”
레이건은 친구의 예언을 붙잡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레이건은 배우 출신으로 아주 잘 생겼으나 경건하게 사니 스캔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미국 대통령을 두 번이나 하게 하셨습니다. 대통령 시절에도 그는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평안하게 일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때는 친구들이 그를 위해 살기 좋다고 소문난 캘리포니아 최고급 주택 단지에 으리으리한 저택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또 육천만 불짜리 도서관을 지어서 레이건 기념관을 만들었습니다. 레이건이 얼마나 만족했겠습니까? 레이건의 잔이 넘치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하면 우리의 잔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회사에서 일해도 회사 주인만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열 번이나 품삯을 사기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채워주셨습니다.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 경영주가 욕심을 부려도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희생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잔을 넘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내가 동에서 심은 것을 동에서만 거두는 줄로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동에서 심은 것을 서에서도 거두게 하시고 내가 심은 것을 자녀가 거두게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족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6절에서 11절에는, 새 언약의 일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울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귀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그대로 다 행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약의 모든 법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정죄로 ‘나는 죄인이네. 나는 죄인이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문입니다. 구약 성경은 유치원 같습니다. 유치원을 졸업하면 학교로 가듯이, 구약 성경의 모든 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해답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해결이 안 됩니다. 아무리 많은 소를 죽이고 양을 죽여 그 피가 흘러도 죄는 계속 지으니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한 분께서 돌아가심으로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씻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도 완벽한 의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약에서의 의문이 신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의 정죄가 신약에서 없어졌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세요. 구약은 정죄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읽으면 ‘아, 나는 죄인이다. 죄인이다.’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신약에서는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일꾼보다 신약의 새 복음의 일꾼이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모세와 구약의 선지자들이 귀하다면 복음의 일꾼은 더 귀하다는 것을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우리 모두 교회의 일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잠언 14장 4절에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를 기르지 않으면 외양간에 냄새가 나지 않고 편하지만,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소가 있으면 할 일이 많아 힘들고 냄새도 나지만 얻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편합니다. 구역장, 교사, 차량 안내위원, 찬양단원을 하지 않으면 편하지만 얻는 것이 없습니다.
구경꾼이 되지 말고 교회의 일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역장도, 교사도 복음의 일꾼입니다. 차량 안내를 하는 분도, 찬양대원도 모두 복음을 돕는 복음의 일꾼입니다.
복음의 일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대로 상을 준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습니다.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는 것뿐입니다. 상은 일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대통령으로, 장관으로, 국회의원으로 봉사한 자보다 교사로, 구역장으로, 교회의 일로 봉사한 자가 더 영광스럽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구약의 의문의 법, 정죄하는 법을 섬긴 모세의 얼굴에도 영광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신약의 새 복음의 일꾼이겠습니까?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분야에서든 하나님께서 일하게 하실 때 일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구 서현교회는 교회를 지을 그 당시 동양 최대의 화강암 건물로 아름답고 견고했습니다. 그 교회에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정규만이라는 한의사 장로님이 원인 모를 병으로 고통을 당하다 죽음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그분이 “하나님, 저를 살려만 주시면 하나님 교회를 하나 잘 지어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했습니다. 그 후 신비롭게도 병이 나았습니다. 교회를 지을 만한 힘이 없었지만 하나님께 서원했기 때문에 화강암을 다듬으며 교회 지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힘이 없습니다. 재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지을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전국에 이상한 병이 돌기 시작했는데, 어느 병원이나 약국에 가도 낫지 않던 병이 정 장로님의 한의원에서 지은 약만 먹으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환자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드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동양 최대의 건물을 지은 것입니다.
그 장로님이 복되고 만족하게 사시다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때 조객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대구의 교통이 마비되었습니다.
신약의 복음의 일꾼은 땅에서도 영광스럽고 하늘에서도 영광스럽습니다. 구약의 모세보다 신약의 복음의 일꾼이 더 영광스럽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입니다. 우리 양곡의 가족들 모두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방송으로 듣는 모든 분들도 구경꾼이 되지 말고 교회의 일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길로 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 언약의 일꾼
고후 3장 03~9절 / 황광민목사
어느 군목이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병사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에 둔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그러자 병사는 "네, 나는 행복하게 죽었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교회학교 선생님께도 편지를 써 주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죽었으며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써 주십시오."
몇 주가 지난 후 군목은 그 교회학교 교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사실 나는 지난주에 교회학교 교사 직을 사임했었습니다. 내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고 믿음 없는 내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포기하자마자 나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일깨워 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어제 깨달았습니다. 나는 곧 교회학교 교사의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노력해 보겠습니다. 나는 끝까지 충성을 다하기로 결심합니다." Moody Monthly라는 잡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교회학교 교사, 작은 일 같지만 큰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은 모두 소중한 것들입니다. 끝까지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이러한 관점에서 봉독한 본문 고린도후서3장 3-9절을 중심으로 하여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
바울 사도는 본문 6절에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계승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사역을 위하여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불러 사용하셨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사용하셨고 다윗과 솔로몬을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많은 사사들이 있었고 선지자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귀한 반열에 우리도 불려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이라 함은 구약의 일꾼들과 비교하며 사용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맺은 언약이 옛 언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옛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 많은 일꾼들을 불러 쓰셨습니다. 이에 반하여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우신 새로운 언약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성취할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은 그 어떤 직책보다도 더 영광스럽다고 하였습니다. 7-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냐?"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직분은 율법의 직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영광스러운 직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일꾼의 직분은 영적인 직분으로서 더욱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성도의 직분은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세상에서는 직분의 귀중함을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느냐로 판단합니다. 학교교사는 돈을 벌기에 소중하고 교회학교 교사는 돈을 벌지 못하니 소홀히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판단입니다. 세상의 일은 돈버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귀중하고 영광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귀하게 여기시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26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모세가 민족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애굽에서 권세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에서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길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일꾼이 되지 아니하였다면 잘 나가는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벌써 많은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일에 온전히 헌신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권세를 누리는 자리도 아닙니다. 무슨 큰 명예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쁨으로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라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였습니다.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새 언약의 일꾼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온전히 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성도들의 사명이 있습니다. 특별히 새 언약의 일꾼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는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성도의 가장 큰 책임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을 보여줌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육신의 신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졌습니다.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겼다는 증거입니다. 얼마나 귀한 이름입니까? 우리도 그렇게 불려 져야 하겠습니다. 요즈음 "예수 믿는 사람들 별 것 없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하다"는 말도 듣습니다. 전부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쩌나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 회개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진정 그리스도의 향기를 들을 때 회개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진정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다면 몇 사람 때문에 욕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 빨리 그리스도의 향기를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러면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사도 바울은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 두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입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법으로 하지말고 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5절의 말씀을 봉독하십시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아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을 때 무슨 일이든지 만족하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그리스도의 편지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야 한다는 첫째 명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힘을 의지하다가 실패한 것은 역사가 증명하였습니다. 포이에르바하와 같은 무신론자들은 뒤집어 보면 인간예찬론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이 인간을 창조하지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었던 우리 인간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교육시키고 개발시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므로 더 이상 신에게 매달리지 말고 인간의 힘으로 살아보자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주의, 자유주의 사상은 인류 역사에 큰 오류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인간예찬론은 그 꽃을 채 피우지도 못하고 세계 1,2차 대전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이로서 교육만 잘 받으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인간예찬론은 더욱 잔인해지는 인간의 모순을 체험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났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타락했을지라도 전혀 악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양심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완전해지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더러는 "성숙한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현대인은 성숙했으므로 신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한없이 약한 존재입니다. 무너지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법보다 영으로
둘째로, 성도가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법의 단계를 넘어 영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의 조문으로 하지 않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아멘. 성도가 사명을 감당하려면 법적인 단계를 뛰어 넘어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류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법(율법)도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법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법이 있음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규범에 불과합니다. "이런 행동은 죄니까 하지 말라"가 바로 법의 요청입니다. 물론 이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 성숙의 차원에서 보면 초보적인 단계입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의 다음 단계는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영입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지고 우리의 심장이 하나님의 심장으로 대체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다. 알면서도 못하던 것을 비로소 하게 됩니다. 하고 싶어도 못하던 것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이 주는 능력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법의 단계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훌륭한 사람을 지칭하며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법에만 문제없으면 훌륭한 사람입니까? 이것은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훌륭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진정 훌륭한 사람은 아름다운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훌륭한 사람은 실정법을 뛰어 넘어, 자연법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의 일꾼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야 합니다. 자신의 힘만 의지하면 법적인 단계도 극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심장이 하나님의 심장으로 대체되어야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편지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목적
고후 3장 03~4절 / 채규현목사
요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들을 보면서 느끼는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에 미국교회와 한국교회의 특징적인 비교를 한 적이 있었는데, 한국교회를 방문한 옛날의 미국 선교사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씀이, 먼저 한국교회의 장점은 뜨거운 기도를 한다, 역시 기도가 강한 나라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미국이나 서양의 교회들은 우리나라만큼 기도를 뜨겁게 하는 곳은 없습니다. 반면 한국교회의 약점은 성경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실제 성경의 깊이 있는 진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교회에서 보면, 웬만한 교회의 리더되는 분들은 성경에 대해서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꿰뚫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우리 한국교회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성경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이 있게 공부한다고 하는 미국의 실정이 어떤지 미국 사람들이 조사한 내용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 사람들 중에 3/4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지만 그들 중의 대부분이 십계명이 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우해주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또 미국 사람들의 3/4 정도가 예수님의 모범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어떠한 모범을 보였는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내용을 몰라요. 미국 사람들 중에 한 60% 정도는 자기가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는-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과연 계속해서 그런 개인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정작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진정 개인적인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너희가 내 안에, 내 안에 너희가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안에 있는 면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훨씬 더 잘 안다는 미국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에 이런 책이 나왔습니다. 「The Day America Told Truth ; 미국이 진실을 말하던 날」 이란 책인데, 지금 현재 미국 사회는 옛날 서부 개척시대보다도 더 못하다, 거칠고 타락해 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면에서 어떤 일치된 견해도 없고 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십계명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전부 자의적으로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미국 사람 중의 77%는 “내가 왜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지 모르겠다.” 고 합니다. 안식일을 지킬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또 미국 사람들의 74%는 “나는 부자에게서는 죄책감을 별로 느끼지 않고 물건을 훔칠 수 있다. 부자니까.” 라고 말했고, 또 64%의 사람들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언제든지 거짓말을 하겠다.” 라고 말했고, 또 56%의 사람들은 “나는 내가 스스로 절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음주운전을 할 수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음주운전해서 사고내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100이면 100, 자기는 안 그럴 줄 알았다고 합니다. 또 53%는 “나는 바람을 피울 것이다. 사실 내 아내도, 내 남편도 기회가 있으면 그렇게 할 텐데 뭘.” 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현재 미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는 믿지 않고 사는 면이 미국 사회에 팽배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고, 못하면 못했지 더 좋지는 않습니다. 도덕적 수준이 미국보다 한국이 더 못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수많은 한국의 교회들이 어떤 미국교회보다도 많이 예배를 드립니다. 많은 예배를 드리면서 과연 그 예배 중에서 하나님을 진정 만났는지, 그 예배 중에서 설교되는 모든 말씀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지금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지켜야 되는 말씀으로 알고 있는지 그것은 의심스럽습니다. 예배를 오히려 하나님과 만나고 그 하나님의 뜻을 내가 다시 한번 깨달아서 그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마치 무당 굿하듯이 드립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배를 드려야 잡귀가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모든 우리에게 불길한 것들을 없어진다고 생각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 식으로 드리는 예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고, 예배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그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가 아멘하고 받고, 그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예배를 나올 때에 바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나왔냐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을 인정한다면 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 한 조항, 한 조항을 금쪽같이 귀히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노력하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러한 배경 속에서 저는 앞으로 몇 달 동안에 십계명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과연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이고, 바로 그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참된 뜻이 무엇인가를 같이 나누고,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실제 우리에게 역사하는 믿음으로서는 이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고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도 다시 한번 회복시키고, 정말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살아난다면 읽는 만큼, 성경 말씀을 보는 만큼, 여러분의 실제 삶에서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 세상에 임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 하나님의 뜻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29장 29절의 말씀입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두 가지가 있죠? 오묘한 일과 나타나는 일이 있는데, 오묘한 일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뜻과 진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천지만물 우주에 악을 허락하셨을까요? 왜 사탄이 횡행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잘 모릅니다. 오묘한 일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궁극적인 뜻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모르는 일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왜 나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왜 내게 나쁜 일이 생기고, 교통사고 당하고, 병이 납니까? 오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나타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뜻을 밝히 보여 알게 하신 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명기 29장에 보니까 율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 보인 것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 밝히 보인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에게 속하였고, 우리가 그것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임한 전체 모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르는 게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오묘한 일입니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 신명기 29장에서 보듯이 그 하나님의 뜻 중에서 특히 율법, 이것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밝히 보이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해서 그것을 열심히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가 알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적어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열심히 알려고 노력해야 되고, 그리고 알아가면서 그것을 행해야만 합니다.
자, 그러면 성경에 보면 그 신명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율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율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십계명” 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이 쭉 나옵니다. 십계명 다 외우십니까? 지난번에 제가 한번 읊어드린 것이 있는데, 다시 한번 할까요? “나(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우상을 섬지기 말라), 여(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부(부모를 공경하라), 살(살인하지 말라), 간(간음하지 말라), 도(도둑질하지 말라), 거(거짓말 하지 말라), 탐(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입니다. 이 십계명은 시공을 초월한, 그러니까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해서 어느 시대 어떠한 사람들도 지켜야 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십계명 다음에는 “율례” 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절에 보면 “율례” 라고 나옵니다. 이 율례는 출애굽기 21장, 22장, 23장, 세 장에 걸쳐서 나오는데 이것을 보통 시민법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영원하신 법,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십계명이 그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환경 속에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하신 법, 십계명은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나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이라도 지켜야 되지만 율례, 시민법은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계명의 정신이 그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환경 속에 어떻게 적용되어지는 지를 보여주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켰어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 그대로 지킬 수는 없어요. 단지 그 법을 우리와 함께 연결시키려면, 그 당시 특정한 환경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진정한 십계명적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내서 그 정신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 이런 말이 있으면 지금은 어떻게 합니까? 돌로 쳐 죽이지는 못하지만 부모를 열심히 공경해야 한다는 그 정신을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그 정신을 우리에게 지키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는 “결례법” 이 있습니다. 절기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제사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여러 제사법, 절기법들이 결례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상징적인 면에서 모든 것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뒤에는 이것을 더 이상 지키지 않습니다. 유월절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정신을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예수님 안에 그 정신이 다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유월절을 직접 지키지는 않습니다. 오순절 안에도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을 직접 지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속죄제나 속건제, 번제는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번제적 정신은 남아 있어요. 직접 우리가 지키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세 가지 단계-영원한 법, 그 당시 환경에 맞게 적용된 시민법, 그리고 여러 가지 결례법(정결케 하는 법, 예식을 지키는 법, 이런 것들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더 이상 지키지 않습니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율법이 사실 다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십계명입니다. 바로 그 십계명이 보다 더 확장되어서 내 여러 다양한 환경 속에 적용하게 만드는 것이 율례나 다른 율법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포함해서 어떤 종류의 율법이든지-특히 십계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특별히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두 가지 기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행동규범, 규칙으로만 알고 있는데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표현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바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우리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사실 율법뿐만이 아니고 성경 전체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일차적인 것이고, 그 하나님 앞에 우리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도 그 다음에 가르쳐 주는 것이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성경말씀이에요.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에 여러 사람들이 나오죠?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다른 환경, 다른 종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그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에도 “야, 요셉 대단한 사람이네.” 이렇게 읽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윗 정말 엄청난 사람이네.” 이렇게도 읽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요셉에게 역사하신 하나님, 다윗에게 역사하신 하나님, 아브라함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그 하나님만이 여러분과 관계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여러분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다윗과 여러분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관계있는 것은 그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시요,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완전한 사람도 아니요, 도덕적으로 바른 사람도 아니요, 오히려 그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다가가셔서 회개케 하시고 용서하고 다시 세우신,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잘못도 없는데도 형에게 배반당하고, 자기 상사에게 또 배신당하고, 계속해서 끝없는 나락에 떨어지는 그 요셉을 볼 때에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요셉이 믿음이 굳어졌다는 생각보다는 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요셉의 고난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되고, 여기 나오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고 노력해야 되고, 그 다음에 율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율법에서 하나님의 어떠한 품성을 말해주고 있는지를 알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이게 율법의 제일 큰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 는 이 명령 가운데 하나님의 어떤 품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바로 먼저 원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품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는 이 명령에 “아이구, 나는 지킬 수가 없는데….”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지킬 수 없는 명령이죠. 친구도 사랑하기 바쁜데 어떻게 원수까지 사랑합니까? 사랑하고 싶지도 않죠. 말씀이 참 힘들고, 무겁고,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기 전에 바로 이 말씀이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아셔야 합니다. 바로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먼저 원수를 사랑하신 뒤에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누굽니까?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까? 원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적대 관계죠? 죄의 근본이 뭡니까? 내가 하나님 되려고 하는 것, 내가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것, 하나님의 통제 밖에서 살려고 하는 것, 이것이 죄의 근본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나에게 “아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하겠다.” 하나님이 나타나니까 싫은 겁니다. 하나님과 자꾸 멀어지려고 하고, 하나님이 내 옆에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시니까 죽인 것 아닙니까?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죽일 수 있을 때 죽일 줄 알면서도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게 예수님이에요. 오히려 그 죽임을 당하면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생명을 다해서 원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분이 “원수를 사랑하라” 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품성이 표현된 것입니다. 또 “거짓말하지 말라.” 먼저 하나님이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일단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목숨 걸고 영원토록 지키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 속에 하나님의 품성이 녹아져 있고, 그 품성을 먼저 이해하고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알지 못해요. 왜 알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바리새인을 보세요. 바리새인의 문제는 이 성경의 모든 율법을 보고 그 율법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그 율법을 그저 도덕적인 행동규범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 어떻게 하면 안식일을 지킬 것인가 하는 행동규범으로만 보니까, 안식일에 불을 지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안식일에 유태인들은 불 안 켭니다. 안식일 되기 전에 미리 켜 놓습니다. 잊어버리고 깜깜해지면 어떻게 해요? 이방인 불러서 켜라고 합니다. 행동규범으로 아니까요. 그리고 안식일에 어느 일정 범위 이상은 못 가요. 아니면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행동규범으로 아니까 자꾸 그런 제한점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율법의 참된 정신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율법의 참된 정신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품성,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 제쳐놓고 행동규범으로만 아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비극적인 사실은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도 율법을 행동규범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만나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율법에 나타나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의 품성과 정신이 마지막에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난 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이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율법이 다 끝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보니까 모든 율법의 마지막 종착역이 예수님이시더라, 예수님 속에서 모든 율법이 다 형상화되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마침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텔루스” 라는 말인데 마지막, terminal(터미널), 종착역, 목적지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보니까 율법을 일일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 속에 그 율법이 다 있는 거예요.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하나님의 품성이 예수님 안에 다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율법의 신학적 기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율법의 도덕적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우리로 하여금 높은 도덕적 경지에 도달하게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왜 여러분을 다른 사람들보다 착하게 살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왜 다른 사람들보다 여러분에게 다른 사람들은 악을 행해도 선을 행하라고 하실까요? 그 이유가 뭘까요?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러면 편하니까? 그러면 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되니까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하실까요? 숙제 다 하면 복을 주니까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학교에서 숙제 하듯 지키려고 합니다. 숙제 끝나면 상 타니까, 하늘의 상급이 있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 계명을 지키라고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레위기에 나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오직 목표는 그것 하나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냐면, 나도 하나님처럼 거룩해 지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왜 살인하면 안 됩니까? 살인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은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나도 생명을 귀히 여겨야만 합니다. 살인 자체가 나빠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표를 여러분이 잘 아셔야 합니다. 자, 말씀 속에 하나님의 품성이 있다고 했죠? 그 말씀대로 행하면 나도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갑니다. 닮아갈 뿐만 아니고 말씀대로 행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품성과 만납니다. 이것을 뭐라고 합니까? 이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예배가 우리가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도 있지만, 매일매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곧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이야기해요. 왜 예배드립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 순간이 나와 하나님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품성과 내 품성이 하나 되는 순간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자, 제가 좀더 실질적으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는 말씀이 있어요. 제게도 목회하면서도 원수가 있었습니다. 원수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냥 껄끄러운 상대가 있었어요. 여러분도 껄끄러운 상대가 있죠? 만나면 별로 안 좋은 상대, 만나면 싫어서 될 수 있는대로 피해 다니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 사람들을 한번 사랑하려고 노력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돼요. 안 되는데,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으니까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깨달아지는 순간이 있는데 뭘 깨닫느냐면, 바로 하나님이 원수인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언젠가 깨닫게 됩니다. 그게 깨달아지면서 원수가 원수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원수짓을 했는지를 알면, 저 사람이 나한테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게 비로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인 나를 주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어느 정도 느끼겠습니까? 내 인간적 원수가 얼마나 센가에 달려 있어요. 얼마나 큰 원수를 내가 용서하려고 노력하는가, 이게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주님은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하셨는가가 이해됩니다. 그게 바로 복음과 율법이 만나는 순간이에요. 복음과 율법이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살리셨다.” 처음에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죠?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에요. 복음을 이해하는 것은 점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가면 갈수록 그게 이해가 더 깊어집니다. “그렇구나, 나를 사랑하신 것이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원수인 나를 사랑하셨구나.” 언제 느낍니까? 내가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잘 안 느껴져요. 경험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한다해도 사실 잘 이해못합니다. 그런데 언제 이해합니까? 내가 부모가 되었을 때, 내가 부모가 되어서 밤에 잠 못 자고 아이 젖주고 하면서 “아, 우리 어머니가 나 어렸을 때 이렇게 하셨겠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느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경험이 내가 율법을 지키면서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내 힘으로는 안돼요. 굉장히 힘들어요. 그런데 그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 보니까 그 율법 속에 있는 하나님의 품성을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게 되니까 그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감격하게 되고, 그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니까 이제는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쉬워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의미에서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와서 내 멍에를 메라.” 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이 멍에는 가볍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가볍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굉장히 무겁게 여깁니다. 왜 무거울까요? 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율법 속에 있는 하나님의 품성이 나와 맞딱드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을 그냥 행동규범으로만 알고 그걸 지키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율법 속에서 주님을 못 만납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합니다. 영원히 여러분은 바리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 속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품성, 사랑의 품성, 이것을 만나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부터 사랑하게 되죠? 밖으로 나타날때는요?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가 다른 사람들에게 비로소 나타납니다. 말씀대로 순종할 때, 바리새인적으로 순종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며 순종할 때, 그게 바로 오늘 고린도후서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제가 와서 제일 먼저 했던 설교였는데, 그 때 설교의 요지는 내 속에서의 대화에서 죄적인 나와 대화하지말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해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질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할 때에 드디어 밖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와 같은 존재요, 우리는 달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빛이 없어요. 그러나 햇빛을 받아서, 그 햇빛의 영광-하나님의 영광을 밖으로 반사합니다. 어떻게 반사합니까? 말씀을 지켜서, 순종함으로써 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받고 반사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의 두 가지 기능-하나님의 품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우리가 지킬수록 하나님의 품성을 깊이 알고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덕적 기능으로 바로 그럼으로써 내가 더욱 하나님을 닮아가서 모든 사람 앞에 내가 아닌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입니다.
이제 앞으로 몇 주 동안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이 두 가지 측면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지 함께 봅시다. 그리고 이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제1계명이 3절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1절, 2절을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라고 나옵니다. “나는 너를 구원한 하나님이다” 라는 전제조건이 있은 다음에 십계명이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한 백성들,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모든 예수 믿는 분들, 바로 이 말씀 안에서 이미 구원한 백성에게 더 큰 복을 주시려고 주신 십계명을 다시 한번 깊이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 03장 03절 / 김홍도목사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편지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성경책이요, 또 하나는 우리 크리스천들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귀중한 하나님의 편지, 성경을 읽으라고 하면 안 읽는데 우리 크리스천의 언행심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편지는 읽지 말라고 해도 잘 읽습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말은 맨 처음 안디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믿는 냄새를 너무 확실히 나타냈기 때문에 온 안디옥 사람들이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에게 크리스천임을 나타내 보이도록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크리스천임을 알 수가 있을까요?
1. 죄에 대한 태도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믿고 회심한 증표의 제일 첫째가 회개인데 회개란 죄에서 돌이켰다는 뜻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죄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면 거듭난 사람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죄로 다시 돌아갔다고 하면 크리스천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3장 9절 말씀은 하나님께로난 자 즉 거듭난 신자는 계속해서 죄를 반복하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거듭난 자도 때때로 미끄러져 넘어질 때도 있으나 그 죄악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여 주님께 손을 내밀어 범죄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 크리스천이 죄와 타협하는 자 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일날에는 교회에 나오고 밤에는 친구 따라 적당히 죄 짓는 장소에 가도록 일러줍니다. 또 마귀는 돈을 적당히 교회에 바치면 되지 너무 곧이곧대로 십일조 안 해도 된다고 합니다. 또 돈 벌기 위해 적당히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합니다. 또 목사가 보는 데서는 말조심하지만 안 보는 데서는 조심할 필요가 없다고 일러줍니다.
그러나 이렇게 타협하는 크리스천은 남에게 영향력을 주지 못합니다. 참다운 크리스천은 “나는 타협하지 않는다. 나는 주일날과 똑같이 다른 날도 크리스천이다. 교회에서와 똑같이 회사에서도 행동하겠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길을 걸어가시다가 귀신 들린 자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몸을 해치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는 위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동묘지로 달려가서 자기 몸을 상케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붙잡아다가 쇠고랑을 채우면 그것을 끊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귀신 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고 쇠고랑도 풀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사람은 성 안에 들어가서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사람들에게 말했고 사람들은 그가 변한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에게서도 예수님 믿기 전과 믿은 후에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회심한 다음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부흥회 때, 남편을 모시고 간 부인이 어서 예수님 믿기로 작정하라고 요청하니까 고개를 흔들며 싫다고 하더랍니다. 또다시 다그쳐도 역시 대답이 없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부인이 “오늘 밤에 당신이 예수님 믿기를 바랬는데 왜 고집을 부렸어요?”라고 하니까 “내가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절대로 무례한 짓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소. 당신은 예수님 믿고 나는 안 믿는데 당신과 나의 생활에 아무런 차이가 없질 않소? 내가 하는 짓을 당신도 하고, 내가 가는 곳에 당신도 가고, 내가 보는 것을 당신도 보고, 당신이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나도 당신만큼 착한 사람이오.”라고 말할 때 아무 말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는 남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가 없습니다.
한 소년이 어머니한테 좀 좋지 못한 장소에 한 번만 갔다 오겠다고 간청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곳에 가면 안 된다고 타일렀으나 굳이 한 번만 갔다가 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는 “네가 정말 그 곳에 간다면 네가 돌아올 때까지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그 좋지 않은 장소에 갔다가 새벽 2시에 돌아와서 어머니 방문 앞을 지나가다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 하나님! 나의 귀여운 아들이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살펴 주옵소서.” 아들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 어머니 앞에 주저앉아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나쁜 장소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생은 변화가 많습니다. 건강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돈 많이 벌어도 달라지고, 결혼한 다음에도 달라집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변화는 우리가 예수님 믿고 회심한 다음에 오는 변화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면 세상은 반드시 우리를 알아봅니다. 죄에 대한 태도를 통해우리가 크리스천임을 잘 보여줍니다.
2. 무엇으로 만족하는가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밤중에 술에 취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닌다면 아무도 그를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부자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는 생활에서 하나님을 쫓아버리고 오직 농장과 곳간과 곡식만으로 만족을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상 물질만으로 만족한 생활을 한다면 그는 분명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나의 가장 큰 기쁨은 예수님을 알고 섬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이 어디 있었는지는 알 수가 있습니다.
돼지는 진흙구덩이에 뒹굴면서 만족해 하지만 양은 진흙에 빠져서는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악 속에 뒹굴며 살면서 만족을 얻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죄에 빠져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속히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돌이킵니다. 그것은 그가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이는 그 속에 그리스도의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 홍수 때 비가 멎은 후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보냈는데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비둘기는 돌아왔습니다. 까마귀는 송장 위에 앉아 뜯어먹으며 즐길 수 있었지만 비둘기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교인이라고 하면서 세상으로 만족한다면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더 기뻐합니까? 무슨 책을 더 즐겨 읽습니까? 한가할 때 무엇으로 시간을 보냅니까? 어떤 부류의 사람과 사귀고 있습니까? TV 연속극 보는 것과 예배드리는 것 중 어떤 것을 더 소중히 여깁니까? 당신이 즐겨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크리스천인지 아닌지를 증명합니다.
3.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는 무엇보다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5)고 하셨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한 집사가 다른 교인을 가리키며 “나는 저 사람을 미워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목사님이 “그러니까 복음이 이 교회에서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멸시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증오심이 꽉 찬 심령에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술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더 견딜 수가 없어서 자살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전에는 착하고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살하러 가는데 한 크리스천이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으니까 “지옥으로 가는 중이오.”라고 했더니 “아이구, 그러면 안 되지요. 내가 도와드릴게요.” 하고 도와주었더니 곧 하나님께 돌아와 새 생활을 했습니다. 그 크리스천이 그 사람에게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그를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사랑할 만한 사람이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나 똑같이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멸시하거나 망신 주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세상이 우리가 크리스천임을 알게 됩니다.
4. 교회에 대한 태도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회에 대한 진정한 태도란 무엇입니까?
①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참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의 집으로 가서 하나님 아버지께 정성껏 예배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정말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실까요?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② 구원받은 성도라면 복음 듣기를 원합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위대한 설교나 세상의 훌륭한 노래보다도 복음 듣기를 더 원해야 합니다. 오늘날 참된 복음을 전하지 않으니까 이단이 들끓고 교회가 혼란한 것입니다. 참다운 복음을 듣기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세상이 그런 사람을 크리스천으로 보지 않습니다.
③ 구원받은 성도라면 성도의 교제를 갖기 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3:14)라고 했습니다. 만일 한 크리스천이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간다면 자연히 교회를 찾아가서 성도들과 교제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성도들과 교제를 갖기 원치 않고 죄악된 사람과 교제하고 세상 친구들만 사귀기를 원한다면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④ 구원받은 성도라면 교회 일에 동참합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7:16)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의 생활의 열매로 우리가 크리스천임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을 통해 크리스천의 열매를 나타낼 때 우리 교회는 더 부흥되고 더 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의 못된 성품이 길들여져서 온유한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까? 아직도 사탄의 지배를 받습니까?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의 열매 중의 하나가 “충성”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교회에 잘 출석도 아니하고 헌금도 안 바치고 봉사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이 과연 크리스천일까요?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의 집,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막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취하십니까? 영
적인 것으로 만족합니까, 세속적인 것으로 만족합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삽니까? 교회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삽니까? 크리스천으로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세상이 우리를 크리스천이라 인정할 수 있게 삽니까?
어느 날 예수님이 무덤 사이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 귀신을 쫓아내고 고쳐주어서 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고침 받은 뒤에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의 아이들이 창 밖을 내다보다가 “엄마, 엄마, 아버지가 오셔”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엄마는 뛰어가 문을 잠그면서 “얘들아 무서워 말아라. 문을 잠갔으니까 들어오지 못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창 밖을 내다봅니다. 그리고 곧 말하기를 “엄마, 저 사람은 그전 아버지 같지 않아. 아빠는 뛰어오면서 소리를 질렀는데 이 사람은 천천히 걸어오면서 아주 조용해”라고 했지만 엄마는 “조용들 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문의 손잡이를 잡을 때 모두 숨을 죽이고 가슴을 조였습니다. 문이 안 열리자 그 사람은 부드럽게 노크했으나 부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여보, 문 열어요. 나 이젠 괜찮아. 내가 예수님을 만났거든. 그래서 완전히 변화되었어.”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두려움으로 문을 열었을 때 아이들은 한쪽 구석으로 도망가 숨었습니다. 그때 남편은 “얘들아 무서워하지 마라. 나는 오늘 예수님을 만나서 다른 사람이 되었단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아빠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그는 팔을 벌리고 아이들을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친절히 말하면서 준비된 식탁에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잠자리에 든 후에도 밤 깊어가는 줄 모르고 두런두런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에 감사했습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을 만나서 이렇게 변화되었소.”라고 다시 말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변화되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도록 삽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들입니다.
바울의 추천서
고후 03장 01~2절 / 지용수목사
성회를 인도할 때마다 저는 무척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시간 은혜를 주시니 행복하고, 천국이 임한 모습을 보면 행복합니다. 또 목사님, 장로님들, 성도님들이 간증하는 것을 들으면 보람이 있습니다. 이번 성회 때에도 한 부모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중학생 아들이 은혜를 받고 새벽에도 스스로 일어나 어린 동생을 깨워서 데리고 나와 예배를 드리며 기뻐했답니다.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시원해지고 뜨거워지고 시원해져 흥분을 했다고 눈물을 쏟으면서 부모님께 간증을 하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은혜를 받으면 기쁘고, 또 은혜를 받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교회로 인도하게 됩니다. 빌립은 벳새다 사람으로 안드레, 베드로와 같은 동네 사람입니다. 그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기쁘고 감격해서 사랑하는 친구 나다나엘에게 바로 달려가 전했습니다.
“나다나엘,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 왔잖아. 그분을 내가 만났어. 그분은 바로 나사렛 예수야.”
그러나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나온 촌사람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하며 예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5,6년 전, 뉴욕시 연합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집회를 앞두고 저녁 식사를 할 때 뉴욕에서 목회를 하시는 한 목사님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창원에서도 뉴욕까지 집회를 인도하러 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던 목사님께서 집회에 참석하신 후에 “한국에 목사님 같은 분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목사님이 계신 것이 한국의 축복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렛은 창원보다 더 시골입니다. 그러니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나신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빌립이 “가서 보게. 자네가 가서 예수님을 만나 보면 알아.”라고 말합니다. 나다나엘은 아무 기대감 없이 빌립을 따라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예수님께서 시골 사람이니 경외하는 마음 없이 그냥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자마자 “이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받아서 묻습니다.
“아니, 당신은 나를 처음 보면서 나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말씀하세요?”
“빌립이 너를 만나러 가기 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내가 보았다.”
나다나엘은 피가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들판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혼자 ‘하나님,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께서는 언제 오십니까?’하고 기도했는데, 그것을 아시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왔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여,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를 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목사님으로 우리 교회를 섬길 분을 찾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력서를 보내 주셨는데, 제가 그분들을 만나보고 또 소개서를 읽어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결정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소개서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척 보시면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저의 어머니도, 제 아내도, 저 자신도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을 가장 잘 아는 분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단점을 모릅니다. 옥에도 티가 있듯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티를 자신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소개서가 필요 없지만, 우리 사람은 처음 만나는 사람을 알려면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처음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해 짐작은 할 수 있어도 알 수는 없습니다. 사실은 그 사람을 겪어보아도 잘 모릅니다.
여호수아 9장에 보면,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소문을 듣고 놀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셔서 애굽 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항복하고,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가나안 땅의 모든 사람은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덜덜 떨면서 연극을 합니다. 대표로 뽑힌 기브온 사람들이 찢어진 옷을 입고 낡은 전대와 낡은 포도주 가죽 부대와 곰팡이 핀 떡을 갖고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여호수아를 만나러 옵니다.
“우리는 당신 나라의 소문을 듣고 평화 조약을 맺으러 멀리서 왔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종이니 죽이지 마시고 평화 조약을 맺읍시다. 이것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갖고 올 때는 따뜻했던 떡이 지금은 곰팡이가 피었고, 우리가 출발할 때는 새 가죽 부대였던 이 포도주 가죽 부대가 이제는 낡아서 해어졌고, 새 옷과 새 신발도 이렇게 낡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멀리서 왔습니다.”
그 말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넘어가서 평화 조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 그 사람들이 바로 옆에 사는 기브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약속했기 때문에 그 약속대로 그들을 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같은 위대한 사람도 기브온 사람들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우리 장로님들을 22년간 섬겼지만 장로님들을 다 알지 못합니다. 모르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겪어 보아도 잘 알지 못합니다. 부부로 20년간 살아도 확실히 모릅니다. 한 가정 연구소의 표본 조사에 의하면, 20년 이상 결혼 생활을 한 서울 시민들 중에서 다시 결혼할 수 있다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비율이 75%나 되었다고 합니다. 20%는 깊이 생각해 보고 결정한다고 했고, 5%만 다시 결혼해도 지금의 배우자와 하겠다고 했답니다.
20년간 함께 살아온 부부가 다시 결혼할 수 있다면 자기 배우자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저는 다시 결혼해도 제 아내와 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5% 안에 들기를 바랍니다. 그 75%의 사람들도 많이 사랑하고 사귀고 나서 결혼했을 것입니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어서 결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살다보니 그 전에 몰랐던 부분이 드러나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겪어 보아도 모릅니다. 그러니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래서 목회자가 없으니 전도자들이 이 교회 저 교회에 다니면서 목회를 했던 초대교회 당시에는 추천서가 필요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만 해도 사도행전 18장 11절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간 그곳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여 세웠지만, 10년, 20년 계속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곳에 가서 또 교회를 세워야 되니 그곳을 떠나서 고린도 교회에 목회자가 없었습니다. 디모데가 잠깐 왔다가, 디도가 잠깐 왔다가, 또 유랑 전도자들이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온 그 유랑 전도자들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이 추천장을 갖고 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베드로의 추천장, 사도 요한의 추천장,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추천장을 갖고 왔습니다. ‘귀하고 신실한 복음 전도자’라는 추천장을 갖고 오면 교회들이 그를 강단에 세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추천장이 좋은 것입니다. 국가의 공무원이 되어도 신원 보증이 필요합니다. 저희 아들이 고시에 합격하여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도 유력한 두 분이 보증을 서 주었습니다. 그래서 공무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신학대학에 입학하려면 목사님의 추천장, 노회장의 추천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나 목사가 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추천장을 많이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추천장을 갖고 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복음을 오염시키고 말씀을 혼잡케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명감이 불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직업이 마땅치 않으니 먹고 살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이렇게도 전하고 저렇게도 전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십자가의 보배 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할례까지 받아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은 다음에 생활이 따라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복음이 오염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는 거룩한 생활을 해야 됩니다. 하지만 거룩한 생활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생활이 따르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고, 우리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생활이 따르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교회가 초라하게 되고 우리는 복을 받지 못하고 채찍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살인 죄수라도 감옥에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데, 만일 생활이 따라야 구원을 받는다면 사형을 선고 받은 죄수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감옥에서 나올 기회도 없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더하거나 빼면 위험합니다. 그런데 유랑 전도자들이 복음을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8절, 19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전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씀을 오염시켰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그것은 잘못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과 그들이 전한 복음이 다르니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게 ‘전도자들이 와서 전하는 복음이 바울 목사님께서 전한 복음과 다릅니다.’하고 연락을 주었습니다. 그 연락을 받고 바울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복음을 오염시키는 것이다.”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유랑 전도자들이 사도 바울을 대적했습니다. 감히 사도 바울에게 도전을 해 왔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요한의 추천장을 갖고 와서 복음을 전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추천장도 없다. 우리는 추천장이 있는 자격 있는 전도자들이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자격도 없는 자이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1년 6개월 동안 바울에게 복음을 받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유랑 전도자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교인들 중에는 바울을 은근히 미워하는 적들이 있었습니다. 교회마다 마귀가 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마귀가 쓰는 사람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귀가 틈을 타니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신하고 팔았습니다. 괜찮은 장로님에게도 마귀가 들어가면 마귀 짓을 합니다. 괜찮은 사람에게도 마귀가 들어가면 교회의 걱정거리 사람이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그런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이 유랑 전도자들과 합세하여 바울을 가짜 전도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바울을 괴롭히니 바울이 눈물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면 나도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추천장을 받아 올까? 나의 추천장은 바로 너희인데 내게 그런 추천장이 필요하나? 고린도 교회가 나의 추천장이다. 너희가 나의 편지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고 세상의 뭇사람이 읽는 나의 추천서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가 나의 열매다.’라는 뜻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압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 2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Watch out for false prophets. 가짜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따라 합시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거짓 선지자들에게는 열매가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처음에는 혹할 수 있지만 나중에는 가짜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따르지도 않고 그들의 말을 듣고 구원받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귀한 사도 바울이 가는 곳에는 교회가 섰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이런 아름다운 구원의 열매가 가득하니 고린도 교회가 바로 바울의 추천서인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추천서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절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참 행복하고 기뻤습니다. 부족한 저를 통해 열 몇 권의 책을 내 주셨는데, 세상에 처음 책을 내놓을 때 조심스러웠습니다. 요즘에는 우리 교회와 저를 아는 분들이 계시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용수가 쓴 책이 서점에 나오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겠습니까? 그럴 때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가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의 추천서, ‘내가 아는 지용수 목사님은 아주 신실하고 귀한 종입니다. 지용수 목사님의 주옥 같은 설교집을 사서 읽으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라는 추천서를 책 앞에 붙여 놓으면 가치 있는 책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부탁을 드려볼까 고민하다가 무릎을 꿇으니 저의 귀한 추천서는 한경직 목사님의 추천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양곡교회 교인들이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저의 추천서는 바로 우리 양곡교회, 여러분입니다. 조그마했던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커지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한국이 알고 많은 사람이 압니다. 이것이 제 열매이고 추천서입니다. 그래서 제가 추천장을 받지 않고 책을 내놓았습니다.
제게 추천서를 내놓으라면 저는 내놓을 것이 있습니다. 우리 양곡교회가 제 추천서입니다. 여러분의 추천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추천서를 내놓으라고 하면 무엇을 내놓겠습니까? 여러분이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추천서가 되고 여러분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님들은 해마다 30명, 40명, 혹은 20명씩 전도하니 그 추천서가 좋습니다. 그러나 추천서가 빈약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부지런히 전도하고 열매를 많이 맺어 여러분의 추천서가 영광스럽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교사에게는 학생들이 추천서가 됩니다. 학생들의 삶의 모습이 교사의 추천서가 되는 것입니다. 구역장에게는 구역원들이 추천서가 됩니다. 기관장에게는 기관원들의 활동이 추천서가 되는 것입니다.
한 유명한 사람이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오케스트라도 없고 아주 훌륭하지 못한 오케스트라도 없다. 훌륭한 지휘자가 있고 훌륭하지 못한 지휘자가 있을 뿐이다.”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단원들이 훌륭해도 지휘자가 훌륭하지 못하면 훌륭한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원들이 훌륭하지 못해도 지휘자가 훌륭하면 훌륭한 음악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관이든 기관원들이 훌륭해도 기관장이 훌륭하지 못하면 기관이 활성화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관원들이 부족해도 기관장이 훌륭하게 리드하면 기관이 확 살아납니다. 우리 교회에서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기관장이 열심이 있고 리더십이 뛰어나면 그 기관이 확 살아납니다. 그러니 기관이 바로 기관장의 추천서가 되는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들의 추천서는 환자들입니다. 환자들이 병원에 와서 감동을 받고 의사 선생님에게 감사하고, 또 복음을 듣고 믿게 되면 그것이 바로 추천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의 추천서는 무엇인가? 어떠한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생활의 열매가 우리의 추천서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 15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할렐루야!
이 말씀의 뜻은 나로 인하여 빛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릴 때 그것이 또한 나의 좋은 추천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자녀가 우리 때문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한다면 우리의 자녀가 우리의 좋은 추천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우리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상처를 받으면 우리의 추천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기도해 주고 상처를 주지 않고 잘 길러야 됩니다.
어느 책에서 현재 선교사로 일하는 분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께서 형들만 중히 여기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답니다. 요즘에는 아이를 하나만 낳는 가정이 많으니 장남 막내가 따로 없고 그런 일도 없지만 예전에 우리나라 어른들은 장남을 특별히 귀하게 여겼습니다.
어쨌든 그 선교사님이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하여 늘 마음이 아팠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학기말 때 자기 그림이 교실의 게시판에 붙었습니다. 너무나 자랑스러워 단숨에 집으로 달려가서 “엄마, 내 그림이 게시판에 붙었어.”라고 하니 어머니께서 “그림이 밥 먹여 주냐? 숙제나 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참 쓸쓸했지만 아버지의 칭찬을 기대하며 저녁 식사 시간에 “아버지, 제 그림이 게시판에 붙었어요.”라고 하니 아버지께서 “밥 먹을 때는 떠드는 것이 아니다. 입 다물고 밥이나 먹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또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도 자기를 제일 사랑해 주는 넷째형에게 가서 또 말했습니다.
“형, 내 그림이 게시판에 붙었어. 선생님께서 내 그림을 게시판에 붙여 주셨어.”
“야, 네가 그림을 잘 그려서가 아니라 네가 하도 불쌍해서 붙여 주신 것뿐이야.”
그는 마음에 상처가 너무나 컸습니다.
그 며칠 후, 학교에서 콜레라 예방 접종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무서워서 서로 주사를 맞지 않으려 하니, 담임선생님께서 그에게 “너는 운동도 잘 하고 용기도 있으니 네가 시범적으로 먼저 맞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인정해 주시는 선생님이 고마워 옷소매를 걷어 부치고 눈을 부릅뜨고 주사를 맞았습니다.
“의사 선생님, 이것 맞으면 좋아요?”
“그럼, 좋지.”
그는 선생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교문을 나섰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남대문 거리에서 예방 접종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또 예방 주사를 맞았습니다. 서울역 앞에 가니 거기에서도 사람들이 주사를 맞고 있어서 또 맞았습니다. 그렇게 주사를 맞다 보니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날 그는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좋아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에게 인정받기를 얼마나 원하는지 모릅니다. 아들딸을 늘 인정해 주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어서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고마워하는 아버지 어머니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고마움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남편 때문에 늘 감사할 수 있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하나님, 좋은 남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가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지으러 부엌에 가니 남편이 있습니다.
“여보, 오늘은 내가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할 테니 당신은 쉬어요. 오늘은 당신 월차야.”
그리고 남편이 봉투 하나를 건네주며 말합니다.
“이것 가지고 연극도 보고 재미있는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와서 푹 쉬어. 오늘은 빨래도 내가 하고 저녁밥도 내가 와서 할게. 그동안 당신이 고생만 하고 하루도 쉬어보지 못했잖아. 이제 한 달에 한 번은 내가 일을 할 테니 당신은 쉬어.”
그러면 아내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살맛이 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괴롭히지 말고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하나님께 “귀한 아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할 수 있는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수 있도록 살아 주어야 그 남편이 자기의 추천장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 12장 4절에 말씀하십니다.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이 세상에는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여자가 많습니다. 아내가 행한 대로 하면 가정이 깨어지고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니 참고 사는 남편들도 많습니다. 아내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사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아내는 남편의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피자헛 사장의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분이 사업에 여러 번 실패하여 나중에는 부인도 맞벌이로 나섰답니다. 한동안 두 평 사무실에 조그만 책상 하나를 놓고 어렵게 사업을 하면서 직원들에게 월급도 주지 못하고 집에 10원도 갖다 주지 못했답니다. 점심 식사는 라면도 제대로 먹을 수 없어서 먹다말다 했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기 지갑에 돈이 몇 천 원씩 꼭 들어 있더랍니다. ‘오늘은 돈이 없어서 굶어야겠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지갑을 열어보면 매일 몇 천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하루는 피곤하여 일찍 잠이 들었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아내가 조용히 일어나서 그의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빼어 돈을 넣더랍니다. 그리고 지갑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고는 자리에 눕더랍니다. 그의 아내가 남편을 위해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매일 몇 천 원씩 돈을 넣어준 것입니다.
그날 그분이 돌아누워서 밤새도록 울었답니다. 그리고 ‘저 착한 아내를 위해 내가 목숨을 걸고 일해서 성공해야지.’라고 다짐하고 열심히 일해서 대성하게 되었답니다.
그 아내는 남편을 살린, 남편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준, 남편의 면류관이 된 아내입니다. 그 아내의 추천장은 바로 남편인 것입니다.
미국의 한 유명 인사도 아내 때문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평생 소원이 책을 한 권이라도 쓰는 것인데, 몇 년간 글을 써서 고치고 또 고쳐서 출판사에 갖다 주어도 출판사마다 책이 될 가치가 없는 글이라며 거절했습니다. 출판사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받아주는 곳이 없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하루는 그가 아내가 보는 앞에서 그 원고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소리쳤습니다.
“다 쓸데없어. 괜히 이걸 쓰느라 시간만 낭비했어. 나는 안 돼. 나는 할 수 없어.”
그러자 그의 아내가 기도하면서 쓰레기통에 들어 있는 원고를 다시 꺼내어 모아 가지고 출판사를 찾아갔습니다.
“사장님, 제 남편이 몇 년 동안 이것 하나를 썼습니다.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쳐서 가지고 왔는데 가치 없는 글이라며 받아주지 않습니다. 이제 제 남편은 인생을 접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서, 제 남편을 위해서 팔리지 않아도 좋으니 책 한 권만 만들어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부인의 간절한 소망에 설득을 당한 출판사 사장이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책 한 권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불티나듯 팔렸습니다. 무려 삼천만 권이나 팔려서 출판사가 큰 유익을 얻은 것은 물론 그 작가도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적극적인 사고방식’이고 그 작가가 바로 노만 빈센트 필 박사입니다.
부인이 남편을 위해 한 일이 남편을 살리게 된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잔소리하지 말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어 좋은 추천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는 형제에게, 경영주는 사원들에게, 사원들은 경영주에게 서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선한 빛을 비추어 주어서 그들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추천장을 잘 만드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전도 열매를 많이 맺고, 아름답고 선한 빛을 많이 발하여서 아름다운 추천장이 있는 삶을 살게 될까요?
요한복음 15장 5절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따라 합시다.
“우리가 주 안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것이 비결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은 언제나 ‘주 안에서(in Christ Jesus)’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무슨 일을 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주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에게는 열매가 풍성하게 맺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고속 열차가 나와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 얼마 만에 갈 수 있다니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빨리 달리는 열차이지만 레일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차는 레일이 있어야 달리지, 레일을 벗어나면 1미터도 못 갑니다.
사도 바울이나 한경직 목사님이나 저나 여러분이나 똑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밖으로 나가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나깨나 “주님, 주님!”해야 됩니다.
예레미야 17장에도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강변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같아서 결실이 그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 있으니
고후 3:1~11 / 김광일목사
나는 혼자가 아이다’는 한 인간의 위대한 인생 여정을 다룬 실화 소설입니다. 주인공 심재훈 박사는 사투리로 “힘들었제? 그 맘 다 안다. 내도 외톨이인 줄 알았드만 아이더라"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간증합니다. 초등학교 4년밖에 다니지 못해 의사가 될 조건이 하나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의사로 만드신 까닭은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뜻이였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할머니를 따라 일본 교토에서 살다가 조선으로 건너왔습니다. 광복 후 다니던 중학교에서 일본에 살았다는 이유로 쪽발이라고 놀림을 받자 흉기를 휘둘러 상해를 입힌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가출하여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로 일하며 스스로 돈을 벌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 의대에 입학하기까지 드라마틱한 인생의 전반기를 보냈습니다. 의과대학 시절 대구중앙교회에 출석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대구 동산의료원에서 수련의를 마치고 도미한 후 아동문학가 최효섭 목사와 남부 뉴저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 후 심 박사는 1년에 한 번씩 한국을 찾아 3개월 동안 영등포의 요셉의원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속내를 알아요. 내가 그렇게 살았거든요. 남의 일이라 생각하지 않으니 어려울 것이 없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나만 잘 먹고 잘 살라고 나 같은 놈을 의사로 만든 것 같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는 미연방 교도소 의무과장직의 은퇴를 앞당겨 남은 생애를 통해 의료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료 시설이 제대로 안된 중남미 카리브해 연안 국가는 약 대신 침술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뒤늦게 72세에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의료 봉사에 나섰습니다. 심박사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습니다. 미수(米壽)인 88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기억이 또렷했습니다. 설탕과 소다는 물론 햄이나 베이컨 같은 가공육을 피하고 일주일에 세 번 이상 걷기 운동과 더불어 의사인 막내딸의 클리닉에서 월·수·금요일마다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습니다. 환자를 만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심 박사는 여전히 플로리다주 팜비치에서 한국 교민들은 진료비를 받지 않고 진료 중에 있습니다. 심재훈 박사는 하나님을 향한 확신으로 인생의 후반기를 의미있게 살아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다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주께 감사드리세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나의 맘과 뜻 다해 주를 사랑합니다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내가 약할 때 강함 주고 가난할 때 우리를 부요케 하신 한의 주 감사 감사 내가 약할 때 강함 주고 가난할 때 우리를 부요케 하신 나의 주 감사 감사.”
본 장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사도직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요, 따라서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조합니다. 이어 바울은 자신의 사역으로 성도가 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여기의 ‘확신’은 원어로 ‘페포이데신’인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확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로 말미암아 얻어진 확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확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난다고 바울은 증거합니까?
첫째로 그리스도의 편지니라
3세기경 로마에 밸런타인(Valentine)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밸런타인이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자 동료들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밸런타인이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특출한 재주를 한 가지씩 가졌는데 내게는 그런 특기가 없어 마음이 슬픕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밸런타인에게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날마다 사람들에게 사랑의 말을 전하자’라고 생각하고 매일 사랑의 편지를 써서 사람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는 나뭇잎에 사랑의 편지를 쓰면 비둘기가 편지를 배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편지에 용기와 위로를 얻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지 5년 후에 밸런타인은 사랑의 전령사로 명성을 얻었고, 순교한 후에 성자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매년 그가 순교한 날에 그의 뜻을 기려 사랑과 격려의 편지를 서로에게 전했습니다. 그날이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입니다. 지금은 초콜릿을 보내고, 먹는 날이 되었지만 본래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편지로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병으로 힘들어하는 자에게 능력의 편지로 가야 하며, 실패한 자에게 승리를 약속하는 편지가 되어야 하며, 불화로 괴로워하는 자에게는 화목의 편지로 가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여기의 ‘그리스도의 편지니’는 원어로 ‘에피스톨레 크리스투’인데 ‘그리스도를 말해주는 편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편지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뜻을 분명하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편지된 자는 보내신 그리스도의 계획과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면 언제라도, 어느 곳이라도 가야 합니다. 나의 기분과 감정과 판단에 따르지 말고 보내신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여 어느 곳도 마다하지 않는 그리스도 편지로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
미국의 한 청년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를 지망했습니다. 마지막 절차를 끝내고 출발을 확인하려고 뉴욕에 갔는데, 선교사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부인이 아프리카 기후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체질임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부인과 함께 뉴저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할 각오를 했지만 이루지 못하여 크게 실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심했습니다. 선교사로 가지는 못하지만, 돈을 벌어 선교사의 일을 돕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청년의 아버지는 치과 의사였는데 부업으로 교회 성찬식에 사용하는 포도즙을 만드는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아버지의 사업을 인수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물질을 쓰겠다는 한 가지 목적만 가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업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결심한 대로 벌어들이는 돈을 헌금하였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선교지에서 하나님께 인도되는 것을 기뻐하며 거액의 선교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청년의 이름은 찰스 웰치(Charles Edgar Welch)입니다. 그가 만든 주스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웰치스(Welch‘s) 포도 주스입니다. 그의 가족들은 지금도 좋은 포도 주스를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여기의 ‘새 언약의 일꾼되기에’는 원어로 ‘디아코누스 카이네스 디아데케스’인데 ‘율법이 아니라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는 약속에 의한 일꾼’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새 언약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받은 일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책임을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능력을 갖추어서 직분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택하셔서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사랑으로 서로 감싸야 합니다. 서로의 죄를 들추어내지 말고 서로 울어주고 서로 기도하고 기다려주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모든 만족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는 확신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영광이라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 여사가 작사한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의 후렴에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의사의 실수로 실명을 하고 평생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자로 살아야 했던 그녀가 이렇게 찬송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영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을 어떻게 표현하였습니까?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찬송시를 쓴 크로스비는 이미 기쁨을 누리고 있었고, 마음의 풍랑이 가라앉았으며, 세상과 온갖 생각과 상념이 가득한 자신은 사라지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가슴 속의 막연한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녀는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영광 가운데 거하게 하심을 확신하였기에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가운데 있느니라.” 여기의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는 원어로 ‘엔 독세’인데 ‘복음의 영광이 지속되다’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영광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잠시 연관을 맺는 것이 아니라 영구히 계속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 있는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바울은 비난받는 상황에도 자신의 인생이 어떤 인생보다 영광된 인생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유는 삶의 근거요 목적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게 된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그 무엇보다 영광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양 제일의 드라이크리닝 회사 “하쿠요샤(白洋舎)”를 창립한 일본의 이가라시 겐지(五十嵐健治)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재산을 날렸습니다. 친구가 사는 하꼬데로 찾아갔지만 그곳에 없었습니다. 당장 돈도 묵을 곳도 없었던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지금 저에게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해결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마음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에 기쁠 수 있었고 하나님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주실는지 기대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하루가 지나기 전에 한 남자가 일자리를 제안하였습니다. 세탁소 주인이었던 남자는 겐지에게 숙소와 음식, 그리고 월급을 주고 세탁 기술도 전수해 주었습니다. 이때의 경험과 밑천을 바탕으로 겐지는 세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10년 후에 드라이크리닝 회사를 세워 크게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겐조는 세탁업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사업이라고 믿었습니다. ‘인류의 더러운 죄를 한 몸에 떠맡고 죄를 깨끗게 하시려고 십자가의 치욕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나 같은 인생이 남의 때를 씻어주는 것이 무엇이 부끄럽단 말인가? 세탁업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성스러운 사업이다’라고 믿으며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가졌을 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복음의 일꾼된 직분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만한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으로 사도의 직분을 진실되게 감당하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존심이 상하는 작은 일 하나에도 걸핏하면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 있다면 끝까지 영광된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자존심과 체면보다 영혼을 더 귀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그 확신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직분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확신으로 충성을 다해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 거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 시대의 새 믿음
고후 3:1-18 / 이주영목사
희망찬 새해 첫주일을 맞아 “새 시대의 새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을 영적으로 분류하면 크게 두 종류로 분류됩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산자는 믿는 자이고 죽은 자는 불신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구약적성도와 신약적성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믿었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를 믿기에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약을 살면서도 아직도 구약적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 유아적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신약의 새 시대를 주셨지만 아직도 옛 것에 머물고 있다면 새해에는 새 믿음으로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구약과 신약은 여러 면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다 언급할 수 없지만 중요한 하나는 구약은 예표요 신약은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2:16-17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몸 즉 그림자의 실체가 나타났으므로 그림자의 내용인 그리스도는 그대로 믿지만 예표적인 것은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8:13에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약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아직도 구약적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신약시대에 주신 더 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명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 시대의 새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1. 새 시대의 믿음은 돌비의 삶이 아니요 심비의 삶입니다.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구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 돌비에 썼지만 신약은 다릅니다.
여기 “육의 마음판”이라 했는데 개역성경에는 한문으로 “심비”라고 했습니다. 구약에는 돌비고 신약에는 심비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두 돌비에 십계명의 말씀을 새겨주셨습니다. 한 개의 돌비도 되는데 왜 두 돌비였을까요? 이 역시 어떤 비유와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십계명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크게 두 계명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22:37-40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셨습니다.
신약도 구약과 그 중심사상이 같습니다. 십계명도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신약에는 다른 신 섬기지 않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까지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까지 나가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의 완고함을 아시고 최소한 다른 신만 섬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에 없는 목숨을 추가하셨고, 원수사랑을 추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계명을 지킴으로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부족한 것입니다. “나는 다른 신을 배척하고 하나님만 섬기며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으며 주일을 지키고 살인과 간음도 도적질도 욕심도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이 십계명 정도의 수준은 우리가 지킬 최소한의 계명일 뿐입니다. 이 정도도 지키지 못하면 신자가 아닙니다. 신약에서는 이 법이 우리 마음 중심에서 나옵니다. 롬8:1-2에 나오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성령 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지는 놀라운 법입니다. 범죄 하지 않기 위해서 힘들게 참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에서 흘러넘치는 생명적인 선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8-44) 하셨는데 이것이 가능합니다.
구약에는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됐습니다. 그러나 신약에는 마음으로 미워함도 살인이고 음욕도 간음이요 욕심도 도적질입니다. 그만큼 신약 성도에게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죄가 꿈틀거린다면 아직 심비가 아닌 돌비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성령의 새 법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을 듣기만 하지 않고 체험하며 사는 시대입니다.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말씀은 구약의 말씀이 바로 해석되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믿어진다면 주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성경입니다. 그러나 율법이나 예표나 상징이나 역사나 여러 교훈을 통해서 힌트하신 것이지 그 자체로 복음이 되지 못한 부분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모든 말씀이 신약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바른 해석을 통해 구약과 신약이 만나면 그 말씀이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 되면서 엄청난 파워를 일으킵니다.
메시지 자체도 파워일 뿐 아니라, 신약에 크게 부어지는 성령 그 자체도 큰 파워입니다. 구약에도 하나님께서 예배에 임하셔서 그 영광을 받으시고 은혜와 평강을 베푸신 것은 사실이지만 신약시대와 같이 그렇게 풍성한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소수의 선지자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임해 성경 기록을 위한 말씀 외에도 예언했지만 신약시대처럼 모든 성도에게 임하신 그런 은사는 아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그 낡고 느슨한 제도나 전통이나 관습이나 열심으로는 은혜의 그 충만함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신약시대를 산다지만 율법이나 교회의 전통에 따라 적당히 지키는 믿음으로 산다면 주신 은혜와 은사도 감당하지 못하여 그 불을 모두 꺼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눅5:36-38에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부흥의 역사가 있었지만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 역시 신부의 마음으로 섬기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없다면 시대는 신약을 사나 구약적인 자일뿐입니다. 구약은 많은 부분은 제사장이 대신하고 백성들은 그냥 아멘만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주교는 구약 냄새가 퀴퀴하게 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신앙을 초보적 유아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만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해 율법 아래 있고, 신랑 예수에 대한 사랑과 열심 없이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는 구약적인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특징은 고대하던 메시아가 오셨고 또 지금도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생명 안에서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일1:1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했습니다.
신약시대도 듣기도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듣습니다.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이 최소한의 은혜를 소홀히 하면 그는 불신앙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듣는 데서 그치지 말고 직접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영접하고 기도함으로 체험하고 사랑함으로 더욱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주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새 시대의 믿음은 제도나 규율을 넘어서 성령의 감동 속에서 더 온전하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고후3:9-11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이처럼 더욱 영광스럽고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 놀라운 모습을 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행2:44-47) 꼭 천국의 한 모퉁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구약에는 물질생활이래야 겨우 십일조와 헌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십일조는 최소한의 드려야 할 의무이고 그 이상으로 사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눅11:42에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이것도 행하”라는 것은 십일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것은 공의 즉 나누는 일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 하한선에 머물지 않습니다. 십분의 일은 물론 성령의 감동 속에서 나의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때로는 성령께서 강권하신다면 나의 것 전부라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몸도 최소한 정한 날과 정한 예배에는 반드시 드리지만 성령이 감동하시면 일생을 나실인처럼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항상 희생과 무거운 짐만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쉬게 하시면 쉬고, 감동 주시지 않으면 지나쳐도 됩니다. 구약에는 하루만 안식일이지만 신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매일 평안을 갖는 참 안식입니다.
구약의 제비뽑기 제도 역시 신약에는 사라져야 할 제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대는 신약이지만 구약보다 더 부정부패하고 지역이나 돈 봉투에 움직이는 죄로 가득 찬 영적상태에서 투표하겠다고 하니까 문제가 난무한 것입니다. 정말 성령의 사람들이라면 제비는 사라지고 투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행 1장과 같이 추천한 후 제비를 뽑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신약의 밝고 맑고 풍성하고 온전한 시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현재 신약적입니까? 구약적입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 없이 신약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성령의 새 술을 담을 새 믿음이 있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예수 믿고 신부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겨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더욱 온전하고 풍성하고 복된 신약의 성도들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사는 까닭은
고린도후서 3:1-6 / 이은규목사
지난 1995년 여름... 미국의 시카고에는 7월 한 달 동안 엄청난 폭염이 밀어닥쳤습니다. 그해 7월 13일의 기온이 섭씨 41도... 체감온도가 무려 48도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해 여름에 폭염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시카고에서만 무려 7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한 해에 미국 전역에서 폭염으로 죽는 사람이 대략 400명 정도가 된다고 하니까요... 1995년 여름 시카고에서는 참 많은 사람들이 더위로 희생을 당한 거죠.
1년이 지나고... 미국 질병관리본부 연구실에서 시카고에서 폭염으로 사망한 700명의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더위에 희생되었을까... 물론 몸이 약한 사람들이겠죠. 질병관리본부에서는 그해 7월 21일부터 8월18일까지... 사망한 사람들의 진단서를 조사하여 폭염으로 인해서 죽은 이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가족이나 이웃을 찾아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희생자들이 기존에 앓고 있던 병은 없었는지... 집에 더위에 약하지는 않았는지... 에어컨은 있었는지... 없다면 에어컨이 있는 공간으로 더위를 피할 수는 있었는지... 조사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질병으로 인해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들... 에어컨이 없이 지냈던 사람들이 일반인에 비해서 폭염으로 인해 사망할 위험성이 3배나 높았다고 합니다.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없이 혼자 지내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거나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희생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보고서는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끌었는데요... 클리넨버그라는 한 사회학자가 이 현상을 다른 관점에서 조사하였습니다. 그의 보고서에는 시카고 서부에 있는 두 지역... 론데일 북부와 론데일 남부 지역을 비교 분석한 대목이 있습니다. 두 지역은 시카고 서부에서 위아래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데요...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사는 모습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1995년 폭염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북부가 남부보다 열 배가 높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큰 차이를 가져왔을까요? 사는 환경이나 모습은 비슷했지만... 북부지역은 폐허가 된 도시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골목마다 마약을 파는 사람들도 많았고... 범죄가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외출을 꺼렸고... 이웃을 신뢰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폭염이 닥쳤을 때... 이웃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홀로 죽어간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런 조사가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4년 후 그러니까 1999년에 시카고에는 다시 95년과 비슷한 폭염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폭염에 잘 대처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시장은 곧 비상 기후대응 전략을 발동시켰습니다. 4년 전의 비극을 통해 얻은 교훈을 매뉴얼로 만든 것이죠. 도시 전체에 폭염을 피할 수 있는 쿨링센터를 34곳을 열어 놓았습니다. 누구든지 그곳을 갈 수 있도록 버스를 동원하고... 쿨링센터를 하루 만에 두 배로 늘려서 사람들이 찾아가기 쉽게 하였습니다. 더위에 약한 혼자 사는 노인이나, 낙후된 건물에 사는 거주민들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였습니다. 치안이 불안한 지역에서는 공무원들이 날마다 집을 찾아가서 사람들의 건강상태를 살폈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가 수치로도 나타났습니다. 95년에 무려 700명에 달했던 희생자가 99년에는 110명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이제 막 대학교수가 된 김승섭 박사가 펴낸 책에 나오는 글을 소개해드렸습니다. 내용도 좋았지만... 책의 제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어떤 멧세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멋도 모르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향을 끼쳐서 아픔을 경험하게 합니다. 여기서 부터가 중요하다는 거죠. 아픔이 더 큰 아픔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아픔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한다는 겁니다. 아픔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픔을 잘 받아들이고... 아픔 속에서도 잘 성찰하여서... 아픔 속에 감추어진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아픔을 잘 극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이 6월 하고도 24일 한 해의 절반을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저마다 살아 온 지난 반년이 여러분에게는 어떤 시간으로 남아 있는지요? 항상 좋을 수는 없었겠죠. 만일... 지난 시간이 내게는 아픔이었다면... 우리도 그 아픔을 잘 받아들이고 성찰하여도 아픔이 새로운 길을 여는 기회가 된다면.. 그건 정말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지난 시간 동안 어떤 아픔을 겪었다면... 그 속에서 이제껏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찾는 용기와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껏 애쓰고 수고했던 일들의 결과가 나쁘게 나타나고... 자기가 믿고 신뢰했던 사람들이 자기를 실망시킨다면...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이 남긴 글 중에 하나인 고린도 후서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쓰여진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을 읽으면 우리는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바울의 깊은 성찰과 고민을 통해서 중요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내가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나? 이것을 고민하는 분이 계시다면... 시간을 내어서 고린도 후서를 여러 번 읽도록 권해 드립니다.
고린도는 당시에도 인구가 20만이 넘는 아주 번성한 항구도시였습니다. 희랍의 중요한 건축 양식 중에 가장 화려하다고 하는 코린트 양식이 태동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우연히 고린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전도여행을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그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생각했던 여정은 수시로 바뀌었고... 그 끝에 고린도가지 오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곳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집을 근거지로 삼아서 1년 반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전도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바울이 어떻게 일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지... 우리는 그걸 고린도 전서를 읽으며 깨닫게 됩니다. 고린도 전서는 바울이 세 번째 전도여행을 시작하고 에베소에 삼년 정도 머무르는 동안 기록된 글입니다. 일종의 교회 생활에 지침서라고도 하겠습니다. 때로는 고린도 교인들이 편지를 보내든지... 아니면 바울을 찾아 와서 전하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듣고서...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권하는 글입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도 보통 정성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인데요... 바울은 틈을 내어서 고린도를 다시 찾아 갑니다. 이런걸 보면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정말 사랑하는구나.. 그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 하는구나.. 하는 바울의 진심을 읽게 됩니다.
문제는 고린도 교인들의 바울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가 고린도를 찾아 갔을 대... 한 젊은 성도는 공공연하게 바울에게 대들었던 모양입니다. 이 일은 바울에게는 큰 상처와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와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바울을 비방하면서 다닙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 성도들이 이렇게 바울을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하고 나선 것 같습니다.
결국 바울은 그가 가장 어렵고 힘들 때에 찾아 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정말 열심히 사랑했던 성도들에게 사도직을 부정당하고... 인간적으로도 배신을 당하는 아픔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바로 바울이 사도직에 대해서 도전받고... 그를 배척하는 사람들 앞에서 밝히는 삶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사명에 대한 소신이자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바울이 사도임을 입증할 추천장이 없다는 걸 물고 늘어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우리가, 여러분에게 보일 추천장이나 여러분이 주는 추천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겠습니까?’(v.1) 이렇게 바울은 추천장에 대해서 언급할 때... 우리는 이미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인정하는 추천장을 지니고 다녔다거나... 아니면 우리가 이렇게 당신들을 섬겨서 실적을 올렸다는 추천장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세상을 좀 더 쉽게 살고... 원하는 것을 빨리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근사하게 보일 수 있는 추천장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걸 스펙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요.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멋지게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고...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지금도 치밀하게 계산을 잘해서 그럴 듯한 스펙을 쌓아 올려가야만 합니다.
지금 바울이 그런 도전에 직면한 거죠. 당신에게 추천장이 있느냐? 당신에게 우리가 인정할만한 특별한 경력이나 스펙이 있느냐? 이런 물음 앞에 바울은 지금 서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겐 추천장이란 정말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우리를 천거하여 주는 추천장입니다.’(v.2) 바울은 이렇게 추천장에 대한 논란을 일축해 버리고 맙니다. 어떤 문서로 기록한 추천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들... 자신이 사도로 희생하며 봉사해서 나타난 결과야 말로 자신이 사도임을 입증할 수 있는 분명한 추천장이라는 거죠. 다시 말하면 자신은 이미 사도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데... 더 이상 무슨 추천장이 필요한가? 라는 거죠. 나를 추천하는 추천장이란 이제까지 내가 살아 온 삶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울이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문서로 기록된 추천장에 비할 수 없는 중요한 추천장이라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야...’ 지금도 성령님께서는 자신의 내면에서 이렇게 끝없이 말씀하고 계신데... 이것이야 말로 자신이 사도임을 말해주는 가장 분명하고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야 말로 추천장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가진 학벌이 추천장이고... 내가 가진 재산이 나의 가치를 높여주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만일... 내가 누군가 아주 지위가 높은 사람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인생을 좀 더 쉽게 살 수 있는 중요한 추천장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주는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하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나를 멋지게 알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근사한 추천장을 아무나 가지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적어도 기죽은 채로 세상을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처럼... 혹시 문서로 된 추천장은 내세울 게 없다고 하더라도... 남들 앞에서 자랑할 만큼 내세울 스펙이나 경력은 없다고 하여도...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초라하게... 다른 사람들 부러워하면서 지레 기죽은 채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단 하룰 살더라도... 당당하게... 제대로 살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설혹 원치 않는 아픔을 겪게 되더라도... 그게 삶을 포기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되는 게 아니라... 아직 한 번도 가지 못한 더 좋은 길을 여는 기회로 삼으며... 우리가 오늘을 살 수 는 없을까요?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v.5)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이 주는 그 어떤 추천장보다 더 가치 있고... 우리를 든든하게 서게 하는 추천장이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건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써 주신 추천장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써주신 추천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써주신 추천장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나의 삶을 하나님의 부르심과 연결시켜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우연히 세상에 온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이런 확신과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바울에게는 자신에 대해서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자신에게 찾아오는 위기를 극복하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편에 편지를 남겼는데요...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 서두의 글을 비교해보면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를테면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빌립보서 1:1)이라고 아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은 이미 바울은 존중하고 사도로 인정하기에... 다른 어떤 표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사람들이 시켜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이,’(갈1:1) 이렇게 아주 장황하게... 예수님과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도가 되었음을 처음부터 분명히 밝히고 시작합니다. 갈라디아에도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려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도가 된 사람이라는 걸 분명히 밝히면서 논쟁에 뛰어드는 거죠.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이것처럼 강력하고 분명한 추천서가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오늘 여기에 보내셨습니다. 나를 추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조건 속에서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시편2:7)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이게 우리가 세상을 멋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추천장을 받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v.6) 우리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드러내는 추천서가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우리가 지향하고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도 바울처럼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름 받았다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새 언약은 사람들을 희망으로 새 생명으로... 온전한 삶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초대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새 언약을 말할 때... 거기엔 이제는 이미 효력을 잃어버린 옛 언약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우리는 옛 언약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자마자 등을 돌리고 제멋대로 살다가 마침내 바빌론의 공격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끝났나보다... 이렇게 절망할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 언약에 대한 것입니다.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예레미야 31:31)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언약은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실현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새 언약에 참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옛 언약은 결국 사람들을 죄로 말미암아 죽이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새 언약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비한 삶으로 초대합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런 신비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존귀한 것은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새로운 언약에 참여 한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새 언약을 가리켜서 처음 시내산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과 부끄러움을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맺기는 했어도 항상 하나님이 두렵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을 생각해 보면... 새로운 언약은 정말 좋은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새 언약이 좋은 것은 그게... 한 번의 실패와 아픔을 넘어서 맺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한 일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찾아 오시고... 그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그들을 치유하여 주시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부끄러움과 잘못을 넘어서서 이제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언약이 소중한 것은 이렇게... 무너진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시고... 다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는... 우리를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새로운 언약을 맺으십니다. 과거의 모든 실패와 부끄러움의 흔적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다 없애버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안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오늘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건 간단히 말하면... 우리를 용서하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새로운 사람 되게 하시고... 어떤 실패와 부끄러움이라도 털고 일어서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일입니다. 마치 정글과 같은 현실에서 힘을 잃고 혼자서 걷고 있는 것 같지만...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너와 함께 하신다고... 말해주는 사람... 그게 바로 새 언약의 일꾼이 감당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 또 놀라운 일입니다.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 세상에서 이것처럼 가치 있고... 멋진 일은 없는데요... 하나님은 새 언약의 일꾼인 우리들에게 바로 이런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너를 살리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드러나도록...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우리의 모습을 교회 안으로 국한 시켜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직업이나 하는 일을 통해서 삶에 지치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살아가는 이유를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직업이나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는 일이 더 빛나고.. 우리는 그 일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유대교 랍비가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탔습니다. 그 택시 기사의 가족은 마침 랍비가 속해 있는 회당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랍비님은 성인식 이후로 한 번도 회당에 가지 않은 저 같은 유대인을 보면 어떤 말을 하십니까?’ 하지만... 랍비는 거기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그가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당신은 택시 기사죠. 그리고 모든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조직 체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죠. 당신은 지금 저를 공항까지 태워주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도시에 가서 누군가에게 감동과 변화를 줄지 모를 강연을 할 텐데... 만일 당신이 없었다면, 전 그곳에 가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전 당신이 방금 무전연락 하는 걸 들었습니다. 저를 공항에 내려 준 후, 병원으로 가서 한 여성을 집까지 태워다 줄 예정이더군요. 당신은 그녀를 건강한 세계로 다시 들어가게 해 주는 한 매개체로서 치유의 작은 부분을 담당하는 거죠. 그런 다음 당신은 부모의 임종을 지켜보러 고향을 찾는 누군가를 태울 수도 있고... 청혼을 하기 위해 연인을 만나러 가는 남자를 태울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이 지금처럼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숨은 공로자 중 한 명이 바로 당신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당신 일은 분명 성스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 성스럽지 않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이렇게 말할 때... 여기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이나 직업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도록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사람들을 살리고 회복시키며 새로운 삶으로 초대할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하고... 사람을 살리고 세우려하는 거룩한 목적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고린도후서 3:1~5 / 박덕기목사
그 동안 절기 설교를 하느라 중단했던 고린도후서 강해 설교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2장:15절에서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란 말에 대하여 호크마 주석에 보면 “그리스도의 향기란,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이끌리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이고 생동력 있는 삶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두 개의 화분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솔로몬 왕에게 어느 것이 생화이고, 조화인지 분별해 보라고 했습니다. 두 화분의 꽃은 너무나 똑 같았습니다. 솔로몬 왕은 화분들을 창가에 갖다 두라고 했습니다. 조금 지난 후 한 화분에 나비와 벌이 날아와 앉은 것을 보고, 솔로몬 왕은 그 화분을 생화로 분별해 냈습니다.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것은, 신앙의 연륜이나 교회의 직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성도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을지라도, 그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혀 없으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 라고 하였습니다. 편지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추억이 있습니다. 제가 청소년시절이었을 때에는, 편지를 배달해주는 우체부가 3일 만에 한 번씩 마을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1년 가도 어디서 편지 한 장 오지 않지만, 누나 친구가 사는 집에는 우체부가 올 때마다 편지를 배달해주고 가는 것이어서 몹시 부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훈련병 시절인데, 결혼을 하고 온 친구와 애인을 두고 온 친구들에게는 날마다 편지가 날아오고, 어떤 때는 그 편지를 읽어주며 자랑을 하는데, 제게는 그런 편지를 보낼 사람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가 몹시 기다려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처녀 시절 지금의 아내로부터 당시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운운하는 제법 유식한 편지를 받고, 거기에 그만 넘어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편지에 얽인 아련한 추억들이 있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전화나 문자메시지로 편지를 대신하는 세상이 되어서 사람들의 정서가 메마르고 세상이 더 삭막해 진 것 같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2장에서 여행 일정의 변경에 대한 이유를 밝힌 사도 바울은, 본 장에서 이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옹호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방문 계획 변경으로 인한 고린도 교인들의 불신임 이외에도, 고린도 교회에 잠입한 거짓 사도들의 충동을 받은 자들에 의해, 사도직을 증명할 수 있는 추천서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사도직에 대한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도직에의 도전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사도직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뿐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사도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요, 따라서 그의 사도직을 부인하는 것은, 결국 사도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본격적으로 그의 사도직을 변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항상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판단만을 두려워했던 사도 바울은, 굳이 자기를 들어내는 자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의 신분이나 자격을 확인하는 공적인 추천서가 통용되고 있었으며, 그러한 추천서를 통해 거짓 교사를 가려내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그의 사도직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위임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에, 추천서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잠입한 거짓 교사들은, 사도 바울이 추천서가 없다는 이유로, 그가 거짓 사도요, 그의 복음은 사술이라고 비난함은 물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 대신에,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자체가 곧 자신의 추천서와 같음을 밝혀, 거짓 교사들과 그에 동조하는 자들의 비난을 반박한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그의 복음 사역으로 인해 성도가 된 고린도 교인들 자체가, 그의 사도직을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추천서가 된다는 사실과, 이와 같은 자신의 추천서는 한시적인 종이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육의 마음 판에 쓴 영원한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 행한 전도 사역의 열매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이 사도 바울을 부인한다 해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과 그가 전한 복음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곧 자신들의 존재 지반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2절에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전도로 이루어졌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서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이 자라고, 그들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자체가 바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요 참사도’ 라는 편지이며, 추천서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고린도 교인들은 그 복음을 받아 열매를 맺었으므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그것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고린도 교회를 볼 때에, 사도 바울은 참으로 하나님이 쓰시는 신실한 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가리켜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을 보면, 사도 바울을 알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편지는 소식을 전하거나 사상을 나눌 수 있는 통신 수단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소식이나 사상 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성도를 보고 그리스도를 평가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으니, 그의 편지 된 성도를 보고 평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행실이 옳고 깨끗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편지인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를 평가 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사명과 책임이 막중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편지를 쓰는 방법
편지는 문자를 사용해서 상대방에게 의사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편지 쓰는 것을 생각할 때, 펜이나 종이 등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편지는, 그러한 도구를 사용해서 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으로써, 우리 마음 판에 새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이에 쓴 편지는 세월이 흐르면 낡아지고 흐려지기 쉬우나, 마음 판에 새긴 편지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영원히 흐려지지 않습니다. 성도는 그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그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 중에 살면서 악하고 불량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은 후에 새사람이 되어, 선한 생활을 하고, 경건하게 살고, 진실하게 사는 것을 볼 때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불신자처럼 행동하고, 거짓이 많고, 진실하지 못하며, 방탕하고, 시기질투하며, 세상에 빠져 돌아가면, 그리스도의 편지 노릇을 하지 못하고, 마귀의 편지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편지는 봉투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썼으나, 내용은 마귀의 편지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들을 불신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예수님에 대해서까지 욕을 하기 때문에, 전도의 길이 막히게 됩니다. 그래서 불신자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불의한 일을 당하게 되면, 나중에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도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편지 노릇을 잘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편지인 줄 알아,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 읽히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편지는 반드시 상대방에게 전달되고 읽히어져야 합니다. 전달되지 않고 읽히어지지 않는 편지는, 편지로서의 구실을 다 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을 때, 성도들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읽히어져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판에 쓰여 진 그리스도의 편지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얼굴 표정, 우리의 말씨, 우리의 마음 씀씀이는 곧 그리스도의 편지 구실을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나의 얼굴에서, 나의 말에서, 나의 행동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읽게 될는지, 아니면 아무리 데려다 보아도 무슨 뜻인지 몰라서 답답해하고 애타하는 그러한 편지가 아닌지, 자신을 살펴보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신혼부부 집에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습니다. 부부가 내용을 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 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누구인지는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저는 두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연극 관람권 두 장을 보내드립니다. 사양 마시고 오늘 밤 꼭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연극을 보고 오시면 제가 누구인지는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부부는 장난기 많은 친구가 재미로 이와 같은 편지를 보냈을 거라 생각하고, 그날 밤 연극 구경을 했습니다. 구경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집안의 값 비싼 물건이 죄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사기꾼의 편지에 속아 그만 당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언행에서 예수 믿는 사람다운 냄새가 풍기면, 이는 그리스도의 훌륭한 편지라고 할 것이나, 반대로 우리의 언행에서 예수 믿는 사람다운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도 뭣도 아닌 답답한 편지나 마찬가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한 시간을 같이 있고, 하루를 같이 지내고, 아니 한 달을 같이 살며, 5년 10년을 아무리 데려다보아도, 지켜보아도, 뜻을 알 수 없는 답답한 편지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에 글을 전혀 배우지 못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딸네 집에 가서 몇 달이 되어도 오지를 않아, 아내를 보고 싶은 할아버지가 편지를 보냈는데, 글자를 모르니까 소 다섯 마리를 그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내인 할머니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역시 글자를 모르는 할머니는 감 세 개를 그려 편지를 보냈는데, 두 분은 서로 무슨 뜻인지 잘 알았습니다. 소 다섯 마리의 그림은 오소! 감 세 개의 그림은 감세! 라는 뜻으로 충분히 의사가 소통된 것입니다.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로서 유명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너무도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빅토르 위고는 8절판의 레미제라블을 출간한지 꼭 한 달째 되던 날, 영국 런던의 출판사인 ‘허스트 앤드 불라게트’사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 빅토르 위고” 이 이상 짧은 편지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의 뜻은 두말할 것도 없이 ‘책이 잘 팔리는지 어떤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출판사측도 회사이름이 박힌 편지지에 단 한자 ‘!’ 라는 글자를 보냈습니다. ‘판매 상태 양호’라는 뜻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비록 짧긴 하지만 편지 구실을 충분히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삼년이 되고, 오년이 되고, 십년이 되었으면, 어떤 사람들이 보아도, 단 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예수 믿은 지 오년 혹 십년이 되어도, 소 다섯 마리나, 감 세 개의 편지처럼도 읽혀지지 못하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성도들이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2. 추천서로서의 편지
편지는 소식을 전달하는 방편인 동시에, 또 다른 기능으로 사람을 소개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즉 편지는 추천서나 소개장의 일종인 것입니다. 취직을 하는 데도 추천서나 소개장이 필요하고, 사람을 만날 때도 그러한 것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명한 스승이나 고관대작들은 추천서나 소개장을 써서, 그들의 친인척이나 후배들의 앞길을 열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판에 이러한 추천장을 새겨 주시면서, 우리를 자신의 사역자로 추천하셨습니다. 우리를 자신의 사자와 복음 전달자로 추천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추천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추천한 사람에게 욕되지 않도록, 조심해서 처신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더 자신을 추천한 그리스도의 이름이 욕되지 않도록, 그 추천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3. 신임장으로서의 편지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고 했을 때, 편지는 하나의 소개장일 뿐만 아니라, 신임장을 뜻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증명서를 필요로 합니다. 특히 국가와 국가 간의 외교 사절이 교환될 때에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대통령이나 수상이 대사를 외국에 파견할 때는, 신임장을 주어 그 나라의 대통령이나 수상으로부터 신임을 받게 합니다. 오늘날 인간관계에 있어서 신임장이나 증명서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임장 자체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사회 생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케냐 나이로비에 영국 기독교인 귀족이 한 사람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나라 소년 한명을 하우스보이로 고용해 석 달 동안 일을 시켰습니다. 석 달이 지나자 그 소년은 주인에게 타 지방에 사는 회교 귀족 집에 가서 일하고 싶다며, 추천서를 한 장 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인은 이제 겨우 일을 익혔는데, 월급을 올려 줄 터이니 떠나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가 월급 때문에 떠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자기가 기독교인이 될까? 회교도가 될까? 결정하려는데, 회교 귀족 집에서도 석 달을 일해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의 삶도 보고, 회교도의 삶도 경험한 다음 결정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영국 귀족은 자기가 그 동안 이 소년에게 한 행동을 생각해 보니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얘야, 너는 왜 처음부터 그런 말을 나에게 하지 않았니?” 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벧전 2:12절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의 신임장답게 생활을 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할 것이며, 그것은 연쇄적 인 파급 효과를 가져와서, 하나님의 교회는 크게 부흥할 것입니다. 또한 성도 개인으로서는 하나님의 신임을 얻어, 더욱 큰 사역에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한 장의 글도 써서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도의 마음 판에 글을 새겨주셨습니다. 곧 먹으로 쓰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피로, 성령의 능력으로 써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편지인 것입니다. 일본의 하천풍언이 젊은 날 폐병이 들어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을 노크하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여기는 전염병 환자가 있으니 들어올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까, 전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신음하던 청년 하천풍언은 복음을 받았고, 그는 그리스도의 편지를 받고서 새로운 인생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받고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편지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편지를 온 세상 사람들이 읽고, 구원의 기쁜 소식이 두루 퍼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편지 된 성도들은 입술에, 인격에, 행실에 복음을 싣고 땅 끝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주신 구원의 복음만을 전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랑, 자기 사상, 인생 경험이 아니라, 복된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마음 판에 성령으로 새겨진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읽히어지는 반가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서, 성도의 사명과 본분을 다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이 해답이다
고후03장 / 최영기목사
저는 설교자로서의 저의 역할을 하나님의 스피커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에 예언자를 불러서 예언의 말씀을 주셔서 의사 전달을 했듯이 우리 교인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을 저를 통해 하시기를 간구하면서 말씀은 준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비하셨는지 평신도 세미나에 참석하신 다른 교회 목자 목녀들과 같이 드리는 이 예배에서 설교할 본문이 주님의 사역과 사역자에 관한 것이라는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Ⅰ. 사역의 목적은 예수 닮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고린도 후서 3장을 사도 바울은 추천서에 관한 말로 시작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사도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거창한 추천서를 갖고 왔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2:17에서 말씀을 팔아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에 비유하고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일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에 사도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추천서는 잉크로 쓴 편지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 교인들 자신이라고 말합니다(1-3절).
목사나 목자 목녀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사역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역자인가를 평가하기 위하여서는 열매를 보아야합니다. 열매란 사역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만들어내어지고 있는가를 보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만들어내야 성공한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든 사역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예수님을 닮으라고 그러셨습니다(롬 8:29).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에 있는 교인들이 예수님을 닮으려는 대신에 율법주의에 빠져들어 가니까 예수님의 형상을 닮도록 다시 일을 해야 하겠다고 한탄하는 말을 합니다(갈 4:19).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의 삶을 특징짓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순종과 섬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으면 닮을수록 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점점 더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사역을 잘못된 기준에 의하여 평가할 수가 있습니다. 목회자인 경우에는 일단 교인이 많으면 성공한 목회자로 인정을 해줍니다. 그러나 참된 성공 여부는 몇 명이 모이느냐가 아니라 어떤 성도들이 만들어내어지고 있느냐 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도 많고 성경 공부도 활발하고 찬양도 뜨겁고 방언, 예언, 신유의 은사가 풍성하게 나타난다하더라도 교인들이 그런 것에만 몰두해있고 섬김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목회자의 목회는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추천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뿐만이 아니라 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장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많이 생기고 부흥하여 분가를 몇 번 하더라도 목장 식구들이 섬겨주기만 바라는 어린이로 남아있으면 그 목장 사역은 성공한 것이라고 보기가 힘이 듭니다. 목장 식구가 목자의 추천서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도 좋은 대학 보내서 좋은 직장 가지고 좋은 상대 만나 결혼시키면 자녀를 잘 키운 부모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이 정확한 척도는 아닙니다. 자녀를 잘 키웠다고 인정을 받으려면 자녀들이 얼마나 예수님처럼 순종하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아야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자녀를 잘 키웠다고 추천할만한 분들이 꽤 있습니다. 한 내외 아들은 하바드를 졸업하였습니다. MBE를 또 마쳤습니다. 그리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Wolrd Vision이라는 자선 단체에 들어가서 코스보 혹은 아프리카에 사거 배운 교육과 기술을 사용하여 자선 단체 기금 운영을 맡아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이야말로 자녀를 잘 키우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삶 가운데에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이웃에 대한 섬김이 보일 때에 비로소 자녀 교육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기적인 사람들로 키워졌다면 딴 사람들에게는 자랑거리가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자녀 교육에 실패한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추천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역 목표가 분명해야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순종하고 섬기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우리의 사역을 평가 받을 때에 우리는 그 기준에 의하여 평가받을 것입니다. 예수님 같은 사람을 키워내는 사역을 하여야하겠습니다.
Ⅱ. 성령 충만해야 예수 닮은 사람을 만들어낸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스럽게 보일 수 있는 추천서와 같은 사람을 키워내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셔야합니다(4-5절). 사도 바울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은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문자와 영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에레미야 31장에 나타난 구약과 신약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 즉 구약을 맺으셨습니다. 구약의 핵심은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복받고 지키지 못하면 벌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레미야를 통하여 새로운 언약을 맺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렘31:31). 이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계명을 지키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렘 31:33). 어떻게 이 일을 이루실까요? 마음속으로부터 계명을 지키겠다는 소원이 생기게 하시고 소원대로 살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빌 2:13).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제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갈 2:20).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이 누구이십니까? 성령님이십니다.
사람을 바꾸는 사역을 하기 위하여서는 성령 충만해야합니다.예수님 닮은 사람을 만든다고 가르치고 야단치고 벌주는데 그렇다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방법입니다(6절). 율법은 의무감과 죄책감을 도구로 사용합니다. 물론 의무감과 죄책감이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떨 때에는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주가 되는 방법이 되어서는 효과가 없습니다. 목자들에게 “당신들이 목자 임명 받을 때에 초원 모임에 참석한다고 서약했으니까 서약대로 꼭 참석해야한다” 가끔 의무감에 호소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의무감 하나만으로 초원모임에 참석한다면 그 모임이 효과적인 모임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여야합니다.
성령님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이것을 성령충만하다고 말합니다. 성령 충만하여서 성령님이 역사하여야 사람을 그리스도처럼 만드는 사역의 열매가 있지 인간의 힘으로는 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할까요? 어떤 분은 성령충만은 어떤 특수한 경험을 해야만 받고 특별한 사람이나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님을 주님을 영접하여서 성령을 받은 분이면 누구나가 살 수 있고 살아야하는 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성령 충만한 것이 정상이고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것이 비정상입니다. 우리가 물론 항상 성령 충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항상 성령 충만하지 않다가 가끔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항상 성령 충만하다가 가끔 성령 충만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분들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충만을 특수한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수한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정상적인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기 전에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도 없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고 하면 남에게 이질감을 심어주는 괴상한 언행을 하게끔 만듭니다.
성령충만은 하나님 자녀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성령충만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면 성령 충만한 삶은 당연히 살아집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서는 세 가지 단어를 기억하면 됩니다. 원한다. 회개한다. 순종한다.
첫째로 성령충만은 원해야 됩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데 강제적으로 우리를 사로잡지는 거의 않으십니다. 가끔 뜻하기 않게 성령님의 강한 역사를 체험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분들의 간증을 들어보아도 예상치 않았고 기대치 않았던 것이지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마음속 깊이 성령님에 대한 갈구가 있었고 이 갈구에 응하여 성령님이 내리셨던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원해야합니다.
우리는 어디 여행을 갈 때에 길을 잘 아는 분을 옆에 태우고 길 안내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길 안내하는 분에게 묻지 않고 가든지 지도를 너무 신뢰하다가 길을 잃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분의 도움으로 길을 다시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분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성령 받는 분들 가운데에 많은 분들이 성령님을
객석에 앉은 안내자처럼 취급합니다. 길을 잃었을 때에만 문의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그에게 인생의 운전대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운전대를 맡기면 운전을 하시지만 강제로 운전대를 빼앗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려면 원해야하는 것입니다.
둘째가 회개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려면 하나님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을 제거해야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이사야도 우리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는다고 말했습니다(사 59:2). 그렇다고 시시콜콜 과거부터 지은 죄를 다 고백하고 회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어릴 적의 작은 죄까지 기억나게 하시고 회개시키시면 회개하는 것이지만 주님이 기억나게 하시는 죄만 회개하면 됩니다. 성경에 어긋나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고 있는 것, 마음을 찜찜하게 만드는 기억나는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을 결심하심으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것이 없이 트이도록 만드시기 바랍니다.
다음에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 하에서든지 “성경은 이럴 때에 어떻게 하라고 말하는가?” 이것만 생각하고 말씀대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전에 어떻게 했던가를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 어떤 것이 유익이 되는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자신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해결될 수 없는 일이 해결되는 것을 발견하며 열릴 수 없는 기회의 문이 열리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사역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의 열매가 열립니다. 주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목자를 통하여 예수님 닮은 목장 식구가 배출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부모를 통하여 예수님 닮은 자녀들이 양육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스럽게 보일 수 있는 추천장이 되는 것입니다.
Ⅲ. 성령 충만한 삶은 자유롭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으로 사는 사람 혹은 율법에 의하여 사는 사람은 자신을 가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과 성령의 사역을 말하면서 모세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7-8절).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독대하고 내려왔을 때에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쳐다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일을 썼다고 했습니다(출 34:30, 35). 베일을 쓴 이유를 사도 바울은 얼굴에서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13절). 모세가 왜 백성이 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가렸는지는 설명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특징지어지는 구약과 성령으로 특징지어지는 신약을 비교하고 있으니까 이런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구약이 불완전한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10절). 구약은 잠시동안이고 영원한 신약으로 대치될 것이라는 것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11절). 또 백성들이 지키지 못할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에서 영광을 보면 그런대로 계명을 존중하지만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덜 순종할까봐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율법에 매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담대함이 없습니다. 자신의 삶이 율법에 비추어서 온전치 못한 것을 알기 때문에 어두운 부분, 온전치 못한 부분을 숨기고자 합니다. 그래서 남 앞에서 정직하거나 솔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까 2중 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 밑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사람들은 투명한 삶을 살 수 있고 자신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의 무능을 내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무능력하지만 성령 충만할 때에 능력이 나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족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낼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안에서 역사하셔서 이미 많이 변화시켜 주셨고 앞으로도 변화시켜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감출 것이 없습니다. 투명하게 내어 보일 것이 없습니다(13절). 그러므로 자유함이 있습니다(17절). 담대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12절).
Ⅳ. 성령 충만한 삶이 예수를 닮게 만든다
이러한 투명한 삶을 살 때에 얻어지는 혜택은 자유뿐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에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18절).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볼 때에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간다고 했습니다. 주의 영광이란 주님의 인품과 삶이라고 이해하면 간단합니다(요 1:14).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시선을 고정시킨다는 의미 이상이 있겠지요. 주님과 더불어 삶을 같이 산다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투명한 모습으로 주님을 바라보면 그와 더불어 생활을 할 때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모습을 점점 변화시켜준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 것은 의지력으로 되지가 않습니다. 주님처럼 사랑하고 주님처럼 온유하고 주님처럼 겸손하기를 결심하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도록 하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 해답입니다. 성령 충만을 소원하고 하나님과 사이를 막는 죄를 즉시즉시 회개하고 말씀에 절대 순종하여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가짜 성령 충만이 많습니다. 감정적으로 붕하고 뜨면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에 감정적으로 붕 뜨고 강렬한 감정적인 뜨거움을 맛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성령 충만은 아닙니다. 어떤 체험을 통하여 능력이 나올 때에 성령 충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성령 충만할 때에는 신비한 능력이 나오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능력 자체가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참된 성령 충만은 인간을 예수님의 형상으로 바꾸어갑니다.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갑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령 충만의 증거입니다.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점점 하나님께 더 순종하고 이웃을 더 섬기는 사람으로 변해 갑니다.